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메시지

8화

꿈의 시작(8)

시드 스넷타를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나는 한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품에 있는 타르라크의 로켓을 건네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기엔 눈길은 험하고 너무 춥다. 결국 난 건네는 건 나중으로 기약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미약하게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과연 내가 잘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그건 어느새 연기처럼 내 속으로 스며들어 폐부 깊숙히서 간지럽히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뿌리뽑지 못하는 종류였다.

죽어도 살아난다 해도 그것이 정말 영원불멸을 뜻하는 건 아니라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게 신이지 인간이겠나. 애초에 불사가 모든 걸 해결 해줄 리도 없고.

특히 주체가 인간인 이상 죽음을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다.

톡.

콧등에 빗물이 떨어졌다. 그 차가움에 하던 고민에서 벗어나 우중충한 날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빗방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약했던 빗줄기는 점점 굵고 세차졌다. 종래엔 물동이를 통채로 퍼붓는 듯 앞을 구분하기 어렵게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은 어쩐지 물건을 만들거나 채집하는 활동이 더 잘 된다. 그래서 원래였다면 어딘가에서 잔뜩 양의 털이나 벗겨 실을 잣고 있었을 시간이다. 나같은 밀레시안들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은 내리는 비가 옷에 스며들어 불쾌하게 무게를 더할 뿐이었다. 나는 로브를 몸에 두르고 빠르게 뛰었다. 흙탕물이 찰박찰박 튀어올라 신발을 더럽혔다. 문게이트 위에 올라서서 던바튼으로 한순간에 이동했지만 날씨는 티르 코네일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던바튼으로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티르 나 노이로 가기 위해서는 크리스텔의 조력이 필요하다. 서큐버스였던 몸이니 분명 티르 나 노이…, 정확하게 말하면 마족들의 본거지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터. 동족의 기밀을 말해달라 하는 것이 조금 찜찜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밀레시안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 티르 나 노이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혹시나 글라스 기브넨이 완성되어 깨어났다고 하면 더더욱. 전투에 익숙한 이가 필요하니 대상이 밀레시안인 것은 당연했다. 사정을 잘 설명하면 두엇 정도는 설득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밀레시안들은 그런 이들이 많으니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 한다. 바로 나처럼.

비가 오느라 던바튼에는 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성당도 마찬가지라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비에 쫄딱 젖은 로브를 집어넣고, 옷가지를 탈탈 털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말려야겠군.

“날씨가 궂은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솔라 씨.”

“아, 크리스텔. 미안해요. 바닥이 젖어버렸네요.”

“제가 다시 청소하면 된답니다. 그것보단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나는 타르라크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내 결정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가능하면 동료를 구하겠다는 판단까지 말이다. 크리스텔은 이러한 내 설명에 어렵게 납득하고 검은색 통행증을 주었다.

“티르 나 노이…가 타르라크 씨가 묘사한 그 땅이라면. 그래요, 제가 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검은색 통행증을 살피는 내게 크리스텔은 진심어린 충고도 해주었다.

“그곳은 인간에겐 너무나 위험한 곳이에요.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고통스러울테니….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신다 해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곤 내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의 품 안에는 성수와 포션이 들려있었다.

“이것 밖에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나는 물건을 받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끝이 젖어 무거운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만큼 뜻 밖의 호의는 아주 크게 와닿았다.

“아니요. 이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든든해졌는 걸요. 소중히 잘 쓸게요. 고마워요, 크리스텔.”

“당신의 앞길에 라이미라크 님의 축복이 있기를….”

그 후에는 안면이 있는 밀레시안 중 전투에 자신 있는 이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흔쾌히 나서준다는 이가 한 명 있었다. 그는 활을 주로 다루는 이로, 나보다 더 먼저 에린 땅을 밟았던 밀레시안이었다.

“어려운 던전이라고 했으니 한 명 더 불러올까?”

“그러면 감사하죠.”

“좋아, 그러면 내 친구를 불러올게.”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그가 부른 다른 밀레시안은 스태프를 들고 있는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밀레시안이었다. 이 사람과는 초면이라 나는 인사를 먼저 나누었다.

블래시, 엔더. 나는 두 밀레시안을 마주보며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이렇게 모였으니 이제 사정을 설명할 차례였다.

나는 티르 나 노이에 대한 이야기와,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을 저지할 거라는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사실 이 둘이 겁을 먹고 나갈 수도 있겠지만, 거짓으로 목숨을 걸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 내내 침묵을 지키던 둘은 고민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은 아니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유예기간을 일러주었다.

“네, 그러면 하루 정도 기다릴게요.”

“그러면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자고.”

“만약 거절한다 해도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할 테니 염려 말아요.”

“고마워요. ”

그리고 티르 나 노이에 가기 전, 남은 하루.

나는 낭만 농장에서 잠을 청했다. 그간 자지 않았던 건 바빠서도 있었지만 르나의 선택에 괜히 우왕좌왕하기 싫어서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아야했다.

침대 위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자야한다는 압박감에 오히려 수면에 들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거의 한 시간을 뒤척여서야 나는 서서히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을 꾸고 있다는 자각이 들자 주위가 불 밝힌 것처럼 밝아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생겼다.

시야에 비치는 건…, 놀랍게도 여신이었다.

타르라크와 동료들이 찾고 있던 모리안 여신은 처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두 눈을 감고 사슬로 묶인 손목을 가슴 께에 얹고 처연하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를?

[ 곧 글라스 기브넨이 부활하려 합니다…. 에린이 불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를, 에린을 위해 키홀의 모략을 파해친 그대에게 부탁드립니다…. 저를 구속한 다섯 개의 마석을 부수고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을 저지해 주세요. ]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고 나서야 확신했다. 여신은 르나가 아닌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확실하게 몸에 대한 주도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 르나의 꿈 속은 아니라는 뜻.

[ 서둘러주세요…. ]

재촉하는 여신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당신이 말하는 마석은 어디로 가야 부술 수 있는 것이며, 글라스 기브넨이 부활하게 되면 어떻게 그것을 처치할 수 있는지.

하지만 궁금증을 입에 담기도 전에 여신의 모습은 암막을 친 듯 어두워졌다.

그리고 꿈은 바뀌었다. 이번에 나는 르나가 되었다. 분명 내 꿈인데 이랬다 저랬다 순 제멋대로다. 나는 뱉을수 없는 헛웃음을 지었다.

르나의 앞에는 거대한 괴물이 서있었다. 나는 그것이 글라스 기브넨일거라 추측했다. 파괴의 화신이라는 별명답게 글라스 기브넨에게서는 난폭한 기운이 새어나왔다. 마치 독처럼 주변을 오염시키는 공기가 떠도는 것만 같다.

르나는 괴물과 싸웠다. 체급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적과 이를 악 물고 싸우는 르나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어느새 나는 르나의 상황에 동화되어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야하는 거야? 꿈인데도 거북함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한참을 싸우고, 또 싸우고.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가 훅 꺼졌다. 르나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일찍 글라스 기브넨이 쓰러졌다. 나는 기쁨의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녀가 보여준 가능성은 내게 아주 간절한 미래의 희망이었으니.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진다고 했던가.

글라스 기브넨이 쓰러진 곳에서부터 아주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그 안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암흑의 근원지가 되었다.

곧 나타난 키홀과 대치한 르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에르그 붕괴 현상.

이 비틀림 현상을 이용해 에린과 마족의 땅을 잇는 것이 키홀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잠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타르라크가 안겨줬던 글라스 기브넨에 대한 자료를 보는 것이었다. 타르라크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글라스 기브넨이 쓰러지면 그 자리에선 독소와 암흑의 마나가 내뿜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전쟁 당시 글라스 기브넨의 시체에서 무수히 많은 마족들이 들이닥쳤다고도.

추측상 마족의 세상과 이어지는 통로가 아닐까. 덧붙인 분석을 본 내 표정을 심각해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글라스 기브넨의 부활을 애초부터 저지해야만 키홀의 계략을 저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글라스 기브넨이 부활하기 전 소환체를 부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체는 아다만티움이라는 광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아다만티움은 다른 광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단단하다. 실제로 평범한 무기로 그걸 파괴하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마우러스를 떠올렸다. 아직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러니까…희망이 있다면. 가장 먼저 마우러스를 찾아야만 했다. 그 자가 글라스 기브넨의 소환자니까.

소환되면 안 돼, 부수지도 못해, 그럼 방법은 역시 마우러스가 소환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마우러스의 증오였다. 자신의 아내를 해친 인간을 향한 분노. 그건 쉽게 설득할 만한 종류가 아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혹시 마우러스 구이디온은 자신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딸인 마리를 해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내 말을 들어줄 용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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