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정법
마비노기: 가내밀레가 살아가는 이야기
*스포일러: G2~G25
*가내 밀레시안의 관점을 서술한 글입니다.
*독백체입니다.
*6월 3일차 챌린지 ‘가지 않았던 길’ 주제를 다룹니다.
정령들의 웃음소리가 은은히 스며드는 서고에서 밀레시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게 서 있었다.
그 밀레시안은 ‘모든 것이 기록되는 도서관’의 어느 벽을 장식하고 있는 액자를 바라보며 내면 속으로 빠져든 상태였다. 이따금 장난꾸러기 책의 정령이 머리맡에 올라앉아 ‘뭐해? 놀자!’ 따위의 말을 재잘거리기도 하였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금세 흥미를 잃고 떠나가길 수 회차였다. 어느 붉은머리 전사의 얼굴이 액자 사이에서 유독 둥실둥실 떠오르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무감한 낯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지나온 길에 선택지는 무수하였으나, 종내 하나로 마무리될 것임을 앎으로써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만일 그때 당신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빠르지는 않더라도 천천히나마 오해를 풀었더라면.’
나비의 날갯짓 한 번만으로도 사건은 이리저리 얽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미련 한 방울이 수면 위에 떨어진다고 결말이 바뀔 지는 미지수, 아니 어림도 없을 것임이 거의 명확하겠지만 밀레시안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미련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옛날, 무너진 마법 골렘의 잔해 속에서 오해의 씨앗을 일찍이 풀 수 있었더라면?
—트리아나는 예정된 삶보다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다크나이트의 여신상 파괴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
—크로우 크루아흐의 계약은 언젠가는 맺어졌겠지만, 시기는 더욱 뒤로 미뤄졌을 수도.
—밀리아는 부모를 잃는 비극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
—반족의 움직임은 더욱 굼떠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계신은 에린으로 넘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약이 일부 들어간 만일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던 밀레시안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제가 덜 귀찮아지는 방향으로, 에린은 조금 더 평화로워졌을 수도 있었다. 딱히 의미가 있지 않은 가정이었으나, 밀레시안은 불현듯 자신이 지나치게 먼 길을 돌아서 왔다는 느낌을 받고 쓰리게 웃는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신의 힘을 휘두르고 이 땅을 잠식한 악몽을 몰아냈어도 그는 과거를 돌이키는 일 자체를 감히 꿈꾸지 못했다. 그러기에 각자가 엮어 온 인연의 끈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쌓아갈 이야기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던 누군가의 말만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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