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잘재잘

잊혀진 이야기

주인공 밀레시안 전생 이야기

- 오리지널 밀레시안 묘사 및 설정 주의

- 밀레시안이 되기 전의 전생을 이야기합니다.

밀레시안들은 다난처럼 본격적인 사회나 구조 따위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연결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앞 농장 사는 밀레시안과 안면을 트고 지낸다든가, 던전을 갈 때에는 꼭 같이 가는 사람이 있다던가. 밀레시안들은 자주 마을 한쪽에 친밀한 상대를 불러내 수다를 떨곤 했다. 밀레시안임을 티 내는 옷차림만 아니었다면 다난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쓸데없는 이야기, 먼 여행을 가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누구랑 누가 싸운 이야기, 인간관계에 대한 눈물 젖은 토로 등등. 종일 듣고 있자면 도대체 언제 저 입이 다물어질까 궁금해지는 주제들이 팔라라가 뜰 때부터 이웨카가 질 때까지 던바튼의 청명한 하늘을 채우곤 했다.

하여간, 베르다미어는 늘 그랬듯이 잠자코 입을 다문 채 허공에서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말들을 들었다. 그는 낯선 사람과 잘 어울려 떠드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들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서 있기는 좋아했다. 가끔 흥미로운 소문이 들리기도 했으니 일종의 정보 수집 목적도 있기야 했다. 마누스가 라비 던전에 들어갔다 이상한 걸 봤다더라, 글쎄 도적 고블린들이 5열 횡대로 서 있더라... 그는 이따금 귀를 쫑긋거렸고 이따금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새벽부터 밤까지 드문드문 서 있는 밀레시안들이 많은 것도 틀림없이 이런 얘기들을 귀동냥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조금쯤은 상상하면서.

그러던 중 그의 귀를 잡아끈 것은 한껏 신 난 목소리에서 튀어나온 '전생'이라는 단어였다. 뭐 그런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들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도 과거에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잘 기억이 안 나네. 베르다미어는 별로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큰둥하게 대충 헤집던 기억을 닫았다. 차라리 지금 들려오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 나을 거로 생각하며 그는 자세를 조금 바꿨다.

"밀레시안들한테는 전생이라는 게 있대."

"난 처음 듣는 말인데? 그게 뭐야. 엄청 수상하게 들려."

"나도 여행을 갔다가 만난 사람한테 들은 건데, 그 사람은 자기가 소울 스트림에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는 거야."

"그게 가능한 거야? 내 기억의 시작은 소울 스트림부터인데."

"그러니까 말이야! 너무 신기해서 무슨 일을 했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자기는 온종일 나무를 깎는 일을 했었대. 그래서 이번에는 나무라면 학을 뗀다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뭘 좋아하느냐고 했더니... 라며, 왁자지껄 쏟아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재능과 직업으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는 것까지 들은 이가 살짝 기울였던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 전생?"

창백하고 붉은 눈동자가 오른쪽 위를 향했다. 그런 게 있었을까? 당장 생각나는 건 없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베르다미어의 기억도 희고 부엉이 소리가 들리는 곳이 시작이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쌓여나가기 시작했었지. 나른한 표정으로 가늠하던 그가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정 궁금하면 꿈이라도 들어가 보지 뭐..."

스스로를 들쑤시는 짓은 그가 썩 내켜 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없으면 마는 거고, 있으면 좋지. 마침 딱 팔라라도 뉘엿 기울고 있었다. 이른 잠을 자기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는 오래 서 있어 찌뿌둥한 몸을 대충 풀어내고 보금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내쉬지 않았을지도. 아니, 애초에 잠을 자고 있는데 한숨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잠들기에는 성공한 것 같은데 -하도 오랜만에 '잠'이라는 걸 자 봐서 어림짐작에 지나지 않았지만- 꿈에 들어왔는지는 불확실했다. 베르다미어는 꿈속으로 추정되는 컴컴한 곳에 누워서 한참을 끙끙거렸다. 이거 그냥 잠에 취해 있는 거 아니야? 배 위에 무거운 솜을 얹고 있는 듯한 감각이 길게 이어졌다. 그가 딱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내 몸이 내 제어 아래에 있는 건 맞는데, 어째서인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자를 열어제끼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다고? 그가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어이없어할 찰나, 어딘가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드디어 어둠을 뚫고 무언가가 보이리라는 기대 아래에서 베르다미어는 고개를 돌렸다. 어쩌면 그냥 그랬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희고, 작고, 깡마른 누군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밀레시안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누군가는 아마도 창문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픈 사람인가? 그가 덤덤하게 생각했다. 창문으로 시선을 옮기면 여름의 싱그러움이 쏟아질 듯 환했다. 작은 방 안에서 창문 바깥의 화사함만이 빛났다. 밀레시안은 문득 침대 위에 누운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방은 너무 어두웠고, 또 너무 쓸쓸했다. 침대 옆에 놓인 협탁 위에는 물수건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대 위에 누운 인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잘 있었어?'

상냥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어깨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침대 위의 그 사람이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우는 것 같았거나.

'매일 와 주네.'

'너 보러 오는 건 하나도 안 힘든걸.'

밀레시안은 팔짱을 낀 채 그것을 관망했다. 그들은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 시답잖은 말들을 퍽 다감하게 하는 목소리나, 싫거나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대답하는 저 사람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내 전생은 뭔데? 베르다미어는 지루하게 속으로 속삭였다.

'밖은 벌써 여름인 것 같더라.'

'응, 날이 아주 더워. 물 자주 마셔.'

'밖에 나가 움직이기나 해야 목이 마르지.'

'... 아직도 밖에 나가고 싶어?'

목소리엔 어스름한 어둠이 깔린다. 묘사하자면 염려와 안타까움 같은 것. 누워 있는 이가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난 항상 밖에 나가고 싶었는걸.'

'위험해서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알아, 모를 리가 있겠어? 매일매일 귀에 박히도록 듣는 얘기잖아. 그런데도 나가고 싶어. 맨발로 걷고 싶어.'

'... ... 나도 너와 같이 벌판을 뛰어가는 생각을 해.'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나는 매일 꿈을 꿔.'

'...'

'매일 생생해지는 꿈을 꿔. 내가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꿈을,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지는 곳으로 한없이 달려나가는 꿈을, 높은 언덕 위에서 별이 떠오르는 걸 바라보는 꿈을 꿔.'

'...'

'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절망해.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게 분명한 것들이니까. 내 곁에 얼씬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들이니까.'

곧바로 기침 소리가 쏟아졌다. 다정한 목소리는 반절쯤 울음으로 구겨진다. 베르다미어는 반쯤 감겼던 눈을 어느새 똑바로 뜬 채 침대 위에서 몸을 한껏 구부린 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가 여름의 태양을 꿈꾼다고 말했다.

침대에는 작은 선홍빛 얼룩이 생겼다. 기침이 잦아들자 힘없이 몸을 늘어트린 이와 밀레시안의 시선이 맞닿는다. 어쩌면 밀레시안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쇠약한 이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연다.

'나는 꿈속의 광경을 걷고 싶어.'

별에서 온 여행자는 자신의 전생이 무엇인지 천천히 깨닫는다.

'나는 죽지 않고 싶어. 나는 내 발로 미지로 향하고 싶어. 나는,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 나도 노력이라는 걸 해보고 싶어. 나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 버둥거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싶어...'

결국 흐느낌이 섞이기 시작한 목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베르다미어는 사라지기 시작한 좁은 방을, 마치 전송하듯이 끝까지 바라보았다. 익숙하게 비어 있는 곳이 나타날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은 그의 입술이 마침내 움직여 짧은 말을 뱉었다.

"네 소원이 이루어졌군."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밀레시안은 짧은 찰나 그의 몸이 그의 영혼을 견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꿈꾸는 것이 많은 자의 혼백을 견디기에 그 육체가 너무 물렀던 것이다. 또한 꿈꾸는 것이 흘러넘쳤기 때문에, 소울 스트림이 길 잃은 영혼을 끌어당겼으리라. 인도자의 손끝이 소원으로 똘똘 뭉친 미약한 빛을 건져내었으리라.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셋을 세었을 즈음 다시 눈을 떴다. 희미한 은백색 상자가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었다.

"기억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

그는 그가 아는 첫 번째 밀레시안처럼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라고. 아마도 필멸의 생애를 마친 몸은 흙으로, 바람으로, 여름의 시퍼런 잎사귀로 흩어졌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자유를 찾아 떠나 온 영혼의 이전 궤적을 더듬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상자를 놓아버리자, 상자는 허공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졌다. 꿈은 깨어나면 잊히는 것. 단지 편린에 지나지 않는 것. 밀레시안은 눈을 감았다.

"... 네가 에린을 택한 건 잘한 일이야."

잘한 일이고말고.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라진, 그리고 사라질 과거에게 속삭였다.

축축한 강아지의 혓바닥이 그의 뺨을 무자비하게 핥았다. 곤히 자고 있던 이가 끙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말랑이, 그만. 누가 이렇게 깨우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영 효과 없는 훈계를 하던 베르다미어가 픽 웃으며 털 덩어리를 끌어안았다. 작게 왕, 짖는 소리가 났다.

"꿈에 들어간 것 같은데..."

그는 털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헥헥거리는 숨소리, 눈가에 비치는 햇빛, 바깥에서 흘러드는 시원한 바람이 좋았다.

"... 기억이 안 나네..."

자신을 환영하는 이 세계가 좋았다.

그는 에린을 사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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