완전한 관계 (1/2)
잇휘
(*이탤릭체는 중국어입니다.)
文俊辉
문준휘는 서명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확히는 요즘의 서명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준휘는 서명호의 차를 훔쳐 먹으며 멀찍이 서 있는 길쭉한 실루엣을 째려보았다. 길쭉한 서명호는 길쭉한 빨대를 두 개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문준휘 앞 컵에 하나 쏙, 제 앞 컵에 하나 쏙. 섬세하게도 두 컵에 원래 꽂혀 있던 빨대와 다른 색깔로 잘도 챙겨 왔다.
"너 요즘 왜 그래?"
"뭐가."
서명호는 문준휘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다리를 꼬고 차를 한 입 쪽 빠는 태가 제법 우아했다. 문준휘의 속이 끓어 올랐다. 문준휘는 웬만하면 하고픈 말은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이었으나 이번엔 망설여졌다.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질문.
너 왜 요즘 빨대 두 개 챙겨오냐고.
-
서명호와 문준휘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라 같은 놀이터에서 놀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 꼬맹이였던 서명호가 길쭉한 고등학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 지켜봐왔다는 말이다.
어린 서명호는 내성적이어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문준휘는 그게 신경쓰였다. 형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명호의 (당시에는)작은 손을 잡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고 다른 애들 무리에 서명호를 억지로 끼워넣기도 했다. 나중에 서명호가 고백하기를 어울리지 못한 게 아니라 어울리지 않은 건데 형이 자꾸 끌고 다녀서 솔직히 귀찮았다고 한다. 문준휘는 야, 너 나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친구 하나도 없었어! 소리를 질렀다. 어쨌든 문준휘는 서명호를 업어 키운 거나 다름 없다고 홀로 자신했다. 참고로 둘은 고작 한 살 차이 난다.
그러다 수험 생활을 마친 문준휘가 머나먼 대한민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문준휘는 대학이 확정나자마자 서명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쉬고 있는데, 왜."
"잠깐 나와 봐."
"왜."
"아, 일단 나와 보라고."
"용건부터 말해."
"나오면 말해줄게."
"말해주면 나갈게."
유치한 티키타카가 이어졌다. 얘 언제부터 이렇게 성질머리가 더러워졌지? 어릴 땐 내 말이라면 다 믿고 따랐는데. 약이 오른 문준휘가 아 몰라몰라 난 나간다 나 너 나올 때까지 집에 안 들어가! 꽥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서명호가 체육복 지퍼를 찍 올리며 나왔다. 문준휘는 서명호를 보자마자 양손으로 서명호의 손을 잡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쉬밍하오, 나 한국 대학에 가게 됐어."
"그래?"
소식을 들은 서명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무심한 반응은 예상에 없었다. 문준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명호의 팔뚝을 잡고 흔들어댔다.
"그게 다야? 이제 자주 못 볼 텐데 서운하지도 않아?"
"아예 거기 눌러붙어 살 것도 아니잖아."
헐. 문준휘는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서명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방학마다 들어올 예정이긴 했다. 그래도 매일같이 봐오다가 이제 적어도 6개월마다 볼까말까라는 건데, 진짜 조금도 안 아쉬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문준휘가 배신감에 치를 떨든 말든 서명호는 눈썹을 으쓱하며 입꼬리를 수평으로 늘릴 뿐이었다. 문준휘는 어쩐지 자식 하나를 독립시킨 듯이 섭섭했다.
그렇게 문준휘는 한국에 왔다. 새내기 문준휘는 낯선 문화에 적응하랴, 수업을 따라가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서명호에게 꾸준히 연락을 했다. 그런데 서명호의 답장 텀이 점차 길어졌다. 어떤 때는 아예 읽고 씹기도 했다. 문준휘는 너무너무 서운해 죽을 것 같았다. 지가 바빠봐야 얼마나 바쁘다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라지만 이 정도면 마음을 그냥 저 멀리로 던지는 수준 아닌가. 완전히 삐져버린 문준휘는 일부러 서명호에게 연락하는 빈도를 줄였다.
한국에 들어온지 서너 달 됐을 때였다. 동기들이 다 계절학기를 듣는다고 하여 나도 들어야 되는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계절학기를 신청한 문준휘는 피를 보고 있었다. 아직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탓에 중국어로 쓴 레포트 초안을 번역기를 돌려가며 한국어로 옮겨야 했다. 남들은 한 번에 끝내는 작업을 두 번 하려니 피곤했다. 그래도 보름만 버티면 중국 갈 수 있으니까, 하며 스스로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때 위챗에 음성 메시지가 왔다. 발신인은 서명호였다. 으잉? 문준휘는 제 눈을 의심했다. 거의 한 달만에 온 연락이었다. 귓구멍에 이어폰을 끼울 새도 없이 스피커에 귀를 붙였다.
"형. 뭐해?"
서명호의 메시지는 아주 간결했다. 문준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음성 메시지를 다시 재생했다. 2초도 안 되는 메시지가 끝나면 다시 틀어서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열 번쯤 틀었을 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이어폰 좀 끼라고 쿠사리를 먹였다. 문준휘는 어 미안미안, 하면서 화장실에 가서 음성 메시지를 다시 재생했다.
한국어였다. 서명호가 한국어로 뭐하냐 물었다. 그런데 문준휘가 충격 먹은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서명호의 목소리 뒤에 다른 사람들의 한국어가 섞여 들렸다, 중국어가 아니라. 중국에도 한국인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중국어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문준휘는 바로 서명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명호가 받았다.
"쉬밍하오, 너 지금 어디야?"
"나 한국 왔어. 지금 공항이야."
"공항? 네가 한국에 갑자기 왜 왔어? 혼자 온 거야? 네가 한국말을 어떻게 해?"
"그렇게 빠르게 말하면 나 못 알아들어."
문준휘가 벙쪄 있는 사이에 서명호가 나 지금 끊어야 해, 나중에 다시 해,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 서명호의 어머니께 꽤 장문의 음성 메시지가 왔다. 요약하자면 급하게 준비해서 보내느라고 먼저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 애가 갑자기 한국에 가겠다고 밥도 안 먹고 고집을 부려대서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건 여기서 다 준비했으니까 네가 신경쓸 게 많지는 않을 거다,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 이게 뭔 상황이지? 문준휘는 서명호의 형, 뭐해? 를 끝없이 반복재생하다가 룸메이트가 문을 두드리고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은 문준휘는 제일 먼저 보름 뒤에 탈 예정이었던 중국행 비행기 표를 취소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고 서명호에게 음성 메시지가 왔다. 이번 메시지도 간결했다. 나 호텔 들어왔어. 텍스트로 호텔 주소가 띡 왔다. 문준휘는 주소를 보자마자 옷을 입고 나가 택시를 잡았다. 호텔 방문을 열자 차분하게 옷걸이에 옷가지를 걸고 있는 서명호가 보였다.
"너..."
"안녕, 형."
"네가 왜 여깄어? 여행 온 거야?"
"이제 중국어로 말하자. 나 아직 한국어가 어려워."
문준휘는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서명호가 황당했다. 서명호는 침대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읊어주었다. 일단 당분간은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편입을 준비하고, 내년 3월에 2학년으로 한국 고등학교에 편입할 것이라고 했다. 편입할 고등학교는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알아봐뒀고 필요한 서류도 다 준비되었으니 걱정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갑자기 우르르 쏟아지는 정보량에 문준휘의 정신이 대략 혼미해졌다. 퍼뜩, 가장 중요한 정보 없이 대화가 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텔은 일단 일주일 잡아뒀어. 편입 전까지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형이 도와줄 수 있어?"
"쉬밍하오."
"응."
"그래서 왜 온 거야?"
암만 생각해도 중국에서 잘만 살던 서명호가 구태여 한국에 올 이유가 없었다. 가족이 다 함께 온 것도 아니야, 평소 한국에 큰 관심을 갖던 것도 아니야. 그러면 대체 왜 왔냐는 거다. 서명호는 눈을 위쪽으로 굴리며 음, 하고 울리는 소리를 냈다. 꾹 다문 입꼬리 끝에 보조개가 움푹 패였다.
"그냥."
"... 뭐?"
"그냥 왔어. 경험 삼아 괜찮겠다 싶어서."
그냥? 그냥 왔다고? 평생 해본 적 없는 언어를 배우고 단식까지 해가며 온 이유가, 그냥이라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찬 문준휘와 달리 서명호는 아주 태평해 보였다. 종종 속내를 모르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였나. 엉뚱하기는 했어도 무계획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문준휘는 경험 삼아서 온 게 왜 하필 한국이냐는 질문을 하려다 말았다. 그래도 비행기 타서 피곤할텐데 너무 캐묻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건 서명호는 한국에 왔다. 단순 여행이 아니라 유학을. '그냥'이라는 가벼운 말 뒤에 숨어 있을 진짜 이유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으나 나름의 판단이 있었으리라 믿었다. 문준휘는 습관처럼 서명호를 염려했지만 사실 서명호는 염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명호는 언제나 제멋대로, 또 제대로 살아왔으니까. 남에게 의존하기를 그다지 기꺼워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 서명호가 문준휘에게 집을 찾아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포인트는 '서명호'가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언제나 서명호의 형노릇에 목말라 있던 문준휘는 그 사실에 조금 으쓱해짐과 동시에 모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러나 기숙사 사는 유학생 문준휘가 한국의 부동산 생리를 잘 알 리가 없었다. 직방이니 다방이니 하는 어플을 깔아서 봐도 도통 뭐가 뭔지. 결국 문준휘는 과방 소파에 다리를 뻗고 리듬게임을 해대는 동기 이지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 눈 앞에 대뜸 핸드폰을 들이미는 행위는 요청이라기보단 강요에 가까웠다만.
"이 집 괜찮은 거 같아?"
"야야야, 잠깐잠깐잠깐! 아씨, 죽었잖아."
"봐봐."
이지훈이 게임오버가 뜬 화면에 탄식을 내뱉었다. 문준휘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핸드폰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짜증스럽게 눈을 흘기면서도 핸드폰을 뺏어 들고 꼼꼼하게 살펴보는 이지훈은 참으로 착한 동기였다.
"야 이런 데 올라오는 것들 싹 다 허위매물이야."
"허위매물?"
"가짜라고. 근데 너 기숙사 빼냐?"
"아니. 어릴 때부터 친한 동생가 한국 왔는데, 걔가 살 집."
"아하."
스크롤을 아래위로 밀던 이지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쯧, 작게 혀를 찼다. 뒤로가기를 눌러 다른 집들도 둘러봤으나 보증금이 말도 안되거나 광각으로 넓어보이게 찍은 사진으로 사기 치는 매물들이 한가득이었다. 이지훈이 문준휘의 손에 핸드폰을 휙 던져서 돌려주었다.
"어플 보는 것보다 그냥 부동산 가는 게 나아."
"어떻게 하는데?"
"아무 부동산을 가. 가서 원하는 조건들을 말해. 그러면 알아서 방 몇 개 보여주셔. 거기서 제일 맘에 드는 방을 계약해. 끝."
말로 들어선 심플해보였지만 어째 알쏭달쏭했다. 문준휘도 중국에선 가족의 안락한 품에서 뒹굴던 어린애였던지라 집을 구해본 경험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아리까리하게 갸웃거리는 문준휘를 애써 외면하던 이지훈은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아, 같이 가주면 될 거 아냐, 해버렸다. 문준휘는 냉큼 정말? 외쳤고. 이래나 저래나 참으로 착한 동기, 이지훈.
그렇게 남자 다섯이 서명호 집 찾기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왜 다섯으로 불어났냐면 과방에 누워 있던 권순영이 재밌겠다고 끼어들었고, 부동산으로 가던 길에 근처에서 자취하는 전원우를 발견하고 주워 왔다. 서명호는 처음엔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으나 서명호 입장에서도 한국 산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중국인 형보다는 로컬 한국인 형들이 더 든든하기는 했다.
남자 다섯이 떼를 지어 부동산에 들어오자 공인중개사가 설마... 다섯 분이 다 같이 사실 건 아니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문준휘가 아뇨 얘 혼자 살 거예요, 하고 서명호를 가리켰더니 공인중개사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풀어져 내렸다. 이미 공인중개사의 뇌리에 서명호는 형 넷에게 사랑받는 막냇동생 정도로 인식된지라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원하시는 조건 있으세요?"
"3개월 정도 살 거고요. 가구가 다 있었으면 좋겠어요."
"네, 단기 계약이시고 풀옵션이요. 근데 3개월이면 너무 단기라서 매물이 많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면 6개월까지 괜찮..."
"어, 그리고 저기 대학교 기숙사랑 가까운 곳이요."
서명호가 합의 없이 조건을 더하는 문준휘를 곁눈질했다. 문준휘는 눈을 부릅 뜨며 뭐, 입모양으로 말했다. 가까우면 좋잖아. 종종 만나서 밥도 먹고,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주고. 조용히 한숨 짓는 서명호의 가슴께가 얕게 부풀어 올랐다 꺼졌다.
다섯 명의 대군단이지만 나름대로 역할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었다. 현직 자취생 전원우는 수압이나 가구 컨디션과 같은 전반적인 집 상태를 점검했다. 이지훈은 입주한다면 벽지를 갈아줄 수 있는지, 공과금은 얼마나 나오는지 등을 꼼꼼히 물어가며 체크했다. 권순영은 주인 어르신께 생존형 애교를 부려가며 월세 네고를 시도했다. 문준휘는 뭐, 서명호의 곁에서 눈치나 살폈다. 눈치 보는 게 뭔 역할이냐고 할 수 있겠다만 생각보다 중한 임무였다. 서명호가 그다지 끌리지 않는 표정을 지을 때면 문준휘가 어,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 하면서 원정대를 끌고 나갔다. 서명호가 표정의 변화폭이 크지 않은 편이었으나 문준휘는 다 알 수 있었다. 문준휘니까.
그렇게 대여섯 집을 퇴짜 놓고, 공인중개사가 영 자신 없는 얼굴로 마지막 집을 보여주었다. 아마 마음에 안 드실 거예요, 하고 밑밥을 깐 대로 정말이지 특별할 게 없는 집이었다. 아니, 비스듬하게 깎인 한쪽 모서리나 K함의 끝을 보여주는 체리색 몰딩은 이전 집들보다 구리면 구렸지 나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날카롭게 집을 둘러보던 전원우와 이지훈도 그저 그런 눈치였다. 문준휘는 나갈 채비를 하며 재빨리 서명호를 살폈다. 그런데 어쩐지 서명호의 표정이 지금까지와 달랐다. 어라.
"여기로 할게요."
예상치 못한 선포에 동기들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권순영이 문준휘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진짜 여기가 좋대? 속삭였다. 문준휘는 권순영의 팔꿈치에 휘청 밀리며 한 군데에 꽂힌 서명호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 끝에 걸린 침대 머리맡 창문 너머로 작은 카페가 보였다. 아하. 집보다도 바로 앞에 카페가 있는 게 마음에 들었구나.
이 역시 문준휘만이 알아챌 수 있는 서명호의 기준이었다. 중국에서도 서명호는 한적한 카페를 찾아 자신만의 아지트로 삼고는 했다. 아지트로 삼은 카페가 문을 닫으면 다른 조용한 카페를 발굴했고, 거기도 망하면 또 다른 카페를 찾아냈다. 문준휘는 항상 책을 읽는 서명호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야 얘들아! 진짜 고맙다. 잘 가고 나중에 봐."
"뭐라고? 문준휘가 고생한 동기들에게 저녁을 산다고?"
"응, 잘 가~"
"뭐라고? 내일 산다고?"
"응, 꺼져~"
일사천리로 계약을 마치고, 문준휘는 너스레를 떠는 동기들의 등을 떠밀어 각자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서명호가 머무는 호텔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서명호와 문준휘는 자연스럽게 버스 정류장 의자에 붙어 앉았다. 하루종일 돌아다닌다고 어깨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문준휘와 달리 서명호의 매끈한 얼굴엔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문준휘가 에효, 큰 소리를 내며 서명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쟤네 좀 시끄럽지."
"어. 시끄럽긴 한데, 좋은 분들 같아."
"그래?"
"그리고 형보다는 덜 시끄럽던데."
"뭐? 그건 아니지!"
"이거 봐."
근거가 하나 더해졌다는 듯 서명호가 빼액 소리 지르는 문준휘를 검지로 가리켰다. 문준휘가 익살스럽게 서명호의 목에 헤드락을 걸고 몸을 흔들었다. 서명호는 맥없이 흔들리다가 문준휘의 팔을 잡고 스르륵 빠져나왔다.
문준휘는 옅은 웃음을 띄운 서명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서명호의 머리 위로 버스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여행 정도는 같이 갈 수 있겠다 싶었다만은 몇 년 동안 함께 타국 생활을 하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서명호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문준휘를 향해 얼굴을 돌리곤 의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준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뒤꿈치로 땅을 쿡쿡 찍었다.
뭐랄까. 안정적이다. 여전히 한국어로 가득한 간판 사이에 서서 한국어로 말하는 서명호가 적응이 안되기는 했다. 볼 때마다 얘가 대체 왜 여깄지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보다도 아무렇지 않게 서울에 녹아들어 있는 서명호를 볼 때면 이상한 안정감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친한 동생이 와서 안 외롭고 좋다, 정도로 설명되는 감각이 아니었다. 나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낯선 곳에 갑자기 굴러들어온 내 세계의 한 조각. 자발적으로 걸어와서는 비어버린 줄도 몰랐던 구멍을 메우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람. 문준휘에게 서명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문준휘가 서명호 몰래 기분 좋아하고 있는 사이 서명호가 타야 할 버스가 미끄러져 왔다. 서명호가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오늘 고마워 형."
"야, 고마우면 나한테 잘해."
"..."
"엉? 알겠지?"
"형이나 잘해."
그러고는 샐쭉하게 버스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얼척이 없어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문준휘가 떠나는 버스에다 대고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나 잘하고 있거든!"
고함을 질러대도 창밖으로 눈길도 안 주는 서명호가 이젠 그다지 서운하지도 않았다. 요새 들어 왜 저렇게 틱틱대지. 늦은 사춘기라도 왔나. 문준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기숙사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집 앞 카페는 서명호의 아지트가 되었다. 어딨냐고 물을 때마다 카페, 두 글자의 짧은 답장이 돌아왔다. 본디 서명호의 아지트라면 문준휘에게도 아지트가 되기 마련이다. 나라가 달라져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언제부턴가 문준휘는 묻지도 않고 카페에 갔다. 그러면 높은 확률로 서명호가 있었다. 문준휘는 공부하는 서명호 앞에서 핸드폰을 잡고 노닥거렸다. 그러면 서명호가 펜을 탁 내려놓으며 형 공부 좀 해, 한소리를 하고. 문준휘는 싫은-데? 약올리듯 말하고. 둘의 일상은 그렇게 느긋하게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 서명호가 한국 고등학교에 편입했다. 기숙사에 들어간 탓에 전만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종종 만날 때면 장소는 반드시 그 카페였다. 서명호의 학교와 카페는 가깝다고 할 순 없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서명호는 꾸준히 카페에 왔다. 문준휘는 그게 혹여나 저를 배려하는 것일까 마음이 쓰였지만, 서명호 혼자서도 들르고는 한다는 카페 사장님의 말을 듣고는 우려를 접어두었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정을 붙인 공간이니만큼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가 보았다. 서명호는 냉철한 척 굴어도 정이 많으니까.
서명호와 문준휘는 둘만 있을 때에도 부러 한국어로 대화했다. 서로의 언어능력 향상을 위한 약속이었다. 이름을 부를 때에도 서로의 한국식 이름, 서명호와 문준휘, 을 말하기로 했다. 쉬밍하오보다 교복 명찰에 자수 놓인 서명호 세 글자가 익숙해졌을 때쯤부터였을 거다. 서명호가 이상해진 게.
"나 진짜 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흐응."
학내 카페에 앉자마자 열변을 토하는 문준휘에 조슈아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슈아는 저번 학기 교양 팀플에서 같은 조로 만난 미국 출신 유학생이었다. 팀플이란 악연을 낳는 거위라지만, 다행히도 팀플이 무난하게 마무리된 덕분에 조슈아와 문준휘는 좋은 형동생으로 남을 수 있었다. 미국과 중국은 꽤나 멀고 생활 양식도 크게 다름에도, 한국에 온 유학생이라는 유일한 공통점은 둘 사이에 지독한 동질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둘은 빠르게 친해져 오히려 동기들보다도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다.
문준휘의 사연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서명호가 빨대를 꼭 두 개 가져온다. 카페에서 서명호는 주로 차를 마시고 문준휘는 기분에 따라 생과일 주스나 초코라떼 같은 비카페인 음료를 마신다. 원래 서명호는 빨대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서명호가 빨대로 마시더라는 것이다. 뜨거운 차에 혀를 데여가면서까지, 굳이.
'어느 날'이라고 뭉뚱그려 말했지만 문준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혀끝에 남은 단맛이 텁텁하게 느껴졌고, 입가심을 하려고 서명호의 차를 한 모금 뺏어 마셨다. 그런데 문준휘가 서명호의 컵에 입을 대자마자 서명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빨대를 하나 가져와 자기 컵에 푹 꽂았다.
문준휘는 그 일련의 시퀀스가 당황스러웠다. 물론 서명호의 차를 마시기 전에 허락을 맡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상관 없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서명호와 문준휘는 네 컵 내 컵 구분해서 쓰는 사이가 아니었다. 중국에서 카페에 죽치고 있을 때에도 거리낌 없이 서로의 음료를 바꿔 마시곤 했었다. 심지어 같이 훠궈를 먹을 때 냄비에 숟가락을 첨벙첨벙 담가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비위생적이라면 비위생적이겠지만, 막역한 사이에 그런 것까지 따지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냥 먹는 거지.
그랬던 서명호가 변한 것이다. 그걸 의식한 뒤부터 서명호의 컵에 꽂힌 빨대가 무진장 거슬렸다. 문준휘가 한 입만, 하면 서명호는 빨대를 빼고 컵만 내밀었다. 그게 은근히 열 받아서 한 번은 말 없이 가져가 빨대로 빨아 먹어보기도 했다. 그러면 서명호는 빨대를 하나 더 가져왔다. 그리고 자기는 새로 가져온 빨대로만 마셨다.
"준휘야. 있잖아."
"응?"
"나 사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가."
문준휘의 하소연에 조슈아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기했다. 문준휘는 그 말이 더 서운했다. 왜 이해가 안 가? 딱 들어도 완전 서운하지 않아? 답답해하는 문준휘 앞에서 조슈아는 미안한듯 눈썹을 팔자로 휘면서도 입가에 올린 친절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마 문준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위생에 관심이 생겼을 수 있지. 근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명호잖아.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서명호. 깊은 얘기를 늘어놔도 민망하지 않은 서명호.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서명호. 서로가 가장 기뻤던 순간과 슬펐던 순간,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서명호. 서명호. 나의 특별한 서명호. 서명호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어쩌면 빨대만이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문준휘가 혼자 한국에 있는 동안 메시지에 잘 답하지 않았던 것도, 요즘따라 차갑게 말하는 것도, 어깨동무라도 하면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피하는 것도. 모두 다 섭섭했다. 선을 긋는 것만 같았다. 형과 나는 여기까지, 우리 이 선을 넘지 말기로 해. 서명호의 모든 언행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뭔가 사건이라도 있었다면 대화로 풀면 될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유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멀리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음, 준휘가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좋아하지, 그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조슈아가 푸핫 소리 내어 웃으며 뚱한 얼굴로 음료를 빨아 마시는 문준휘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조슈아가 문준휘의 입에서 정돈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감정을 이해해보려 애썼던 게 무색할 정도로 쾌속의 답변이었다. 내내 욕해놓고도 어쨌건 좋은 건 좋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귀여웠다. 하긴. 좋으니까 서운한 거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서운함을 느낄 필요도 없을 테니.
"걔랑 나는 가족 같아. 아니다. 가족보다 친해."
"와, 어떤 친군지 진짜 궁금한데?"
"어, 나중에 소개해줄게."
"그래. 꼭 보여줘. 그 친구랑 얘기도 좀 해보고."
그때까지 걔가 날 끊어내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어놓지 않았다. 육성으로 말했다가는 진짜 언젠가 끊어져버릴 것 같아서. 문준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서명호와의 관계가 쫑날지도 모르겠다는. 만약 정말 관계가 끝난다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멀어져야 돼.
뭐가 됐든, 조슈아 말대로 대화가 필요하기는 한 것 같았다. 혼자 꽁해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문준휘는 서명호와 대화를 해보기로 한다. 형답게, 어른스럽게.
-
"너 내가 더러워?"
문준휘의 급발진에 빨대로 차를 휘휘 젓던 서명호의 손이 덜커덕 멈췄다. 서명호가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들어 문준휘를 쳐다보았다. 서명호의 두 눈은 의문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준휘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거리며 달아올랐다 식었다를 반복했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했다.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고,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려 했다. 그 전에 그간 고등학교에 적응한다고 예민했던 걸지도 모르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보고자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문준휘가 이미 차를 마시고 있는 서명호 앞에 비장하게 앉았다. 학교에서 곧장 왔는지 교복을 입은 서명호는 제 앞에 달그락 놓이는 케이크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목 안 말라? 문준휘는 이를 악물고 어 별로, 답했다. 그러자 서명호가 바로 일어나 빨대를 하나 더 가져오더니 제 컵에 꽂아 넣었다. 오늘은 다른 색이 없었던 건지 원래 컵에 있던 것과 같은 아이보리색 빨대였다. 문준휘는 팔짱을 끼고 서명호를 지켜보았다. 자, 그렇게 필사적으로 네 거 내 거 구분짓던 게 불가능해졌는데 이제 어쩔 생각이신지? 그런데 그때,
와그작.
서명호가 자기가 쓰던 빨대 끝을 살짝 씹어 표시를 해두었다. 그 꼴을 보자마자 문준휘의 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 왜?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급속히 분노가 차오름과 동시에 문준휘의 이성이 저 멀리 날아갔다. 문준휘가 서명호의 손에서 컵을 낚아챘다. 컵이 흔들리며 왈칵 쏟아진 차가 테이블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탓에 문준휘의 손도 살짝 적셔졌으나 알 바 아니었다. 문준휘가 빨대 두 개를 모두 입에 넣고 차를 쭈욱 빨아들였다. 눈 깜짝할 새에 이 모든 일이 벌어져 서명호가 저지할 틈도 없었다.
"아, 목 마르다."
문준휘가 뻔뻔하게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컵을 탁 내려놓았다. 서명호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아까는 안 마르다며."
"갑자기 말라졌는데?"
분명한 기행이었다. 서명호가 문준휘를 째릿 노려보았다. 문준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차를 급하게 들이키느라 따끔거리는 목을 축였다. 아까 데인 손가락도 이제야 얼얼해왔다.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문준휘를 보던 서명호가 컵을 자기 쪽으로 스윽 당기며 일어섰다. 그리고 카운터로 저벅저벅 걸어가 빨대 하나와 냅킨 한 움큼을 가져와선 냅킨을 몇 장 떼어 문준휘에게 건넸다.
"화장실 가서 차가운 물로 손 씻어."
다시 자리에 앉은 서명호가 냅킨으로 테이블을 쓱쓱 닦아냈다. 그리고 잇자국이 있는 빨대를 빼내고 새 빨대를 끼워 넣었다. 툭. 문준휘의 안에서 또 다시 뭔가가 끊어졌다.
여기까지가, 문준휘가 급발진한 경위.
"형.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요새 왜 그러는 거야? 맨날 빨대 꼭 두 개 가져오고."
흥분한 문준휘의 입에서 모국어가 섞여 나왔다. 꽤나 직설적인 추궁에 황당함과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던 서명호의 안면 근육이 서서히 풀어져내렸다.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내려가고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쪽 입꼬리가 경련하며 아래로 늘어졌다. 종합하자면, 처음으로 문준휘가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서명호의 큼직한 손이 제 뺨과 입술을 몇 번 쓸어 내렸다. 엄지로 턱을 받치고 눈만 굴리며 창밖을 내다보던 서명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그냥. 그런 게 있어."
"뭐가 있는데."
집요하게 캐묻는 문준휘에 서명호의 낯에 머물던 어색한 웃음기마저 거두어졌다. 냅킨을 쥔 문준휘의 주먹이 꽉 다물렸다. 계획보다 말이 엉망진창으로 쏟아져 나왔다만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실수든 뭐든 물꼬를 튼 이상 문준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묵묵히 서명호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 뿐.
끝을 알 수 없는 정적 속에서 서명호의 손가락이 컵에 꽂힌 빨대들 사이를 휘적거렸다. 빨대가 컵 표면에 부딪히며 달각이는 소리를 냈다. 서명호는 빨대를 뒤적거리며 창밖도, 컵도, 문준휘도 아닌 테이블 어드메를 응시했다. 하릴없이 빨대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끝내 하나를 말아 쥐었다. 서명호가 조심스레 컵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 그거 내 빨댄데."
삐그덕거리는 서명호를 노려보던 문준휘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순간 서명호가 발작하며 빨대를 잡고 있던 손을 떨궜다. 서툴게 내려놓은 컵이 옆으로 무너지며 차를 와륵 쏟아냈다. 서명호가 이미 축축해진 냅킨으로 테이블을 허둥지둥 닦아냈다. 냅킨이 스치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물자국이 넓게 퍼졌다.
"나 휴지 더 가져올게."
빈 컵을 들고 일어서는 서명호의 뾰족한 귀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문준휘는 카운터에서 카페 사장과 대화하는 서명호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교복 바지를 힘주어 움켜쥔 서명호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문준휘는 서명호의 전례 없는 다급한 몸짓과 상기된 얼굴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서명호, 너 왜 그래. 이게 그렇게 당황할 일이야? 평소처럼 여유롭게 둘러대면 되잖아. 명쾌하게 말하는 거, 네가 제일 잘 하는 거잖아. 왜 오늘은 그걸 못 해. 너 왜 그러는 거야.
사실은, 문준휘도 어렴풋하게 눈치 챘다. 서명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서명호가 문준휘 앞에서 쑥스러워한 적이 없어 비교할 데이터베이스가 없었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서명호는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깐.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문준휘의 귓가에 빙글거리는 웃음기를 품은 조슈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준휘가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구나.
...
......
... 어?
문준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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