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조우
"정말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가이드님!"
"아니야. 순전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란다."
말리는 센티널 옆에서 가이드는 뱃심을 부린다. 반대 상황이라면 몰라도 이는 센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거참, 얼른 결정해야 될걸세. 벌써 장군님 인내심은 바닥났으니까 말이야."
관리가 그들을 재촉한다. 마지못해 센티널은 고집을 꺾었다.
가이드는 온화한 말투로 쏘아 다시금 되 읊는다.
"나는 네 전속 가이드가 되는 거고, 앞으로 약속한 3개월간 함께 일한 후에, 그다음에 더 어쩔지 정하는 거야. 알겠지?"
센티널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 이제 정말 번복하기 없기야. 약속이다?"
"네, 가이드님... 아, 성함을······."
"루스. 아무렇게나 불러도 괜찮아."
루스, 그래. 그녀는 국립 센터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경복궁의 가이드였다.
이 사람을 더 알아보기 전에 미리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 센터에 관한 것.
그것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국립 센터, 시립 센터, 사립 센터. 국립 센터의 이름은 원칙적으로 궁의 이름을 쓴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친숙한 이름을 빌려 쓰는 정책이나 사실상 센터, 센티널, 가이드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쓰는 대부분의 용어는 외래어이므로 큰 효과가 있지 않았다. 시립과 사립 센터에서는 상관 없지만 대표적으로는 시립 센터인 규장각과 성균관, 사립 센터인 설매관이 있다.
센터는 전국의 모든 센티널 발현자들이 교육받고, 일자리를 꾸려 구난사(救難事)로서 취직하게 하며, 재난의 장소, 정도, 인명 피해를 미리 조사하고 교육 이수 중인 센티널과 필요할 시의 가이드와 전문 구난사를 파견시키는 곳이다. 하지만 중개업체나 학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국가에 여전히 빈번한 문제였다.
재난을 조사하는 것은 센터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재상청(災象廳)에서 이를 돕고 있다. 대부분의 센티널 발현자는 구난사가 되지만 재상청에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상청에 관리로 취직해서 센터에 발령받아 도로 센터로 돌아오는 센티널도 있다.
이는 나중에 루스와 현이 파트너가 되는 데에 약간의 기여를 하게 된다.
센티널 현이 가이드 루스와 대화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보호원은 답지 않게 험한 곳이었다. 그곳의 교육종사자들이 그를 무척이나 예뻐한 것은 그녀가 센티널이었기 때문이다. 현은 보호원에 있는 동안 봉사하는 영웅으로 그녀의 보호자들에게서 칭송받았다. 그곳에서 현은 그네들의 말마따나 인명 구조의 달인, 작은 구난사였다. 보호소는 일종의 갇힌 우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의 마지막이 다가오며 현이 성인이 되고 더 이상 보호자들이 그녀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그날 펑펑 울었다.
현은 법률에 따라 국립 센터 중에서 골라져 배정받았다. 국가는 보호소에서 겪은 많은 인명 구조 경험을 높게 사 나라에서 최고 위치에 있는 경복궁에 그녀를 배치하였다. 그녀가 겪은 바로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교육 이수 받게 된 구난사 지망생 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는 예의 바르고 착했으며 열심히 했다. 가이드로서 어느 곳도 흠잡을 수 없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이 서류를 봐라. 예상 피해도에 비해서 구조한 인원 비율이 점점 적어지잖아. 정말 최선을 다 한 거 맞아? 이대로면 너 경복궁에서 제명 당해."
"...네. 최선이었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더..."
"해명 안 해도 돼. 이번이 마지막으로 붙여 주는 가이드니까 열심히 해. 나도 네가 사립 센터로 가는 거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붙여주는 가이드야."
관리는 한 가이드를 소개했다. 흠 될 것 없이 깔끔한 경복궁 특유의 청색 가이드 유니폼을 차려입은, 눈에 잡아낼 것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여러 업무 얘기로 난잡한 센터를 울리는 그의 정갈한 발소리만으로 오랜 시간 교육종사자로 일한 프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은 그 발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녀 얘기를 해보자. 그녀는 센터 중에서도 최고 경복궁의 실적이 가장 많은 가이드였다. 나라에서 제일가는 일타 강사와도 같았다. 보통 가이드는 과다한 수의 센티널을 가이드하지 않는다. 10명 정도의 센티널을 보고 나면 본인과 가장 잘 맞는 센티널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스는 가이드로 일한 약 5년 동안 200명 이상의 구난사 지망생을 만난 경력직 중의 경력직이다.
현 에어리브. 루스가 그와의 가이드 일정이 잡혔을 때, 도저히 경복궁에서 강등당하기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발을 맞춰 손을 잡았을 때 생각은 달라졌다.
1호선, 구난사와 그 지망생이 처치해야 할 재난이 들이닥치는 곳은 언제나 시끄럽다. 일주일간의 강습이 시작된 첫날이었다. 위축된 데다가 뻣뻣하게 서 있는 학생에게 가이드는 말했다.
"왜 벌써 겁을 먹니? 아직 재난은 시작되지도 않았단다. 너무 큰 재난이 닥칠까 두려운 거니?"
"아니요,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요..."
루스는 속으로 웃었다. 절대로 나쁜 뜻은 아니다. 그 프로 가이드는 깨달은 것이다. 이번에 이끌 학생의 구난사 교육 이수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하려면, 그 기억을 알아내는 일이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일 것임을. 그렇지 못한다면, 이 안타까운 학생은 꼭 쫓겨난 신세가 될 것임을.
그런 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재난이 군중 한가운데서 높이 뛰어올랐다. 이것이 이번의 재난이다. 구물구물 기어 오는 살덩이를 손바닥에 겨우 반절도 미치지 않는 작은 호신용 검으로 찌르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사립 센터에 가면 남들에 비해서는 실적이 좋지 않을까.' 현은 늘 하던 일을 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귀를 찌르는 사이렌 소리, 설상가상으로 화재가 일었다. 모두 꾸며진 세트장이 아니라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이 그때만치 피곤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환경이었다. 내미는 손에 그저 수용할 뿐인 그 상황 자체가 피곤하게 다가왔다. 그 저릿한 감상의 모르는 손덩이는 구조 대상이었건만, 본인을 끌어당기는 크레인처럼 느낀 것은 확실히 높은 실적을 원하는 자에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센티널은 가이드의 구호에 맞추어 구조를 계속한다. 꿈에 나온 기계인 양 덥석덥석 잡아 끄는 인간의 피부가 쓰려온다.
그렇게 손이 따가워 견딜 수 없을 무렵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와, 어서! 내 손을 잡으렴."
역시 제일간다는 가이드였다. 여기저기 쓸리고 긁힌 피부에 가이드의 손이 닿자 쓰라림이 덜해지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마치 잠들기 전 각성제를 마신 것처럼. 배턴 터치하듯 가이드와의 접촉이 늘어간다.
왼손으로 가이드와 접촉, 보안갑 낀 오른손으로 인명 구조. 왼손으로 접촉, 오른손으로 구조. 왼손, 오른손.
사람의 살점이 타는 냄새. 죽을 것처럼 뛰는 나 자신. 생사의 문턱에 있는 비명. 번갈아 가며 잡히는 팔, 손. 현은 그때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 일을 회상하려 한다.
여느 날 밤 악몽처럼 세실은 기억 속에서 나타난다.
현은 어지러이 몸을 겨누며 기꺼이 기계인 양 사람을 잡아 끈다. 일렁이며 구부러지는 땅에 그대로 휘청일 수 밖에 없는 몸이다. 가이드님, 절실히 불러 본다. 목청마저 나간 지 오래여서, 혹여 듣지 못할까 재차 불러 본다. 가이드님, 가이드님, 루스······.
귓틈으로 흘러오는 듯한 청량감에 되려 두통이 찾아올 때쯤.
"가이드님."
"걱정 말렴. 그 기억은 잊어도 좋아. 같은 실수도 다른 기억으로 덮어도 좋단다. 지혜로운 인간이라고 뇌 용량이 부족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
가이드는 차가워진 센티널의 체온을 데운다. 뒤에서 잡는 손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가이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에 들려오는 열 한 번의 비명은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재난을 넘는 재앙이더라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으리라. 그들은 한동안 서로의 숨을 나누었다.
"62%? 우리 군사들이 다 가서 조사해올 거예요. 거짓으로 보고할 생각은 마세요. 저희 재상청에서 예상한 건 높아봤자 60%였는데... 아니, 아무리 잘 나가는 가이드를 붙여 줬다지만 A급 센티널 한 명이 1호선 재난을 맡고도 이렇게 멀끔하게 돌아왔다는 건..."
관리가 보고서를 받고는 불평한다. 물론 그 보고서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다.
"...전부 루스 가이드님 덕분이에요. 저, 나머지 엿새 치 동조 임무는 다른..."
"장군님께 전해주시지요. 4주 더 연장하겠다고요. 저와 이 아이는 동조율이 제법 좋은 것 같더군요."
"가, 가이드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날 낸 동조율 수치에 현은 이것보다 더한 실적을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루스에게 그 동조율은 지금까지 합을 맞춰 본 다른 이수자에 비해서 높지 않았다. 허나 현이 그때 당장 고려했던 것은 지금 자신이 이 사람을 붙잡았을 때의 경복궁의 손해와 그녀에게 끼칠 민폐였기 때문에, 미련 가지지 않고 그를 놓아줄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가이드는 이 반대였던 모양이지만.
이전에 말한 적 있듯 재상청에서 온 관리 중에는 센터에서 구난자 교육을 받던 센티널도 존재한다.
지금 보고받는 관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어떤 가이드와도 동조율이 높지 않아 결국 능력을 제어하고 구난사 기업 대신 재상청에 취직했다. 센티널에게는 그 누구보다 잘 맞는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그 관리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럼, 두 사람 동조율이 높으니 전속이 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좋겠네요."
루스의 입가에 미소가 띄였다.
그 사태는 폭주 사태는 아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폭주하는 센티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번 사건은 과로로 인한 능력 소실 상태, 즉 번아웃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게 바로 가이딩의 묘미다. 가이드의 힘으로 그 번아웃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능숙한 가이드의 속삭임 덕분이었겠지.
여기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부분은 사실 그 가이드는 이런 사건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건 마냥 경력 덕분은 아니라 그 센티널이 자신이 상상해왔던 이상적인 학생이어서다.
마지막 여운을 남기고자 가이드는 센티널에게 묻는다.
"그때, 넌 그저 두려운 게 아니었어. 무언가 떠올리는 중이었지.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 있니?"
정곡이었다. 그땐 일부러 꺼내 본 기억을 이번엔 꼭꼭 숨기고 싶어졌다.
"좋아, 너 같은 아이를 전혀 본 적 없는 건 아니야. 못 믿는다는 표정 짓지 말렴. 웬만하면 난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 만약 네가 입을 열지 않겠다면, 나는 너와의 동조 임무를 계속 연장할 수 밖에 없어. 한 달, 두 달, 일 년이 지나서 가령 내가 네 전속 가이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내가 맡은 센티널이 안 좋은 결과를 맞는 걸 두고 볼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 말을 들은 지 벌써 2주가 지난 뒤다.
고난은 언제든 또 다시 찾아왔다. 나중에 생각하기로는, 루스 그 프로 가이드는 센티널을 위해 일부러 그의 트라우마를 연상시키는 재난 예정지를 골라 맡은 모양이었다. 의도를 생각해 보자면 노출 치료라던가, 실전을 위한 예행연습이라던가, 급박한 상황에서 나오는 더 효율적인 동조율을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거기서 더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이 가설에 대해 루스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 순수한 가설에 불과해서다.
그래서 이 중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현과 루스가 함께 가는 동조 임무는 대부분 현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는 것 뿐이다.
이론에 따라 움직이는 오른손과 왼손은 아무리 기계이더라도 오류가 나기 마련이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때처럼 단순한 구령에 맞춰 구호 작업을 계속했다간 실수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인간이 이를 알 수 있을 리 없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프로 가이드의 약물 비슷한 효과의 가이딩은 모두에게 신뢰받고 있으며 가이드의 입장에서도 가이드와 센티널의 신뢰는 중요했으므로 그런 사사로운 부작용의 의미를 모두가 알 필요는 없었다.
그 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은 낮지만 만약 센티널의 가이딩 의존도가 높을 경우 그 정도에 비례하여 배로 높아지는 것이 바로 그 부작용이 위험한 이유다. 하지만 부작용의 정도가 심하다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지망생을 포함한 구난자의 가장 큰 특징은 구조용 보안갑이다. 이는 보통 주로 사용하는 손에 끼며 천이지만 단단하고 맨 살이 드러나지 않게 싸매어져 있다. 그래서 가이드와의 접촉에는 활용성이 없다. 누군가는 주로 쓰는 손으로 가이딩을 받는 것이 편할 수 있지만, 현은 아니었다.
오른손잡이인 장기 선수도 왼손으로 수를 둘 때가 있다. 왼손잡이인 사람도 오른손으로 밥을 전혀 못 먹는 건 아니다.
현은 늘 하던 식으로 오른손으로 구조, 왼손으로 가이드와 접촉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오른손, 왼손. 오른손, 왼손... 하지만 실전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른, 오른, 왼, 오른, 오른, 오른, 왼, 오른, 오른······.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귀 틈으로는 청량감이 흐르고 오장육부는 제자리에 있지 않은 기분이며 바닥은 꿈틀거려 몸은 가눌 수 없는 대로 양손은 어지러이 바뀐다. 모르는 사람 몇 명과 루스의 손이 스치고 또 모르는 사람 몇 명, 루스의 손은 스치며 모르는 사람을 구조하려 끌어 당겼을 때,
꺄악, 쿵. 그리고 우당탕······.
두 사람은 요란스럽게 넘어졌다. 현이 잡아끈 것은 구조 대상자가 아니라 루스였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쓸려 무릎이며 팔꿈치며 성치 않은 곳이 없다.
"자, 잠깐. 가만히 있으렴. 지금 치료해줄 테니..."
뿌리치기엔 달콤한 말이다. 현은 그대로 앉아 구조를 멈추고 그녀를 안는다. 가이드는 오른손의 보안갑을 벗긴다. 왼손과 달리 잔 흉터가 많은 모습, 심지어 저번 임무에서 짧은 도구 때문에 생긴 화상까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효율적인 구조를 위해 가이딩을 받은 적이 없어 치료받을 기회가 없던 오른손이었다.
약 2분 36초, 서로 웃으며 긴 기분을 느낀 두 사람은 그런 채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제 정말 참을 수 없다. 현은 그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루스가 정말 말한 대로 기간을 계속 4주씩 늘리는 것을 보고도, 그 가이드가 자신 손을 붙잡으며 전속 가이드가 되면 이 흉터도 깨끗하게 지워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도, 털어놓지 않을 수는 없었다.
루스, 그래. 그녀는 국립 센터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경복궁의 가이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을 긁어내고, 달래며 결국 전속 가이드가 되고 말 테였다.
그녀와의 동조 임무가 한 달 하고도 3주가 되던 날, 현은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날 뿐이라고. 보호소 출신인 나는 재난과 화재와 나를 견딜 수 없다고······.
옆 방에서 생활하던 세실과는 단짝이었다. 마치 빨간 머리 앤과 그 친구 다이애나처럼, 서로를 부러워하고, 서로 의지하는 단짝. 그녀는 현에게 말하곤 했다.
“네가 센티널이라 다행이야. 네가 언제까지나 내 친구라면, 너는 언제든지 날 구하려 올 테니까.”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귓속에 메아리치듯 맴돌며 울린다.
그날이었다. 아직 어릴 뿐이었던 작은 영웅 현은 그날따라 기시감을 느꼈다. 늘 오는 재난일 리 없었다. 미리 찾아오는 비명, 뜨거운 감각, 타들어 가는 냄새에... 이상하고 말고. 그것은 이미 찾아온 비명과 감각과 냄새였다. 이제 막 일어난 어린 아이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아이는 이미 늦었다. 그 나잇대 아이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교육용 보안갑 한 짝을 낚아채고 재빨리 양손에 착용하려 애쓴다. 서두르던 나머지 어깨도 팔도 벽에 계속해서 부딪혔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계속 보호소의 사람들을 찾는다.
여러 번, 모든 방의 문을 열어 제끼며 아이들, 보호자들, 나를 칭송하는 보호소의 친우들 모두 찾아내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출구의 문 또한 연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록 나의 능력이 하찮다 여겨진다.
마지막 구조조정이었다. 복도 끝 방이다. 그곳에 나의 다이애나가 잠자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도 달아나지 않는 잠을 잔다. 나는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돌렸다. 손목에 힘을 주고 당기지만 철컥대는 소리만 들릴 뿐 열리지 않는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목재로 만든 나무 재질의 문, 결대로 자르면 나의 힘으로 어느 정도 부술 수 있을것이다. 자를 것이 필요하다. 무너지고 있는 건물의 이름모를 자재, 높이 들어 문을 향해 내려친다. 그렇게 만든 겨우 손가락 하나 넣을 얇고 긴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세실의 방은 목재 건물의 가장 큰 기둥이 노출된 벽에 붙어있었다.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려면 모든 방을 다닥다닥 붙도록 만들어야 했고, 이는 그 보호소에서도 반영되었다. 만약 불이 세실의 방에서 난 것이라면, 다른 아이들의 방에서까지 불이 옮겨붙은 것도 납득되었다. 얇은 나무 판자로 된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불꽃은 보호소를 전부 태워버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 구멍을 향해 세실을 애타게 불러 본다. 계속 부러지는 연약한 도구들을 계속해서 바꿔 가며 방문을 부순다. 자꾸 드는 무서운 생각에 눈물이 주체되지 않고 흐른다. 목이 쉬도록 나의 다이애나를 부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비로소 문이 완전히 부서지고, 비집고 들어간 방에는 잿더미만이 가득하다.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이제껏 괴롭힌 그 아이는 그 때 없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볼 수는 없었다. 그 아이 다웠다.
경복궁에 가게 된 것은 그 후로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 없이 마주 보고 앉아 추억을 나눴다. 조용히 내 곁에서 사라진 세실과 보호자 누구도 말해줄 수 없는 그날의 속셈을. 또 온 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불유쾌한 죄책감과 구역감처럼 도로 올라오는 화재 향마저. 그것 모두 토해낸 다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불러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가이드님이 좋아요."
"저는 가이드님 만큼 동조율이 높은 가이드를 만날 자신이 없어요. 저는 겁이 많아서, 다른 가이드와 손 잡아보고, 안아볼 엄두도 안 나요."
하하하, 루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내가 네 전속 가이드가 되면 되겠구나."
그 속마음을 읽혀버린 현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까지는..."
그 때 관리가 그들 옆을 지나간다. 루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리의 옷깃을 붙잡는다.
그 후, 아마도 약 5개월이 더 지난 후의 이야기다.
현은 센터의 이수를 완료했다. 원한다면 그들은 구난자로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재난청에 지원했다. 현의 능력이 예지에는 아주 특출났기 때문이다. 루스에겐 그다지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 말인즉슨 현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해주었다는 얘기다.
현은 루스의 추천으로 무기를 더 길고 찌르기 쉬운 것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것을 쓸 일은 더 없었다.
그들이 그 관리처럼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자그마치 7년이 걸렸다. 현은 돌아오고서 생긴 말버릇이 있었다.
"두 분, 동조율이 높으니 전속이 되는 것도 생각해보시면 좋겠네요!"
그 관리와 닮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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