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me more.

캠게 냠힝

Love me more.

남연우 서제희

 

 

―제희가 나를 제일 잘 아는 것 같아, 애인도 아닌데 꼭 애인 같애.

모든 노력에 상응하는 보답이 항상 따르는 것은 아니다. 가령 사람의 마음 같은 것들. 서제희는 부단히 노력했으나 오랜 짝사랑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 이상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는다. 잘 될 가능성 하나 없다는 걸 사랑의 초장부터 알고 있었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칼처럼 잘리는 게 아니어서,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이며 고인 마음 버려내지 못한 게 올해까지 햇수로 삼 년이었다.

―연우야, 그런 말로는 장난치지 마….

오랜 짝사랑으로 비틀리고 꼬인 마음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샜다. 네가 가장 알아주길 바랐으나 평생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형편없이 흘러나왔다. 끝끝내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으나, 남연우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걘 원래 눈치가 좀 빨라서. 희망 없는 마음에 매달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제 마음에서 그 애를 긁어낼 때다. 더 이상 남연우에게 마음 저당 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그만두고 싶었다.

졸업식 이후 남연우와의 연락을 끊었다. (사실 서제희가 먼저 끊었다기에는 어폐가 좀 있지만.) 정확히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서제희로서는 고백도 하기 전에 차인 셈이다. 붙어 다녔던 삼 년의 세월은 이렇게나 부질없고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 오랜 기간에 의미를 붙이고 자라나는 마음 짓눌렀던 것은 서제희 혼자라는 사실도 이렇게나 새삼스럽다. 고백하지 않든, 하든, 이렇게 결과가 비참할 거라면 그냥 전해볼 걸 그랬나. 이런 가정은 의미 없는 법이다. 한 학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휴학계를 냈다. 같은 과 아님에도 염증 날 정도로 걔 얘기가 자주 들렸다. 오늘 술 마시러 갈 사람, 경영도 같이 간대. 걔 와? 아, 그… 남연우? 사소하게는 경영 이공 간판이라는 소리부터, 남연우가 술자리에 낀다고만 하면 학부가 시끄러웠고, 누구랑 썸을 타는지, 과팅은 누구랑 하는지…. 그 애의 모든 행적이 화려한 소문이 되어 돌아다녔다. 서제희는 그걸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특히, 누구랑 잘 되어간다는 그런 소식들. 그래서 해외로 도피할 궁리를 했다. 세계지도를 펼치니 졸업하면 둘이서 여행 가자고 했던 나라만 빼곡했다. 그중 아무 곳이나 찍었다. 무작정 떠났다. 가기 전에, 간다고 걔한테 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처음엔 여행으로, 비자가 끝나가자 그 뒤에는 더 머무를 명분 없어 유학으로. 서제희 인생에 두 번은 없을 길고 긴 일탈이었다.

 

남연우, 네. 교수님이 호명한 익숙한 이름 석 자, 그리고 삼 년이 지나도 잊히지도 않는 목소리. 서제희가 남연우를 알아본 것처럼 남연우도 그랬을 것이다. 길고 긴 오티가 끝나고 뒤를 돌아보니 찾던 얼굴은 없었다. 인사도 하기 싫은가…. 그래도 오랜만이라고 인사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너랑 친구는 하고 싶어서 다시 돌아왔는데.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죽여버렸다고 생각한 마음이 목소리 하나 듣자마자 다시 뾰족하게 튀어나와 찔러대는 것 보니 아무래도 삼 년은 많이 모자란 시간이었나보다. 사람 다 빠져나간 빈 강의실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형 오늘 올 거죠?

카톡. 누군가 봤더니 하진이였다. 지금 정외 학회장. 붙임성 좋은 애. 일 학년 하기에는 우스운 학번인 자신을 이리저리 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애. 학기 시작하기 전부터 제게 계속 치대서 몇 번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안면 정도는 있는 애. 솔직히 자신은 그런 술자리에 낄 군번도 아니고,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선뜻 거절하긴 어려운 자리였다.

 

응 몇 시 어딘데?

나 근데 꼭 가야 해?

고양이가 울상짓는 이모티콘도 하나 꾹.

 

ㅋㅋ이참에 친구 좀 만드세여 형

근데 형은 술자리 안 나와도 친구는 만ㅎㅎ이 생길 듯...

무튼

친구 많으면 좋잖아여

근데 다른 과 애들이랑 형도 있는데 괜찮져?

다들 착함ㅋㅋ 형 안괴롭힐 듯

 

보내준 지도 링크 보면서 이리저리 길 좀 헤매다가. 문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익숙한 채하진 얼굴보다 더 먼저 시야에 잡히는 얼굴이 있다.

“오랜만이네.”

“…으응, 안녕.”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촐랑대는 하진의 물음에 대답 고르다가 그냥 슬 웃었다. 고작 아는 사이. 딱 지금 사이가 그렇지. 친구라고 하기도 뭣한 사이 아닌가. 남연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오랜만에 본 얼굴은 제가 기억하는 얼굴 그대로였다.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 속의 얼굴에서 조금 남은 젖살마저 전부 빠지고, 성장보다는 성숙해졌다는 표현이 제법 어울릴 정도의 미묘한 변화. 곁눈질로 살펴본 남연우의 표정이 미묘했다. 입꼬리 말아 올려 웃고 있다가, 조금은 오묘해진…. 무슨 생각 하는지 가늠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럴 이유도 이젠 없는데. 이왕이면 빠져나가기 쉬운 끝자리에 앉았는데 그게 또 남연우 맞은편 자리였다. 비는 족족 다시 차는 잔만 말없이 받아마셨다. 주위는 신경을 긁을 정도로 시끄러운데 둘 사이만 지나치게 고요했다. 누구 하나 시선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먼저 말 걸려고 하지도 않았고. 서제희야 아무리 저 싫어하는 거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자기 피하는 친구한테 굳이 말 걸 이유는 못 찾았다. 

“둘이 왤케 어색해여. 아는 사이라며?”

“내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

“형이야 그렇다 치구, 연우 형 오늘따라 텐션 엄청 낮네.”

저 형이 원래 저런 형이 아니거든요. 알져? 혀엉, 어디 아파여? 채하진은 남연우 옆에서 걔 콕콕 찔러대다, 별 반응 없자 제 옆으로 자리 옮겨서 또 조잘대기나 하고. 근데 형이랑 학번 같겠다. 연우 형 올해가 막학년이에요. 군대 안 갔거든요. 뭐랬더라, 조부모님이 국가유공자랬나…. 이미 다 아는 사실들이 타인의 입을 빌려 쏟아져나온다. 그 뒤에는 자신이 모르는 남연우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관심 안 가지기로 다짐한 게 무색하게도, 이상한 부분에서 자꾸만 속이 긁힌다. 그래서 한 잔 더. 그저 옆에 있는 채하진 얼굴 보며 가만히 고개 끄덕였다. 고개 똑바로 돌리면 남연우 술 마시는 모습이나 시야각에 잡힐 테니까. 그러다가 눈 마주치면 대놓고 표정이나 굳고. 그게 괜스레 싫어서는. 조금 더 잔 받아서 마시다가, 테이블 옮겨서 인사도 좀 하고. 연락처랑 인스타 아이디 교환도 하고. 여기저기서 말아주는 거 한 잔. 게임 하다 걸려서 한 잔. 자꾸 나 몰아줘서 한 잔 더. 내가 흑기사 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다시 한 잔…. 후, 숨 한 번 뱉으니 알코올 냄새가 훅 났다. 장난 없이 먹이네. 다시 돌아와서도 앞자리에 남연우 목석처럼 굳어 있길래. 이쯤 되면 슬 빠질까 해서 핸드폰 메모장 앱 켜서 토도독. 가볍게 두드리고는,

나 이제 갈게 편하게 마셔

남연우 눈앞에 한 번 들이민다. 깜빡. 걔 눈꺼풀이 느리게 닫혔다 열린다. 제대로 보긴 본 거지. 걔 눈앞에 손 몇 번 휘적거린다. 너무 주는 대로 받아마셨나, 겉옷 챙겨서 나가려는 행동이 굼떴다. 가끔 남연우랑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하긴 했는데, 오늘처럼은 아니었는데. 이것보다는 할 말도 많았던 것 같은데. 아니, 사실 난 많은데. 남연우가 별로 나랑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 있던 남연우 폰이 반짝 켜졌다. ♥민영♥ 하트 잔뜩 붙여서 양쪽을 화려하게 꾸민 이름이 얼른 받으라는 듯 웅웅댄다. 아, 하필 왜 이런 상황에만 눈이 마주치는지. 왜 그 순간 스스로가 이물질이 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는지. 너무나도 답이 자명한 질문에 헛웃음이 샜다. 가만히 외투 집어 팔 느릿하게 꿰었다. 누구의 탓도 아닐 관계의 단절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나 먼저 가볼게.”

한창 흥겨운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 채하진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더 있다가 가라며 예의상으로 한 번 잡는 거 외에는 별 제지 없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며 가벼운 인사 한번 하고. 나오면서 머릿속으로 햇수를 셌다. 사학년이면 학교도 별로 올 일 없겠지. 겹치는 수업도 거의 없겠고, 일 년만 안 마주치면….  나는 도대체 이런 걸 왜 세고 있는 거지…. 정수리까지 술이 오른 기분이었다. 잡념이든, 술이든, 털어내려 제 머리 스스로 마구 헤집었다. 차가운 초봄 바람이 뒷덜미 스산하게 훑었다.

갑자기 뒤에서 불쑥 끼어든 따뜻한 손이 비어있는 제 손목 가볍게 잡았다. 적당한 무게감과 동시에, 등 전체에서 뜨끈한 열감이 느껴진다. 제 어깨에 고개 폭 묻고는 제히야아, 답지 않은 작은 웅얼거림은 덤이다. 아까는 시선 한 번 안 주더니 이건 또 뭐야. 취했어?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목덜미와 어깨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남연우 숨결만 제 피부 간지럽히고. 낯선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제 기억은 고등학교의 조금 더 앳된 남연우가 전부라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취해야만 할 수 있는 얘기도 있다지만, 별로 취한 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는데.

“네가 나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웅…. 대답보다는 리액션에 가까운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아니라면 미안, 앞으로 연락 종종 할게.”

가벼운 사과랑 가벼운 거짓말도 조금. 나는 네 주량도 모르고 주사도 모르고, 네가 내일 이 모든 일을 기억할지도 몰라서 친구 사이에만 할 수 있는 가벼운 말들로 신중히 고르고 골라서.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붙잡힌 손목 떼어내기 싫어서 머뭇대고 있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좀 엉뚱하다. 제히야아. 잔뜩 풀린 발음이 여전히 웅얼웅얼. 내가 모르는 남연우가 자꾸만 마음을 긁어댄다. 성가시게도.

“나 술병 난 거 같애.”

눈 깜빡. 이런 말을 제게 하는 저의를 모르겠어서. 여전히 한쪽 손목 붙잡히고, 등 전부 내어준 채로. 차마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새까만 하늘이나 멀거니 보면서. 하진이 불러줘? 아니이, 제히야아. 

그냥, 하루만 재워줘….

왜 이럴 때 아까 네 액정에서 본 이름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건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상한 싸구려 우월감이나 느끼고 있는 건지. 하, 헛웃음이 샜다. 익숙한 악취가 났다. 오래 썩은 마음에서 기인한 시궁창의 냄새가.

 

제희 형

여누 형이랑 같이 잇어여?

형이 폰 놓고감;

연우가 너무 취해서 내가 데려다줬어

경황이 없어서 연락하는걸 깜박했어 미안

 

아녜여 조심히 들어가세요 형ㅋㅋ

너도 적당히 마시고 조심히 들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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