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 - 미르

2024 스승의 날 소명미르낫씨피

“자. 아동서부터 천천히 읽어 보자.”

“으에…….”

소명 선배님이 내민 것은 비교적(어디까지나 비교적!) 얇은 책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위한 아동서. 책… 책의 페이지를 넘겨 보면(나중에 찾아보니 책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일반적인 책보다 글씨 크기가 조금 크다.

그, 그치만…….

만화도 아닌 책을 읽으라고 하시다니…….

“처음부터 한번에 다 읽을 필요는 없으니까. 네 속도대로 읽어 봐.”

나를 믿어주려는 눈빛이 강렬하다. 그런 얼굴을 보면 책 같은 거 안 읽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느니, 재미없는 것보다 만화나 웹툰 단행본을 더 읽고 싶다느니 하는 소리를 뱉을 수가 없다. 애초에 그게 틀린 말이란 것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건 난이도가 너무 높아요!

“모, 못할 거예요…….”

“너답지 않게 왜 뒤로 가고 그러니? 할 수 있어, 분명.”

“아으…….”

결국 나는 받아들었다.

“미르야!”

“허걱! ……여긴 어디죠?”

“우리가 사는 집이란다.”

잠시 후, 나는 선배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몇 문장 읽지도 않았는데 잠이 든 것이다.

“……동네 한 바퀴만 돌고 오면 안될까요?”

“조금만 더 읽고 가자.”

“잉…….”

평소 대련 때는 상냥하신데, 지금은 무섭다. 어느 쪽이든 똑같지만 그냥 내 마음가짐이 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쪽이 정답이다.

째깍, 째깍.

집안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구구, 구구.

비둘기가 우는 소리.

빵빵.

자동차 클락션 소리도 들린다.

아, 어디서 라면을 끓이고 있——

“더는 못 읽겠어요!”

나는 책… 책 옆에 접힌 종이로 읽었던 자리를 표시하고(나중에 찾아보니 책날개라고 하는 것 같다) 엎어졌다. 이제 글자가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그렇게 느끼자마자 포기했다.

조심스럽게 선배님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혼내지는 않으시겠지만, 역시 더 읽으라고 하실까? ……아버지였다면 계속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다가 결국 끝까지 읽게 시키실 텐데.

“수고했어. 내일 이 시간에 더 읽자.”

하지만 선배님은 아버지가 아니다. 방긋 웃으면서 그만 읽자며 책갈피를 내밀어 오셨다.

나는 해방감에 한껏 웃으며 대답했다.

“네……!”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셨다. 열이 오른 것 같은 머리가 천천히 식는다.

끝까지 최대한 집중한 뒤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 기분 좋았다. 선배님의 손길이라 더욱 기분이 좋은 것도 있지만.

“앗, 조금만 더 쓰다듬어 주세요!”

“후후.”

……그게 평소였다면 절대 입에 담지 않을 부끄러운 소리였다는 걸 깨달은 건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그 후로도 조금씩이지만 매일 그 책을 읽어갔다.

도중에 졸고, 잠들고, 집중이 깨져도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일주일 후.

마지막 문장을 읽은 나는, 책을 덮었다.

“다 읽었어요! 처음으로!”

나는 곧장 앞에서 지켜보던 선배님께 다가가 안기며 외쳤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겠지만 오늘은 특별하니까.

선배님은 이번에도 나를 쓰다듬어 주셨고, 웃고 계셨다. 행복해.

“정말 잘했어. 내용은 어땠니?”

“내, 용……?”

…….

하,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으, 아……. 그게, 저기, 하,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얼굴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분명 글자를, 문장을 읽은 기억은 나는데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그래놓고 좋아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이대로 기절해버리고 싶어졌다.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은데 선배님이랑 서로 안고 있어서 못해!

“괜찮아.”

“네?”

그런데, 선배님은 웃거나 화내거나 실망스러워하시지 않았다.

내가 실패했는데도 미소지으면서 쓰다듬어 주시고 있다.

“미르 넌 고기를 먹을 때 몇 번 씹니?”

“세 번……이요. 얇은 건 한 번.”

“……그건, 조금 더 씹는 게 좋을 거 같네.”

선배님은 아무리 독서가 특기인 사람도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해서 여러번 반복해 읽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선배님은 역시 많은 걸 알고 계셔.

“선배님! 오늘은 외식하러 가요! 고기 얘기하니까 고기 먹고 싶어졌어요!”

“그래? 그럼 준비할까?”

“앗싸! 에헤헤, 맛있겠다. 아, 오늘은 절대 카드 꺼내시면 안 돼요! 오늘은 기념할 게 두 가지나 있으니까 꼭 제가 사야 해요!”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같은 책을 다시 읽어도 좋고, 다른 책을 읽어도 좋다고 하셨으니까.

“감사를 두 배로 돌려드리는 날이에요!”

나의 소중한 스승에게.


우와 2222자다!

스승의 날 기념으로 레뷰 보면서 쓴 거. 흰나리 검게 물드는 계절…… 그니까 종교에유 쓰다가 이거 잠깐 호로록 쓰고 다시 종교에유를 쓴… 순서라고 기억합니다.

시점은 약혼 전, 소명씨와 동거할 적에. 결혼한 시점에는 나름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한…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읽기 능력을 갖추게 됨. 더 난이도 높은 책을 읽으면 잡니다.

처음엔 선배님은 선배님이지, 스승을 따지자면 외삼촌이라고 생각하던 미르도 제대로 소명씨를 스승(내지는 세 번째 부모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게 재밌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유사 어머니가 되고… 그의 사촌오빠와 결혼을 하고… 다시 사촌오빠의 의붓 형제와 유사 어머니가 연애를 하고……. 개족보다.

+)오늘 7월 7일은 포니테일의 날입니다. 그리고 소명씨는 포니테일이죠. 그러니까 오늘은 미르의 두 번째 스승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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