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유령

이엘님 2천자

시다 by Cid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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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는 흉년이 들어 농작물도 수확하지 않았다. 하늘은 벼와 이삭 대신 땅 위의 수많은 목숨을 공양될 제물로 거두어 갔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 것처럼 보였다. 집, 국가, 군대, 의료 시설, 기계, 인간, 희망까지도……. 진흙탕이 된 대지를 어셔는 철퍽거리며 걸었다. 그는 첫 전투에서 소대원의 절반을 잃었다. 두번째 전투에서는 나머지 절반을 잃었다. 그는 햇수로 7년째 전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발 없는 유령이 된 것처럼 그는 수풀 속을 거닐었다. 지역의 동남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숲은 음산함을 물씬 풍겼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들었다. 냄비에 마지막 남은 식량과 비곗덩이를 끓이고 먹은 지도 사흘이 지났다. 어셔는 곯은 배를 움켜쥐며 걸었다. 나머지 대원들을 찾아 합류해야 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위치가 아니었다. 그는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혼자 있다가는 정신이 먼저 미쳐 넋을 놓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미 쇠약해져 있었다. 지난 몇 주 사이 살이 내려 뺨이 눈에 띄게 홀쭉했다.

사거리를 지나 오래된 폐건물들이 응집한 구역으로 진입할 무렵,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들었다. 그의 귀가 정확하다면 그것은 피아노 소리 같았다. 생존자! 그의 눈에 일순 이채가 돌았다. 그는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다. 아니,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언어를 잃어버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들을 수 있었고, 숨을 쉴 수 있었다. 자신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호흡을 나누고 두 눈을 들여다볼 누군가를 필요로 했다. 어셔는 연주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소리는 지붕이 무너진 오래된 찻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곳곳에 흩어진 음반으로 미루어 보아 주인장에게 재즈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주인장의 시체는 계단 앞에 있었다. 팔다리가 가죽을 뚫고 나와 끔찍한 몰골이었다.

어셔는 그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으스스한 듯 쓸쓸하고도 경쾌한 분위기에 재즈가 가미된 추모곡이었다. 작곡가는 고인이 된 아버지를 추억하며 그 노래를 작곡했으나, 어셔는 그 음악을 들으며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는 살아야 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는 전쟁 이전에는 고된 기억이 없었다. 훈련소에서 모진 훈련을 통과할 때마저 그의 삶은 순탄하기만 했다. 전쟁은 그야말로 그에게 닥친 첫 재앙이자 재난이었다. 피할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1층 테라스를 건너가 찻집의 문을 열었다. 잿가루가 휘날리는 그곳에 먼지 쌓인 피아노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어셔는 한눈에 남자를 알아보았다. 그는 부대에 조달되던 영자 신문에서 남자의 기사를 읽은 적 있었다. 유럽 전반에 영역을 확장한 모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가 어째서 이런 낙후된 지역에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어셔의 인기척을 알아챈 듯했지만 연주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가 흑건과 백건을 강타하듯 내리누를 때 그의 음악은 쓸쓸함이나 비정함을 풍기기보다는 흥미 본위의 경쾌함을 띠었다. 어셔는 말을 잃은 것처럼 기관단총을 손에 거머쥔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리에서는 어느덧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건물 외벽에 부딪혀 떨어져 나가는 빗소리가 음악에 섞여 황량하게 울려퍼졌다. 남자가 연주를 마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셔에게 눈을 맞추며 정중한 듯 불손한 듯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군인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가 나긋한 미성으로 말했다.

“미치지 않았으니 걱정 마요. 당신은 살 거예요.”

그것은 어쩐지 전능한 예언과도 같았고, 어셔는 그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음에도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빗속으로 그의 뒷모습이 젖어들 때 어셔가 건물 안에서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죠?”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목소리의 힘을 소실한 상태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불쑥 치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뒤를 돌았다. 가물거리는 빗줄기에 남자의 얼굴이 불분명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그의 모습이 희미해져 갔다. 빗속으로 남자는 점점 멀어졌고, 어셔는 그를 막지 않았다. 약 30분 후 지원 병력이 거리에 도착해 넋을 놓고 자리에 서 있는 어셔를 발견했다. 그는 후방으로 이송되었고, 부러지거나 다친 곳은 없었으나 영양실조로 인해 의가사 제대 판정을 받았다. 전역을 얼마 앞두고 어셔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시온 싱클레어였다. 그러나 전역할 때까지 남자를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었고, 그는 수많은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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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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