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변하지 않는 것(1)
시간은 앞으로만 향해 간다.
나는 보다 일찍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다. 무기도, 포션도, 그리고 단단하기 위해 애쓰려는 마음도. 이 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결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늘. 블래시와 엔더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지금 내 심장박동은 조금씩 두근거렸다.
약간의 긴장은 필요하지. 자기 위로를 하면서 발로 땅을 짓이겼다. 지나가는 면면에서 블래시나 엔더와 비슷한 점이 보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움찔거렸다.
해가 중천에 오고, 식료품점의 글리니스 씨가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오. 정확히 약속한 시간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결국 오지 않는 걸까.
"…좀 더 기다려볼까."
결정을 존중해줄거라는 둥의 소리는 역시 헛소리다. 나는 용기를 더하고 책임을 나눌 사람들이 필요했으니까. 이제 그들에겐 해당 사항이 아니게 됐지만.
그래도 이 이상으로 질질 끄는 것도 그만둬야겠지. 나는 지체할 것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알면서도 섭섭한 게 이런 마음일까.
크리스텔이 준 통행증을 이용해 마족의 땅으로 가려면 반호르의 바리 던전에 가야 한다. 한시 바쁜 일이니 던바튼 성벽 밖에 위치한 문게이트로 빠르게 넘어갈 생각이었다. 활동하기 좋은 오후에, 던바튼 근처다 보니 이용객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 줄 끝자락에 선 나는 붕 떠있는 돌을 보며 예전에 누군가 해주었을 문게이트에 관한 일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에린에 왔을 때에 문게이트는 이미 있었지만 그보다 더 전에는 이동 수단이라고는 마차나 도보 뭐 그런 종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언제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안다. 나조차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니까.
과거. 마족들과 인간이 치열하게 전투할 때, 마족의 편으로 전쟁의 선두에 선 대마법사 자브키엘은 비장의 수를 내밀었다. 그의 최종마법은 이웨카를 이용해 라데카를 에린으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마우러스의 저지로 완전한 라데카가 아닌 월석 파편만이 끌려왔으나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으니. 그의 의도는 반쯤 성공했다고 봐도 옳았다.
하지만 상처가 흉터로 아물고 기억이 한 페이지의 기록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다. 월석이 품은 어마어마한 마나의 힘을 알게 된 드루이드들과 마법학자들의 노력으로 문게이트를 만들었다. 파멸을 가져온 그 자의 마법이 후대에 이르러 이렇게 편리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많은 인간을 죽이고자 했던 파괴적인 마법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으론 르나가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르나는 자브키엘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그녀는 지키기 위해 키홀과 싸웠지만 결국 결과적으론 반쯤 실패했으니. 뭐…, 어쩌면 르나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의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르지.
나는 키홀의 목적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대비할 수 있으니 뭐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생각도 한편으론 있지만….
언제나 미래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내가 본 상황보다 더 최악으로 치닫을 가능성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이 길 앞에 후회 한 점 없길 바라는 건 사치라는 점이다.
그래도 누군가 외면할 거냐 물어본다면 나는….
"이봐요, 안 들어가세요?"
"아니요! 갈 거에요."
어느새 앞의 줄이 지나가고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문게이트 위에 올라섰다.
반호르로 넘어간 후, 바리 던전에서 예상치못한 사람들이 나를 잡았다. 블래시와 엔더였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나를 찾아왔다는 둘은 면목 없는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대장간에 무기를 맡겼는데 깨먹어서…, 새로 구하느라 좀 늦었어.”
“미안합니다. 저만이라도 일단 나가려했는데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들이 단순히 변명을 하러 온 건지, 아니면 나를 돕기 위해 온 건지 가늠을 하느라, 그리고 둘은 아마도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느라.
뒤늦게 내가 물었다.
“가실 건가요?”
“응. 굉장한 던전을 가는 거잖아?”
“블래시, 그렇게 간단히 말할 문제가 아니에요.”
엔더는 친구를 타박하고선, 상황을 정리했다.
“저희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 셋으로도 위험한 일인 건 충분히 인지했어요. 마음도 단단히 먹었으니 전력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뚜렷한 어조로 띄운 그의 말에는 진심이 스며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면서 멋쩍게 물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 하는게 바보 같은 걸 알지만…, 궁금한 게 있어요. 저를 왜 돕는 건가요? 모른 척 무시해도 될 텐데.”
그러자 블래시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큰 체구에 안 어울리는 행동이라 엔더의 입가에 웃음기가 달리는게 보였다.
“흐음, 당연한 거 아닌가? 세상이 망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없는 손이라도 보태야지.”
“오랜만에 옳은 말이에요.”
“엔더, 날 무시하지 말라고 했지.”
살짝 으르렁 댄 블래시가 다시 얌전하게 나를 본다. 그의 시선은 올곧다. 이건 르나와 다른 점이려나. 나는 마족들 앞에서 홀로였던 르나를 떠오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가요….”
멋대로 재단하고 실망했던 아까의 나를 지워버리고선 나는 블래시와 엔더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드린다는 이 악수를, 그들은 가볍고도 강하게 맞잡아주었다.
바리 던전에 들어온 우리는 제단 앞에 모였다. 내가 꺼낸 검은색 마족 통행증을 살펴보며 엔더가 물었다.
“상당히 신기하군요. 통행증이라기엔 심상치 않은 마력이 스며있어요. 흠, 마치 부적처럼요.”
“이 친구는 드루이드 공부를 해서 이런 것에 관심이 많거든.”
나는 엔더에게서 다시 통행증을 받아 여신상에 바쳤다. 그러자 펼쳐진 던전의 내부는 평범한 바리 던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몬스터도 그랬다. 고블린, 플라잉 소드, 위습. 혼자서도 처치하기 어렵지 않은데 셋이 모이니 더욱 더 수월하다. 우리는 파죽지세로 던전을 해쳐나갔다.
보스룸에서 보스까지 물리친 후 들어간 방에서야 뭔가 다른 점을 알아챘다.
“이게 바로 티르 나 노이로 가는 문?”
거대한 석문은 여신상 뒤에 있었다. 봉인하듯 사슬로 묶여있었고 양 옆에는 고블린 석상이 나란히 서있다. 느껴지는 걸로는 막연히 불길한 것이 이 너머에 있다, 정도로만 있어 확실히 정체나 원리를 알기는 어려워 보였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으로 나서서 문에 손을 댔다. 손에 힘을 주자, 사슬이 스르륵 풀리고 문이 열렸다. 빛이 비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둡고, 속을 알 길 없이 깊었다.
“들어가요.”
발을 떼었다. 미지의 세상으로의 진입에 몸과 혼이 사정 없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 바닥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양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일련의 동작이 마치 홀린 것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눈을 반짝 떴을 땐, 난 움푹 패인 땅에 서있었다. 황급히 옆을 살피니 다른 두 사람도 방금 눈을 뜬 모양이었다.
“솔직히 놀랐어.”
“별 경험을 다해보네요.”
“저도요.”
우리는 막 새로운 땅을 밟은 뜨내기처럼 굴었다. 그리고 티르 나 노이는…, 첫인상으로 말하자면 최악이었다.
공기엔 재와 함께 목구멍을 간질이는 연기가 섞여있고, 생명의 소리라고는 음침하게 울리는 정체불명의 그윽거리는 소리…, 그리고 간혹 늑댄가 싶은 동물의 컹컹 울부짖음.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티르 나 노이를 사람들은 낙원이라 했지만, 이게 낙원이라면 차라리 반대되는 지옥에서 사는 게 나을 정도다.
어림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해. 이 정도면 멸망한 세상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블래시와 엔더도 내 감상과 다를 바 없는 말을 뱉었다.
“글라스 기브넨이란 것이 침략했다면 사실 이렇지 않을까 싶은데.”
“돌아가면 티르 나 노이에 대한 서적을 모두 불태워야겠군요.”
“그럼 일단 주위를 둘러볼까? 여신 구출에 대한 단서부터 구해야 하잖아.”
“네. 그렇게 해요.”
천천히 이 땅을 둘러볼수록 우리의 낯은 묘해졌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비록 묘지에는 좀비가 살고, 길에는 승냥이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 이 곳은.
“티르 코네일과 많이 닮았네요.”
“그렇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특히 저 나무 말입니다. 촌장님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를 닮았어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거대한 나무는 티르 코네일의 광장에 있는 것과 모양새나 크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잎사귀가 다 떨어져서 황량하긴 했지만. 당황스럽게 나무를 쳐다보다가 별안간 블래시가 손을 들었다.
“어라, 근데 저기 사람 아닌가?”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나무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저것도 승냥이 아닌가요? 여기에 사람이 살 리가….”
“진짜 사람이네요.”
“….”
엔더가 입을 다물고 블래시가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먼저 앞서갔다. 촌장님 댁으로 추정되는 곳에 누군가가 진짜로 서있었다. 그는 횃불에 불을 붙이고 있는 중인데 언뜻 보니 다리가 불편한 듯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저기요!”
내가 그 앞으로 가니 등만 보이던 몸이 돌아선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반으로 단정하게 묶어 내린 청년은 나를 발견하고도 크게 놀라지 않고 두 눈으로 차분히 살폈다. 그 잿빛 눈과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순간 나는 그에게서 거대한 공허를 발견한 듯해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정쩡한 거리를 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 오시다니, 상당히 특이한 분들이군요.”
더 이상 미소라고 할 수 없는 냉막한 웃음기가 입가에 맴돌았다.
“전 도우갈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혼자 남은 인간이지요. 당신들의 이름을 말해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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