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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냠힝

베를린에서 삼 년, 하노버에서 사 년. 이십 대 초반 좋은 날들 다 독일에서 피아노 치느라 헌납하고, 겨우 아버지 설득해 밟은 한국 땅이다. 말이 좋아 유학이지, 그저 유배였다. 팔 년 동안 한 번도 온 적 없는 한국이다. 덕분에 한국에서보다 음악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았느냐는 되레 뻔뻔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서울의 불야성은 여전히 눈부셨다. 공항 택시 타면서 곧바로 본가로 들어갈까 생각하다가, 밖에서 하루만 쉬고 가자는 결론으로 호텔 주소 찍었다. 사실 너무 오랜만이라 긴장 조금 했다. 십자로 빛 번지는 창밖 멀거니 쳐다보다가, 원하는 연락 없는 핸드폰 괜히 산만하게 켜보다가. 며칠 전 보냈던 디엠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나 서울 가. 읽었다는 표시도 안 떴다. 위로 올려보면 몇 달에 한 번씩 장문의 메시지로 상투적인 안부 묻는 내용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드문드문.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선 신인 배우가 이번에야말로 칸의 레드카펫을 밟을 수 있을지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가만히 시트 헤드에 기대 눈 감았다. 택시에서 내리니 서제희 얼굴이 보였다. 진짜 서제희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높은 빌딩에 서제희 얼굴이 나왔다. 터치스크린 광고판에 온통 서제희가 가득했다. 입매가 예쁜 호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잘 지내나 보네. 그제야 진짜로 서울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괜히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었다. 앞으로도 나흘간은 답장 없을 서제희를 생각한다. 많이 바쁜가 보네. 저 빌딩들에 얼굴이 전부 걸어놔야 할 테니까. 답지 않게 시비조로 흘러가는 생각에 입술 앙다물었다.

서제희는 죄 찍는 것마다 사랑 영화였다. 처음에 배우가 되었다는 소식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 걔 주조연으로 출연하는 건 전부 보긴 했다. 평론가들은 다른 영화도 나쁘지 않지만 로맨스를 찍을 때 제일 빛난다고 평가했다. 남연우가 보기에는 서제희 연기가 영 밍숭맹숭했다. 걘 그거보다 더 뜨거울 수 있는 애였다. 여러모로. 로맨스 영화만 골라 찍을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 팰 때도, 자신이 한국 떠날 때도 한 번도 운 적 없으면서 스크린 안에서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 뚝뚝 흘려댔다. 그게 괜히 밸이 꼬였다. 나 떠날 때도 한 번만 울어주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우리는 아닐 줄 알았나.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헛웃음으로 터졌다. 기분도 괜히 들쭉날쭉. 열일곱 불같이 뜨겁던 마음으로 독일까지 갔지만 (그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강산 한 번 바뀔 세월에 퇴색되고 흐려진 지 오래다. 연락이야 처음부터 뜸했다. 학교 때려치우고부터 연락은 거진 끊겼다고 봐야 했다. 아빠가 핸드폰 멋대로 바꿔버려서 겨우 인스타 맞팔이나 하면서 간간히 디엠만 했다. 실없이 안부 물으면 마지못해 적선하듯 주는 대답. 그렇게 이어진, 겨우 친구인 관계도 이제 칠 년이다. 걔는 처음부터 롱디는 못한다고 첫 여친이랑 헤어지면서 못 박았으니. 이제 더 뜨겁고 설렐 마음도 없다. 다 가라앉아서, 아주 오래전에. 오래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와, 연예인이다….”

진짜 서제희다. 전광판 말고 실물 서제희. 빈정거리는 말이 먼저 입술 비집고 튀어 나갔다. 시사회, 시상식, 메이킹 필름, 어디서든 방긋방긋 웃던 얼굴이 굳은 채 펴질 생각 않는다. 불청객이 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거 아냐? 그러면, 사인해주세요?”

오랜만에 한국 왔는데, 그런 반응 보이면 나 섭섭해….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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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우 서제희

남연우랑 서제희는 지금보다 머리 두 개가 작았을 적부터 친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부모님이 서로 친했다. 소꿉친구 비슷한 거였다. 비슷한 곳에 살았고, 부모님끼리의 왕래가 잦았다.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남연우를 제일 자주 만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별다른 친구도 없었다. 친했던 건 그만큼 세계가 좁을 시절부터였다. 서제희는 아직도 가끔 생각했다. 앞니 하나 빠진 채로 제히, 하던. 발음 조금 새는 어린 남연우를.

서제희 부모님은 늘상 바빴다. 그래서 서제희는 남연우 집에서 자주 놀았다. 남연우 집에서 놀고, 공부하고, 피아노 뚱땅거리고, 티비도 보고, 저녁도 먹고…. 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둘이 자주 놀았다. 은비가 심심해하면 깍두기로 끼워서 셋이 놀았다. 남연우 처음 만났을 때는 은비는 이제 막 걸음마 떼고 말 튼 아기였는데, 어느 순간 머리 하나 밑으로 와서 따박따박 따지고 드는 미운 다섯 살이 되었다. 역시 애는 빨리 크네. 제히야, 너 진짜 애늙은이 같다…. 종종 남은비는 서제희한테 착하다고 했다. 자신의 가족 아니어서 더 꼼꼼하게 돌봤다는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남은비는 서제희더러 큰오빠라고 불렀다. 미운 다섯 살은 진짜로 서제희를 오빠로 느껴서라기보단, 그렇게 부를 때 비죽 입 튀어나오는 남연우의 반응을 더 즐겼던 것 같다. 야, 내가 제히보다 생일 빨라. 한국인 아니랄까 봐 생일까지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남연우의 항변에도 바뀌는 건 없었다. 제히 오빠는 큰오빠, 연우 오빠는 작은 오빠.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삼 남매 놀이 하면서 지냈다. 일주일에 일곱 번 만나서 놀았다. 남연우네 어머니는 귀찮을 법도 한데 내색 안 했다. 오히려 은비랑 잘 놀아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엄마, 나는?

―제희가 너보다 은비 잘 놀아 주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은비랑 노는 거 재미없는걸…. 자꾸 울고 떼쓰고 시끄럽고….

삼 남매 놀이에서 큰오빠 역할을 제법 즐겼던 것도 같다. 은비 머리 빗어주기, 땋아주기, 대충 다정하게 오빠처럼 돌봐주기. 그런 것들. 제 말 고분고분 따르는 미운 다섯 살하고 미운 열한 살을 보며 어떤 성취감도 느꼈다. 제희는 동생 안 갖고 싶어? 엄마가 장난스럽게 물을 때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미 동생이 둘이나 있는 것 같아. 토요일이면 꼬박꼬박 아저씨랑 아줌마랑 동생들 손잡고 성당도 갔다. 그냥 남들 다 눈 감고 손 모으고 고개 숙이니까 자기도 그랬다. 노래 부를 때면 가사 뜻도 모르는 거 열심히 따라 불렀다. 종종 남연우와 남은비가 기도할 때 눈 뜨고 발장난 걸려고 하면 손으로 꾹 누르며 저지하는 역할이었다. 서제희한테 주어진 역할이 그랬다. 제희가 참 속이 깊고 어른스러워. 달라붙는 꼬릿말이 서제희에게는 포상이었다.

머리가 조금 크자, 어머니들은 자식의 인생 청사진 그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히려 청담 사는 엄마들치고 늦은 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가야 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이름까지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엄마들 사이 마음 맞는 부분이 한 군데 있었다. 우리 애는 공부는 좀 못해도 되니 그냥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 ―물론 청담 어머니의 공부는 좀 못해도 되니, 의 기준은 서울대 의대는 굳이 갈 필요 없지만, 인서울 경영학과 정도는 가야지…. 정도였지만.― 그래서인지 엄마의 레디메이드 인생 계획은 그렇게 터무니없이 빡빡하지는 않았다. 학령기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 또래 친구들 매일매일 학원 몇 군데씩 빡빡하게 돌릴 때, 남연우랑 서제희는 손잡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 피아노 레슨을 같이 다니게 된 건 피아노 정도는 교양으로 해둬야 좋다는 엄마의 권유로부터였다. 아주머니는 피아노 대신 속셈 학원 하나 보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일주일에 격일로 월수금 피아노, 화목토 논술. 딱 두 개만 했다. 서제희는 무용까지 세 개. 어쨌든, 청담키즈 치고 굉장히 애들답게 자란 편이었다.

발견한 의외의 재능, 남연우는 피아노를 잘 쳤다. 서제희도 그 나이대 애들 평균 이상으로 센스 있단 소리는 몇 번 들었는데 남연우는 그 이상이었다. 선생님은 애 음감도, 흡수력도 전부 타고났다고 했다. 바이엘 네 권 금방 졸업하고, 서제희가 체르니 삼십 할 때 남연우는 사십하고 있었다. 서제희가 체르니 사십 들어갈 때쯤, 남연우는 모차르트, 바흐, 이런 거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질투하다가, 그냥 그러고 말았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는 질투보다는 박수를 보내게 된다. 무엇보다 남연우가 피아노 앞에 앉으면 짓는 좋아 죽겠다는 그 표정이 서제희도 좋았다. 남연우는 딱히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던 게, 서제희 연습하는 피아노 방 맨날 들어와서 장난치고, 방해하고, 옆에 앉아서 멋대로 오른쪽 페달 밟고 그랬다. 피아노 하는 애들이면 으레 거쳐 간다던 써머, 플라워 댄스, 이런 것도 연주해줬다. 학원 안, 서제희가 연습하고 있는 피아노 방에서…. 나중에는 듣고 싶은 곡 없냐고 남연우가 마구 보챘다. 그러면 대따 어려운 곡 찾아서 남연우 알려주고, 남연우는 며칠 지나면 짠. 하고 곡 완성해오고…. 그런 식이었다.

서제희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교양으로 배울 시기가 끝나서. 초등학교 사 학년이었던가. 남연우는 피아노 학원을 끊지 않고 계속 다닌다고 했다. 그 애 인생 최초의 터닝포인트였다. 고작 열한 살 남연우는 피아노 사 년 뚱땅거린 게 재밌어 피아노를 업으로 삼겠다고 집에서 선언했고, 아주머니는 남연우의 입시 계획 전면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당장 중학교 진학부터 말이다. 일반 중학교에서 서울의 이름난 예술 중학교로. 자식이 원하는 건 최선을 다해서 손에 쥐여주고 싶은 평범한 부모의 마음으로. 아저씨는 좀 떨떠름해 하는 것 같았지만, 예술 중학교가 미션스쿨이라는 말에 오케이 사인 줬다고 했다. 남연우는 바빠졌다. 고작 초등학교 사 학년에 중학교 입시 준비하느라 그랬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같이 놀고 싶다고 보채기도 뭣했다. 집 소파에 몸 폭 묻고는 영화나 진창 봤다. 그때부터 생긴 버릇일 테다. 남연우 집에 놀러 가도 은비랑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주머니랑 셋이서 거실에 앉아서 뽀로로 같이 봤다.

―연우 중학교 어디 가는데요?

―예원학교 보내려고. 제희도 거기 준비하고 있지?

―네에.

―그러면 고등학교도 같은 곳 가겠네?

남연우가 갑작스럽게 틀어버린 궤도의 종착은 서제희랑 비슷한 방향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사실 하나로 안심하는 것 같았다. 연우 좀 잘 부탁한다면서 아주머니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은비는 티비 보다 말고, 가끔 뽀로로 성대모사 해 달라고 졸랐다. 비슷하게 따라 해주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자꾸 웃었다. 그러고 있으면 레슨 끝난 남연우가 쪼르르 다 모인 곳에 나와 왜 자기 없이 재밌게 노냐며 막 투덜거렸다. 제히야, 나 너랑 놀래, 피아노 말고…. 서제희는 대답은 않고 손끝으로 남연우 입술 위로 밀어 올려 어느 이가 빠졌는지 봤다. 제히야, 모해애. 위쪽 송곳니 자리가 비어있었다. 여전히 새는 발음이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 될 일은 없겠구나. 전공별로 반이 갈렸다. 무용은 특히 성비가 파괴된 지 오래였다. 지독한 여초. 남자애들은 한 손에 꼽았다. 같은 성별끼리 어쩔 수 없이 똘똘 뭉쳐 다녔다. 서제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반장 도맡아서 고고한 아가씨들 수발들었다. 여자애들이 키가 좀 더 컸고, 몇 없는 남자애들 애 취급이 심했다. 제희야 나 물 떠다주라. 제희야 나 토슈즈 끈 묶는 방법 좀 갈쳐주라, 저번에 너가 묶어준 거 단단해서 배우고 싶은데. 제희, 토마토 먹을래? 아 해봐, 아. 제희 피부 왤케 좋앙, 완전 애기 피부. 선크림 뭐 써? 제희야, 나 안마 좀 해주면 안 돼? 햄스트링 존나 뭉쳤는데에. 사정도 모르고 중학교 일학년 남연우는 여자애들 많아서 부럽다고 했다. 너네 반엔 없어? 아니이, 있는데. 그럼? 너네 과 여자애들이 젤 이뻐. 음, 우리 반 여자애들은 손이 이뻐. 그러면 우리 반 자주 놀러 오던가. 그럴까? 남연우 행동력 하나는 빨랐다. 그날부터 하나 있는 무용과 반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자기네들이 세상에서 제일 고고한 줄 아는, 외부인 출입하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 굉장히 폐쇄적인 집단에. 핑계는 서제희를 댔다. 제히 보러 왔는데. 그러면서 눈 접어 사람 좋은 웃음 살살 치면 날 잔뜩 서있는 여자애들 마음 쉽게 허물어지곤 했다.

여기서 발견한 남연우의 두 번째 재능. 사람 잘 꼬신다. 그걸 서제희는 중학교 들어와서야 알았다. 남연우 반은 1반, 서제희 반은 9반. 번거롭게 매번 끝 반에 놀러 와 남연우 딴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애 책상에 걸터앉아서 무용과 여자애들이랑 곧잘 수다 떨었다. 목에 빳빳하게 힘주고 시끄럽다고 그쪽 무리 흘기던 혜진이까지 어느새 둘러앉아 입 가리고 꺄르륵 웃어댔다. 조곤조곤, 정작 남연우는 별말 안 하는데도 그랬다. 걔는 명예 9반이었다. 괜히 가장 친한 친구 뺏긴 기분에 입술 조금 삐죽.

―제히야, 점심 안 먹어?

―다음 교시에 연습 있어서.

기분 괜히 언짢아서 조금 꼬장부린 것도 진실, 다만 다음 교시에 연습 있는 것도 진실. 뛰기 전에 위장 가득 찬 느낌 싫어서 안 먹었다. 이 반에서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래? 그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애 하나 잡아서 같이 점심 먹자며 홀연히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는 오늘 급식에서 나온 거라며 끝나고 먹으라고 포장된 냉동 파인애플 하나 제 책상에 두고 갔다.

그해 봄에 남연우는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럴 때마다 서제희는 조금 외로워졌다. 남연우가 피아노 입시 때문에 바빠서 조금 소홀했던, 딱 그만큼만. 남연우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우주처럼 팽창하는데, 서제희는 여즉 좁았다. 앞으로도 남연우에겐 피아노나 음악만큼 소중해 마지않는 거 많이 생길 테고, 서제희는 그 모든 것에서 항상 일순위 차지할 자신같은 건 없었다. 그저 냉동 파인애플 하나 신경 써서 챙겨줄 정도의. 딱 그 정도의. 그럴 때마다 괜히 제 마음 통제가 잘 안돼서 남연우에게 조금 틱틱댔던 것도 이제는 옛날의 일이다.

자기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남연우는 연애 중에는 조잘조잘 여자친구 얘길 자주 했다. 별 시답잖고 사소한 얘길 걔가 하는 말이라고 열심히 들었다. 주로 걔가 왜 좋은지, 오늘은 걔랑 뭐 했는지.

―제히도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어. 더블데이트도 해보고 싶은뎅.

버킷리스트 하나 종알거리면서 말하는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럴 계획은 없어 그냥 부스스 웃었다. 언젠가 할 기회가 있겠지, 그런 식으로 둘러대면서. 그러다 갑자기 눈 내리깔고 주뼛주뼛. 어떤 대단한 말 하려고 저렇게 뜸 들이나.

―곧 백일인데 뽀뽀는 해도 되나….

너무 빨라? 적당해? 서제희한테 물어봤자 알 턱 없었다. 아무리 애늙은이여도 스킨십 경험은 전무한 그저 중학교 일학년이다. 하고 싶으면 해. 도움 될만한 조언도 줄 수 없었다. 그때부터 왼쪽 손목에 걸어둔 시계나 힐끔댄다. 남연우가 허물어졌던 몸 다시 바싹 당겨 고쳐 앉는다. 그리고 여친과 스킨십을 할 만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기 시작한다. 만약에, 있잖아…. 서제희 쪽으로 완전히 몸 쭉 기대서 여즉 종알종알. 남연우 머릿속 상상의 나래를 듣는다. 영화관 골목에서, 그 여자애 데려다주는 골목 어귀에서,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서. 상상 속 남연우는 이미 뽀뽀 백 번쯤 했다. 그러니 적당히 흘려 넘긴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남연우 입술 주름이나 관찰한다. 가끔 웃을 때 드러나는 이 끝을 본다. 맞닿는 살에서 끈적이는 땀이 자꾸만 밴다.

―제히야, 듣고 있어?

요즘 왜 내 말 잘 안 들어줘. 장난스레 비죽 튀어나온 남연우 입술 보다가, 시선 올려 깜빡거리는 눈 마주한다. 그늘진 남연우 속눈썹이 빠르게 팔랑댄다. 왜 잘 안 듣냐니. 그냥 듣기 싫어서. 빈손으로 남연우 뺨 가볍게 쥐었다. 엄지로 걔 입술 꾹 눌렀다. 제 엄지 위에 제 입술 꾹 맞붙이고 하나, 둘 셋…. 삼 초 후에 떼곤.

―이렇게 하면 되는 거 아냐?

―제히야, 완전 영화 같아.

할 말이 없었다. 걔 피아노 레슨 기다리면서 본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 맞아서.

남연우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여자애들 만나고 헤어지고 반복했다. 사귀는 계기만큼이나 헤어지는 계기도 별거 아니었다. 적어도 서제희에게는 그랬다. 까닭 모르게 자꾸만 마음이 무너졌다. 이유 없이 자꾸만 가슴이 답답했다. 스스로 짜증이 늘었다. 제 것일 감정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게 우습다. 아니, 결코 이유 모르진 않지만 덮어두고 굳이 들춰보고 싶지 않았다. 평생 몰라도 될 것이었다. 머리가 커 갈수록 티 내는 법보다는 그 사이에서 균형 잡으며 평정 찾는 법이나 늘었다. 졸업 공연 준비해야 할 때 즈음, 남연우 권유로 인생 첫 여자친구도 만들었다. 적당히 예뻤고, 적당히 착했다. 친구가 품 들여 소개해준 여자애라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귀는 내내 미안했다. 졸업 공연 준비에 예고 입시 시즌이라 심적인 여유도 없었으면서 마음 깎아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그 여자애 내줄 방 한 켠 만들었다. 못해도 이 주에 한 번은 데이트, 등하교는 웬만하면 같이. 모범생이 수학의 정석 풀듯 스텝 차근차근 밟았다. 손도 잡고, 깍지도 끼고, 껴안기도 하고, 뽀뽀도 하고. 매일 연락은 집중해서 한 시간 정도, 전화 통화도 잠깐. 가끔 분위기 무르익으면 영화 대사도 따라 해봤다. 지루하고 진부하다, 근데 그 애는 귀 끝 빨개져 어쩔 줄 몰랐다. 종종 남연우랑 걔 여자친구랑 더블데이트도 했다. 버킷리스트 하나 달성했다며 히죽 웃는 얼굴에 괜히 배알이 꼬였다. 연애는 오래 했다. 걔는 착해서 헤어지자고 말 못했고 서제희는 딱히 헤어지자고 말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그게 서제희의 책임감이었다. 좋든 싫든 한번 시작하기로 한 이상 먼저 놓지 않는 거.

서울예고에 붙었다. 이 중학교 나온 애들 대부분은 서울예고를 갔다. 그래서일까 남연우도, 서제희도, 서로의 진로에 대해 제대로 얘기한 적 별로 없었다. 남연우 여친 얘기라면 모를까. 둘 다 취미로 다녔던 학원이 진로가 된 케이스다. 그냥 막연히 관련 일 하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만 있는 중학생. 아니, 남연우는 종종 말하긴 했다. 나 근데 요즘 피아노 말고, 노래 부르는 것도 관심 생겼는데. 대학은 실음과로 가볼까 봐. 근데 나 이거 부모님 한테도 말해봤는데, 목 쓰는건 안 했으면 좋겠다고 자꾸 그러셔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너가 잘 말해주면 안 돼? 이런 말들.

―잘 말씀드려 볼게.

―우리 아빠는 너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둘만 있을 때 몸에 힘 죄 빼고 편안하게 쭉 기대는 건 남연우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제히야, 살 좀 찌워. 기대기 불편해. 그렇게 말하는 남연우도 진배없이 말랐다. 헛웃음이 났다. 맞닿은 부분이 자꾸만 땀으로 끈적해졌다.

―아 맞다, 헤어졌다며.

그렇게 운 떼는 서제희 근황을 궁금해하는 말들. 그렇게 됐어. 언제 헤어졌어? 일주일 전쯤. 헐, 사이 좋았잖아… 왜? 그냥. 유학 간다더라. 롱디는 오반가. 오바지, 군대보다 길어.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 그렇게 대답하니 남연우 눈이 놀란 듯 깜빡거렸다. 그리고 입 조금 비죽. 나는 너 그런 줄 전혀 몰랐네.

―너는 너무 자기 얘기 안 해.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는데. 누가 맘에 들고 누구랑 썸 타는지도 다 말하는데. 헤어졌다는 것도 말 안 해주고.

―좋은 이야긴 아니잖아.

―그래두. 나는 알아야지.

제히는 나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나만 맨날 매달리구, 어쩌구 저쩌구. 일부러 들으라고 종알거리는 소리에 어이가 좀 없었다.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바뀐 것, 학교가 바뀌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남연우나 서제희나 맡겨둔 키 되찾은 듯 훌쩍 컸다. 그 외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학교가 바뀌어도 보던 얼굴은 여즉 그대로인 청담 썩은물 판이었다. 남연우는 썩은물 판이 질린 건지, 부모님하고 요즘 자주 다퉈 사람 관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지, 오랫동안 연애를 쉬었다. 늘 챙기던 네뷸라이저 대신 이어폰을 주머니에 갖고 다녔다. 희소식이었다. 다만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대신 자주 서제희를 찾아와서 칭얼댔다. 그 빈도가 점점 늘었다. 진로 문제였다. 부모님하고의 의견 차 좁히지 못한 날이면 가장 친한 친구 곁에 와서 끓는 감정 섧게 한바탕 쏟아내고 다시 잠잠해졌다. 가만히 토해내는 얘기 듣다가 머리 끌어안고 등줄기 토닥거렸다. 그제서야 서제희의 마음도 덩달아 잠잠해졌다. 그제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게 비정상이란 걸 누구보다 서제희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머리로 알기만 했다.

―나는 진짜 제희 뿐이야.

빈말이라도 나쁘지 않은 울림이었다.

제히야. 너 담배 피워? 학교 끝나고 같이 집 가다가 일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남연우가 동그란 토끼 눈 하고 물었다. 갑자기 웬 담배, 제 셔츠 소매에 코 묻으니 진짜로 텁텁한 냄새가 났다. 억울하게 항변하려다 그냥 꾹 다문 조개 입 됐다. 피우냐니까. 절레절레. 냄새 뭐야…? 말보다 행동. 남연우는 손 당겨 가져가서 손바닥에 고개 묻고 킁킁댔다. 손바닥에 간지러운 숨결 닿자 고개 살짝 떨궜다. 그제야 손 놓아주고는 가방에서 파란색 스너글 꺼내 구마하듯 칙칙 뿌려댔다.

―그렇게 냄새 많이 나…?

―그 정도는 아니긴 한데.

똥군기 많기로 유명한 무용이라 서제희도 어쩔 도리 없었다. 같은 학년 여자애들은 심하게 갈구고, 남자애들은 자기네들 트로피마냥 썼다. 자꾸 담배 피는데 곁에 서 있으라고 하는 거. 그런 것들. 싫다고 반항 한번 해본 적 없었다. 병폐를 끊어낼 의지는 없었지만 동기들한테 피해는 안 갔음 했다. 그냥 지수누나 식후땡 따라간거야. 그 누나는 맨날 왜 그러나 몰라.

간만에 학원 없는 날 둘 다 별다른 약속 있는 거 아니면 서로의 집에 놀러 가서 진득하게 놀았다. 머리 크고 나서 달라진 점 하나, 부모님과 은비 자주 있는 남연우 집보다는 텅텅 빈 서제희 집에 자주 갔다. 열일곱은 어른 없는 빈집이 한참 좋을 나이였다. 오면서 사온 아이스크림 분홍색 수저로 양껏 퍼먹고, 저번에 하다 만 게임 이어서 했다. 하다가 질리면 넓은 침대에서 한껏 뒹굴거리다가 그것도 질리면 영화나 드라마 틀었다. 서제희 방 티비는 남연우 넷플릭스 계정이 연결되어 있었다. 오징어게임 본다고 몰래 엄마 폰인증 받아온 성인가 계정.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은 왜 죄다 청불인지. 넋놓고 보고 있으면 꼭 씬 한번씩 나왔다. 그럴 때 춘식이 얼굴 쿠션 하나씩 껴안고 주뼛대면 곧 지나가곤 했다. 가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한 여자 복수극 보려다가 웬 애먼 씬만 몇 분째 이어져 둘 다 눈 둘 곳 찾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서제희 방은 채광이 꽤 좋은 편이라 해 지는 모습이 예뻤다. 그래서 커튼을 자주 젖혀뒀다. 새빨간 노을이 방 안으로 길게 졌다. 지는 해 곧이곧대로 맞아서 얼굴이 빨간 것인지, 그냥 민망한 상황에 둘 다 열 오른 것인지. 서라운드로 들리는 여자 교성보다 서로의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정도 거리에 있었다. 살금살금. 손끝이 얽혔다.

―제희야, 너 예전에 나한테 뽀뽀한 적 있잖아.

넌 그걸 뽀뽀라고 할 수 있냐고 억울하게 항변하려다, 쪽. 입술이 닿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거지. 먼저 저지르고 무구한 척 눈 깜빡이며 묻는다.

―나도 해도 돼?

―하지 말라구 하면 안 하려구.

된다는 대답이 뭐 그리 길어. 대답 듣더니 남연우는 양쪽 눈 찡긋 눈 접어 웃고 사르르 눈 감았다.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았다. 그게 참 예뻐서 오랫동안 보느라 입술 맞붙은 후에도 눈 늦게 감았다. 쪽, 쪽. 입맞춤 반복될수록 한쪽으로 몸 슬그머니 기울었다. 기우는 거 손으로 받쳐가며 서로 입술 감쳐물고 진득하게 혀 섞었다. 둘 다 고삐리라 그런 경험 전무해 몸짓이 전부 서툴렀다. 남연우는 여자친구랑 이런 거 해본 적 있을까, 난 없는데. 그런 생각 하며 방황하던 손 걔 뒤통수에 두고 살살 쓸었다.

한번 붙은 불씨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였고, 하나, 둘, 순서 밟을수록 다른 미지가 궁금했고, 하면 할수록 괜히 뱃속만 간질거리고…. 학원을 자주 빼먹었다. 남연우는 대학 좋은 곳 가게 해달라며 기복신앙 때문에 꾸준하게 토요일마다 나가던 성당도 그만뒀다. 빼먹는 날이면 빈 서제희 집 가서 방문 걸어 잠그고 입부터 맞췄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방문 잠깐 닫는 그 틈새에 계속 등이 벽에 부딪혔다. 가벼운 뽀뽀에서 고개 꺾어가며 하는 진득한 입맞춤으로, 그 뒤에는 슬그머니 허리께로 손 내리다 손장난으로. 불은 멈출 줄 모르고 옮겨붙었다. 학교에서도 바쁘고 없는 시간 쪼개서 찰싹 붙어 다녔다. 점심시간마다 선배들이 불러도 전부 씹었다. 그 시간에 4층 음악실 하나 통으로 빌려서 피아노 치는 남연우 구경했다. 쳐달라는 거 다 쳐줬다. 유명한 뉴에이지부터 처음 들어본 멜로디까지. 모르는 멜로디 제목 뭐냐고 짚어서 물어보면 자기가 쓴 거라며 비시시 웃었다. 피아노 뚜껑에 몸 기대서 구경하다가, 종내에는 옆에 붙어 앉아 쓰지 않는 손 당겨가 새끼손가락 얽었다. 남들이 보면 꼭 연탄곡이라도 치는 모양새로 보이게. 그런 나날들이 길었다.

무용과 반 분위기는 흉흉했다. 별거 아닌 걸로 매일같이 트집 잡고 불러서 갈궜다.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이런 걸로도. 지수누나 존나 빡쳤어. 왜. 너가 자꾸 말 씹어서. 그러니까 왜? 일학년 군기 존나 개판이라고…. 아니, 그걸 묻는게 아니잖아. 그 누나가 너 좋아하잖아. 뭐? 몰랐어? 점심시간마다 자기들 담배 피는 곳에 세워두고 수업 종 칠 때까지 줄담배 피는 게 날 좋아해서라고? 야… 제희야, 좀 숙여주라. 응? 반 친구는 팔 잡으면서 어떻게 좀 안되냐고 보챘고 끝까지 걔가 원하는 대답은 안 줬다.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 꺼내면서 청소 당번일 애 어깨 톡톡 두드렸다. 채지수가 한바탕 엎어두고 간 교실은 꼴이 엉망이었다.

―내가 할게. 혁아, 먼저 가.

끝날 시간 됐는데도 안 나오자 남연우는 무용과 반 찾아와서 서제희 청소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나마 멀쩡하게 깨끗한 책상에 앉아서 인스타그램 하다가, 수면이 늘 부족한 한국 고등학생답게 스르르 상체 허물어져서 청소 다 끝내고 힐긋 보니 팔 베고 색색 자고 있었다. 고요한 교실 속 남연우 숨소리랑 아날로그 시계 초침 째깍이는 소리 딱 그거 두 개만 났다. 그런 고요함 아니었으면 남연우는 잠들지도 않았겠지만. 햇빛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자리였다. 아무도 없길래 눌리지 않은 뺨에 제 입술 꾹 눌렀다. 커튼 안 닫고 옆자리에 굳이 앉아 손차양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제희야.

―네, 선배.

―누나라고 부르랬잖아.

―네.

―그만 개겨라.

―죄송해요.

―너 게이야?

―네?

빨리 집 가고 싶은데, 신발장에서 운동화 앞코로 운동장 바닥에 낙서하면서 자신 기다릴 남연우 생각이나 했다. 불러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까딱까딱. 채지수 꼰 다리 끝에 달랑거리며 걸려있는 슬리퍼나 봤다.

―나 지금 호모 새끼한테 매달리냐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선배.

―혁아, 니가 그랬잖아.

그러더니 어제 청소 당번이 슬그머니 곁에 와서 핸드폰 액정 코앞에 들이민다. 손차양해주는 사진, 도둑뽀뽀 하는 사진, 그런 것들. 하루 이틀도 아닌 게 명백하게 누가 봐도 서제희랑 남연우다. 아니라며 잡아떼기엔 화질이 너무 좋았다. 침묵했다. 긍정이 되어 가닿는다.

―게이 아니에요.

서제희는 이성이 끊어질 것 같았다. 남자 안 좋아해요. 열일곱 소년의 순진한 생각으로 음침하게 자기 따라다니는 사람 있는 줄도 몰랐다. 오른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향후 사회에 나가서 둘 다 게이 새끼 꼬리표 붙는 게 더 손해일까, 그냥 혼자 학폭범 되는게 더 손해일까. 이걸 뭘 재고 있지. 판단은 빠르게 섰다. 적어도 남연우한테는 피해 안 가게 해야지. 간단한 결론이다. 왼손 말아쥐고 남자애 콧대 갈겼다. 핸드폰 떨어지자 그거 낚아채 주머니에 쏙 넣었다. 콧대, 인중, 그런 곳만 집요하게 반복해서 쳤다. 코피는 쉽게 터졌다. 손등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피가 주르륵 흘렀다. 검지께에 힘주고 걔 앞니 한 번 치자 입 감싸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채지수는 미쳤냐며 옆에서 옷 잡아당기며 소리를 꽥 질렀지만 차마 여자를 때릴 순 없었다. 옆으로 슬 밀자 혼자 엉덩방아 쿵 찧곤 넋 나간 채로 있길래 신경껐다.

―제히야, 왤케 전화 안 받….

남연우는 들어오면서 토끼눈 되어 눈 도르륵 굴렸다. 서제희가 패고 있다는 결론 나오자 일단 바깥 문 걸어 잠근다. 안쪽 방음용 두꺼운 문도 밀어 닫았다. 곧 복도는 다시 고요해졌다.

―왜 그러고 있어.

할 말 없어 침묵.

―말 좀 해봐.

남연우가 재촉하자 넋 놓고 앉아있던 채지수가 꽥 소리 질렀다. 진짜, 씨발, 눈물겨운 게이새끼 사랑이다…. 스피드웨건도 이렇게 한 줄 요약 못 할 텐데. 서제희는 제 마음이 타인에 의해 난자당하는 꼴을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는 걸까. 좋았던 날은 짧았고 제가 주도해야 할 인생은 자꾸만 타인에 의해 흔들거렸다. 그리곤 암전. 기절일랑 한 건 아니다. 뒤에서 남연우가 손으로 눈 덮어 가렸다. 그리고 귓가에 속닥속닥. 너 눈 돌았어…. 아냐, 연우야. 나 지금 완전 이성적이야. 제정신인 사람은 그런 말 안 해. 연우야, 미안한데 먼저 가면 안 돼? 서제희가 원하는 대답은 안 주고 그저 숨 고르라고만 하고, 여즉 눈 가린 손 치워주지도 않은 채.

―너 손등에 피나.

―내 피 아냐.

―너 피 맞아.

눈 덮은 손 살그머니 치워주고, 왼손 꼼지락거리며 당겨가 서제희 검지에 끼워진 피갑칠된 얇은 링 슬 빼갔다. 그리곤 자기 주머니에 쏙. 제희야, 이건 내가 버릴게. 그리곤 더럽게 피 묻은 손등 따뜻하게 감싸 쥐기나 한다. 그제야 감각 돌아온 듯 닿은 부위가 쓰렸다.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잘 얘기해볼게. 보건실 가서 약 좀 바르고 있어.

그리곤 서제희 몸 쭉 밀어서 음악실 밖으로 내쫓았다. 그렇게 남연우를 둬선 안됐다. 서제희 인생은 아무것도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남연우마저도.

 남연우는 동급생이랑 선배 물리적으로 팬 죄로 학폭위에 회부되었다. 선배는 패지도 않았는데, 정신적으로 피해 잔뜩 입었다고 생난리를 쳤다. 남연우가 그럴 리 없다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걔가 사람을 코뼈 내려앉을 때 까지 팰 리가 없어요. 그것도 연고 없는 무용과 선배를. 진짜 착해요. 오히려 그 선배들이 무용과 후배들 괴롭히고 다닌 건 모르셨어요? 반 애들 여론이 어떻게 되었든 어른들의 사정으로 학폭위는 조용히 열렸다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강제 퇴학은 불명예스러우니 남연우가 조용히 자퇴하는 걸로 합의 보기로. 폭행 수위에 비해 처벌이 너무 센 거 아니냐고 말 많았지만 풍기문란 전부 지워내고 저렇게 한 줄 간단하게 판결 나오기까지 그 애 부모님이 어떤 말을 들었을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남연우는 독일로 갔다.

 

다시 현재, 서제희는 여즉 꿀먹은 벙어리였다. 일부러 정지 화면으로 둔 것처럼. 미동도 않았다. 묻고 싶은 거 많았지만 서제희도 할 말 많을 걸 알기에 가만 기다렸다.

남연우도 머릿속으로 할 말 고르고 골랐다. 잘 지냈어? 난 너랑 연락했던 그대로, 막 졸업장 따고 들어왔어. 이제 해외는 지긋지긋해, 다신 안 나가려고.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나가기 전에는 네가 키 조금 더 컸는데, 이제는 내가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그런 상투적인 말 뒤에는, 서운했던 묵은 마음들 하나씩. 어떻게 꺼내야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그런 남연우다운 생각 하다가, 아니, 쟤는 잠수 잔뜩 타서 내 마음 전부 긁어놓고 난 왜 쟤 상처 주면 안 되냐. 나쁜 마음도 조금 삐죽, 서제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제 마음속 말들도 제법 소란스러워지고. 십 분쯤 지나서, 남연우 인내심 전부 닳아갈 때쯤 작은 목소리 툭.

“내가 널 어떻게 보고 싶다고 해.”

…감히. 감히, 이게 서제희 입에서 나온 단어가 맞나. 뭐라고 더 우물거리던 서제희는 제 손목 답삭 잡고 호텔 안으로 끌었다. 밖에 사람 있을까 봐. 안색이 하얗게 떠 있다. 순순히 끌려가 걔가 묵는 객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다시 다리 꼬고 까닥거린다. 하던 말 계속 해줘. 듣고 싶다.

“잘 못 지냈어.”

이런 얘기 듣고 싶었던 거면서. 잘 못 지냈어, 별 재밌는 얘기 없어. 너네 집에는 그 뒤로 안 갔어. 죄송해서. 하던 전공은… 그냥 너랑 영화 보던 거 생각나서 그쪽으로 갔고. 운 좋게 사랑 많이 받았어. 연락 일부러 씹었던 거 아냐, 미안. 몸이 안 좋아서.

서제희는 꼭 자기가 연기하는 배역 같은 표정을 했다. 딱 그 정도의 얼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 표정.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떠나기 전에도, 떠난 후에도. 꾸준히 스크린에 비춰줬던 얼굴. 너무 남연우에게 익숙해 되레 알아채지 못했던 것. 서제희는 한국 뜨기 전이랑 여즉 같았다. 알아채자 터지듯 웃었다.

“갑자기 왜 팔자에도 없는 배우 했나 했더니….”

서제희는 나 보라고 연기하고, 그거 숨길 생각도 없고, 저 생각하면서 한 연기로 상 타는 날에도 괘씸하게 나한테 연락 한번 안 주고. 또 비슷한 영화 찍어서 내가 볼 때까지 바다 넘어 멀리멀리 흘러가라고 하고. 그렇게 표정으로만 말하면 누가 알아. 말은 한마디도 안 하면서.

“만나는 사람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서제희 손 눈으로 훑었다. 칠 년 전, 별 이유도 없이 끼던 반지 자리조차 비어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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