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어느 봄날

FAITH : 안식의 레퀴엠 / 엔딩 이후 지수의 어느 평범한 봄날 / 2020.03.29 업로드

그 말을 어디서 봤더라. 사람은 사랑을 하면 변한다고. 가끔 이 말에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꼭 변해야 하는가? 사랑하기 전의 모습에 호감이 생겨 발전한 관계에서 굳이 변화가 필요한가? 아니, 변할 수밖에 없는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그냥, 가끔 궁금하다고.

"왔어?"

"일찍 오셨네요."

사람이 많지 않은 카페에, 두 남녀가 앉아있다. 반 묶음 머리에 하늘색 나비 핀을 단 여자는 익숙하게 제 앞에 놓인 밀크티 잔을 들어 올렸다. 컵 표면의 물방울이 흘러내려 무릎에 툭 떨어졌다. 지나치게 차가운 온도였다.

"미안, 얼음 녹아서 밍밍하겠다."

"아니에요."

"어제 왜 그렇게 일찍 잤어? 평소엔 새벽도 잘 새우는 애가."

어제... 뭘 했더라.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작은 고민에 빠졌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 그다음에 동생이랑 밥을 먹고... 모르겠다. 요새는 작은 기억들은 잘 잊는다.

"아르바이트 갔다 오니까 많이 피곤해서요."

"그러게, 내가 어제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괜찮아요. 오빠도 쉬어야죠."

남자의 눈에 걱정스러움이 어렸다. 유리잔을 쥐고 있던 여자의 손을 떼어 제 손아귀에 넣는 모습이 퍽 따뜻했을지 모르겠다. 잔에 열기를 빼앗긴 여자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겠지만.

"지수야."

'지수야, 내가 너를 잡아주고 싶어. 너 금방 넘어질 것 같아.'

남자는 여자의 과거를 알았다. 거대한 바다에 어떤 기억을 지녔는지, 어떤 사람들을 마음에 들여버렸는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그 배에 같이 타지는 않았지만, 작은 것 하나까지 모조리 말이다. 여자에게 쉴 곳이 되어준 것은 첫 번째로 가족이었고, 두 번째는 남자였다.

"네."

"괜찮아?"

다정한 물음이 여자에게 날아들었다. 여자는 그 세 글자가, 저 밖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꺼번에 흩날릴 때 그 무엇보다 아름다우나 결국 순식간에 바닥에 퍼질러져 버리는 한때의 아름다움.

'저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 외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긴 하던가. 여자는 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남자는 여자에게 휴식처가 맞기는 했다. 일단은.

남자는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잡은 손등을 엄지로 쓸었다. 여자는 남은 손으로 밀크티를 한 모금 넘기고, 컵이 큰 탓에 테이블에 몇 방울을 흘린다.

"아이고, 조심 좀 해."

당연한 듯 냅킨을 집어 테이블을 닦는 남자가 익숙했다. 여자는 자유로워진 양손을 테이블 아래 무릎에 가지런히 올린 채 남자가 제게 웃어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들어 컵 안의 얼음이 반짝였다. 여자는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가 손을 뻗어 여자의 안경 줄에 걸린 머리카락을 정돈해주었다. 남자가 100일 선물로 사준 것 중 하나였다.

'네가 이거 상품 페이지 보고 있는 거 슬쩍 봤어. 그거 말곤 아무것도 안 봤다.'

"밥 뭐 먹을까요. 오빠 어제 닭갈비 먹고 싶댔죠."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그건 나중에 친구들이랑 먹을게. 오늘은... 음, 고기 종류 중에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먹어도 상관없는데.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도 마시지 않은 밀크티가 이제는 아주 밍밍해져 손대기도 싫었다. 다음부터 이 카페에 오지 말아야겠다. 여기 왜 왔었지. 아, 커다란 벚나무가 잘 보여서 골랐다고 남자가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데이트하기에 나쁘지는 않네.

"8시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밥 먹고 뭐 좀 하다가 연극 보러 가면 되겠다."

여자는 남자와 있을 때 말수가 거의 없었다. 제 의견을 내는 일도, 꺄르르 웃는 일도, 투정 부리는 일이나 눈을 빛내는 일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늘 여자의 휴식처였다. 그래야지.

"오빠, 반지 없네요."

"어? 아, 미안. 아까 화장실 갔다가 빼놓고 왔나 보다. 나 잠깐 갔다 올게."

'오빠, 우리 백 일은 그렇게 크게 안 챙겨도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냥... 둘이 케이크 초 불고 밥 먹는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오래 만날 거니까...'

남자는 기어코 안경 줄과 한 쌍의 반지를 가져왔다. 그때 남자의 눈빛이 그 금속들 못지않게 반짝여서,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누가 커플링은 연인의 수갑이라고 했던가. 흔쾌히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당하기로 합의하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채우는 작은 수갑. 여자는 제 앞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햇볕 아래에 제 손을 넣어보았다. 반지에 반사된 빛이 일시적으로 눈을 멀게 했다. 여자는 눈가를 찡그린 채, 손을 다시 테이블 아래 무릎 위로 가지런히 두었다.

"세면대 옆에 있더라. 미안, 미안. 너 아니었으면 잃어버릴 뻔했다."

밝은 갈색의 의자에 다시 무게가 실렸다. 여자는 가만히 웃고, 남자의 왼손에 끼워진 것을 확인하듯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둥근 링은 남자의 약지 손가락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여자는 문득 저 반지의 시작점은 어디일지 궁금해졌다. 영영 찾을 수 없겠지.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갈까요."

"그럴래? 음료 반도 안 마셨잖아. 입에 안 맞는구나."

밝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챙기던 여자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최고의 날이었다. 하늘은 새파랗고, 벚꽃은 선명한 붉은색에, 카페 내부에 흐르는 음악은 하나같이 여자가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여자는 기분이 좋을 것이었다.

"따뜻한 거 시켜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래? 얼죽아가 웬일이래."

남자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빈 컵과 여자의 찰랑대는 컵이 함께 쟁반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자연스레 그것을 들고, 여자는 자연스레 남자의 짐까지 모아 일어섰다.

"와플이라도 시켜줄 걸 그랬나?"

"밥 먹어야죠."

"너 원래 영화관 가서도 팝콘 먹고 밥 또 먹잖아."

"요새 위가 줄었나 봐요."

"그것도 진짜 웬일이라냐."

여자의 낮은 신발 굽이 카페 바닥을 두드렸다. 유리문 밖의 풍경이 아름다웠다. 하늘은 파랗고, 벚꽃은 새빨갛고... 여튼 그런 거 말이다.

"오빠, 버스 타고 갈까요."

"그럴래? 걸어가면 시간 좀 걸리긴 해."

묵직한 유리문 밖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봄, 그 자체였다. 멀리 횡단보도 너머로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저기서 29번 버스를 타고 세 정류장을 가면 식당이었지. 따라 카페를 나온 남자가 손을 잡아 가볍게 여자를 끌어당겼다.

"무슨 생각해."

"...그냥, 예쁘다는 생각이요."

새파랗다.

"날씨 좋긴 하다. 구름도 하나 안 보이고."

바다처럼.

"내일 상담 가는 날이지?"

"네."

여자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지금도 한 치의 오류 없이 멀쩡하지 않은가. 기대 쉴 나무도 곁에 있고. 더 좋아질 것도 없는 셈이지.

"언제 끝나는 일정이었지?"

"이제 한 주면 끝나요. 연장될 수도 있긴 한데."

"잘됐네. 선생님도 좋은 성과 있는 것 같다고 그러지?"

'지수 씨, 괜찮은 거 맞아요?'

"네."

"그래. 난 네가 진짜 주저앉을까 봐 걱정 많이 했어."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생님.'

"버스 곧 오겠네요."

"그래. 가자."

맞잡은 손이 이상하게 시렸다. 겨울은 지난 지가 오래인데도. 바닥에 널린 꽃잎들이 신발 밑창에 들러붙었다. 여자에게는 지금 그것을 떼어낼 힘이 없었다. 남자의 손도 여자의 손에 들러붙었다. 여자는 그것을 떼어낼 명분이 없었다.

시간이 생에 진득하게 붙는다. 생이 사에 녹아 질척인다.

여자는, 어디에 자신을 뉘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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