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휘] 완전한 관계

완전한 관계 (2/2)

잇휘


♪ THE 8 - 나란히

徐明浩

 서명호는 문준휘를 좋아한다.

 서명호는 운명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명호가 운명이라고 믿는 딱 하나가 있었다. 그건, 문준휘. 이 드넓은 지구에서 같은 나라, 같은 동네에 태어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성장을 목격하며 살아왔다는 게 운명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없으면 안 되는, 유일무이한, 대체될 수 없는,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이루는, 완전한 관계. 서명호는 문준휘와의 관계 앞에 낭만적인 형용사를 끝없이 갖다 붙일 수 있었다.

 서명호는 자신이 문준휘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특별함은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차는 남자인 내가 어떻게 남자를 좋아해? 따위의 혼란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나이에 비해 철학적인 편이었던 중학생 서명호는 좋아한다는 말이 문준휘를 향한 자신의 깊은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얄팍하다고 여겼다. 형과 나는 고작 그 정도 사이가 아니야. 보다 심오하고 아름다운 거란 말이야.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고 결코 감정이 희석되지는 않는다는 걸 인정한 건 열일곱 쯤이었다.

 서명호에게 문준휘란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마치 날 적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문준휘가 없는 과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서명호가 그리는 미래에도 당연히 문준휘가 들어앉아 있었다. 서명호는 문준휘와 함께하는 세계가 모양새를 달리 하더라도 영원히 깨지지는 않으리라는 강력한 확신을 안고 있었다.

 "준훼이는 한국 대학을 준비중이라더라."

 그런데, 서명호의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것도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가 무심코 뱉은 한 마디에. 서명호는 그래요? 간신히 답하고 방에 들어갔다. 쾅, 문을 닫자마자 몸이 문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감각과 함께 편두가 둥둥 울렸다. 서명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형이 한국을 간다고? 왜? 언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당장 어제 만났을 때에도 문준휘는 유학의 유자도 꺼내지 않았었다. 문준휘가 제 입시에 관해 언급한 거라곤 공부하기 싫다고 툴툴댄 게 전부였다. 서명호는 혹시나 저가 기억을 못하는 걸까 싶어 문준휘와의 위챗을 뒤적였다.

 [카페야?]

 [응]

 [갈게]

 이런 위치 확인을 위한 대화가 전부였다. 그래, 형이 한 말을 내가 잊을 리가 없지. 근데... 왜 나한테 말을 안했지? 문준휘의 소식을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머니도 아시는 걸 왜 내가 몰라? 이게 말이 돼? 하염없이 핸드폰을 노려보던 서명호는 마이크에 입을 붙이고 음성 메시지 녹음 버튼을 꾸욱 눌렀다.

 형. 한국 가?

 서명호는 버튼을 누른 채 한참 동안 입 안에서 질문을 굴렸다. 왠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물어봐봤자 답은 뻔하지 않은가. 응, 그렇게 됐어. 그러면 서명호는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왜 말 안 했어? 그럼 문준휘는 뭐라고 할까. 서명호의 눈 앞에 난감하게 입을 뻐끔거리는 문준휘가 그려졌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결국 잡음만 가득한 메시지를 전송해버리고 머리를 헤집으며 코로 한숨을 내쉬던 중, 문준휘에게 답장이 왔다.

 "뭐야?"

 듣자마자 실소가 터져나왔다. 지금 누가 할 말을. 형은 뭔데? 서명호는 답장 없이 핸드폰에 홀드를 걸었다.

 문준휘는 늘 서명호에게 가시적인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그건 서명호가 문준휘에게 품은 감정과는 다른 결일 것이었다. 서명호도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냥 넙죽 받아먹었다. 어느 방향이든지간에 궁극적으로는 같은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망이란 둘이 함께하는 미래.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서로의 궤적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관계. 그런 단단한 기대가 한 순간에 산산이 부서져내렸다. 알지만 무시해왔던 간극을 확인받은 것만 같았다. 화가 치솟았다. 다만, 그 분노는 문준휘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했다. 왜 멋대로 기대해버려서 혼자 상처받는 건지, 바보 같이.

 물론 이건 서명호가 지나치게 깊게 생각한 결과였다. 문준휘가 서명호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어쨌든 문준휘도 수험생인지라 지망 대학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머쓱할 것 같았고, 붙고 나서 서명호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문준휘의 심정을 헤아리기에는 열여덟 서명호의 마음이 이미 깊이 상해버렸던 것이다.

 서명호는 기로에 놓였다. 마음의 차이를 인정하고 애정을 접을 것인가, 문준휘에게 가지 말라고 떼라도 써볼 것인가. 어느 쪽이든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서명호는 제3의 선택지를 택하기로 한다. 문준휘 몰래 한국어 공부를 하는 것. 떠나보낼 준비를 하면서도, 앞으로 더 벌어질지도 모르는 간격을 최대한 좁혀보고자 노력하는 것. 서명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

 "형. 요새 고민이라도 있어?"

 펜으로 머리를 쿡쿡 찍으며 문제 풀이에 열중하던 문준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지 맥락 없는 질문이었다. 문준휘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띄웠다. 얼떨떨하게 웃다가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고민 있어 보여?"

 "그런 건 아닌데, 혹시나 해서."

 서명호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지겹게 이어진 기만을 문준휘 스스로 맺을 기회를. 서명호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다지만, 그걸로 상처가 아물 리가 없었다. 문준휘를 볼 때마다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몇 달째 입을 꾹 닫고 있는 문준휘가 야속했다. 그렇다고 자기가 유학 계획을 알고 있다는 걸 티내고 싶지는 않았다. 문준휘의 음성으로 직접 들려줬으면 했다. 그러면 문준휘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준휘는 다문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점이 콕 박힌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다가는 말했다.

 "있긴 한데... 아직은 얘기하기가 좀 그래. 나중에 얘기할게."

 "그래도 말해."

 서명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우리 사이에 좀 그런 게 어딨어. 숨기는 거 없었잖아. 문준휘가 난처하게 웃다가 불쑥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중에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할게. 약속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선연한 빛을 내는 문준휘의 두 눈을 보면서 서명호는 생각했다. 거짓말.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하지 않았잖아. 그러나 서명호는 문준휘의 눈빛에 취약했기에, 별 말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어버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문준휘가 도장을 찍듯 서명호의 엄지에 제 엄지를 꾹 찧었다. 좋다고 헤실거리는 문준휘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픽 나왔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약속을 해.

 서명호라고 애초부터 문준휘를 따라가야겠다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문준휘를 좋아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서명호는 중국에서의 일상 또한 좋아했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 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국어도 추후에 한국에 놀러갈 때를 대비해 보험 삼아 배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서명호도 살림살이를 품에 안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는 말이다.

 "그게 다야? 이제 자주 못 볼 텐데 서운하지도 않아?"

 "아예 거기 눌러붙어 살 것도 아니잖아."

 문준휘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물론 서명호도 서운했다, 어머니의 입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던 몇 달 전 어느 밤에는. 하지만 이제는 서운하지 않다.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은 묻고 싶었다. 형, 평생 한국 살 건 아니지? 졸업하면 바로 돌아올 거지? 서명호가 이 질문들을 그저 삼킨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서명호가 아쉬워하건 말건 문준휘는 떠난다. 이미 정해진 사실에 손댈 수는 없다. 따라서 서명호로서는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이다. 둘째, 문준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 고민도 없는 듯 웃고 있지만 문준휘도 다가올 타지생활이 마냥 설레지만은 않을 것이다. 불안하고 두렵겠지. 그 와중에 자기까지 칭얼거리면 불안을 하나 더 얹어주는 셈이 된다. 이왕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 짐 하나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다녀오기를 바랐다.

 "그럼 언제 출국해?"

 "2주 뒤에. 그때까지 많이 놀자."

 2주 뒤라.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서명호의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떠나기 2주 전에야 말한 문준휘가 또 다시 원망스러웠다.

 서명호는 집 앞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총총 걸어가는 문준휘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형. 대뜸 자길 부르는 소리에 문준휘가 멈춰 서서 상체를 반만 돌렸다.

 "응?"

 "... 잘 가."

 서명호는 각오했다. 앞으로 2주 동안 문준휘를 보지 않기로. 이제부터 문준휘가 부재한 일상에 익숙해지기로. 혼자 되는 연습을 하기로. 문준휘는 잠깐 집 앞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것치곤 꽤나 아련한 인사에 눈을 몇 번 꿈뻑였다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나 아직 안 가."

 그리곤 온 팔로 큰 원호를 그리며 인사하더니 다시 뒤돌아 걸어갔다. 서명호는 문준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명호는 정말로 문준휘가 떠날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앞으로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자주 만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고집이었다. 사실은 만날수록 이별이 실감날 것 같아서 잠시 회피하기로 한 것에 가까웠다. 서명호는 이젠 자기가 수험생이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얼굴 좀 보자는 문준휘를 피했다. 그래놓고는 매일 카페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항상 문준휘와 오던 곳이니만큼 한 번쯤 마주치지 않으려나 싶었지만, 문준휘는 단 한 번도 카페에 들르질 않았다. 다른 친구들과도 인사하느라 바쁜가 보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괜히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 내일 두 시에 비행기 타는데, 올 거지?"

 두 시간 전쯤 문준휘에게 온 메시지였다. 벌써 내일이다, 문준휘와 헤어지는 날. 코앞으로 다가온 이별은 진작 굳게 먹은 마음을 고칠 고민을 하게 했다. 서명호는 침대에 누워 확신에 찬 문준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눈을 길게 감았다 뜨기를 몇 차례, 마침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

 "미안. 못 갈 것 같아."

 "응, 어쩔 수 없지."

 곧바로 돌아온 답장을 들은 서명호는 이마에 팔을 올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차라리 너무하다고, 배웅해달라고 떼를 써줬으면 했다. 그러면 못 이기는 척 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험생 서명호를 배려하는 문준휘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었다. 그새 스물이 되어간다고 의젓해지기라도 한 건지. 와중에 언제나 솔직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왔던 서명호로서는 번번이 뜻 모를 기대를 품고 실망하는 제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다음 날, 서명호는 일어나자마자 가방을 메고 카페로 향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문준휘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서명호는 지정석마냥 앉던 창가에 자리를 잡고 바로 문제집을 펼쳤다. 사각사각. 드르르륵. 사각사각. 드르르륵. 조용한 카페에 서명호의 샤프가 종이 위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와 원두 가는 소리만 나른하게 울렸다.

 순간이었다,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서명호가 벌떡 일어나 택시를 잡은 건. 서명호는 몇 시간을 내리 문제집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같은 각도로 숙여진 목이 슬슬 뻐근해져 왔다. 서명호는 잠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목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왔을 때, 제 앞의 공석이 눈에 들어왔다. 늘 문준휘가 채우던 의자가 텅 빈 채 무력하게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마자 강박적으로 지워내던 생각이 서명호를 덮쳐왔다. 등받이에 거의 누워서 핸드폰을 하던 문준휘. 눈을 반쯤 뜨고 자는 게 민망하다며 테이블에 폭 엎드려 자던 문준휘. 신발코로 정강이를 쿡 찌르며 배고프다고, 이제 집에 가자고 투정을 부리던 문준휘. 무시하면 입을 비죽이며 책에 고양이 그림을 그리던 문준휘. 그래놓고 막상 집중했을 때면 말을 걸어도 반 박자 늦게 반응하던 문준휘. 그 모든, 문준휘.

 통제할 수 없이 쏟아지는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뒤늦게 실감이 났다. 문준휘는 이제 없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그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명호는 즉시 테이블 위의 모든 걸 가방에 쓸어 담고 지퍼를 닫을 새도 없이 뛰쳐나가 택시에 올랐다.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하고서야 시간을 봤다. 열두 시 언저리였다. 공항까지는 빠르면 한 시간 걸린다. 잘 하면 문준휘를 볼 수도 있겠다. 기사님, 서둘러주세요. 서명호 답지 않게 기사님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거운 마음을 싣고 있어서일까, 차는 더디게 움직였다. 평소엔 안 막히던 길이 그날따라 꽉 막혔다. 서명호는 10초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10초 간격으로 문준휘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망설였다. 택시에 탄지 1시간 반이 지났을 때에는 그냥 체념했다. 이미 출국 수속을 밟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2주 전, 집 앞에서 손을 흔들던 문준휘의 모습을 약 6개월간 곱씹어야 한다는 게 속이 상했다.

 두 시가 다 되어서야 택시에서 내린 서명호는 공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준휘가 없을 걸 알면서도 발이 바쁘게 놀려졌다. 서명호는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비행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14:00, 한국행. 항공편을 정확히 몰라도 저게 문준휘가 탄 비행기일 것이었다. 날이 좋아 출발 지연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문준휘에게서 위챗 메시지가 왔다. 비행기 창문을 배경으로 한 셀카 한 장과 음성 메시지였다.

 "나 이제 한국 간다! 오늘 못봐서 아쉽네. 도착하고 연락할게. 보고 싶을 거야, 밍하오."

 메시지를 끝까지 들은 서명호는 공항 밖으로 달렸다. 머지 않아 비행기 하나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저 비행기에 문준휘가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서명호는 고개를 처들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형, 잘 가.

 아니. 아니야. 가지 마.

 가지 마.

 대낮의 태양과 마주한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여전히 열려 있는 서명호의 가방에서 물건들이 와르륵 쏟아졌다. 서명호는 아랑곳 않고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구름을 계속해서 눈꺼풀 안에 새겼다.

 

 서명호가 한국에 온 사연에는 다소 와전된 부분이 있었다. 문준휘가 떠난 이후로 식사를 잘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단식 투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문준휘가 없으니까 입맛이 뚝 떨어졌다.

 서명호는 문준휘가 한국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걸 물어봐야 알 수 있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예상 범위 바깥에 있을 문준휘의 하루하루, 물어본다 한들 곧장 돌아오지 않을 대답. 그 시간차. 그 모든 게 어색했다. 이제까지 서명호와 문준휘의 관계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다. 할 말이 있으면 메시지로 쫑알대기보다 만나서 직접 얘기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서명호가 물어보지 않아도 문준휘는 꾸준히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며 근황 보고를 해왔다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갈증에 목이 막혔다. 사진 속의 문준휘는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서명호는 사진에다 대고 묻고 싶었다. 형. 즐거워?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면 나도 좋아야 하는데 어째서 자꾸만 심통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뭣보다 저가 없는 일상을 하나 둘 쌓아나가는 문준휘를 보기가 괴로웠다.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는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을 문준휘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쓰렸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은 비관적인 가정들을 낳기 마련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시간이 4년간 이어지다 못해 문준휘가 쭉 한국에서 살겠다 결정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 함께했던 지난 십여 년은 기억 어딘가에 고인 추억 정도로 남겠지. 서로의 미래에서 서로의 이름을 삭제해야만 할 거야. 아니,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까먹게 될지 몰라.

 타고나기를 겁이 없는 서명호는 살면서 처음으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저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곡기를 끊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혼란스러웠다. 문준휘가 없는 세상은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대처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에 넣은 게 없는데도 수시로 토기가 올라와 매일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서명호의 부모님은 쫄쫄 굶어놓고 위액을 뱉어내는 아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지독한 상사병이었다.

 "밍하오. 많이 힘드니?"

 빼빼 말라가는 아들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서명호를 앉혀 놓고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한데 통 말을 않으니 많이 답답하셨을 것이다. 서명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때문에 그래? 괜찮으니까 다 말해 봐."

 "..."

 준훼이가 보고 싶어. 나 형 없으니까 한 순간도 못 살겠어. 서명호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제 병의 근원을 목구멍 깊숙이 눌러 넣었다. 아무 말 않고 주먹만 세게 쥐는 서명호를 보던 부모님이 심란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입시 때문이야?"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이었다. 서명호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끄덕이기를 택했다. 다른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었다. 부모님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밍하오. 좋은 대학을 가지 않아도 돼. 엄마 아빠는 결과와 상관 없이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거야. 혹시 우리가 도와줬으면 하는 게 있니?"

 "... 한국에 갈래요."

 "뭐?"

 "한국에 갈래요."

 며칠만에 입을 연 아들이 한 소리가 갑자기 한국을 가겠단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시던 부모님이 재차 설득하듯 말했다. 밍하오, 차라리 1년 푹 쉬고 내년에 다시 도전해도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다. 서명호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었다.

 어쨌건 서명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적절한 근거를 대야 했다. 허겁지겁 급조해서 뭐라고 지껄였던 것 같은데, 뭐라고 했더라. 대충 중국 교육의 경쟁에 지쳤고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 이런 소리를 했던 것 같다. 서명호의 부모님은 아들을 최대한 지지하는 편이었지만 갑작스레 외국에 가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우신 듯 했다. 아버지는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담배를 태우려 자리를 떴다. 어머니는 자세를 고쳐 앉고 아들의 말을 되새기며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왜 한국이니?"

 "가깝잖아요. 준훼이 형도 있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문준휘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 가야겠다는 건 맞지만, 부차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문준휘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였다.

 부모님은 한국행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당연했다. 도피성 유학을 지지해줄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부도 곧잘 하던 애가 굳이 이 시기에 유학을 갈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서명호도 부모님의 거절을 납득했다. 그러나 이미 언어화된 마음은 다잡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밥은 넘어가질 않았고, 무엇도 할 기력이 없어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딱히 한국에 가겠다고 시위를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이 저러다 죽어버리기라도 할까 우려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졸지에 불효자식이 된 서명호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준휘에 대한 감정이 죄송함을 짓눌렀다. 아무래도 첫사랑이란 무모하기 십상인 지라.

 끝내 부모님이 백기를 들었다. 며칠을 버텨 보아도 서명호의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단 결정이 나자 몇 달 간은 출국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얼마나 바빴냐면 문준휘의 연락에 답할 여력이 없을 정도였다. 문준휘에게 미리 언질을 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그간의 마음 고생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도로록. 캐리어가 공항 바닥을 타고 굴러가는 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서명호는 낯선 언어가 적힌 안내판들을 따라 걸었다. 서명호는 공항 로비에 줄지어 늘어진 의자 중 하나에 걸터 앉아 선불 유심을 핸드폰에 톡 끼워 넣었다. 통신이 원활해지자마자 제일 먼저 부모님께 잘 도착했다고 연락을 넣었다. 다음은 문준휘였다. 이제는 알려줘야겠지.

 "형. 뭐해?"

 음성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문준휘에게 전화가 왔다. 받아들자 문준휘가 두다다다 질문을 쏟아냈다. 평소보다 약간 높아진 톤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이 읽혔다. 서명호는 조용히 웃었다. 쓰는 말만 바뀌었지 여전하구나 싶었다. 몇 개월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될 일이야 있었겠냐만은.

 서명호는 호텔로 가는 버스에서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낯설다면 낯설고 익숙하다면 익숙하다고도 할 수 있을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이곳이구나, 내가 살 곳이. 형이 있는 곳이. 서명호는 설렘도 떨림도 없는 가슴을 손으로 몇 번 쓸어 내렸다. 해외를 안 가본 건 아니었다만 혼자서는 처음이라 긴장될 만도 한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온화했다. 서명호는 그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호텔 방문을 부러 열어두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문준휘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은 평화롭기만 했다.

 "너..."

 문준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정돈되지 않은 차림새였다. 둥그렇게 커진 눈, 붉은 기가 올라온 뺨, 가쁜 호흡, 헝클어진 머리칼. 모로 봐도 복수는 제대로 성공한 듯 했다.

 "안녕, 형."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온치 못한 상태의 문준휘를 보자 제 평온함의 바탕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 그래서였다. 서명호의 잔잔한 가슴에 흐뭇함이 차올랐다.

-

 그렇게 서명호는 열아홉의 나이에 고2가 되었다. 동급생보다 한 살 많은 외국인이라는 걸 숨기지 않았던 탓에 몇몇 아이들은 대놓고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뒤에서 저에 대해 수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겠거니 싶었다.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창밖 너머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애들을 구경하는데, 누군가가 서명호의 어깨를 콕 찔렀다.

 "형. 같이 매점 갈래?"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에 걸맞는 어린 얼굴이 보였다. 옆에서 야, 형이라고 할 거면 존댓말을 써야지, 하며 핀잔을 주었다. 뭐 어때. 좀 어떻지. 서명호는 사람을 불러 놓고 지들끼리 투닥거리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일어났다. 그래, 같이 가자. 싱긋 웃으며 답하자 둘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복도를 걸어가며 어린 얼굴을 한 애가 자기는 이찬이고 얘는 부승관이라고 또박또박 설명해주었다. 알려주기 전에 이미 명찰을 봐버려서 알고 있었지만 몰랐던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며 재잘거리는 둘을 보면서 서명호는 고작 한 살 차이 나면서 자기를 챙기려 들던 문준휘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 부승관이 멈칫했다. 

 "우리 최한솔도 소개해줄까?"

 "엉, 그러자."

 둘은 자기들끼리 뭐라는지 모르겠는 말을 주고받더니 계단 앞 반에 쏙 들어가 남자애를 하나 달고 나왔다. 목에 헤드폰을 걸친 남자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느적느적 걸어오다가는, 서명호를 보고 우뚝 멈춰 섰다. 누구...? 최한솔은 속삭이는 것치고는 제법 큰 목소리로 부승관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 왔는데, 중국에서 왔고 한 살 형이래."

 "오우. 안녕하세요."

 "봐봐. 보통은 존댓말 쓴다니까."

 "그릉가."

 "편하게 말해도 돼."

 "된다잖아."

 "뭐."

 얘들은 투닥대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나. 최한솔은 둘의 말싸움이 익숙한지 별 반응을 하잖고 느릿하게 서명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재차 인사를 했다. 제 이름은 최한솔이에요. 응, 네 이름도 명찰 봐서 안단다. 이쯤 되면 이 학교에서 명찰의 쓸모는 무얼까 싶었다.

 2주쯤 지나자 다른 애들과도 불편하진 않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만, 제일 친한 애들을 꼽자면 처음 가까워진 그 셋이었다. 이찬은 첫날에 호언장담했던 대로 서명호의 학교 생활을 많이 도와주었다. 반말을 쓰길 어려워했던 부승관도 이제는 편하게 장난을 걸어왔고, 최한솔은 다른 반이지만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만나 놀고는 했다. 저들끼리 시끄럽게 굴기는 해도 서명호의 조용한 성향을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라서, 서명호는 그들 사이에서 퍽 편안함을 느꼈다.

 아침부터 교실이 시끌벅적했다. 반 애들이 한 남자애를 둘러싸고 와글와글 떠들고 있었다. 언뜻 들어 보니 둘러싸인 애가 옆학교 여자애와 연애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기숙사에 갇히다시피 지내는 학생들에게 급우의 연애란 즐거운 이슈일 수밖에 없다. 뒷목까지 시뻘개져서는 멋쩍게 웃는 아이의 얼굴에서 순전한 행복이 우러나왔다. 사랑에 빠진 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인 서명호는 새삼 생경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나 좋을까.

 그리고 문득, 제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저 애의 사랑과 자신의 것은 온도가 다른 기분이었다. 서명호에게 사랑이란 좋아하지 않는 법을 몰라서 그저 품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일상이 되어버린지 오래된 감정은 무덥지도 시리지도 않은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 뭐, 한국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모순된 말일지도 모르겠다만은. 평균적으로 미지근하긴 할 거다.

 그런데 볼수록 아이들은 제 친구가 누군가와 사귄다는 자체에 열광하는 듯도 했다. 서명호는 그게 좀 의문스러웠다. 연애를 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관계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함께 지내는 시간에 데이트라는 별칭이 붙고, 남들에게 서로를 연인으로 소개하고, 가끔 기념일을 보내고. 그런 정도가 아닌가. 누가 누굴 좋아한대, 도 아니고 누가 누구랑 사귄대, 가 저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친한 친구랑 연인이랑 뭐가 다를까."

 "다를 거 없지."

 칼같이 대답한 최한솔이 매점 빵을 크게 물었다. 피크닉을 쪽쪽 빨아먹던 이찬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한가로운 점심 시간에 던진 것치곤 꽤 심도 높은 논제였다. 부승관과 이찬이 금세 생각에 잠겼다. A와 B의 차이점을 서술하시오, 하면 별로 다르지 않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답을 써내는 한국식 교육에 길들여진 애들인지라 답을 찾아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음, 사귀면은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그러지 않나?"

 "근데 안 사귀어도 할 거 다 하는 사람 많잖아. 사귀어도 스킨십 안하는 경우도 있고. 그걸 뭐라고 하더라."

 "플라토닉 러브."

 "어, 그거."

 "아! 연인은 뭔가... 확실한 내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는 확실한 내 편 아니냐?"

 "그건 그래."

 서명호는 이찬과 부승관이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며 토론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10대 아이들인지라 논점이 한정적이었다. 이런저런 가설이 오고 갔지만 결론은 다를 거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럼 연애란 뭘까. 우리는 왜 연애를 하고 싶어 안달을 낼까. 럭비공처럼 통통 튀던 대화가 절대 남은 점심 시간 내에 결론이 나지 않을 주제로 넘어갔다.

 "연애도 일종의 계약이지. 난 이제 당신만을 바라보겠다, 뭐 그런?"

 "에잉,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차가워 보인다."

 "사실인걸."

 시니컬한 정의를 내놓은 최한솔이 남은 빵조각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너 그러다 목 막힌다? 부승관이 걱정하며 제가 먹던 우유를 내밀었다. 최한솔이 작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기가 무섭게 예비종이 울렸다. 이따 보자. 어엉. 계단 앞에서 하나 셋으로 갈라져 각자의 반으로 들어갔다.

 서명호는 교실에 들어가서도 이렇다 할 결론 없이 마무리된 점심 시간의 토론을 곰곰이 고민했다. 만약 형이랑 연애를 한다면, 우리 사이가 뭐가 더 바뀔까?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건 편하기도 하겠다. 서명호는 비밀스럽게 사랑을 속삭이는 가상의 문준휘를 떠올려보았다. 지금보다 더 사랑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를 한 문준휘를.

 근데, 여기서 더 사랑스러울 수가 있나?

 ... 중증이다. 서명호는 왠지 민망스러워 입술을 감춰 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상념은 기숙사 침대 위에서도 멎지 않았다. 궁리 끝에 서명호가 찾아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연인은 이별을 한다. 최한솔의 표현을 빌자면 계약 해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면, 친구는 서먹하게 멀어지곤 해도 명시적으로 이별을 하는 일은 잘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연애라는 관계를 시작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끝날 것을 시작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럼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데 왜 사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만, 어쨌건 연인은 친구에 비해 절대우위도, 비교우위도 점하지 못한다. 순간의 행복에 빠지기보다는 친구라는 안전한 미명 하에 영원을 획득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과 연인이라는 이름의 관계를 맺는 문준휘를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났다. 본능적으로 나오는 감정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문준휘를 잃어본 서명호로서는 아예 잃느니 혼자 속 곯다 마는 게 훨씬 내켰다. 

 서명호는 결심했다. 문준휘와 영원히 친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문준휘와의 완전한 관계가 맺어지지 않으려면 어떤 형태로든 맺어지지 않아야 된다. 결심과는 별개로, 연애를 시작했다던 행복에 겨운 얼굴이 탐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나 좋길래 그런 표정을 지을까. 호기심은 나도 겪어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연장되기 쉽다. 따라서 서명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욕심을 제어하는 일이 되었다. 마음을 들키지 않고, 언제나 침착하게. 마치 명상자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스킨십 여부가 관계를 가르는 척도라는 건 잘 알려진 통념이다. 그를 증명하듯 이찬도 친구와 연인의 차이점으로 제일 먼저 스킨십을 꼽았다. 서명호도 그 일반적 통념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서명호와 문준휘가 이제까지 스킨십을 하지 않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중국에서도 덥석 손을 잡거나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등의 스킨십은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다. 그런데 무연고지에 둘만 덩그러니 놓인 상황은 이제껏 별 생각 없던 것도 특별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더욱이 서명호는 문준휘를 향한 강렬한 애정을 숨기기로 맘먹었으니, 몸이 닿는 게 신경 쓰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준휘와 스칠 때마다 통제 대상의 감정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고, 그때마다 서명호는 조금씩 괴로워졌다. 단순히 해소할 수 없는 욕망이 늘어가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는 문준휘 앞에서 몰래 딴 생각을 품고 있는 제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마침내 서명호는 소모적인 감정만 퐁퐁 솟아나는 샘을 막아버리기로 한다. 방법은 명료했다. 문준휘와 닿지 않는 것. 그건 직접적으로 몸이 닿는 것뿐 아니라 컵을 같이 쓰는 것과 같은 간접 접촉까지 포함했다. 속도 모르고 제 어깨에 팔을 걸쳐오는 문준휘가 얄미웠지만 미워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건 서명호가 문준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벌어졌으니까.

-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마음을 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서명호의 심장이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너무 당황한 티를 내버렸다.

 어떻게 했어야 맞을까. 어떻게 했어야 들킨 걸 들키지 않으면서도 상심한 문준휘를 달랠 수 있었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어떻게 했어야 했을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다만, 문준휘가 날카롭게 저가 더럽냐고 묻던 그 5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당황했으리란 건 틀림 없었다.

 "휴지 좀 더 가져갈게요."

 "난리 났네."

 "..."

 "어쩌려고 그러니."

 카페 사장이 어깨 남짓한 노란 머리칼을 하나로 묶으며 중얼거렸다. 카페 사장은 가볍게 굴다가도 종종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소리를 하곤 했다. 그게 그만의 매력이겠다만은, 지금 같은 타이밍에는 별로 달갑지가 않다. 서명호가 빙긋이 웃는 카페 사장을 저도 모르게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시간을 벌려고 했다. 성난 문준휘에게 건넬 말을 구상할 시간을. 그러나 까맣게 꼬여버린 머릿속은 카운터에 다녀오는 동안 정리되기는커녕 더 얽히고 설켰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든가 하는 구질구질한 핑계로 모면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았다. 끝내 서명호는 아무런 답도 찾아내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아까 엎은 차가 테이블 표면으로 넓게 퍼지다 못해 바닥에도 똑똑 떨어졌다. 다 엎질렀네. 이제 어떡해야 할까.

 문준휘는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잔뜩 둥글려진 문준휘의 어깨를 보니 서명호의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형. 형에게 상처를 주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내가 형을 좋아해서, 지나치게 좋아해서 방어 기제를 세운 거였는데. 이게 아닌데.

 "형. 형이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아니야."

 비겁한 말이었다. 서명호는 정말로 문준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건 문준휘가 알아서 마음을 풀기를 유도하는 말밖엔 안 되었다. 서명호는 저가 뱉은 말을 후회했다. 가능하다면 주워 담고 싶었다. 문준휘가 상체를 조금 세웠다. 그리고 손틈새로 한쪽 눈을 빼꼼 내보였다.

 "... 정말?"

 "..."

 "정말?"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서명호는 제 덫에 제가 걸린 것만 같았다. 정말이라는 두 음절 뒤에 생략된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모호하기만 한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문준휘가 말았던 몸을 천천히 펼치고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터질 듯이 달아오른 귓바퀴, 힘을 주어 꼭 다문 입술, 힘이 들어갔지만 어쩐지 마주치지 못하는 두 눈.

 문준휘만 서명호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서명호 또한 문준휘를 잘 알고 있었다. 서명호는 문준휘의 저 표정의 의미를 안다. 문준휘의 물음 뒤에 생략된 말도, 이제는 안다.

 형. 형이 그렇게 반응하면 어떡해. 알았어도, 눈치 챘어도 모르는 척을 했어야지. 형이 그래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번에는 서명호가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쩌적, 옆 테이블의 커피잔 속 얼음이 녹으며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명호와 문준휘의 완전한 관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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