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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삼하인

G25 스포일러 / 삼하인의 트레저헌터(+밀레시안)

이차 by 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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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05


1.

밀레시안은 여전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목을 끄는 차림새만큼이나 변함이 없었다.

밀레시안은 말하자면, 몇 마디로 정의 내리기에는 턱없이 복잡한 한편 억척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그 양면성이 종족 본연의 비범함에 더해져 밀레시안이라는 인물의 해석에 난항을 부른다.

안이하게도 그중 몇 겹은 편견 몇 겹은 숭상으로, 방대하고 섣부른 추측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 한들 밀레시안이 낡은 벽 틈새를 드나드는 생쥐처럼 비밀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별에서 온 대개가 그렇듯이 다난 보편과 다소 동떨어진 사고와 비롯되는 행실은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종류였다.

그러한 종족적 특성 가운데에서도 그 밀레시안이 특수했다. 일거수일투족이 화두를 제공했다. 둘은 없을 행보를 몇 차례고 거듭한 이에게 모든 눈과 귀가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나, 그것이 순전히 실제 밀레시안을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의 무신경함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하나 녹록지 않았던 여정의 반작용인지 밀레시안은 유달리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가령 과자와 사탕 따위를 전해 주기 위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사람을 찾아 무작정 이리아 사막 한복판에 도달한 것처럼.

밀레시안은 거대한 용의 유해 앞에서 쿠키와 캔디, 젤리 중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초콜릿도 있다고 덧붙였다.

2.

사탕과 젤리를 함께 포장한 묶음이 있어 그것을 받았다. 짧게 감사를 표하고 뒤늦은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는지, 그간 이상하거나 수상한 일은 없었는지 가볍지만 면밀한 근황들이 오갔다. 그 과정에서 설탕이 듬뿍 들어간 간식의 경위도 자연스레 끄집어져 나왔다. 망자가 돌아오는 날을 축제로 맞는 것도 밀레시안 종족이 에린 땅을 밟은 이래 그들을 중심으로 정착된 문화였다. 밀레시안은 이미 다른 이들 여럿을 방문하고 오는 길이었다. 미약한 궁금증이 일었다.

누군가의 요청 내지는 부탁을 받아 하는 일인지를 물었다. 설마 축제 날까지 선의로 의뢰를 수행하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의구심이 반, 이 밀레시안은 얼마든지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는 앞선 수긍이 반이었다.

밀레시안은 완전히 틀린 추론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건네주고 싶은 사람들의 몫을 만들었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서신 한 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선호하는 것을 묻고 원하는 만큼 나누어 준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수량이 모자라면 기꺼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두 배든 세 배든 만든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이 자리에서 밀레시안을 조우한 것은 어렵지 않게 그날을 떠올리는 촉매가 되었다. 어떤 목적들이 어떤 형태로든 결말지어진 용의 무덤 앞에서 각기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이 열린 직후의 밀레시안을 떠올린다. 겨를없이 헤어지던 순간에도 스쳐 간 표정이 있었다. 선명보다 조금 엷고 창백보다 조금 더 하얀. 전투의 긴장과 열기가 채 해소되지 않은 공기 속에서, 마음속 악천후를 억누르기에 급급해 보이던 얼굴.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저지른 이 같지 않았던가.

밀레시안은 여전했다. 선의와 애착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는 눈빛만이 달랐다. 마주하는 얼굴은 한결 깨끗했다. 적어도 그날의 빈 껍데기처럼 걷지 않을 것만은 확실했다.

일찍이 제로의 다른 사람들도 만났다는 듯했다. 의문은 지금에 이르러 해갈할 차례였다.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 목적지를 분명히 하지 않아 다른 동료에게서도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수유간 뜸을 들이던 밀레시안이 입을 뗀다.

올 것 같아서.

3.

희고 단단한 용뼈 밑에는 언제까지고 물이 고여 있다.

어떤 죽음은 지나치게 거대하고 느리게 풍화해 생보다 길게 잔류한다.

비석도 없는 죽음을 기리는 사람은 자신이 비석이 되어야 했다.

4.

더 묻지 않았다. 밀레시안의 예감은 적중했다. 지금 여기에 서서 얼굴을 마주하는 상황은 그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들어맞았다는 방증이었다. 다른 이유는 밀레시안이 오직 나를 만나러 무덤을 찾은 것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밀레시안도 과거 누군가를 이곳에 묻었다.

직감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별 인사를 나눌 즈음 밀레시안은 용의 날개였을 뼈대를 돌아봤다. 그가 그리워하는 이는 자신이 아닐 것이라고 밀레시안은 말끝을 흐렸다.

5.

깎아지른 협곡은 안쪽으로 발을 들일수록 음산함을 품었다. 높은 지반 사이에 있는 입구까지 다다르는 길은 망령들이 도사려 흡사 저승에 이르는 듯했다. 죽음 이후와 가장 가까운 곳임에도 메투스는 그리운 이와 재회하는 기적에 냉담하다. 사방에 생자와 망자의 비탄이 끓었다. 비애를 두르고 걸음 한 이를 초대한 망자는 없다.

아크 리치는 고요했다. 불길한 기운을 거느리고 한곳을 맴돌 뿐이었다. 꺼림칙한 힘이 요동친다. 순리를 위배한 사자는 존재만으로 대기를 침잠시켰다. 오한이 피부에 들러붙고 바람이 귀를 때렸다. 협곡 어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달은 구름이 걷혀도 어슴푸레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희미한 밤이므로 그 아래 놓인 것들의 윤곽도 분간할 수 없어짐은 마땅하다는 듯이. 지금쯤 한창일 죽은 자가 안개처럼 녹아드는 으스스한 축제를 상상했다. 차라리 그곳으로 가 외곽 어느 모퉁이에서 불야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불각시에 스쳐 가지 않았을까. 누구도 모르는 사이, 심지어는 나조차 깨닫지 못하더라도, 만나러만 와 준다면…….

감상은 길게 가지 못했다. 가슴 가운데가 일순에 더워져 이가 물렸다. 자신을 떠밀듯 발을 내디뎠다. 버석한 흙먼지가 날린다. 지상을 부유하던 아크 리치가 예상대로 부패한 몸을 돌렸다. 존재를 인식 당하는 순간 죽음이 훅 끼친다. 반사보다 빠르게 방아쇠에 검지를 걸었다. 적대다. 상시 기민하게 반응하는 감각이자 따라서 질리도록 느낀 감각이었다. 알아차리는 것이 이르면 이를수록 위기로부터 멀어진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위기인지 생각한다. 뇌가 결론을 요하는 즉시 본능과 계산이 유연히 맞물렸다. 이성은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다.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이승을 떠난 영혼이 돌아온다는 날에 걸쳐 과거의 여로를 떠돌았는지. 어째서 밀레시안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는지. 번잡스러울 축제는 왜 머리를 떠나지 않고 냉기 서린 협곡에 제 발로 들어간 이유는 또 무엇인지. 얌전히 돌아가기는커녕 사정거리를 가늠하는 따위의 미련한 행위를 왜 멈추지 못하고는 기어이 득 없는 싸움을 벌이고야 마는지. 머릿속이 깨끗했다. 그러나 움직였다. 돌아서지 않을 이유도 없었지만 돌아설 이유도 없었다.

무기를 고쳐 쥔 손마디가 차다. 우툴두툴한 신발 밑창이 마른 땅을 죽 긁었다가 단숨에 박찼다. 떨어져 박히는 섬광을 아슬아슬하게 비꼈다. 방심할 틈도 없이 달리는 발을 따라 마력이 폭격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6.

애당초 위기는 닥치지 않았다. 곁에 남지 않은 것들을 붙잡고 있는 것은 내 손이다. 그 의지들을 인정한 이상 잔뿌리처럼 뻗어 내리는 감정은 책무였다. 진정 험난한 위기들은 먼 과거 사라지고, 나는 앞서간 이들의 묏자리를 밟으며 그저 침통해 하기만 했을 뿐으로 느껴지는 때가 가끔보다 잦았다. 그러고 나면 해일 같은 애수에 반드시 쓸려 가고 마는 것이어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을 벌이곤 했다.

호흡을 고르면서 턱을 손등으로 대충 훔쳤다. 발치에는 아크 리치가 납작하게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처음과 같이 고요했으므로, 그 또한 삼하인의 이상야릇한 영향을 받은 듯이 여겨졌던 것이다. 죽은 것과 산 것 모두가 을씨년스러운 땅을 배회하는 밤. 땅거미가 깔려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나는 처치하고 나서야 그것이 흔해 빠진 괴물임을 알았다. 이어 확인했다. 사념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적막에 변주는 없었다.

끔찍하게 평화로웠다. 어떤 드라마도 없이.

울적한 심경으로 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다. 적지 않은 총탄을 썼고 우두커니 선 자신은 한심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격한 감정과 호흡이 가라앉은 자리로 재기 어려운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그러자 제 얼굴을 몹시 세게 갈긴 듯한 기분이 들어, 우습게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때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트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지만을 선택하며 살았던 시간 속에서도 그리움이 이토록이나 잔인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말로 그랬다.

고립된 바람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찬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밀레시안에게 받은 간식이 전투에 망가지지 않은 것은 뜻밖이었다. 포장지 안에서 하나를 집으려는 순간 위화감을 눈치챘다. 사탕과 젤리 사이에 초콜릿이 끼어 들어가 있었다. 단 하나였다.

아크 리치는 머지않아 부스러질 것이고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것이다. 삼하인의 밤이 아니더라도.

내게 주어진 자유는 그런 종류였다. 그것을 수반한 삶은 방문하지 않을 객을 위해 이따금 차와 다과를 준비하는 것과 같아, 식고 눅눅해져 볼품없어져 버리면 마치 정다운 이가 어느덧 머물고 떠난 것처럼 쓸쓸해졌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 번도 그리해주지 못한 탓이다.

하나인 초콜릿이 어떤 유의미한 상징이라도 되듯 제일 먼저 씹어 문다. 금세 삼키고도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밤은 아닌 듯했다. 쓴 입안에 퍼지는 달큰함이 이상하리만치 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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