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解魔
리노와 아스트라의 블랙코미디 우주여행
1
53번째 행성에는 생명체가 없었다. 그곳은 대신에 이미 죽은 시체들에 갈 곳 없는 분노를 풀어내는 인공지능 로봇들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리노 트레너와 아스트라는 멸망해가는 별을 두고 54번째 골디락스 존에 위치한 행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문득 리노 트레너는 자신의 불행이 우주까지 따라왔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말이 통하는 지적 생명체가 나타난다면 스스로 전 우주에서 가장 운이 없는 남자라고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운이 없는 편이었다. 녹티스에서의 ‘리노 트레너’ 가 사망할 때까지의 과정은 그 불운 덕에 상당히 험난했다. 단 한 문장으로 그 불운을 설명할 수 있었는데. 평균 수명이 백 년 조금 밑도는 종족 안에서 리노 트레너는 스물 네 살에 죽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죽었지만 소멸하지 않았다. 우주의 법칙이 느닷없이 신이라는 존재에 올라앉아버린 제 친구 덕에 변덕을 부린 건지 혹은 원래 죽은 사람들은 전부 망령이 되어서 우주를 떠도는지는 그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녹티스에서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었으며, 몇 년동안 그가 제 어머니의 무덤에 평안하시냐고 인사를 올려도 돌아오는 대답 또한 없었으니 그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죽음인 셈이었다. 그는 막연히 악인들이 불에 타며 악마에게 고문당하는 지옥이나 하늘 위 풀밭에서 아기 양들이 풀을 뜯고 천사들이 하프를 켜는 천국의 이미지를 떠올렸었으나, 아쉽게도 죽은 후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천국도 지옥도 양도 악마도 아닌 조금 짓궂은 신의 ‘80년 통합 우주여행 패키지’였다.
그리고 재회 후 그의 친구 아스트라는 먼 우주를 보다 말했다. 외계 생명체 찾으러 안 갈래?
2
또 허탕인 거야?
리노 트레너는 우산-사실 월산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알맞다-을 펼쳐들어 황산 비를 막아주며 말했다. 이미 사념체인 그 둘이 황산비를 맞는다고 문제가 될 일은 없었으나 리노 트레너는 굳이 사람 녹이는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아스트라는 눈 앞의 황산 웅덩이 앞에 웅크려서 톡, 톡 가볍게 웅덩이를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고 있다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기본적인 rna구조가 보이긴 하는데 아직 이게 생명체의 형태로 진화하려면 몇억 년은 남은 것 같아. 타이밍 미스로 인한 허탕이라고 할 수 있지. 리노 트레너는 rna구조 따위는 몰랐지만 마지막 문장만큼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54번째 행성 탐사는 거기서 종료되었다.
이번엔 꽤 감이 좋았는데…
아스트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로브자락에 묻은 물기를 짜냈다. 사념체에 불과한 로브자락이 젖어드는 건 아스트라가 부린 변덕이 틀림없었다. 반응의 취사선택. 황산에 몸이 부식되는 건 무시하고도 액체에 옷이 젖어든다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는 받아들여 몸에 달라붙은 물기를 짜내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취한다. 아스트라의 신체는 아스트라의 의지대로 반응을 취사선택하고 법칙을 흔들었다. 편리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3차원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해 주었지만 솔직히 리노 트레너의 입장에서는 그냥 마법 같았다.
저기, 이거 확률이 얼마나 되는 거야? 영원히 못 찾는거 아냐?
그저 둘 다 재미로 떠난 여행이었으니 재미로 그만둬도 별다른 문제는 없는 거 아닌가? 우리는 이미 생명체가 있는 행성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다른 행성을 찾아낸다고 한들 크게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그곳은 그들의 고향도 아니었고 그들의 고향과는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공간으로 단절되어 있어 문화적 교류 따위도 가능할 리 없었으며 따라서 그 두 별은 서로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굳이 신이나 된 아스트라가 ‘짝지어주기’ 마냥 애타게 생명체가 있는 별을 찾아 해멜 필요는 없었다.
아스트라는 말없이 ‘우연히’ 비에 섞여 떨어진 작은 상아 주사위를 잡아채 위로 던졌다. 퐁당. 깊이가 일 센티나 될 법한 황산 웅덩이에 떨어진 상앗빛 주사위는, 분명 던질 때는 평범한 육점 주사위였는데 떨어지고 나니 왜인지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새겨져 있었다.
생명체가 있는 행성을 찾을 확률이 얼마냐고?
리노 트레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아.
3
55번째 행성에는 그나마 녹조류와 원시 식물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자라 있었다. 한 몇억 년만 기다리면 동물도 출현할 터였다. 이름도 모르고, 마치 누군가 마구 만들어 둔 듯한 원시 양치식물들이 빽빽하게 자라있는 호수 앞 수풀에서 리노 트레너는 클 대 자로 뻗어 행성의 대기권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원래 살던 곳보다 하늘의 색이 훨씬 채도가 높고 다채로워서 마치 오로라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혹은 이게 이 행성의 오로라가 맞던가.
겨우 찾았네.
우리가 이동한 거리는 한 5조 광년쯤 돼,
몇 조 광년? 그럼 벌써 그 정도 시간이 흐른 거야?
아니? 2주 걸렸지. 리노 군은 신을 뭘로 보는 거야?
늘 이런 식이다. 겁을 잔뜩 줘 놓고 결국은 맥 빠지는 농담으로 샌다. 제 우주여행 파트너는 끝내주게 짓궂은 말버릇으로 종종 저를 농락하고는 했다. 보랏빛 주황빛 하양빛 오로라가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별자리의 배치라던가 하늘의 각도라던가가 전혀 달라서 마치 게임 속에서나 보던 세상 같았다.
우리가 불행해서 늦게 찾은 걸까?
아주 먼 거리를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평범한 행복을 바랐던 소년소녀로 돌아갈 때가 있었다. 왜 우린 평범하게 행복해지지 못하는 거지? 그것은 리노 트레너와 캐서린 브라보의 삶을 관통하는 의문이었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살고 좋아하는 게임의 발매일 디데이 마이너스를 세면서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정도면 충분했는데 왜 그게 안 됐을까, 정적이 바람이 되어 원시 식물들을 스칠 무렵에 아스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그걸 알고 싶었어,
창백한 푸른빛의 눈은 해마 속 익숙한 별을 떠올리게 한다. 흔히들 불행을 마가 꼈다고 표현하는데 그러면 아스트라는 그 마에서 풀려난 걸까.
그런데 어쩌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행운일지도 몰라.
예나 지금이나 늘 이상적이고 도움 안 되는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데 뭐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향은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서 우리의 영혼을 쏙 빼놓고는 한다. 그러니 저 세 치 혀 몇 초에 불과한 어절들로 위로를 받는 것도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바꿔주진 못할 터였다. 여전히 그는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의 존재를 여전히 믿는다면, 그렇다면 달이 있는 행성에서 태어난 것이 그의 최고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별의 밤에는 달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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