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성공적인 청혼을 위한 필수 지침서 中

다이아몬드 에이스 | 미유키 카즈야 네임리스 드림

"자… 도착."

여자의 집은 시내에서 떨어진 주택가의 작은 아파트였다. 신축은 아니지만 주변 시설들이 잘 들어와 있어 혼자 살기에는 적당했다.

단지 내 공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미유키는 차에서 내려 옆 좌석 문을 열었다. 곯아떨어진 여자는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깰 줄을 몰랐다. 미유키는 캄캄한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고 여자를 둘러업었다.

여자의 집에는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어 공동현관 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요리하는 중이라 인터폰까지 못 간다며 알아서 들어오라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층에 두 세대가 사는 아파트이니 집을 헤맬 일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유키가 여자의 도어락까지는 알 턱이 없다는 거였다. 그는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난감하게 뒤에 업힌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 좀 일어나 봐."

"……."

상대는 답이 없다. 이 상황도 답이 없다. 미유키는 여자를 내려 벽에 기대어 앉히고 도어락 앞에서 고뇌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 비밀번호는 항상 가족 생일이거든.'

그리고 때마침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건 언젠가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다. 아주 옛날, 여자와 미유키가 모두 중학생이던 시절의 본가 얘기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 비밀번호를 자기 생일로 해두진 않았겠지….'

그럼에도 설마 하면서 누른 여자의 생일 네자리는 당연히 틀린 비밀번호였다. 삐빅거리는 기계음이 밤에는 유독 크게 들렸다. 미유키는 여자의 옆집을 의식하며 다시 손을 놀렸다. 이번에는 여자의 어머니의 생일이었고, 도어락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삐빅 소리를 냈다.

아, 정말 어쩌지. 여자의 집 도어락은 일정 횟수를 넘기면 어마무시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는 종류였다. 미유키가 여자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다시 한번 몸을 살살 흔들었다.

"(—), 좀 일어나 봐. 집에 들어가야지. 내가 널 우리 집에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

야속하게도 여자는 여전히 숙면을 취하는 중이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칭얼거림이 다였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참, 내가 업고 왔지. 미유키는 복잡한 심경으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여자를 길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악의 경우 정말로 자기 집에 데려가야 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데. 미유키가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아."

그러고 보니 한 사람 더 있었지. 미유키는 벌떡 일어서 기억을 되살리며 번호키를 하나씩 눌렀다. 이번에는 도어락이 맑은 음과 함께 잠금쇠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냈다. 비밀번호는 여자의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휴. 그제야 안도한 미유키가 여자를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자를 침실의 침대에 눕히고 협탁의 등을 켰다. 그리고 이불을 마저 덮어주었다.

오늘 정말 가지가지 한다…. 미유키는 침대 맡에 앉아 잠든 여자를 바라보았다. 수면 유도등의 옅은 주황색 불빛이 여자의 뺨을 물들였다. 미유키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거둬졌다. 그는 제 손을 바라보다 입을 다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미유키는 여자의 집에서 나와 곧장 제집으로 향했다. 그는 서서히 잡생각이 떠오르는 사고를 무시하기 위해 도로 위 차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 밤 운전은 조심해야지. 자정이 넘어 주말이 된 도로는 미유키를 포함해 차량이 여럿 달리고 있었다.

무사히 주차까지 마친 미유키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드는 것이었다. 캔 손잡이를 꺾자 시원한 치익 소리가 난다. 그는 맥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자가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온갖 것들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멀스멀 흘러 나왔다. 가령 가게 앞에서 보인 추태를 쿠라모치와 여자의 친구에게 들킨 일이라거나. 

그걸 떠올리자 취기가 오르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져 식탁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식탁의 유리에 자신의 얼굴이 어둡게 비추어 보인다. 미유키는 고개를 들어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여자는 오늘 다섯 번째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얘기는 앞서 네 명의 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뜻이고, 오늘 불려 나간 미유키는 그 안에 못 들었다는 얘기다. 

왜 10년이 지나도록 이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미유키는 항상 타이밍이 따라주지 않았노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연애는 타이밍이다. 

그런 말은 미디어 매체에서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게 제 얘기가 될 거라고는 여긴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유키는 한창 야구에 푹 빠진 자신이 근시일 내에 사랑 같은 걸 하게 되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랑? 지금 그런 게 들어찰 구석이 있기는 한가. 하지만 대개 그렇듯 그런 종류의 것들은 당사자 동의 없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다.

미유키가 제 마음을 자각한 여름날로부터 얼마 후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유키는 한창 실연에 빠져 있는 여자에게 대뜸 고백할 만큼 무대포도 아니었고, 여름은 끝났어도 다가올 드래프트를 위해 그라운드에 꾸준히 얼굴을 내비쳐야 했다.

미유키의 일정은 연애 빼고 모든 게 착착 진행되어 갔다. 청백전도 즐겁게 끝냈고,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학창 시절을 만끽하며 학급 친구들과 어울렸다. 수험 생활이 한창인 제 팀원들을 장난 삼아 골려주는 건 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져 있는 순간순간에 본가에 있을 여자를 떠올렸다. 그는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스레 여자의 생각을 하는 자신을 돌아보고 기함했다.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감정의 트랙에는 끝이 없으니까. 그렇게 홀로 숙성시킨 마음은 제법 절절해져서, 미유키는 다시금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여자를 더 애틋하게 여기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연애와 사랑은 타이밍이다. 

미유키가 그러는 새에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그는 1, 2학년의 겨울 합숙을 지켜 보고 본가로 돌아왔다. 새해 첫날에는 여느 때처럼 여자가 들이닥쳐 신사에 가자고 졸랐다. 겨울 합숙은 작년에 졸업 했으니까, 신사의 무수한 계단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미유키는 봉헌함에 100엔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힐긋 옆에 선 여자를 훔쳐보았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끈을 당기자 나는 종소리가 청량했다. 두 사람은 손뼉을 두 번 치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그는 좀 유치하지만 옆에 있는 애랑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야구는 내가 잘 하면 되지만 사랑은 어째 하늘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직전에 뽑은 새해 종합 운세의 연애운이 대흉인 걸 의식하지 않았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여자는 무탈한 학교생활과 가족의 건강을 빌었다고 말하면서 미유키에게 무얼 빌었냐고 물었다. 그는 선수 생활 잘 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어물쩍 답했다.

이것이 미유키가 놓친 첫 번째 타이밍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 변화는 이상 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3월, 졸업식을 마친 미유키는 예정대로 프로 선수가 되었고, 그 후 말도 안 되게 바빠졌다. 학생과 사회인은 천지 차이구나. 미유키의 사람과 곤죽 사이 어드메의 몰골을 보고 고등학교 시절 선배였던, 그리고 이제는 구단의 선배가 된 아즈마가 킬킬 웃으며 그를 놀려 먹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아즈마는 그 해 1군에 완전히 복귀한 상태였다.

미유키의 타격을 높이 산 감독의 기용으로 시즌 중 1군으로 몇 번인가 콜업도 되었다. 그렇게 선 첫 타석에서 시원하게 뻗은 안타를 뽑아냈다. 고시엔 우승 학교의 주전 포수, 4번, 그리고 주장. 미유키는 그렇게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여자에게는 두 번째 남자친구가 생겼다. 이번에는 한 학년 위의 선배라고 했다. 미유키는 전화로 근황 얘기를 듣다 튀어나온 남자친구 화제에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그래, 뭐, 잘됐네. 하고 속없이 맞장구를 쳤다.

이때까지는 그래, 미유키도 아직 미성년인 여자에게 대쉬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 평정심을 유지했다. 학창 시절 연애가 뭐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미유키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연애하다 깨져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던 제 친구를 떠올리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리고 그런 미유키의 생각 그대로, 여자는 두 번째 남자친구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헤어졌다. 입시 끝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졸업식 직전에 이별을 고했단다. 소식을 전해 들은 미유키는 여자가 또 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여자는 담담했다.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어. 막 학기 들어서는 공부한다고 잘 못 만나기도 했고." 

아니 그럴 거면 왜 고백을 하냐고. 수험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스프링 캠프에서 돌아온 미유키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여자는 왜 오빠가 화내냐며 되려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얼굴을 보는데 또 화가 사르르 녹아서….

"3학년 때 누굴 사귀는 건 어려운 것 같아. 공부하기도 바쁘니까…. 나도 올해는 정말로 공부만 할 거야!"

수험 생활은 구경만 해 본 미유키도 고개를 주억이며 맞장구를 쳤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럼 적어도 앞으로 1년은 여자가 다른 사람을 만날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자가 대학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남자친구가 생길 거라는 걸 몰랐으니까.

여자는 수험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도쿄 소재의 제법 이름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여자가 다니게 된 대학은 미유키가 소속된 구단의 홈구장과 거리가 가까웠고, 미유키가 나와 사는 지금의 집과도 가까이에 위치했다. 본가에서 거리가 꽤 되는 탓에 여자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여자는 첫 학기 시간표에 월요일 공강을 만들었고, 미유키는 월요일이 오프였다. —당시 미유키는 1군 백업 포수로 들어가 있었다.— 겨우내 운전면허를 취득한 미유키는 월요일이면 본가에 갔다가, 저녁 무렵에 여자를 데리고 학교로 돌아가는 날을 반복했다. 미유키는, 그런 날들이 기꺼웠다.

"참, 우리 동아리에 오빠네 구단 골수팬이 있거든? 근데 걔랑 얘기하는데 갑자기 오빠 이름이 나오는 거야. 그게 좀 신기하기도 하고, 아는 척하고 싶기도 해서 어릴 때부터 한동네 살아서 친하다고 했더니 안 믿더라?"

"그래?"

"응! 뭐랄까… 한동네 살면 다 친하냐고 말하는 느낌이었어. 난 오빠랑 진짜 친한데."

"하하,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전화 안 받으면 민망하잖아. 오빠 휴대폰 잘 안 보고 사니까."

"야."

"히히, 농담이야. 오빠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리고 내가 인맥 자랑하고 싶어서 말한 것도 아니고…. 안 믿으면 그만이지."

…나도 참 중증이군. 사랑은 사람을 물렁하게 만든다. 네가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고작 그 한 마디에도 가슴이 술렁인다. 미유키는 핸들을 고쳐 잡으며 힐긋 조수석을 곁눈질 했다.

"그거 아직도 하고 다니네?"

"응? 뭐를?"

"목걸이."

여자의 목에서 목걸이가 반짝였다. 미유키가 재작년에 선물한 물건이다. 여자가 미유키의 졸업식에 오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는 뭘 선물하면 좋아하냐'의 그 '선물'이 바로 저 목걸이였다.

"아~ 당연히 하고 다녀야지. 누가 챙겨준 생일 선물인데." 

정작 본인은 지금까지도 그게 자기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여자가 키득 웃으며 목걸이를 매만졌다.

미유키는 시내에서 목걸이 고르던 때를 회상하고 허허로이 웃었다. 누가 봐도 이성에게 선물할 것이 분명한 포장의 종이백을 기숙사에 들고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걸리기라도 할까 얼마나 노심초사 했었는지, 여자는 알기나 할까.

"다른 건 안 필요해? 뭐… 반지라든가."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추어 섰다. 미유키는 전부터 줄곧 비어 있는 여자의 손가락을 의식하며 물었다. 여자는 음, 하고 말을 늘였다.

"글쎄? 액세서리 즐겨 하는 편은 아니라 필요하진 않아. 그치만… 오빠가 선물해주는 건 좋아."

뭐랄까, 그 미유키 카즈야가 액세서리를 골랐다고 생각하면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단 말이야. 오늘은 안 했지만 작년에 사 준 귀걸이도 자주 하고 다녀.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미유키는 괜히 뜨끔해서 멋쩍게 웃었다. 그 말 대로였다. 여자가 자신에게 하듯 의류나 소품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굳이 액세서리를 택한 건 그 나름의 노림수였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조금쯤 의식해주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그게 좀, 생각보다 더 효과가 없었다.

물론 기뻐하긴 했다. 여자는 미유키에게 고마워 했고, 선물 받은 액세서리를 자주 착용하고 다녔다. 하지만 정말 그뿐이었다. 아마 이번에 반지를 선물한대도 비슷한 반응이겠지. 미유키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는 이제 이번 골든 위크에 미유키의 아버지와 제 어머니가 둘이서 교외로 여행 가기로 한 것을 들었냐며 입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이런 게 말이지. 전혀 무드가 안 잡힌다고. 미유키가 속으로 난처하게 웃었다.

미유키는 이때 어렴풋하게 깨달았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여자의 이성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도 못 했다는걸.

그리고 두 주 건너 뛰고 다음 달에 만난 여자의 오른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중간부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야 그러시겠죠. 그렇게 술을 퍼 드셨는데."

일어나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여자였다. 일어나자마자 전화할 줄 알았다. 미유키는 잠긴 목소리로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 나 오빠 친구들한테 실수하지 않았어?

"아마도 아닐걸? 다들 재미있어 하던데."

— 진짜? 그럼 다행인데…. 집에는 오빠가 데려다준 거지? 그래도 어떻게 들어오긴 했네. 비밀번호 누를 정신은 있었나 봐?

"아니, 그거 내가 도어키 때려 맞춰서 들어간 거야. 너 진짜 인사불성이었다니까…."

— 뭐?! 그걸 찍어서 맞췄다고?!

"찍었다기 보다는… 너희 아버지 생신이잖아, 그거."

집 비밀번호는 가족 생일로 해두는 경우도 많으니까…. 미유키가 모르는 척 덧붙였다. 여자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그래, 그렇지. 하고 어딘가 흘러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유키는 상대가 앞에 없는데도 슬쩍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튼… 도어키는 바꿔 둬."

— 에이, 됐어. 뭘 굳이… 대신 오빠만 알고 있어.

스피커 너머의 여자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여상스레 웃었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미유키는 울컥해서 헛숨을 들이켰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약간 힘을 실어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여자는 이렇듯, 단 한 번도 미유키를 이성으로 의식해준 적이 없었다.

필름 끊겨서 진짜 걱정했는데,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다. 여자가 다시 재잘거린다. 별일이 없기는. 나는 어제가 살면서 제일 정신 혼미했는데. 미유키가 말을 삼켰다.

— 오빠 친구들한테는 미안했다고 전해줘.

 "신경 안 써도 돼. 먼저 합석하자고 그런 것도 걔네인데 뭘."

— 그래도!

"네, 네. 알겠습니다."

속은 괜찮고? 응, 완전 멀쩡해. 그럼 다행이네. 미유키는 전화를 마무리 짓고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커튼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 온다. 햇빛에 눈이 시려 팔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리를, 해야 하나…."


미유키가 처음 여자의 전화를 받은 건 같은 해 늦가을이었다. 그의 구단은 아쉽게도 일본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미유키는 조금 이른 오프를 맞이했다.

전화는 그가 저녁 식사를 마치도 한가로이 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중에 걸려왔다. 발신인은 여자였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취한 게 분명한 말투로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그것도 반쯤 우는 소리로. 그래서 주소를 추궁해 달려갔더니 여자는 대학가 술집에서 테이블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여자를 일으켜 세우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아니, 걔가 자꾸…."

남자친구랑 싸웠단다. 

여자는 미유키의 팔 한쪽을 끌어안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미유키는 뭐든 네 말이 맞다고 대꾸하며 여자를 살살 달랬다.

여자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며 그럼 그냥 헤어지지 소리를 몇 번이나 삼켰는지 모르겠다. 미유키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제 신세를 한탄했다. 나는 어쩌다가 걔를 좋아하게 돼서.

이상하게도 여자는 그럴 때마다 미유키를 찾았다. 집 나와서 아는 사람도 없는 중에 가까이에 사는 미유키가 의지라도 됐던 것인지.

그렇게 돌발성 술자리와 사전 약속을 잡고 가진 술자리가 몇 번. 그 과정에서 미유키는 여자가 주량을 넘기면 필름이 끊긴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둘이서 평범하게 술자리를 가졌던 어느 날에, 마찬가지로 취기가 올랐던 미유키는 충동적으로 여자에게 고백했다.

"이럴 거면 그냥 그 자식이랑 헤어지고 나랑 사귀면 안 돼?"

"…갑자기 뭐라는 거야? 싫어!"

물론 대차게 까였다. 여자는 취한 와중에도 황당해 하며 농담 하지 말라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일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미유키의 정제되지 않은 말은 고백 비스므리 한 걸로도 안 들렸으며, 여자는 남자친구—이때는 네 번째 남자친구였다.—와 다툰 거지 헤어진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운 좋게도 여자는 그 대화를 모두 잊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미유키는 모든 걸 기억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책이라면 마지막 장은 뭐라고 쓰여 있을까? 

미유키는 책 뒷부분을 펼쳤다 닫은 것처럼, 예정된 결말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친구는 영원하지만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고 했던가. 지금까지 여자의 연애의 끝을 보면 그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자가 만난 남자들은 이제 완전히 남, 이때까지 남아 있는 건 미유키였다. 그건 미유키가 연인 역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동시에 그 역할은 언제든 그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남이 되는 건 생각보다 순식간이다.

혼자 펼친 감정은 혼자 갈무리 해야 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은 온전한 본인의 몫이다. 그는 신경을 돌릴 대상으로 야구를 택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미유키는 처음 하는 마음 정리가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그때 잠시 뿐이었다. 

"그래서— 카즈야, 듣고 있어? 엄마랑 아저씨가 주말에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냐고 물어 보셨다니까. 시간은 오빠한테 맞추면 될 것 같은데. 이번 주 더블 헤더 아니지?"

막상 얼굴을 마주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그간 쌓았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속이 복잡해도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감이 기꺼웠다. 알게 모르게 상대를 배려하는 세심한 구석도 좋았다. 그리고 망설이면 잡아 끄는 그 막무가내가 좋았다. 잡아 끌려가는 자신도 싫지 않았다.

미유키는 짧은 방황을 끝내고 다시 현실을 받아 들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발 들인 트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미유키의 사랑은 그랬다.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고, 그저 올곧게, 우직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미유키는 사랑을 꼭 야구처럼 했다. 푹 빠질 줄은 알아도 헤어 나올 줄은 모른다. 

그래서 미유키는 자신을 부르는 전화나 문자 따위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항상 같은 레파토리에, 하룻밤이 지나면 잊혀질 가벼운 고백을 속닥였다. 

이제는 타이밍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롯이 시간을 재다가 생긴 안정된 지금과 새로운 관계 사이의 망설임 문제였다.


"이제 정말 그만둘 거야."

미유키는 괜히 소리 내어 말하며 고무장갑을 걸고, 행주로 싱크대의 물기를 훔쳤다. 

생각을 안 할래도 어젯밤 쿠라모치와 여자의 친구와 대치했던 상황이 자꾸만 떠올랐다. 확실히 남들이 보기에는 기형적인 관계다. 쿠라모치의 그런 경멸 어린 표정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 난생처음 봤다. 행주를 쥐어짜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덕분에 머리가 조금 식었다. 미유키는 손의 물기를 닦고 휴대폰을 들었다. 라인이 하나 와 있었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지? (13:38)

발신인은 쿠라모치다. 미유키는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지. 

(14:02)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만취한 사람한테 고백하는 머저리 (14:03)

아….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쇼파에 앉았다. 쿠라모치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14:07) 그건 잊어주라….

그건 상관 없는데 너 (14:07)

아니 됐다

네가 알아서 해야지 (14:09)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거든…. 미유키는 마지막 라인에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정신이 좀 들었다. 익숙해진다는 건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미유키가 딱 그 꼴이었다.

"음……."

손가락이 다리 위를 천천히 두드린다. 미유키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머리가 식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그만할 때가 됐다. 아주 이성적인 상태에서 내린 판단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오래 했지. 미유키가 중얼거렸다.

미유키는 앞으로의 제 일정을 떠올리며 천천히 여자와의 만남을 줄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지난 날의 실패를 되새겼다. 감정 정리의 첫걸음은 상대를 자주 보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2월이면 스프링 캠프로 바빠질 테니 연말과 연초만 넘기면 된다. 가족 모임은 어쩔 수 없으니 사적인 만남이라도 자제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시즌 시작하고는 원래도 얼굴 볼 새가 없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고. 

미유키가 주먹을 쥐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스프링 캠프며 시즌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시간 속에서 미유키는 의도적으로 여자를 의식하지 않으려 야구에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즌 우승과 MVP로 돌아왔다.

미유키는 자신이 그간 마음을 꽤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그 근거로 지금 여자와 만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시즌이 끝나고 찾아온 여유 시간이었다. 미유키도 전화나 문자를 제하고 여자와 대화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마 본가에서 만나는 것을 제하고 사적으로 만나는 건 '그 날' 이후로 거의 처음이다.

앞자리에 여자가 앉아 있지만 심장이 덜걱거리지도 않고, 괜히 기분이 들뜨지도 않는다. 하하, 그래. 그때랑 지금은 또 다르지. 상황도 다르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성숙함에 차이가 있다. 미유키는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었다. 메뉴는 시럽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쓰디쓴 아메리카노다. 이제 더는 여자를 상대로 감정의 동요 같은 건 없었다.

"오빠, 나 다음 주에 선 봐."

"…?"

적어도 여자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미유키가 제 귀를 의심했다. 뭐, 뭘 본다고? 말까지 더듬으며 되묻자 여자가 다시 대답했다. 선 자리 나간다고. 동시에 미유키의 머리가 온통 흰색 배경과 물음표로 가득 찼다. 배경음으로 앞선 1년이 파사삭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미유키의 표정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좀 봐! 뭘 그렇게까지 놀라고 그래?"

"아니… 잠깐만…. 갑자기 웬 선?"

"엄마가 괜찮은 사람 소개 받았다고 한 번 나가 보라길래."

"……너 그럼 결혼… 아니, 아주머니가 결혼하라고 독촉하셔?"

"독촉은 아니고…. 결혼 생각 있냐고 물어 보긴 하시지.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대뜸 아는 사람한테 누굴 소개를 받아 오더라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일단 나가 보기로 했어."

갑자기 불쑥 다가온 여자의 결혼 소식—정확히는 맞선 소식이다—에 미유키는 황망해졌다. 잔잔했던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남의 속도 모르고 여자는 태연하게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생각해보니까 괜찮을 것 같더라고.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일단은 소개팅 한다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나서 정말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선 봐서 만난 사람이랑 정말 잘 맞아서 몇 달 만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잖아. 내 친구도 작년에 선 봐서 결혼 했거든. 처음에 서로에 대해서 대강 알고 시작하니까 나중에 집안에서 조건 따질 일도 적어서—"

"…조건? 무슨 조건?"

"어, 뭐. 나이나 직업, 수입, 종교 같은 거. 각자 집안에서 원하는 배우자상이 있기도 하니까. 나는 가정사도 미리 알려두면 편하겠다 싶어서."

"가정사?"

뭘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뭐,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겠지. 그 생각대로 여자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안 계시잖아. 거기까진 이해했다. 다음 말을 이으려던 여자가 갑자기 고민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눈을 도록 굴리던 여자가 테이블 위로 두 팔을 올리고, 몸을 미유키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이거 진짜 예전 얘긴데…. 예전에… 그러니까 그 바람났던 개자식이랑 사귈 때 있잖아. 그때 걔네 집에 인사 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그때 식사 하다가 집안 얘기가 나왔었거든. 고향은 어디냐, 부모님은 뭐 하시냐…. 근데 아버지가 안 계신다니까 탐탁잖아 하시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 그러면서 좀 이런 저런 얘기를 하셨는데… 그게 좀… 그랬었지."

"…무슨 얘기를 했는데?"

"음, 뭐… 결혼식에서는 누구 손 잡고 들어 갈 생각이냐든가…. 그때는 당황해서 그냥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대놓고 눈치 준 거지."

돌아 보니까 걔랑도 그때부터 좀 서먹해졌던 것 같아. 그렇다고 바람을 피울 줄은 몰랐지만. 여자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결혼은 둘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별 생각 없었는데, 어른들 중에는 아직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리 사정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나중에 괜히 마음 상할 일도 없고 괜찮지 않을까 해서. 근데 이 얘기 우리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절대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여자가 미유키에게 단단히 일렀다. 미유키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묵직한 돌덩이가 뱃속에 둘러앉은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입이 쓴 이유가 커피 때문인지 여자의 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간만에 차려입고 나가려니까 좀 긴장되는 거 있지?"

격식 차리는 게 소개팅이랑은 또 다르잖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한 여자가 다음 주 약속에 나갈 때 귀걸이는 하는 게 좋을지 안 하는 게 좋을지에 관해서 물어왔다. 미유키는 금이 간 정신머리로 여자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다. 이제 커피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번잡했다. 뒤통수를 두 대 정도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미유키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젠장, 이건 진짜 글러 먹었네. 급하게 욱여넣은 상자는 결국은 터지는 법이었다. 


도쿄 시내의 술집, 방으로 분리된 공간에 남자 둘이 마주 앉아 있다. 실수로라도 외부인이 들어 오기는 힘든 구조에 제대로 된 시멘트 벽으로 나뉘어 있어 대화 소리가 넘어가는 걸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쿠라모치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했다며."

"했었어! 진짜로!"

"퍽이나 했겠다…."

쿠라모치는 잔에 반쯤 남은 술을 쭉 들이켰다. 시즌 중이었던가, 흘러가듯 여자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미유키가 뭐라고 했더라. 

'너한테 그런 꼴을 보이고 나니까 정신이 좀 들더라. 그래서 음… 정리했어.' 

정리를 했으면 이러고 있지 않겠지. 쿠라모치가 혀를 찼다.

미유키는 제 머리를 냅다 테이블에 처박았다. 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여자가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열이 받았다. 결혼식에 누구 손을 잡고 들어가? 동시 입장해, 미친 놈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여자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게 화가 났다. 그리고 속상했다. 

테이블에는 이미 술병 여러 개가 늘어져 있었다. 미유키에게는 약간의 알코올과 제 한탄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부를 수 있는 건 유일하게 사정을 알고 있는 쿠라모치 정도였다. 

쿠라모치는 정말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눈곱 만큼도 없었다. 그가 얼마 전 일본 시리즈에서 미유키가 속한 구단과 붙어 접전 끝에 아쉽게 시즌 우승에서 미끄러진 건 둘째로 치고,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일인지 감이 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화 해서 하는 첫 마디가 이거였다.

'저기, 쿠라모치…. 작년에 그… 네가 나보고 미친놈에 머저리라고 했던 거 기억나?'

'끊는다.'

'아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가 시즌 우승한 MVP 놈 연애 상담이나 해줘야겠냐. 하지만 평소에 술은 입에도 잘 안 대는 사람이 집 근처까지 찾아와서 술 살 테니 어울려 달라고 말하는데, 그걸 매정하게 걷어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에 돌아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미유키는 한탄을 계속했다. 요즘 세상에 부모님 한 분 안 계신 게 뭐 얼마나 큰 흠이라고 그래? 그렇게 따지면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고. 그는 속사포처럼 소리 내 말을 내뱉고 속이 미어져 울컥했다.

"나라면 그런 소리 안 듣게 할 수 있는데…."

"얼씨구."

이 새끼는 진짜 뭐가 문제지? 야구 빼고 할 줄 아는 게 정말 집안일 뿐인 건가? 그래도 나이가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더니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뭘 한 거야, 대체. 쿠라모치가 답답함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뭘 어쩌고 싶은… 아니, 아니다. 너 이럴 거면 확실히 해. 취한 사람한테 고백 같은 거 하지 말고 맨정신일 때 제대로 하라고. 정말 늦기 전에. 내가 장담하는데 계속 이딴 식으로 굴면 1년 후가 됐든 2년 후가 됐든 넌 분명 (—) 씨 결혼식 신부 측에서 부조금이나 받고 있을 테니까."

"뭐? 왜 하필 부조금이야?"

"그럼 너한테 사회를 맡기겠냐, 주례를 맡기겠냐."

부조금도 싫고 사회도 싫고 주례도 싫어…. 미유키가 테이블에 오른뺨을 붙이고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그 꼴을 보고 쿠라모치는 작년에 처음 만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만, 일방통행도 해당 사항인가 보다.

"대체 왜……."

"……."

"……."

"…야, 자냐?"

갑작스레 잦아든 푸념에 쿠라모치가 황당해 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 미유키.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미유키는 미동이 없었다. 이거 주정뱅이 시중이나 들게 생겼군. 쿠라모치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술병에 조금 남은 술을 털어 마셨다. 그리고 미유키의 외투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미유키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어쩌지. 쿠라모치는 미유키의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망설였다. 타이밍도 이런 타이밍이 없었다. 그는 결국 전화가 끊기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카즈야, 아직 안 자지? 물어 볼 거 있어서 전화 했어. 그 왜, 작년 이맘때 즈음에 만났던….

"저, 죄송한데 미유키 녀석이 지금 술 마시고 뻗어 있어서요."

받자마자 쏟아지는 목소리에 쿠라모치가 조금 급하게 상대의 말을 끊었다. 상대는 낯선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잠시간 말이 없었다.

— 아… 저 카즈야 많이 취했나요?

"음… 네, 그렇긴 한데. 급한 일이시면 제가 어떻게든 깨워보겠습니다."

— 아,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급한 건 아니라…. 그보다 누가 데리러 가야 하는 상황인가 해서요. 

"그건…."

쿠라모치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사실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 네, 그럼 가게 상호 알려주시면 바로 그리로 가겠습니다.

쿠라모치는 가게의 위치와 상호를 상대에게 말해주었다. 곧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설정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위치한 방의 이름까지 전달한 후에 그는 전화를 끊었다.

여자는 대략 20분 정도 지나서 도착했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여자는 길어진 머리카락을 제하고는 쿠라모치가 기억하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여자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 듣고 혹시 하기는 했는데. 쿠라모치 씨 맞으시죠? 오랜만에 봬요. 이번에는 저랑 카즈야 역할이 반대네요."

"안녕하세요. 일부러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이 녀석이 이렇게 될 때까지 마실 줄은 몰라서…."

"뭘요! 간만에 동생 노릇을 하는 것 같아서 나쁘지 않네요."

동생 노릇이라…. 쿠라모치는 조금 숙연해졌다. 미유키가 이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쿠라모치는 미리 꺼내 놓았던 미유키의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저는 그럼 먼저 계산하고 오겠습니다."

여자는 밖으로 나가는 쿠라모치의 손에 들린 것이 미유키의 지갑이라는 걸 알아보고 조금 웃었다. 웃음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내리면 갈색 곱슬머리가 시야에 들어 왔다.

뭐 때문에 이렇게 마셨을까. 늘어진 술병들을 보고 여자는 곰곰이 미유키가 이렇게까지 취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봤다. 항상 먼저 취하는 쪽은 여자라서 미유키가 제대로 취한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미유키는 본디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다. 본가의 냉장고에 들어찬 맥주병을 보고 아버지께 너무 자주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 했지 결코 본인이 과음을 하진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아닌데, 시즌 우승하고 한참 기분 좋을 시기일 텐데. 

여자는 이런 저런 가정을 셈하다가 그의 머리를 조금 들어 안경을 벗겨냈다. 테이블과 맞닿은 안경다리가 얼굴에 눌려 영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미유키가 깼다.

"……아."

"아, 미안. 깼어?"

"……."

"어… 저기, 괜찮아? 물 마실래?"

천천히 감았다 떠지는 눈의 초점이 흐리멍덩하다. 진짜 취했구나. 여자가 내심 놀라워 하며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팔목이 잡혔다. 물이 아니라 음료수인가? 예사로운 생각을 하며 고개를 내린 여자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선 안 보면 안 돼?"

"……."

팔목을 잡았던 손이 위로 올라가 손등 위로 겹쳐진다. 미유키가 아래로 겹쳐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여자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거… 나가지 마."

응? 선 보지 말고, 그냥…. 끝 맺지 못한 말이 흐려지고, 다시 고개가 툭 떨어진다. 손의 힘도 풀려서 테이블 위로 널브러졌다. 여자는 입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눈동자가 당황스러운 듯 흔들렸다. 그리고 잡혔던 손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어 새하얀 조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쿠라모치가 돌아왔다. 쿠라모치는 여자의 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보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확신했다.

"쿠라모치 씨, 제가 지금 좀… 확신이 안 들어서 그러는데요."

"네?"

손가락이 탁자를 천천히, 일정하게 두드렸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쿠라모치가 여자의 앞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테이블 위로 엎어진 갈색 머리통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선 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이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 잠깐 사이에 사고를 치는군. 쿠라모치는 두통이 밀려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등 떠밀어 주는 역할이 지금의 미유키에게 필요하기는 했다. 그래서 여자의 전화를 받은 것이고. 물론 거기에 자신이 여자와 이런 문답을 할 거라는 계산은 없었지만…. 쿠라모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일단은… 확신 하셔도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정말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라모치가 진 빠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뒷일은 쿠라모치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는 미유키를 변호하는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그래서 선 자리 안 나가실 거예요?"

"아, 나갈 거예요. 소개해주신 분 체면도 있는데 이제 와서 바람 맞힐 수는 없죠."

"그건… 그렇네요."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쿠라모치는 왠지 몸에 힘이 빠졌다. 어쨌든 미유키와 여자는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간다. 쿠라모치는 미유키의 머리 가마를 쳐다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셨어요?"

생긴 거 번듯하고, 다들 우스갯소리로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놀리기는 하지만 정말 심각한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에도 미유키를 마음에 품었던 사람은 손가락 열 개를 거뜬하게 넘었다. 그 미유키 카즈야가 밤중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달려 나올 정도였으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기엔 어폐가 있다. 여자는 미유키를 의식한 적이 없었을까. 쿠라모치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여자는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어딘가 미묘했다.

"정말 몰랐어요. 그런데…."

"…?"

"알고 생각해 보면 플러팅이었나 싶은 게 있기는 하네요…."

"아……."

쿠라모치가 탄식했다. 여자가 머뭇거리다 덧붙여 말했다.

"예전에, 대학생 때 남자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네 소꿉친구라는 사람이 자꾸 네 애인 노릇을 하려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고요."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쩌면 걔가 맞았는지도 모르겠어요."

…미유키가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여자가 둔한 건가? 쿠라모치는 미유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약간 수정했다. 어쩌면 둘 다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즈야가 저한테 고백 같은 걸 할 기미는… 못 느꼈거든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요.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연애 경험은 좀 있는 편이라서요. 확신할 수 있어요."

그게…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취하셔서 기억 못 하시겠지만. 그리고 아마 정황상 한 두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쿠라모치는 말을 삼키고 무난한 대답을 내놨다.

"뭐,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야구 말고는 다 서툰. …그래도 기분 상하진 않으신 것 같아 보이시네요."

"좀 놀라긴 했는데… 딱히 기분 나쁠 일도 아니고요. 음, 카즈야는 어린 시절의 첫사랑? 그런 거라서요.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해요."

쿠라모치는 그 순간 작년에 들었던 황당한 대화를 떠올렸다.

'왜? 어릴 때는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아, 그렇다고 마음이 있었다는 건 아니고요. 첫사랑은 다들 그렇잖아요. 그리고 저희가 워낙 가까이 지내서요, 뭘 하든 가족 같았죠."

여자가 칼 같이 선을 그었다. 쿠라모치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겹쳐지는 목소리에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여자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네? 쿠라모치가 의문을 표하자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그래서, 그랬는데요. 방금 전까지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뀐 것 같거든요."

"어떤… 부분에서요?"

"글쎄요…."

대개 이런 것들은 작은 계기만 있어도 순식간에 바뀌는 법이다. 사랑에 거창한 계기는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작은 전환점 하나라고 여자는 줄곧 생각했다. 여자가 키득 웃었다.

"방금 전의 절박한 얼굴?"

"……미유키랑 성격이 닮았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으세요?"

"아하하, 가끔 있어요. 언니 오빠는 동생의 거울이라잖아요."

여자는 유쾌하게 웃었다가, 옆에 엎드려 있는 미유키를 의식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붙잡으면 잡혀 줄 의향이 있어요. 아무튼… 결론은 그거죠. 제가 선 보러 나가는 걸로 이렇게 안 하던 과음까지 하면서 실의에 빠져 있을 거라면, 그럴 시간에 좀 솔직하게 굴었으면 한다는 거요."

슬슬 나갈까요?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던 휴대폰과 미유키의 외투를 챙겼다. 쿠라모치는 테이블 맞은 편으로 돌아 이런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미유키를 둘러업었다. 어깨가 묵직했다. 

여자가 빠트린 물건은 없는지 자리를 돌아 보았다. 쿠라모치의 눈이 여자를 쫓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건 반 정도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말하는 걸 보면 여자도 보통 성격은 아니다. 이런 일에… 보통 저렇게 태연한가? 쿠라모치가 힐긋 미유키를 보고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쩌실 거예요?"

"당분간 남자친구가 있을 예정은 없으니까… 일단은 두고 보려고요."

"하지만 이번 주말에 선보러 가시잖아요? 그 맞선 상대가 미유키보다 마음에 들면요?"

쿠라모치의 말에 여자는 자신이 미유키에게 전화 했던 이유를 상기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여자의 입가에 머쓱한 웃음이 떠올랐다.

"실은 그 맞선 상대 말인데요…. 이렇게 됐으니까 카즈야한테는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거 쿠라모치 씨한테만 말해드릴 테니까 당분간 카즈야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들은 쿠라모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든 미유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대체 운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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