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이로운 욕심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다이앤 사무엘 결혼 au + 토감 / 2020.04.01 업로드

"아르터스, 아르터스!"

"아, 노크 좀 하세요."

펜을 안 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종이에 찍 그을 뻔했다. 전부 손으로 직접 작성하는 거라서 한 번 망하면 처음부터 해야 하는 바람에 펜 들고는 졸지도 않는 게 버릇이 되었다. 내 덤덤한 표정에도, 문을 박차고 들어온 실라는 표정에서 다급함을 숨기지 못했다. 얼른 좀 오라며 손을 까딱이는 모습에 일부러 느긋하게 일어나니 답답함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새가 조금 재밌다. 일터에서 이렇게 사람 놀리는 재미로 살면 안 되는데 싶지만, 어차피 집에서도 사람 놀리는 재미로 사는데 다를 거 있나. 일만 잘하면 되는 거지.

"에스더가...!"

그러나 그 단어에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튀어 나갔나 보다. 정신을 차리니 남편의 방 앞이었던 걸 보니. 딸의 울음소리가 귀에 크게 박혀 들었다. 어떤 소음 속에서도 저 목소리는 확실히 알아듣는다. 웬만해선 아빠한테 떼 안 쓰는데, 무슨 일이지?

"아빠, 아빠. 일어나...!"

문가로 다가서며 들린 것은 둔탁한... 그러니까 뭔가를 패는 소리였다. 문틀을 짚고 서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 든 생각은 애 아빠는 체벌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감이 정확하게도, 때리는 쪽은 이제 겨우 다섯 살 난 딸이었다. 정확히는 자는 아빠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거래? 아, 방금 좀 세게 맞은 것 같다. 아프겠다.

"에스더, 뭐 하는 거야."

침착하게 아이를 남편에게서 떼어놓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아빠 일어나라는 걸 보니 뭔가 단단히 서운한 게 있었던 걸까. 같이 산책하러 나가기로 했는데 사무엘이 잠들어 버렸다거나. 온갖 상상을 하며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랬다.

"왜. 무슨 일인데."

"아빠가아, 안 일어나잖아아...! 아빠가 돌아가신 것 같아, 엄마아..."

정지된 머리를 돌리는 데에는 몇 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실라를 봤으나,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래. 저 사람이 알았으면 굳이 나 있는 데까지 달려와서 여기 데려다 놨겠냐. 자기가 처리했겠지.

"아빠 살아 계시는데?"

그렇게 맞고 안 일어나는 게 용하지. 아이의 시야 바깥에서 멍한 얼굴로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남편이 보였다. 일하다가 잤나 보네. 나도 모르게 그 앞의 서류부터 살폈다. 다행히 잉크는 안 묻었고.

"아빠...?"

아이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다섯 살 아이란 꽤 무거워서 오래 안고 있을 수 없기에, 슬쩍 내려놓고 등을 떠밀었다. 아빠한테 가거라.

"무슨... 애나, 이게 뭐...?"

얼굴 안 욱신거릴까. 얼음이라도 가져와야 할까 싶다. 남편은 늘 봄에 약했다. 그대들이 내 봄이다- 하고 멋있게 말할 때는 언제고, 막상 진짜 봄만 되면 몸을 가누지 못해 여기저기 머리를 대고 잠들기 일쑤였지. 내 어깨나 책상에 기대어 자는 정도면 차라리 나은데, 욕실이 쓸데없이 채광이 좋은 바람에 씻다가 순간 존 적도 있는 것 같다.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해서 확실치는 않지만.

"당신이 안 일어나서 딸내미가 아빠 죽은 줄 알고 걱정돼서 때렸대."

그 와중에 '죽었다'가 아니라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게 당신 딸다웠다. 얼마 전까지는 '돌아가다'와 '돌아가시다'의 뜻이 왜 그렇게 다른지 이해를 못 하더니, 그냥 외우기로 했나 보다. 그 작은 머리로 열심히 파고들었을 생각을 하니 귀엽다.

"에스더... 그래. 아빠가 좀 졸려서 그랬다. 미안하군."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딸내미한테 숙이고 들어가는 아빠의 표정이다. 솔직히 맞는 말이지. 얻어맞은 건 자기인데. 맞은 뺨을 감싸고 어리벙벙한 표정을 한 게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임이 분명했다. 솔직히 저것까지 귀여우면 내 눈에 뭐가 쓰인 거겠지.

"에스더, 다음부터는 아빠 죽으면 엄마 불러라. 잠자는 황실의 대공은 진실한 사랑의 키스로 깨워야 된대."

바로 그저께 읽어준 책이 하필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이걸 여기서 써먹을 줄은 몰랐는데.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제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본다. '아빠 그런 병약한 존재였어?' 하는 눈이군. 그럴 리가 없겠지만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그리 생각하며 웃고 있던 찰나 바닥에 나뒹구는 작은 꽃바구니가 보였다. 둘 다 일 때문에 바쁜 것 같으니 유모랑 가자고 했나 보다. 좀 미안해진다. 오늘은 일이 너른 날이라 같이 가줄 수 있었는데. 흩어진 꽃들을 모아 바구니에 담고, 한 손에 가볍게 들어 아이에게 쥐여주었다.

"아... 맞다. 아빠, 이거."

"이게 뭐지?"

"아빠랑 엄마 주려고 내가 꽃 가져왔어. 반만 가져가. 딱 반만!"

목소리에 묻은 시무룩함은 여전했으나, 말끝이 단호해진 걸 보니 아빠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서 안도한 모양이다. 진짜 귀엽다. 갑자기 남편이 어렸을 때 복숭아를 배가 터지도록 먹어서 목에 반성 팻말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사무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싶다.

"그래, 고맙다."

딸은 요새 내게 아빠가 좋다는 말을 달고 산다. 아빠가 너무 멋있다며, 다음에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라나. 아빠랑 결혼한다고 안 하는 게 다행일지. 그러면서 엄마 이야기는 흔적도 없길래 조금 서운해했는데, 나중에 유모에게 들었다. 아빠 앞에선 엄마가 좋다고 하고 엄마 앞에선 아빠가 좋다고 한다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직접 말하기는 부끄러운가 보지. 그것도 날 닮았나.

"유모가, 아빠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이것만 얼른 주고 오라 그러셨어. 그래서 나 이제 어쩔 수 없이 가야 돼."

가기 싫은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다. 저러면 아빠가 안아줄 걸 아는 거지. 누구 딸인지 똑똑하고 기특하다. 그 예상대로, 남편은 웃음이 걸린 얼굴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펜을 마저 든다. 저래놓고 몇 시간 후에 오면 또 조는 거 아닐까. 커튼이라도 쳐줘야 햇살에 잠을 안 자려나.

"나 때문에 괜히 일 놓고 왔나 보군. 미안해."

난 재밌는 광경 봐서 좋은데. 저렇게 붙여놓으니 둘이 꼭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분명 객관적으로 에스더는 나를 더 닮았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그냥 내가 둘 다 귀여워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입꼬리에 가볍게 미소를 걸고 딸아이 머리를 한 번, 남편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 문을 나섰다. 이제 또 일해야겠네. 아이고.


"에스더 유모한테 갔어?"

"그래. 같이 자자고 해도 오늘은 유모랑 자기로 정한 날이라며 팽하더군."

"안쓰럽다."

영혼 없는 말을 던지고서 이불에 들어가 있으려니, 들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자리에 무게감이 실렸다. 자연스레 등을 감싸는 팔 안으로 들어가 누운 자세를 고치니 퀭한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잘 보인다. 아까는 장난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남편이 안쓰럽다. 기분 탓인지 살도 전보다 빠진 것 같고. 아니, 사절단 때랑 비교하면 확실히 건강이 그때를 못 따라가지.

"괜찮아?"

"...원래 다섯 살이 이렇게 힘이 강한가?"

그거 물어본 거 아니었는데. 하기야, 쏟아지는 서류와 끝없이 늘어나는 일을 평생 감당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나 역시 당신의 곁에 머물기로 했을 때 비슷한 결심을 했으나, 태어날 때부터 어깨에 짐을 지고 살아온 당신에 비할 바는 못 되리라. 그런 당신에게는 지금 몇만 자의 글씨가 빼곡히 적힌 서류보다, 우리를 꼭 닮은 아이 하나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래놓고 무슨 둘째를 낳자고 하는지.

"당신 딸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은 쏙 빠지는 거고?"

맨 등을 간지럽히는 손길이 장난스럽다. 바람 섞인 웃음을 뱉으며 얼굴 앞으로 흘러내린 당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엉킨 곳 없이 흐르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기는 느낌이 좋아서 어느새 습관으로 굳은 행동이다.

"아파? 얼음이라도 대줘?"

"그거 말고, 아까 말한 키스는 언제 해줄 건데?"

어차피 맨날 하면서 이런 건 단 한 개도 안 놓치려고 한다. 순순히 해주면 이건 내 아내가 아닌데 당신은 누구냐고 부러 인상이라도 구길까. 아니면 오늘 기분 좋냐고 물어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만족하면서 잠들 수도 있겠다.

"지금 안 자는데 뭐하러."

"내일 힘내라고 해줄 수도 있지. 잘 자라고 해줄 수도 있고."

"설마 그 나이 먹고 꼭 굿나잇 키스가 있어야만 잠드나?"

휴일이 아닌 날은 이때가 하루 중 제일 많이 웃는 시간인 것 같다. 일 이야기도, 제국 이야기도 없이 오직 우리 부부의 이야기로 채워나가는 시간. 아니, 우리 가족의 이야기로. 이 시간의 주제는 예측할 수가 없다. 오늘, 어제, 일주일 전, 그러다 타고 흘러 첫 만남까지 가는 경우도 있으니.

"사절단의 나한테, 너 단장이랑 결혼한다고 그러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무슨 반응을 보이든 그 옆에 있고 싶지는 않아."

"설마 때리기야 하겠어."

"당신이라면."

손가락을 남편의 이마에 가볍게 튕겼다. '이거 봐.' 하는 목소리에 한 번 더, 아프지도 않으면서 이마를 문지르는 모양새가 어이가 없어 또 한 번 더.

"빨개졌어. 진짜로 뽀뽀해줘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바보야? 문질러서 빨개진 거 다 알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민망한 실랑이의 끝에 먼저 져주는 건 늘 나였다. 어떡하겠는가. 이 사람은 과하게 머리가 잘 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나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심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넘어가는 수밖에.

붉은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아깝다. 동이 트면 당신은 언제나 철저하게 지키던 루틴을 따라서 먼저 이 방을 뜰 테고, 나 역시 우리의 공간을 뒤로하고 다시 펜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짧은 달콤함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매일 그렇게 살아오고 있지만, 가끔은 많이 아쉽다.

드물기에 더 귀하다 했던가. 1시간 남짓한 시간을 기다리며 나머지 23시간을 견디기에 이 시간이 더 가치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당신과 하루 열 두시간 이상 같이 있는다 해도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사랑에는 과함이 없으며, 제 그릇이 충분한 이상 부어도 부어도 더 욕심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남을 해하지 않는 욕심이란 가끔은 이로울 수도 있는 종류다.

"휴일까지 며칠 남았더라. 요샌 날짜 감각도 흐리네."

"3일. 쉬고 싶으면 휴가 내도 돼."

"같이 안 쉴 거잖아."

남편의 어깨에 턱을 얹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어본다. 내 나름 가벼운 한숨이었으나, 그에겐 꽤 커다랗게 닿았나 보다. 매사 나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게 썩 기분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그 시선 한가운데로 끝없이 나아간 건 나인 것을.

"당신이 힘든 것만 아니면 좋겠어."

사무실 다시 옮기고 싶다. 신혼 때 남편 얼굴 보면서 일하려니 집중도 안 되고, 일 문제로 다른 부관들 있는 데까지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해서 방을 옮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종종 아쉬워하고 있지. 솔직히 틀린 선택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사무실을 합친다면 일의 능률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올라갈 거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그래도 부관으로서의 자아와 아내로서의 자아가 부딪히는 걸 어쩌나.

"못 버틸 정도로 힘들진 않아. 다 내가 선택한 건데 힘들다고 한숨 푹푹 쉬고 다니기도 싫고."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결국 내가 먼저 주제를 넘겨버렸다. 둘 다 이 시간에까지 일 이야기를 하기는 싫은 듯, 이후로는 가벼운 대화만 한참 오갔다. 하나같이 속이 비어있는 이야기들처럼 들렸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 당신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당신도 이 순간에는 나와 같은 것을 느낄 거라는 걸 알아.

오늘따라 시계의 초침이 훨씬 매섭다.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인 줄 알았더니, 그런 안일함을 비웃듯이 행복의 끝자락은 생각보다 이르게 와버리고 말았다. 이번 휴일에는 정말로 산책이고 뭐고 다 취소하고 하루 종일 집에 붙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 둘만 잔뜩 봐야겠다. 또 한 주를 버티기 위해서.

"잘 자, 애나."

"당신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따스한 인사가 오간다. 이럴 때마다 당신이 내 마음을 느끼고 맞춰주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같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진다. 어느 쪽이든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나는 당신 덕에 '사랑을 위한 포기'를 배웠고, 당신 덕에 어머니에게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에게 뒤늦게야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까, 얼굴을 마주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횟수가 많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당신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알아야지.

이상하게도, 내게 요새 하루 중 제일 따뜻한 시간은 밤인 것 같다. 당신의 온기가 닿는, 달이 하늘에 걸린 푸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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