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성공적인 청혼을 위한 필수 지침서 下

다이아몬드 에이스 | 미유키 카즈야 네임리스 드림

여자는 화장대에 위의 귀걸이 중 하나를 집었다. 화려한 것과 무난한 것을 차례대로 귀에 대어 보고작은 라운드 귀걸이를 골랐다.

여자는 서랍의 한편을 차지한 악세서리 몇 개를 들여다보다 서랍을 닫았다. 

미유키에게 받은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수도 늘었다. 지금껏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가족처럼 가깝기에 서로의 기념일이나 좋은 일을 축하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축하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하지만 이제는 그에게 받은 것들이 전과는 달리 보였다.

여자는 택시에 잡아타고 약속된 장소까지 걸리는 시간을 어림짐작했다. 아직 여유롭다. 여자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맞선을 보기로 한 당일인 오늘 미유키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솔직히 예상한 바라 별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취한 그를 집에 데려다 준 다음 날 미유키는 거의 창피해서 죽으려고 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서는 어제는 미안했다고 말하며 자기가 이상한 말을 하진 않았냐고 재차 묻는데, 그게 퍽 안쓰러워 여자는 특별히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다고 대답해주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별말 않기는 무슨.

여자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리 소극적으로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님? 목적지 도착했는데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어느 새 택시가 건물 앞에 멈춰 서있었다.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값을 치른 후에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상단의 라이트가 깜빡이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가 와 있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6:15)

저도 도착했습니다. 여자는 휴대폰 패널을 두드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만나기로 한 레스토랑은 8층이다. 여자가 레스토랑의 프런트에서 맞선 상대인 남자의 이름을 대자 직원이 예약된 룸으로 여자를 안내했다. 조용한 복도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앞선 직원의 구두 발굽 소리가 울린다. 

여자는 며칠 전 쿠라모치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쿠라모치는 여자에게 맞선 상대가 미유키보다 마음에 들면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여자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연애도, 결혼도. 둘이서 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오늘의 만남을 지속하려면 상대도 여자가 마음에 들어야 하고, 다음으로 이어갈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직원이 어느 문 앞에서 안내를 마쳤다. 여자는 고개를 까딱이며 직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직원이 걸어온 복도를 뒤돌아 나간다. 여자는 문고리에 손을 댔다. 

여자가 문을 열자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는 입가에 웃음을 내걸었다.

여자에게는 상대가 자신과 만남을 진지한 쪽으로 이어가지 않으리란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와타나베 씨."

적어도 첫 만남이 그 모양에 그 꼴이었던 사람과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없을 테니까…. 적어도 나라면 안 해. 여자는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사진을 전해 받았을 때는 설마 했어요."

여자와 마주 본 남자의 이름은 와타나베 히사시였다. 미유키 카즈야의 고등학교 동창생.

처음 어머니에게 상대가 여자 프로야구 구단의 전략 분석원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여자는 미유키를 떠올렸다. 아는 야구 관련 종사자라고는 그 하나였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하면 알까? 아마 모르겠지. 같은 업계라도 리그가 다르고 선수도 아닌데. 그래서 여자는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며칠 후 받은 종이 위에 프린트된 한자 넉 자와 읽는 법을 들었을 때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딘가 처음 듣는 이름 같지가 않았다. 이 위화감의 정체는 다음 날 알았다. 평소보다 늦은 퇴근길에, 휴대폰으로 전송되어 온 상대의 사진을 뒤늦게 확인했을 때…. 여자는 반신반의하며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즈야, 아직 안 자지? 물어볼 거 있어서 전화했어. 그 왜, 작년 이맘때 즈음에 만났던….'

— 저, 죄송한데 미유키 녀석이 지금 술 마시고 뻗어 있어서요.

전화 주인은 술에 취해 뻗어 있었고, 대신 받은 건 그의 친구였다. 그 이후의 상황은 더 회상할 것이 없었다. 미유키의 행동이 꽤나 강렬했던 탓에 여자는 본인이 그에게 연락했던 이유를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 선보러 가시잖아요? 그 맞선 상대가 미유키보다 마음에 들면요?'

그러다 일련의 상황이 지나가고 헤어지기 직전에 쿠라모치의 말을 듣고서야 상기해냈다. 자신이 전화를 걸었던 이유를.

'실은 그 맞선 상대 말인데요…. 이렇게 됐으니까 카즈야한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거 쿠라모치 씨한테만 말해 드릴 테니까 당분간 카즈야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여자는 휴대폰에 사진을 하나 띄워 쿠라모치에게 내밀었다. 쿠라모치는 사진을 확인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진 속의 주인공인 갈색 머리가 단정하게 이마를 덮은 남자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쿠라모치의 고교 시절 팀 메이트이기도 한 그 와타나베 히사시였다.

'저 그분이랑 선 봐요.'

'아니, 이게…….'

'제가 생각하는 분이 맞죠? 작년에 쿠라모치 씨랑 같이 뵀던 것 같은데요.'

'허…….'

이게 말이 되나? 쿠라모치는 할 말 많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언가 석연찮은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녀석….'

'왜 그러세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쿠라모치가 고개를 내젓고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쿠라모치의 반응에서 와타나베가 선 자리를 자의로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하나 세웠다. 선 자리가 내키지 않지만 절친한 친구의 지인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더구나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면.

"……저, 그리고… 이런 자리에 모셔 놓고 드릴 말은 아니지만…."

인사와 그간의 안부로 시작된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와타나베가 굳은 표정으로 뜸을 들였다. 역시 자의로 나온 건 아니었군. 여자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예상 답안을 떠올렸다. 부모님께 등 떠밀려 나왔다, 이름과 사진을 받아 보니 미유키의 친구분이시라 거절할 수 없었다,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다….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예상 안에 없었는데. 그의 대답은 여자가 세웠던 리스트에 없었다. 와타나베는 미리 얘기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제 쪽에서 식사를 대접할 테니 함께 저녁을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기분이 상했다면 그냥 돌아가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나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는 남자랑 선 보고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여자의 머릿속에서 주말극 드라마 한 편이 훅 지나갔다. 대개 이런 전개라면 빠지지 않는 이벤트가 있지 않은가. 가령 누가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든지.

그런 터무니 없는 걱정은 제쳐놓고, 여자는 와타나베의 말을 듣고 도리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다른 마음 먹고 온 건 마찬가지인지라. 여자에게도 이번 만남을 진중하게 이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상대였다.

여자는 와타나베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다. 딱 작년 이맘때였다. 여자가 바람피운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만취해서 남의 술자리에 끼었던 때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가 미유키의 친구만 아니었더라면 눈 꼭 감고 약속을 파토냈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안도감에 여자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쿠라모치에게 퍽 장난스럽게 말했던 그 '절박한 얼굴'이 생각보다 뇌리에 단단히 박힌 것이다.

여자는 조금 곤란해졌다. 전부 살짝 엿본 단편이 예상치 못하게 진지했던 탓이다.

"저, (—) 씨?"

"아… 네!" 

여자가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와타나베는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대로 밥 먹으면 분명히 얹힐 것이다. 분위기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괜찮습니다. 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실은…."

대충 알고 나왔거든요…. 여자가 눈을 옆으로 돌리며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여기선 솔직하게 말하자.

"네?"

와타나베가 반문했다. 여자는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했다. 쿠라모치의 연락을 받고 미유키를 데리러 갔던 일, 맞선 상대가 누구인지 말했더니 보였던 쿠라모치의 미묘한 반응. 물론 미유키가 술김에 고백했던 일은 뺐다.

여자는 설명을 마치며 이제 편히 식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유키라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이야깃거리는 웬만해서는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다. 학생 때 얘기면 식사 시간 한두 시간은 금방이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대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어째…. 이야기를 다 들은 와타나베의 표정이 듣기 전보다 굳어 있었다. 거의 사색이 됐다. 여자는 자신이 한 얘기 중에 그를 불편하게 만들만한 것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와타나베 씨,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저, 다른 게 아니라… 혹시 그러면…."

와타나베가 퍽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카즈야도 아나요?"

"예?"

"오늘… (—) 씨가 저와 선 보는 걸요."

물론 모른다. 얘기할 예정이 미유키의 돌발 행동으로 무산되었으니까. 하지만 선 보는 두 사람이 미유키와 가까운 사람들이니만큼 말했다고 이상할 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말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뭐랄까, 지금 와타나베의 반응은…. 

그는 몹시도 당혹스러워 보였다.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눈동자나 작게 움직이는 손을 빼고서도 그저 표정만 봐도 그랬다.

꼭, 미유키가 이 자리를 알면 안 되는 것처럼….

아. 여자가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쿠라모치도 이미 사정을 다 아는 눈치였다. 쿠라모치는 미유키의 절친한 친구고, 와타나베도 그 못지않게 절친한 친구다. 둘 다 겉보기에도 입이 무겁게 생겼고 말이다.

"카즈야가 알면… 안 되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말과 행동이 따로 논다. 원래의 침착함이 무너질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여자는 덩달아 표정 관리가 조금 어려워졌다.

여자의 표정을 본 와타나베는 무언가 깨달은 듯이 입을 살짝 벌렸다. 기막힌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싸늘했다. 아마 둘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여자였다. 여자는 적당히 와타나베에게 답할 말을 찾아 예의를 차린 그럴듯한 말을 솎아내다가….

"…카즈야가 절 좋아하는 게 혹시 친구분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나요?"

 못 살겠다, 진짜. 끝내 곧게 폈던 상체를 무너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하하…. 허탈하게 웃은 와타나베는 뜸을 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 저밖에 모를 거예요."

"쿠라모치 씨도 알던데요…?"

"아, 쿠라모치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원래 눈치가 좋은 애거든요."

와타나베가 허리를 펴고 고쳐 앉았다. 여자도 자세를 바로 했다. 두 사람을 짓누르던 무거운 공기가 걷혔다. 와타나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카즈야랑은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자주 만나는 편이었어요. 제가 대학을 다닐 때나 졸업한 후나 자취하는 곳도 가까웠고요. 그래서 그 애가 시즌이 끝나고 한가할 때면 술자리도 종종 가지는 편이었는데…."

와타나베가 꺼낸 이야기는 조금 과거의 얘기였다.

"카즈야가 우연하게 유독 저랑 만날 때…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먼저 일어서는 경우가 많았어요."

여자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그 '급한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여자 분이었고…. 카즈야가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어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어요. 저도 대강 카즈야도 만나는 사람이 있나 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거든요. 때가 되면 소개해주겠거니 생각하기도 했고요."

여자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친구랑 만나는 중인데 왜 온 거야….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모두 맨정신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자기도 술을 마셨으면서 대체 누굴 데리러 오겠다고. 

"그리고 한동안은 잊고 있었는데… 작년에… 음, 저희가 우연히 만났었죠."

그 다음 얘기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와타나베가 작게 웃었다.

"카즈야에게 그런 사람이 둘씩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와타나베가 그간 자신과의 약속 때마다 미유키를 불러낸 상대가 그 자리에 있는 여자라는 걸 깨닫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니까. 단지 구성이 좀 바뀌었을 뿐이었다. 미유키의 전화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느냐, 여자의 전화 너머로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오느냐의 차이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친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카즈야는 이상한 데서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잖아요. 알고 지낸 지 이 정도 되니까 그런 걸 읽는 노하우가 생겼다고 할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요. 와타나베는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제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때는 일부러 합석을 제안한 것도 있었어요. 카즈야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분인지 전부터 궁금했었거든요." 

죄송해요. 와타나베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여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그날의 일이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당시 합석을 가장 먼저 입에 올렸던 사람이 와타나베였던 것만은 기억났다. 

얘기가 대강 마무리됐다. 둘 사이의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공기가 한결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왜 나오신 거예요? 카즈야가 절 좋…아… 한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건…."

와타나베가 난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건… 극적으로 뭔가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컨대 그의 사정은 이랬다.

웃어른들의 사정으로 선 자리를 파토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와타나베는 여자와 미유키는 무척 가까운 사이이니만큼 선 자리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유키가 제게 연락하지 않았으니 여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미유키의 긴 짝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고, 미유키가 무슨 사정에서 머뭇거리고 있든 간에 이런 상황이 닥쳐서까지 가만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당장 약속 당일에라도 극적인 무언가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얘기를 대강 들은 여자는 침묵하다 짧게 감상평을 말했다.

"생각보다 카즈야를 후하게 평가하시네요."

"그런가요…."

여자는 냉수로 입을 축였다. 결국 미유키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뿐인가? 오늘은 아예 연락조차 없었다. 혼자 생각할 때는 느끼지 못하던 답답함이 올라왔다. 

미유키를 머리 한구석으로 구겨 넣던 여자가 퍼뜩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사실 지금 미유키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아, 맞다. 그런데 여자친구분께는…."

"여자친구한테는 제대로 설명하고 허락도 받고 나왔어요. 그러니 걱정은…."

와타나베가 말을 채 잇기 전에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직원인가?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성큼 들어온 사람은 직원이 아니었다.

"저기 한창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당차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짙게 선팅 된 선글라스를 낀 짧은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와타나베가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자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어쩐지 저 여성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와타나베가 당혹감이 그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오리, 여긴 어떻게…."

여자는 일단 이 상황을 한 번 부정했지만, 이 상황에 답은 하나뿐이었다. 선글라스의 여성이 또각또각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이제 테이블 바로 코앞에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상황이 휘몰아친다. 여자는 마주 인사하며 바깥쪽에 놓여 있던 물컵을 테이블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옮겼다.


그리고 그 시각 답답해 빠진 미유키 카즈야는 초조하게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시간상 여자는 진즉에 집에서 나왔을 것이다. 약속 장소에 이미 도착했을 수도 있다. 미유키의 여자의 약속 장소도 몰랐다. 기차는 이미 떠났고, 붙잡기에는 너무 늦었다.

미유키 카즈야는 자기 자신이 답답해졌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건 싫다. 하지만 이대로의 관계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럼 도대체 자신은 뭘 어쩌고 싶단 말인가? 이대로는 정말 쿠라모치의 말대로 여자의 결혼식에서 부조금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죽어도 싫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생각에 미유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푹신한 쿠션이 머리에 닿았다. 정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여자의 말대로 선을 본다고 당장 결혼을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사람을 봐야 아는 거고, 오늘 나온 상대가 끔찍하게 별로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반대로 상대가 아주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그런 식으로 여자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미유키의 속에 다시 무거운 돌덩이가 얹혔다.

대체 누가, 어떤 사람이 여자와 마주 앉았을까?

아, 젠장할. 미유키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 빌어먹을 사랑이 야구보다도 어려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가 와타나베의 애인에게 물세례를 받는 것과 비슷한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와타나베가 연신 사과했다. 그는 분명 평생 할 사과를 오늘 다 했을 것이다. 그의 여자친구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원래는 슬쩍 살피고만 가려고 했는데, 안에서 웃는 소리가 나니까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그건 둘 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거였는데….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은 여자도 아는 얼굴이었다. 어째서 아는 얼굴인가 하면, 그는 와타나베가 전략 분석원으로 있는 구단의 선수였다. 여자가 특별히 찾아보지 않아도 이미 아는 선수였다.

작년 WBSC의 우승 투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약력 화려한 투수.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기까지 했던 그는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스포츠 선수 중 하나였다. 똑같이 유명해도 미유키보다는 나루미야 메이와 비슷한 부류였다. 그는 경기뿐만이 아니라 방송에서도 노출도가 높았고, 여자도 그가 휴식기에 촬영한 예능과 광고 포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기 그런데… 예전에 카즈야랑 열애설… 나지 않으셨어요?"

이 사람, 재작년 겨울에 미유키 카즈야와 열애설이 났었다.

미유키의 일이기도 하고, 워낙 언론에서 야구계 유명인사들의 연애라고 신명 나게 과거 행적들을 끌어내 기사를 낸 데다가, 야구 팬들도 두 사람이 결혼해서 2세가 태어나면 그 애는 포수를 하니 투수를 하니 하면서 떠들었던 게 제법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여자 또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열애설의 사실 여부가 궁금해 연락했을 때 미유키는 그런 사이 아니라며 질색을 했고, 바로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양쪽에서 정정 기사를 내 가십은 금방 사그라지며 마무리됐었다.

"어우, 말도 마세요! 그때 이 사람도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잠깐 화장실 가서 둘만 있는 새에 사진 찍어서 기사를 낸 거예요. 아마 사진 찍은 파파라치도 저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다 알았을 거예요."

그냥 좀, 화제성에 돌아버린 거죠. 카오리가 제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그는 무척 유쾌한 사람이었다. 여자는 차라리 이렇게 셋이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트레이에 음식을 싣고 온 직원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카오리 또한 여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앞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설명하자 카오리는 '아~ 이분이 그….' 하고 아는 체를 했다. 여자는 미유키가 대체 어디까지 티를 냈는지 슬슬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저희가 아무래도 종사하는 업계가 같은 데다가 히사시랑 미유키는 친구이기까지 해서요. 셋이서 자주 만났었거든요. 근데 걔가 자꾸 먼저 일이 생겼다고 일어나는 거예요."

여자는 카오리의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와타나베도 멋쩍게 웃었다.

"저는 미유키가 눈치가 있어서 일부러 저희 둘만 있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준 줄 알았거든요.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네요. 뭐, 의도가 어땠든 간에… 걔한테는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 덕에 이 사람이랑 잘 됐거든요."

카오리가 씩 웃었다. 미유키 본인의 연애는 난항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리고 본래 선 자리였던 분위기는 급격하게 연애 상담소로 탈바꿈했다. 와타나베와 단 둘이 있을 때에 비해 여자도 말문이 트였다.

그들은 여자가 미유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지 고작 며칠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미유키의 사회적 체면을 위해 그날 일은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로 대체되었다.—

여자의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미유키를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으세요? 걔가 성격은 모난 구석이 있어도 얼굴은 꽤 봐줄 만하잖아요. 제 주변 애들도 한 번씩은 설레고 그랬다던데."

"저희는 어릴 때부터 워낙 가족처럼 지내서…."

"정말요? 단 한 번도?"

여자가 카오리의 추궁에 슬쩍 눈을 돌렸다. 카오리의 눈이 흥미진진하게 반짝였다. 와타나베가 카오리를 말리는 시늉을 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진 않았다. 여자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어깨에 힘을 뺐다. 그리고 시인했다.

"……아예 없지는… 않았죠."

여자의 눈을 높인 장본인이 미유키인데, 그에게 잠깐도 마음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들이 아주 어렸던 때를 제하고도 고등학교 때 미유키가 제게 목걸이를 선물했던 날 대뜸 직접 걸어주겠다고 했던 때라던지. 당시에는 그를 의식하면서도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생각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여자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제가 카즈야를 그런 쪽으로 생각 못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럴 만한 이유요?"

두 사람이 눈을 깜빡이며 얘기에 집중했다. 미유키 카즈야는 인간적으로나 이성으로나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여자에게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된 거지?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작년까지 저희 어머니랑 카즈야네 아버지가 그런… 그러니까, 호감을 가지고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예?"

"두 분 다 사별하신 지는 오래되셨어요." 

여자가 제 앞의 두 사람이 오해라도 할 새라 보충 설명을 했다. 와타나베는 그 순간 예전에 여자가 미유키와 함께 산 적이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정이 있어서 어릴 때 카즈야네서 몇 년간 함께 살았어요. 이후에 얻은 집도 근처라 가까이 지내다가…. 저희가 독립하고 난 다음부터 두 분이 거의 같이 지내시고 계시거든요. 집을 합친 건 아닌데, 주말이나 연휴면 두 분이서 여행도 자주 가시고…."

이게 꽤나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거든요. 여자가 억울한 투로 변명했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친한 사이라도 단둘이 골든위크에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일이 어디 흔한가? 게다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거실장 위에 올라와 있는 걸 보았더라면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유키는 빼고 말이다.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쩌면 두 분이 재혼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 

"와……."

와타나베와 카오리가 나란히 탄식했다. 여자가 어색하게 머리칼을 매만졌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까 좀… 의도적으로 카즈야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작년까지라는 얘기는,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와타나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어머님께 여쭤보셨나요?"

"네. 물어봤는데, 아니래요. 정말 그냥 친한 친구사이라고…. 제가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죠."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사랑을 하고 있었구나…. 와타나베의 안에서 미유키에 대한 측은함이 커졌다. 천천히 여자의 말을 곱씹던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미유키 카즈야가 (—) 씨랑 잘 해보고 싶어서 그러고 있을 때 (—) 씨는 다른 의미로 미유키로 성을 바꾸는 생각을 하신 거네요."

"음… 네. 그런 셈이죠."

"와우……."

와타나베의 여자친구가 기함하며 입을 가렸다. 하마터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호적상 남매가 될 뻔한 것이다. 주말극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였다. 결국은 아니었지만.

"저 지금 처음으로 미유키 카즈야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 얘기 카즈야한테는 안 하셨죠…?"

"다행히도요…. 민망하니까 이 얘기 카즈야한테는 하지 말아주세요…."

미유키가 이 사실을 알면 뒤로 넘어간대도 이상하지 않다. 여자는 정말 민망하게 웃었다. 

이렇게 다시 얘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저는 카즈야가 이제 와서 뭘 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오늘 이렇게 된 걸 봐서는 거의 가망이 없지 않나…."

"냉정하시네요…."

"음… 저는 생각이 좀 다른데요."

두 사람의 시선이 카오리를 향했다. 카오리가 팔짱을 끼었던 팔을 풀고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의 상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걔 지금쯤 분명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어쩌면 벌써 맥주 한 캔 깠을 수도 있어요. 카오리가 덧붙인 말에 여자는 미유키가 이미 이번 일 때문에 인사불성이 된 적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카오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는 야구나 사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궁지에 몰렸을 때 기회가 찾아오면 잡아채야 하죠. 그리고 그 녀석은 9회 말 2 아웃에서도 과감하게 리드를 해요."

사정을 듣고 보니 미유키의 처지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여자가 미유키의 마음을 알게 된 지 고작 며칠이라면, 여기서 끝내기는 영 아깝지 않은가. 여자도 그에게 아예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미유키가 답답하게 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걔한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야구는 9회 말 3 아웃이면 무를 수도 없이 경기 종료지만, 연애는 그렇지 않잖아요."

게다가 야구에는 외부 찬스 타임이 없지만, 사랑에는 있다. 카오리가 씩 웃었다.

 

"그리고 지금 저한테는, 경기가 끝났다기보다는 이제야 이닝이 (—) 씨한테로 넘어갈 걸로 보이거든요."


다음 날 아침.

미유키는 새벽부터 가볍게 러닝을 뛰고 돌아왔다. 샤워하고, 아침을 먹고. 뒷정리까지 마치고 식탁에 앉으면 창 너머로 새하얀 햇빛이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잠시 생긴 여유에 스며드는 건…. 

잡생각이다.

그는 휴대폰에 여자의 연락처를 띄운 채로 거실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전화를 하기로는 마음먹었다. 적어도 어제 일에 대해서 물어봐야 하니까. 그런데 무어라 서두를 떼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짜고짜 어제 선 자리는 어땠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는 전화를 걸 그럴듯한 핑계를 찾고 있었다. 

"!"

그러니까, 지금 통화 버튼을 누른 건 순전히 실수였다. 손가락이 엇나갔다. 미유키가 식겁해서 불에 덴 듯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쇼파 위로 집어 던졌다. 통화음이 울리고 있었다. 

'일단은 끊고 다시—.'

미유키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취소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여자가 전화를 받는 게 빨랐다.

— 여보세요?

아, 맙소사. 스피커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유키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 벌써 일어나 있었네?"

— 시간이 몇 신데. 당연하지.

"하하, 평소엔 이 시간까지도 안 일어날 때 많으면서."

— 아니거든? 요즘에는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 그래서, 오빠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일단은 적당히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미유키가 놀란 심박수를 가라앉히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나 오늘 저녁에 본가에 다녀올까 하는데, 너도 갈 생각이 있나… 해서."

— 오늘 저녁? 약속 있어서 안 돼.

"아… 그래? 무슨 약속?"

서두는 무난하게 넘겼다. 미유키가 안도하며 쇼파에 앉았다. 떠올리려고 생각할 때는 죽어도 생각이 나지 않더니, 막상 닥치니 그럴듯한 핑계가 떠올랐다. 이제 적당히 얘기를 끌다가 어제 만난 사람은 어땠느냐고 물으면….

— 지난번에 선 본다고 했던 거 있잖아.

"…?"

미유키가 반사적으로 휴대폰 디스플레이에 뜬 날짜와 요일을 확인했다. 자신이 꿈을 꾼 건 아니었다. 날짜를 착각한 것도 아니다. 분명히 여자의 약속은 어제가 맞았다.

"그거 어제 아니었어?"

— 어제 못 만났어. 그쪽에서 사정이 있다고 하루만 약속을 늦춰 달라고 했거든. 그래서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어.

잠깐만….

미유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꼈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힌다. 미유키는 다시 쇼파에서 일어났다.

— 아무튼 난 오늘 못 가니까 오빠만 다녀와. 아저씨한테 안부도 전해 드리고. 말일에는 같이….

"(—)."

— 응?

미유키가 휴대폰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지금, 잠깐 만날 수 있어?"


여자는 머리칼을 정돈하며 어제의 대화를 떠올렸다.

'약속이 미뤄져서 못 만났다고 하세요.'

'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말 그대로 물러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거죠. 물론 (—) 씨가 그러고 싶으시면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이번엔 분명 반응이 올 거 같거든요.'

아침부터 연락이 온 것도 놀라운데, 카오리가 말했던 대로 하자 정말로 지금 만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여자는 더 캐묻지 않고 괜찮다고 말했다. 왜 만나자고 하는지도 알고 있고,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다가 갑자기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하면… 또다시 아무 일도 아닌 채로 끝날지도 몰랐다.

나는 내심 카즈야가 말해주길 바라는 건가? 여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제 저녁 전까지만 해도 쿠라모치에게 말했던 대로 '붙잡혀 줄 의향이 있다.' 정도였는데…. 지금은 또 조금 다르다. 와타나베와 카오리에게 미유키 얘기를 들었기 때문도 있고, 자신의 얘기를 하며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았기 때문도 있다. 역시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자신을 확실하게 해주니까.

여자는 외투를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미유키는 아파트 밖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인접한 작은 공원에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는 덩달아 긴장이 감도는 걸 느꼈다.

미유키가 여자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어쩐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안녕. 

미유키가 인사했다. 여자도 평소처럼 인사를 받았다. 미유키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제법 진중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할 말을 고르는 것도 같았다. 여자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오늘… 그 약속 나갈 거야?"

미유키가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본론으로 나오는군. 여자가 속으로 짧게 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 그래야지. 약속한 자리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한 번 약속을 어겼잖아."

미유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적했다. 여자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들으면 기절할 일이었다. 여자는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고 따지려다, 방향을 틀었다.

"그렇긴 하지만… 무례하게 파토를 낸 것도 아니고, 약속 한 번 미뤘다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건…."

미유키가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차하며 수습했다.

"…근데 이번에 그렇게 진지하게 나가는 거 아니야. 집에서도 그냥 누구든 만나 보라고 해서—."

"누구든?"

미유키가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기류가 변했다. 미유키는 울컥한 낯으로 아래를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자는 당황했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그의 무언갈 건드린 것은 확실했다.

"네가 왜…."

미유키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꼭 화를 참는 모양새로 눈을 감고 주먹을 쥔 손으로 이마를 내리눌렀다. 잠시 후 그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싫어."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상관없어. 그건 네가 선택해서, 그 사람이 좋아서 만나는 거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유키가 다시 말을 흐렸다. 음절 하나하나를 뱉을 때마다 점점 격양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감정을 잘라내듯 입술을 약하게 짓씹었다.

"이런 식으로 조건 맞춰가면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만나지는 마."

여자는 미유키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왜 그래야 해?"

여자는 말없이 미유키가 말하는 걸 모두 들었다. 생각한 것과 비교도 못 하게 무겁다. 그의 단편을 본 것 정도로 깊이를 가늠했던 자신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랬다.

화를 내는… 아니, 속상해하는 포인트가 여자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오차 범위 안에도 없었다. 가슴이 술렁였다. 여자는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침묵했다. 시선이 다시 신발코를 향했다.

"그럴 거면 나랑 해."

…? 

여자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미유키가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게 있는 표정으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 하자. 결혼."

바람 한 줄기가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왜… 잘 나가다 얘기가 그리로 튀어? 여자는 살짝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홧김에 내뱉은 소리치고는 표정이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더 어이가 없었다. 미유키는 진심이었다.

"허, 참나… 싫어!"

그래서, 여자도 진심을 담아 외쳤다. 어이가 없어서 산통이 다 깨졌다. 살다 살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A와 Z 사이에는 24개의 알파벳이 있는데, 황당하게도 그걸 전부 뛰어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미유키의 귀에 꽂히는 순간, 그의 다리가 말 그대로 휘청했다. 거절당할 걸 은연중에 알고는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대뜸 결혼하자는 소리를 하는데 좋다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다급했으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카즈야.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불렀다. 미유키는 그 목소리에 정신 한 가닥을 간신히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거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

여자가 팔짱을 낀 채로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미간에 모인 눈썹이 단호했다. 이 상황이든 여자와의 사이든 전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미유키는 영문도 모른 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뭘…?"

"뭐긴 뭐가 뭐야! 진짜 이렇게 답답하게 굴래?"

'뭘?' 맥없는 소리에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고. 세상에 누가 어제까지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이랑 대뜸 결혼을 해.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하냐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미유키를 올려다봤다.

"카즈야, 나 좋아해?"

미유키는 순간 배트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놀리는 건가?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로서는 질문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으나 여자의 단호한 표정만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동공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미유키 카즈야는 분명 야구 외의 대부분의 것들에 서툴렀고, 거듭 말했듯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멍청하게 서 있을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미유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좋아… 하지."

"좀 확실하게 말해 봐."

"…좋아해."

첫 번째 대답은 얼떨떨한 감이 섞여 있었고, 두 번째 대답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여자는 그제야 불만을 거두고 표정을 풀었다.

긴장이 풀린 여자는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워졌다. 평소엔 낯짝 두껍고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 이 말 한 마디를 못 해서 수년을 쩔쩔맸다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것도 솔직히 말해 기가 막혔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런 서투른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여자는 며칠 전 식당에서 제 손을 잡고 저를 올려다보던 미유키를 떠올렸다. 여자는 미유키 카즈야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까 전의 속상해 죽겠다고 온통 외치던 얼굴도, 좋아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얼굴도,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좋았다. 여자의 입술이 완만하게 호선을 그렸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사랑에 특별한 계기는 필요 없다. 필요한 건 단지 작은 전환점 하나일 뿐이지.

"그리고 또?"

"나랑…."

미유키는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뇌의 혈관이 맥박치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술렁였다. 나쁜 예감은 들지 않았다. 이건 불길함보다 기대감에 가까웠다. 

미유키는 줄곧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여자에게 이미 수없이 했던 말이기도 했고, 동시에 한 번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말이기도 했다. 그는 말 하나를 미루고 미뤄서 결국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멀리 돌아온 미유키가 말을 이었다.

"…나랑 만나자."

미유키는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에 파묻고 고개를 떨궜다. 여자는 손으로 채 가려지지 않은 미유키의 새빨간 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는 미유키에게 마치 종이 울리는 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래, 좋아!"

장장 10년짜리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을 알리는 종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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