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아이라 다이앤 결혼 au + 토감들 / 2020.04.01 업로드

"앤, 비가 올 것 같은데 창문 닫을까요?"

"아니야. 일할 땐 시원한 게 나아. 머리에 열 올라 죽을 것 같거든."

"음... 오늘도 처리할 서류가 많아요?"

펜을 쥔 손등 위로 자연스레 아내가 손을 겹쳐왔다. 허리를 굽힌 탓에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많지. 사람 하나 깔려 죽으란 것처럼 서류 뭉치가 가득하지. 솔직히 이런 서류는 조각조각 찢어 밤하늘로 후 불어 날려버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분명 같이 사는데도, 오늘처럼 집에서까지 일을 하고 있으면 그들과 동떨어져 혼자 지내는 기분이 든다. 지금의 아내와 집을 합치기 전엔 도대체 혼자 어떻게 살았던 걸까. 고용인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적은 날이 있었냐. 애들은 자?"

"네, 그럼요."

아내는 꼭 아홉 시만 되면 칼같이 아이들을 재웠다. 규칙적인 생활을 교육하는 것에는 물론 동의하나, 사람인지라 가끔은 아쉬울 때가 있기도 하다. 가령 야근을 하고 올 때라든가. 솔직히 요즘은 정시만 되면 '저 우리 애들 봐야 합니다.' 하고 자리를 박차고 퇴근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물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나만 집에 가족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요."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요만한 아이들과 함께 사니 나도 옮아버린 건지, 아니면 아내가 워낙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 한정으로 투정을 부리는 성격이었을지도, 아니... 그건 좀 그렇다. 취소.

아내의 배쯤에 이마를 부비며 최대한 하기 싫음을 내비쳐본다. 아이라가 내 일에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런다고 크게 의미는 없지만, 적어도 이 사람이 나에 대한 권한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러면 기분이 좀 좋아진다.

"응원해줄 테니까 얼른 하고 잘까요, 앤?"

누가 나를 애 취급하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은 적은 아내가 처음이었다. 차를 우릴 때 자연스레 내 잔에만 덜어주는 설탕도, 고되고 지쳐 침대로 쓰러질 때 자연스레 뒷머리를 받쳐주던 손길도, 일어나기 싫다고 뭉그적대면 자연스레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에 넣어주며 들려주던 웃음소리도, 전부 예전이라면 미간을 구기고 쳐냈을 것들이었다. 가랑비에 온몸이 젖어 들어간다는 게 이런 것인지.

"으응..."

한숨을 내쉬며 서류 뭉치에 시선을 꽂아본다. 아내가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여주며 나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읽는 것이 느껴진다.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과 부드러운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담요 덮고 있으면 정말 최고의 밤일 텐데. 이렇게 구름이 달을 가리지 않는 날이면 아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아마 오늘도.

"디아나의 밤이네요."

디아나. 종종 친구들이 불러주던 애칭이며, 로마 신화 속 달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내는 청명한 밤에 꼭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만약 달의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건 나보다는 아내에게 더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애초에, 나는 달빛 아래의 당신에게 사랑에 빠진 게 아니던가.

"내일이면 저도 연합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네.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환자들?"

아쉬웠다. 그 당시에는 그저 친우와 헤어지는 아쉬움인 줄만 알았지, 그 감정의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보다 한참 뒤, 너를 짝사랑하던 때에는 그 일이 꽤 오래 미련으로 남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아예 그날에 '나도 널 기다릴 거야.'라고 말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함께일 수 있었을까- 하고. 다행히 지금에 와서야 다 의미 없는 후회다. 어쨌든 우리는 함께 있으니.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다. 나는 그 타이밍을 아주 놓친 건 아니었던 모양이고.

어찌 됐든, 결혼 이후 커다란 보름달 아래에서 내 손을 잡고 서 있던 아내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그때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한 것 같다고.

"앤? 펜이 한 마디도 움직이지 않고 있네요."

잠시 소중한 추억에 빠져 현실을 잊은 사이, 아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이런 생각에 깊이 빠지면 동료들이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적이 많았는데, 추억 속 사랑에 잠긴 나를 끄집어낼 수 있는 건 역시 현재의 사랑뿐인가 보다.

"너 없어야 잘 될 것 같아. 가서 자."

그러나 네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겉으로 볼 때 상대를 더 좋아한다고 여겨지는 건 네 쪽이니까. 늘 하는 말이 이런 것뿐이니, 비겁하게도 나는 네가 내 행동과 눈빛에서 마음을 읽어주길 바랄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라도 건넬라치면, 그것이 온 나무를 타고 흘러 낙엽을 타고 세상을 날아다닐까 봐 지레 부끄러운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면 서운해할 것 아닌가요?"

"야, 내가 언제 이런 걸로 서운해한 적..."

볼이 찔려 말이 멈췄다. 눈매를 고이 접으며 손가락으로 뺨을 지그시 누른 너 때문에, 심장이 볼에서 뛰는 기분도 다 느껴본다. 이게 네 손가락 끝의 맥박인지, 내 심장이 너무 거센 탓에 볼까지 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후자가 아니면 좋겠는데. 놀릴 것 같단 말이야.

"볼이 튀어나왔는데요. 정말 괜찮은 거 맞으신가요?"

"그런 게 보여?"

"달이 이렇게 밝으니까요."

입술을 꾹 깨물고 만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신혼이라 칠 연차도 아닌데, 나는 종종 왜 이렇게 연애 초기 같은지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로 집중해야 해서 안 되겠다. 벌떡 일어서 아내의 등을 꾹꾹 밀어 방 밖으로 쫓아내고, 잘 자란 인사를 조용히 읊은 채 문 너머로 숨어버렸다. 사랑하면 그 사람과 오래 함께하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건만,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면서 수명이 깎이는 기분일까. 불공평하다.

"앤, 잘 주무셨나요?"

"..."

책상에서 잠든 나를 또 침실까지 질질 끌어 옮겼나 보다. 키도 비슷하면서, 또 고생했겠네.

"애들은?"

"화장실에요."

아내를 대충 끌어안아 아침 인사를 대신하고, 방에 딸린 화장실 대신 가장 넓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치약 밑에서부터 눌러 쓰라고 했지!"

"무슨 상관이야아. 쓰기만 하면 됐잖아."

"얼씨구? 어디서 말 배워왔냐?"

"..."

화목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애들이 뭐 그렇지. 저게 큰 싸움으로 번지면 제지를 하겠다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하는 중이다. 귀엽잖아. 나랑 아이라 연애할 때 싸우던 거 보는 것 같고.

"엄마 양치하게 비켜봐."

"엄마! 이거 치약 뭐라고 말 좀 해봐."

"정 의견 안 맞으면 치약 따로 쓰게 해줄 테니까 얌전히 치카치카나 해."

"..."

그건 싫은가 보다. 그럴 만하지. 맨날 저렇게 싸워... 아니, 일방적으로 쏘아대면서 막상 아이앤 챙기는 건 우리 가족 중에 아이다가 제일이다. 좀 과격한 츤데레라고 해야 할지. 그래서 귀엽다.

"엄마는?"

"엄마 여기 있잖아."

"아이씨, 엄마 말고!"

아이다가 제 말에 놀라 조그마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 전에 먼저 닿은 손은 아이앤의 것이었다. 말한 사람보다 더 동그래진 눈으로, 마치 파리 잡듯 퍽 하고 아이다의 입과 턱을 덮어버린 아이앤의 손에는 아마 치약 거품이 잔뜩 묻었을 것이다.

"아이들아. 너네 늦어."

덤덤한 말 한마디에 아이다가 쌍둥이의 손을 탁 쳐내고 불같은 양치를 시작했다. 저러다 또 잇몸에 피 내놓고 말 안 하고 씩씩하게 버티다가 아이앤이 이르러 오지.

"엄마 먼저 나간다. 사고 치지 말고 학교 잘 다녀와."

"다녀오세요."

"다녀와."

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욕실 슬리퍼에 가득 고인 물 때문에 발이 축축하다. 아내가 밥은 좀 먹고 가라며 나를 붙드는 것을 애써 거절했다. 나도 먹고 싶은데... 아마 눈이 조금 울상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잠 줄이고 밥 먹을 바에는 그냥 더 자는 게 낫다. 사절단에서는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지. 그때까지도 젊었나. 아, 그래도 지난 휴일에 내 거랑 아내 거, 애들 옷까지 싹 다림질해놓길 잘한 것 같다. 그냥 놔두면 또 아내가 다 가져가서 했을 테니까.

"앤... 맨날 아침 거르면 어떡해요."

"잠이 더 중요해... 밥은 가서도 대충 먹을 수 있지만 잠은 아침 아니면 못 잔다고."

짐을 이것저것 챙기느라 아내를 볼 수는 없지만, 아마 아까 내 표정보다는 훨씬 울상일 것이다. 직접 보는 것도 아니고, 단지 표정을 상상하기만 해도 출근 스트레스를 몇 초 정도는 날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지.

"내일부터 도시락이라도 싸드릴까요?"

"아, 됐어. 내가 너 괴롭히는 것 같잖아."

"전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더 실랑이했다간 내가 진다. 빠르게 손을 휘젓고 신발장으로 직행했다. 어차피 이러면 저녁때 또 이 주제로 말이 나오겠지만, 지금뿐이라도 도피해놓는 게 낫다.

"앤."

"응. 오늘도 보람찬 직업 생활 보내라."

아내가 뭐라 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이미 나와버려서 듣지는 못했다. 지금 모른다고 해도 나중에 듣게 될 것이다. 아내 얼굴은 보고 싶은데 실랑이는 하고 싶지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햇살이 곱다. 어제는 아이라가 달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또 지금 보니 해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조건 없이 따뜻하다는 점에서. 페리오의 겨울이라도 네가 드는 곳이면 따뜻할 것 같은 느낌도 들고. 혹시 쫓아 나올까 봐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땅에 내린 햇볕에 자꾸 눈이 간다. 생명을 틔우는 빛이다. 그리고 네가 틔운 싹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있겠지.

오늘따라 직장이 밉게도 가깝다. 가는 길은 이렇게 가깝지 않을 거면서. 지금쯤이면 애들도 학교 갈 준비를 다 마쳤을 것 같다. 셋 다 보고 싶다. 오늘도 퇴직을 결심해본다. 어차피 승인 안 해줄 테니 결심만 해보는 거다. 정말로.

언젠가 친구에게 아이는 다루기 어려워서 멀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에는 모두 '아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괜스레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삶의 낙이 보석, 그 하나에서 친구들로, 그리고 애인, 배우자, 자녀들까지 여러 갈래로 쪼개져 나뉘는 과정이 빛 같다. 백 번 나눠준다 해도 하나의 양이 적어지지 않는 빛 말이다.

아, 출근길에 웃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다. 당장 발걸음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싶은 생각을 꾹꾹 누르고 오늘도 서류 더미 속에서 허우적대러 가야겠다. 행복한 저녁을 위해, 오늘은 정말로 칼퇴근할 거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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