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별은 왜 새벽별인가

CM ; 소나기 후의 물웅덩이

카즈밀레

※ G20, 나의 기사단 영입 이후

※ 둘의 사이는 동료.

※ 오리지널 밀레시안의 묘사가 나옵니다. 주의.

※ 〈게이트에 내리는 비〉 밀레시안 시점입니다.

오늘따라 날씨가 흐리다 싶더라니, 결국 손가락을 적시는 비가 내렸다.

가방 속의 물건들이 젖지 않게 단단히 단속하고 농장 식구의 이마를 쓸어주며 아마 지나가는 소나기일거라고 말했다. 농장엔 굵직한 눈이 내렸지만 비와 다름 없게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훈훈하게 열을 높여 둔 집에 짐들을 들여두고 메이드에게 눈은 대충 쓸어두면 된다고 말한 후에야 농장을 나섰다. 농장에 들어갈 때보다 더욱 짙어진 비 냄새에 콧잔등을 찡긋거리면 미지근한 빗방울이 코를 때리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엔 괜시리 들르고 싶은 곳이 생각나던데, 비가 오니까 거기엔 없으려나. 미지근한 빗방울에 천천히 젖어드는 머리꼭지가 느껴졌기에 발을 재게 놀렸다.
가는 동안에 기온이 내려간 탓인지 탈틴의 언덕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춥고 덥고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몸은 아니어서 굳은 손을 쥐엄질하며 풀어내고, 익숙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찾던 사람은 역시 없었다. 비가 오니 당연하지. 걘 이유가 없으면 비 한 방울도 맞기 싫어할걸. 파란 고양이 같아서는. 혼자 키들키들 웃고 있자니 강아지의 동그랗고 축축한 코가 허리께를 꾹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 비 맞는 거 싫어?"

끄응, 소리를 내는 하얀 강아지의 젖은 털을 양 손으로 잔뜩 부볐다. 털이 무자비하게 손에 달라붙었지만, 괜찮아, 귀여우니까. 게이트에 있을까, 아니면 어디 비 안 맞는 곳에서 쉬고 있을까, 천천히 가늠하며 다시 발을 옮겼다. 사실 만나고 싶기도 했고 만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근래에는 그 녀석을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만나서 같은 장소에 있을 뿐인데 괜히 눈치를 보게 되기도 했고, 눈이 마주치면 목구멍에 나비라도 걸린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한 병이 났나 싶었는데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뱃속이 간질거리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원인을 모르니 손만 놓고 있는 꼴이었다. 그 뿐일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머리에 피가 돌았다. 호전성과는 다른 무언가. 싸움의 긴장감을 느끼고 있을 때와는 다른. 대체로 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아마도 일시적인 일이겠지, 라고 이번에도 생각을 접어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밟는 풀이 물을 먹어 철벅거리는 소리를 끌며 문게이트에 올라섰다. 소나기일거라고 말하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비가 오랫동안 올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후, 게이트의 단단한 타일이 발에 닿았다. 비구름이 넓게도 퍼진 모양인지 벨바스트에 있는 게이트의 벽돌이 물을 먹어 어두운 빛깔을 냈다. 빗물을 잔뜩 맞아 무거워진 머리카락이 귀찮았지만 지금 짜내면 슈안이 잔소리를 할 게 틀림 없었다. 게이트는 오랜만에 한산한 느낌이었다. 드문드문 조장급 기사들도 보이는 바람에 푸른 빛을 찾던 시선을 힘겹게 제자리로 되돌렸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왜인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푹 젖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들른 사람처럼 조원들에게 다가갔다. 비 안 맞게 잘 피해 있으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이르고 나면, 짖궂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비 와서 쉬니까 좋지? 훈련도 안 하고, 임무도 안 나가고..."

"조장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반쯤은? 비 피하는 표정들이 즐거워 보이길래."

조장님도 정말! 아이르리스의 목소리가 통 튀어올랐다. 금세 토라진 표정이 풀릴 거면서 꼭 저렇게 화가 난 티를 낸다니까. 그래도 비 그치면 열심히 해야 한다, 하고 덧붙이니 씩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챙길 건 다 챙겨줬는데. 그러면 이제 정말로, 빗방울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신경써야 할 차례였다. 비에 녹아 있는 시선이라서 외려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손을 뻗어 묵직해질대로 묵직해진 머리에서 빗물을 주르륵, 짜냈다. 아니나 다를까 슈안이 펄쩍 뛰며 이름을 불러댔지만 그것보다는 날 부르는 손짓이 중요했다. 미안, 미안, 대충 눙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새 뱃속에 나비 한 마리가 피어났다.
차양 아래로 들어서면 바닥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벽에 기대어 선 기사에게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섰다. 손에 잡혀 있는 머리카락을 한번 더 짜내면 또 주르르륵. 신발에 물이 튀었다.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비가 꽤 사납게 오는군."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뱉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도 예상한 바였어. 한결같기는. 잠시간 긴장을 품었던 마음이 끈이 풀리듯 풀어졌다. 불러 놓고 먼저 말하는 법은 드문 녀석. 힐긋 눈동자를 굴려 보면 여느 때와 같이 무기력한 낯이 보였다. 이상한 면에서 일관적인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면 떠드는 건 또 이쪽이겠지. 여러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쓸데 없는 잡담이었고, 또 대부분은 내가 묻고 그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해주네. 이게 뭐라고 즐거운 기분이 드는 건지. 그러다 머리가 눅눅해질 때쯤, 툭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요새는 무슨 일을 하지?"

무슨 일을 하냐니. 빗줄기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봤지만 가타부타 더 붙는 말은 없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입꼬리가 얕게 올랐다.

"말하면 아나."

밀레시안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어차피 다 알고 있을 거면서. 특급 주시 대상이라지 않았나? 사실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세상을 어쩌네 저쩌네, 누구를 돕고, 무엇을 막고.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일들, 아니면 걱정을 사거나, 그것도 아니면 의문을 살 일들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말해봐."

그런데 곁에 서 있는 기사는 고집을 부릴 용의인 것 같았다. 비가 와서 변덕을 부리는 건가? 눈을 깜박이며 생각한 바를 그대로 뱉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담. 비가 와서 그런가."

"그래, 비가 와서 그러니까... 네 얘기를 해봐."

이상하네. 그래도 그 고집을 꺾어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말을 골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말들이 이어졌다. 그림자 세계의 이야기, 어떤 음모의 초입에 발을 디딘 이야기, 싸움과 휴식과 그 밖의 것들. 이유까지 살뜰히 붙이고 나면 그저 그런 밀레시안의 궤적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전투를 기꺼워하며 이미 휘말린 일이라면 약간의 체념을 양념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 아마도.

"재미없지?"

그래서 아까와 똑같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물었다. 사나운 빗줄기에 웃음기가 약간 묻힌 음성이었다. 그러자 긴 숨소리가 났다. 그 바람에 나비 여러 마리가 가볍게 날갯짓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소리였는데도.

"재미없군."

그래, 그렇다니까. 나즈막한 웃음이 절로 새었다. 그런데 입 안이 조금 썼다. 마치 무언가에 실망했을 때처럼. 그럴 일은 아닌데. 기묘하게 바늘에 찔린 듯한 감각이 싫어 충동적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핑계는 기다렸다는 듯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가봐야 해.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거든."

눅눅하게 마른 신발이 젖고 있다며 아우성을 치는 걸 무시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가볍게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다가갈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계속해서 곁을 비워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생각이 흰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표정이 이상해질 것만 같아 다음 말을 혀 끝에서 조금 급하게 쏟아냈다.

"다음에 봐. 만날 수 있다면의 이야기겠지만. 비 오니까 땅바닥엔 눕지 말고, 카즈윈."

너는 대체로 만나기 힘드니까. 탈틴의 언덕에서 널 기다린 적이 몇 번이었는지 이제는 잘 모르겠어. 멋대로 딸려 올라오려는 말의 목을 잡아채어 혓바닥 아래에 눌러 두고 몸을 돌렸다. 아까보다 굵어진 빗방울이 어깨를 때리고 지나갔다. 안장에 몸을 실을 수도 있었지만 걸어가기를 택했다. 혹시라도 뒤에서 인사가 들려올까봐. 하지만, 역시나, 귀를 메우는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머리 끝이 다시 젖어들어갔다. 눅눅하게나마 말랐던 머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을 잔뜩 먹었고, 기분은 게이트에 들르기 전보다 더 가라앉았다. 아무런 일도 없는데 일이 있다면서 나온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게이트에 눌러앉아서 비 오는 날의 게이트 특식은 뭔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텐데. 도망치듯 뛰쳐나온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걸까, 나는. 아니면 그냥 그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간지러웠다가도 곤두박질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분명 굳건한 신뢰가 사이에 쌓여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엇인가를 기대했고, 두려워했으며, 기다리고, 도망쳤다. 기다림이 보답받을까 무서웠을 때가 있었다. 기대한 바가 돌아올까봐 도망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들이 밑바닥에 고여 있음을 알았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언제나 이것이 소나기이기를 바랐다. 태양이 나오면 사라질 얕은 웅덩이이기를. 너무 많이 나를 적시지 않기를.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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