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單

저 끝의 바닥에까지

닿는 빛도 때로는 존재하는 법이다.

Hanchiching by 한치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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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나아간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체로 진실이나, 사람들은 거짓이라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건 부정할 수도, 뒤집을 수도 없는 진실이리라. 안개가 낀 듯 뿌연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그렇게 사고했다. 변할 수 없는 어두운 부분, 눈을 감으면 더욱 훌쩍 와닿아 버리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고.

여자의 삶은 철도 길과도 같았다. 한 방향을 향해 이리저리 꼬여 나갔다가 뒷걸음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한들 결국엔 종착지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형태의 무언가라고. 여자를 조금이라도 짙게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든 당연하게도 예측할 수 있듯이 그 끝은 죽음이었다. 단야는 그걸 사무치게 잘 알았다. 자신은 살아가기엔 너무 모났고, 또 죽기엔 너무 무르기 짝이 없어서 빙빙, 죽음 주위를 돌고 도는 열차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예측할 수 없는 게 삶의 저주이자 묘미,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축복이지 않겠는가. 하연우, 라는 남자가 여자의 삶에 불쑥 끼어들었다. 멍청하고, 아둔하고, 어리석은 자.

그에 대한 첫인상은 그랬다. 창살 안의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그렇게 크게 다른 것도 아니므로, 홍단야는 난잡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만 절망했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이 그간 닥닥 갉아먹다 내팽개친 남자들보다도 더 물러터지다 못해 악취가 날 것 같은 말이었다.

‘지금 네 복부에 날붙이가 박혔던 걸 기억하고 있으면서 말하는 거지?’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울컥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게워 낼 것 같아 부려 더 몸을 덜덜 떨어대며 제 가여움을 어필했다. 온전한 거짓은 아니니 죄책감은 없다. 자신을 쫓던 이가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이렇게 아둔한 이라면 집에 얹혀살아버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다. 역시나, 빙고. 물 흐르듯 혹은 뱀의 똬리를 틀듯 자리한 하연우의 집은 그와 똑 닮아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세세하게 캐내듯 관찰하여 보지 않아도 안다. 그가 사랑받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게 집 구석구석에서, 고르는 단어와 어휘에서 적나라하게 느껴지니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비루한 가정환경을 가진 이들일수록 자신과 정반대의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자신과 같은 성정을 가진 이들도 물론, 잘 알아본다만. 절실함과 결핍에서 기반한 그 하이에나 같은 눈에는 하연우같은 이들이 가장 먼저 걸려든다. 어여쁘게만, 마냥 곱게만 자라온 이들과 질척하게 엮이면 자신의 시궁창 같은 인생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거든. -물론, 홍단야는 그러한 이들의 곁에 다가가 곱게 쌓아 올려진 견고한 행복을 박살 내는 것에 큰 관심을 두었으나, 그건 결국 그들의 삶에 맞아들어가는 퍼즐처럼 자신이 자리하지 못하리란 자기혐오에서 기반한 파괴적인 행위라 해석해도 무관하다.- 그래서 여자는 금방이라도 하연우를 으스러트릴 것처럼 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역겹다, 죽여버리고 싶다, 짜증 난다…. 온갖 날이 선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하연우로부터 멀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더 엉겅퀴처럼 엮여들려 그랬지. 그로 인해 남자가 고통에 울부짖을지라도.

그러나 남자는 쉬이 망가지질 않아서, 금이 가는가 싶다가도 단단하게 일어서곤 해서…. 어리석은 기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이 남자라면, 이 사람이라면—. 아니, ‘하연우’라면 안온한 삶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다가설 수 있을지 몰라. 그런 안일한 기대에 힘입어 홍단야는 웃었다. 쿠키를 구워 그가 일하는 소방서로 걸음을 옮겨 팔자에 없는 부류의 아양을 떨어댔다.

술집이나, 클럽이나 낯선 숙박업소나 담배 냄새와 술 냄새를 한껏 풍기는 남자 앞이 아닌 데서 눈웃음치며 듣기 좋은 말을 꺼내 놓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는데, 그게 자신이 뱉으면서도 꽤 진심 어린 말이라 그런 자신이 낯설 지경이더라.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이미 이 사람은 곧잘 하는 사람인지라…. 제가 무어라 따로 부탁드릴 게 없네요. 열심히 구웠어요, 맛있게 드세요.”

역겨워. 살가운 목소리와 부드럽게 지어 보이는 눈웃음과 사람 좋게 올라간 제 입꼬리에 느낀 감정은 그랬다. 가식적이야, 나 같지 않아, 위선 떨고 있네…. 자기 자신을 향한 날 선 사고들이 박혀 꽂혔다. 그러나 그러자면 귀신같이 남자는 아이와도 같은 말간 웃음을 띄워 보여 이런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건 홍단야에겐 생존을 위해 퇴화하다 못해 결여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 구석이었으므로, 가히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글러 먹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 중 하나를 뒤틀린 형태에서 도로 돌리다 못해 올곧게 바꾸어놓은 결과를 낳았으니까. 물론, 이는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해서 여전히 홍단야는 -여자의 가치관에 따르면- 글러 먹은 구석으로 가득한 인물이었으나.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조금은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는 걸. 그게 모두 마치 처음 만난 날처럼 난도질과도 같은 언행을 일삼는데도 한결같이 타일러가고, 응원하고, 때로는 따끔한 말도 건네는 남자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그러므로— 그래,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필요로 하고, 갈구하고, 탐하고, 욕망하다 못해 그 끝에 다다라 결국엔 사랑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주어서? 그렇다면 그 누구여도 상관이 없었을까? 애초에 그만큼의 일을 겪고도 홍단야의 곁에 남아줄 이가 얼마나 있을까부터 의문이 들지만….

다른 사람이었으면 무용지물이었으리라. 둘이 나누었던 대화 속의 작은 단어 선택 하나가, 주고받았던 눈길이. 보랏빛이 도는 연푸른 눈동자와 맞닿았던 녹음을 담은 듯한 그 청아한 색에서 엿보았던 그의 올곧음이. 같이 마주 보고 바보처럼 웃어대었던 순간과 울부짖듯 악을 쓰며 원초적으로 맞닿았던 그 파편들이. 그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순간 중 하나라도 틀어졌으면 홍단야는 변화할 수 없었으리라.

사랑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그 모든 순간에 ‘하연우’를 빼어놓는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이제야 겨우 햇살이 드는 터로 한 발짝 옮긴 홍단야지만, 그 끝에는 찬란한 빛 속에서 그와 함께 부둥켜안고 있으리라 하연우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겠지. 그렇기에 홍단야 또한 잔뜩 난도질당한 발로 걸음을 옮긴다. 온갖 더러운 걸 다 쥐었던 손으로 널 부여잡고,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았던 눈으로 사랑스러운 그를 담아낸다.

사람은 변하니까, 사랑은 변화를 끌어내니까. 하연우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그러므로 여자는 결국 그에 의해 햇살을 본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끝도 없이 비틀거리며 향하던 영양가 없는 도돌이표를 끊어내려 다짐한다. 다시 반복되는 그 길로 돌아갈지라도, 그래. 결국에는 그의 곁으로 가 따스한 품에 꾹, 안기리라. 그의 복부에 남은 자상의 흉터처럼, 홍단야의 가슴엔 하연우가 깊게 박히다 못해 뿌리를 내렸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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