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별은 왜 새벽별인가

BM ; 온기 어린 손바닥

베인밀레 토막글/G25 및 리플레이 강스포일러 주의

※ G25까지의 메인스트림 및 G22 리플레이 강스포일러 주의.

사랑은 많은 것을 가능케 한다.

이를테면 마을 바깥으로 한 번도 나서 보지 않은 이에게 머나먼 동쪽의 나라로 여행할 의지를 주기도 하고, 가을의 낙엽처럼 떠돌던 이가 한 곳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도록 하기도 한다. 사랑 앞에서 ‘절대’나 ‘결코’ 같은 말은 금세 제 빛깔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별의 여행자가 상흔으로 너덜거리는 기억을 되짚어 올라, 기어이 그의 가슴에 결코 아물지 못할 흉을 남길 창날 앞에 처음 선 그날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의 입가가 가볍게 경련한다. 붉고 검을 시선이 그를 영원한 것처럼 바라본다. 발아래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이제는 그의 앞에서, 웃으며, 입을 연다.

 

“왜 다시 나와 마주하려 하지?”

 

남자의 물음에 모든 것은 주춧돌을 빼낸 것처럼 부스러지기 시작한다. 곁에 있을 이들이며, 발치에 낮게 깔린 마법 안개,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린 대지 아래의 검고 차가운 공간 같은 것이 뿌리를 잃은 나무처럼 쓰러지고 만다. 밀레시안은 아랫입술을 떨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자신을 베인이라 소개한 남자는 소금기둥처럼 선 자에게 다가섰다. 그 눈에는 갈앉은 애정이, 그러니까, 이후의 궤적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이에게서나 볼 수 있는 다정함 따위가, 뱀의 똬리처럼 도사렸다. 밀레시안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다.

 

“지나간 일에만 매달리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대.”

 

얼음장 같은 손. 금방이라도 치솟아 사라질 불길이 숨어있는 것처럼 열띤 기색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그와 아주 대조되는 낮고 다감한 목소리. 여행자는 그것들이 모두 지옥의 강처럼 발아래에서부터 그를 살라 버리고 있다고 느꼈다. 승리자의 깃발이 목을 조르고, 헤 벌어져 피 흘리는 상처에 파도가 친다.

 

“내가 바란 건... 그런 일이 아니란 것쯤, 잘 알고 있지 않나?”

 

오래전 마셔 비운 독잔이 뱃속에서 요동친다. 토해낼 것도 없는데 욕지기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여행자는 이를 악물고 혀를 끊어내듯 한 자 한 자 뱉는다.

 

“나는, 아직, 당신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어.”

 

그건 내가 내린 결론이 아니야. 이 말을 하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여행자는 눈을 부릅뜬 채 남자를 응시하며 서슬 퍼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당신이 내게 결론을 강요했을 뿐이야. 시간과 운명이, 신의 뜻 따위가 내게, 당장 결론을 내리라고, 날 재촉했을 뿐이야. 당신의 끝이 내 손에 칼을 쥐여주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고!

창백한 입가엔 낮은 웃음이 걸렸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여행자는 그 목소리에 날카로운 사금파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진다.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질문의 답은 맥없이 명료하다. 영웅은 이미 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사랑은 영원한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 끝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패배로써 광휘에 스민 애정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렇게 완전해질 것이다.

 

밀레시안은 얕게 뜨는 호흡을 토해냈다. 마지막 목소리를 더듬었던 것처럼 떨리는 손이 천천히 남자의 얼굴을 향한다. 어떤 반론도 말도 부탁도 한마디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목소리를 들은 듯이 평온하고 잠잠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손이 남자의 얼굴에 닿는다. 천천히, 둥근 선을 따라 손이 미끄러진다. 그 순간만큼은 지나간 시간을 더듬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지금처럼 생생해, 꼭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별에서 온 자는 깜박이는 불빛처럼 속삭인다.

언제나 당신의 뺨이 당신의 손처럼 차가운지 알고 싶었어...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결말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댓글 1


  • 감성적인 악어

    베인 이 자식 힘들어하는 밀레 앞에서 알기 쉽게 다정하게 구는 게 괘씸해요. 오랜만에 베밀 뽕이 찹니다. 글 길이가 짧은 만큼 바꿀 수 없는 결말을 반복하는 밀레의 행동처럼 덧없는 느낌을 살려준달까 마지막 문장이 더욱 날카롭게 받아들여진달까 세상에 베인이 괘씸하고 아니 조금 더 나은 감상을 쓰려고 스크롤을 올렸는데 베인 괘씸하단 말밖에 못 하겠네요 이 괘씸한 자식...왜 실실 웃고 앉잤죠?!?!?! 아 괘씸해 갑자기 댓글 달면 놀라실 것 같은데 선생님의 이 연성이 제 심장을 뚫고 지나가 버렸어요...정말로 여태까지 본 수많은 베밀 명작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작입니다....너무 좋았어요...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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