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경심 재탕하고 뽕차서 씀
추가로 업로드 될 예정. 뽕찰때마다 그때그때 씁니당
모든게 한편의 꿈이었으면 했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도,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죽음에 수몰되어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남은 가족들도. 물론 그 가족중 한명은 태섭 저 자신이었다. 삶을 이어갈때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형과 아버지의 죽음은 형편보다도 무겁고 끈질기게 태섭의 모가지를 옥죄어왔다. 삶은 늘 버거웠다. 하루를 살아내는것이 아닌 감내해나가는 것이었고, 좀처럼 마음속을 짓누르는 이름모를 감정들은 단단한 돌처럼 제 형체를 굳혀나갔다. 그래서 태섭은 늘 모든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든것들을 아무런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나는요, 형. 이제 그만 하고 싶어요. 모든게 너무 힘겨워요. 얼마나 제 감정을 삭혀왔으면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태섭은 마치 어떻게 눈물을 흘려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묘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명헌은 그런 태섭을 바라보다 이내 떨고있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쥔다. 그리곤 제 품으로 그를 가까이 끌어안아 말없이 등을 쓸어내린다. 많은것을 홀로 삼켜내야했던 그를 위로하듯. 맞닿은 박동을 느끼며 태풍같은 그 마음에 조금의 햇살이라도 들 수 있기를 바라며.
쓸데없는 미사여구 없이 묵묵히 제 뒤에 서 있어주던 사람. 태섭에게 명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그 손을 뿌리쳐보지만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 두터운 손으로 제 손을 다잡아주길 바라게 되는 사람. 모든걸 놓아버리려해도 제 손에 끼어진 그 단단한 깍지때문에 다시금 모든걸 붙잡고 있게해주는 그런 소중한 사람.
품지 말아야 할 감정이라는 것을 안다. 제가 없다면 더 빛날 수 있는 사람이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시선이 자꾸만 그에게로 향했다. 나란히 그와 서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뒤에서 등을 바라보며 따라걷고 싶었다. 작은 욕심은 마침내 저 스스로가 주체할 수 없을정도로 커져버렸지만 감히 그 마음을 함부로 깨부수고 싶진 않았다. 혼자만의 감정이니까. 당신이 알아채지 않도록 언제나 그랬듯 삼켜내고 삭혀내는 것은 제가 가장 잘 할줄 아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당신을 품어보지만 이 마음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당신에게 닿을 수 없도록 저 깊이 고이 묻어둘테니.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제 마음하나 숨기기 급급해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무엇이 떠오르는지 알지 못했다. 명헌의 고백을 들었을 때 어떤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쿵쾅거리는 심장. 금방이라도 속이뒤집힐 것 같던 울렁거림. 그건 정말이지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태섭은 빗길 한 가운데서 미친사람처럼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머릿속을 누군가가 꼬챙이로 헤집는 것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런 감정에 사람들의 비명소리, 제게 가까워지는 클락션 소리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그리고 다시한번 정신을 차렸을때는 이미 모든게 늦은 후다. 좀처럼 눈은 떠지지 않았지만 그제서야 제 주위를 감싸고 있던 소음들이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비명소리. 투둑 거리며 제 몸에 쏟아지는 빗방울들. 간신히 눈을떴을땐 시야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빗물의 냄새 사이로 강하게 섞여들어오는 피냄새에 미친듯이 쏟아지는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제서야 태섭은 제가 차에 치였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당연하게도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겨우 뜬 시야는 다시금 깜깜한 암흑으로 변한다. 아, 나는 죽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죽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고싶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와중에 제 손을 다잡아주던 단단한 손, 조심스레 저를 껴안아주던 그 몸의 온기가 떠오른다. 단단하고 따뜻한 사람. 그런데 그게 누구였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암전된 시야와 함께 의식은 저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친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누군가는 그 곳에서 영원히 멈춰선다하고 다른 누군가는 생이란 원래 원과 같은 형을 띄고있어 죽음이후에는 그 이후로의 삶이 계속되어진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편을 들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자의 말이 맞지 않았나 싶다. 그것을 증빙하듯 이렇게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하고 있지 않나. 한가지 다름이 있다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 마치 이 곳에 살고있던 누군가와 삶이 교체되기라도 한 듯 한순간에 뒤바뀐 것일테다. 연(蓮)나라 윤원 20년. 제가 살고있던 곳과의 시공간이 까마득히 차이나는 이 곳에서 태섭은 그렇게 제 의사와는 상관없는 새 삶을 살게된다.
언제 깰지 모르는 꿈 속을 걷는듯한 기분. 배를 타고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형은 이 곳에서 언젠가 한번쯤은 머릿속에서 그려보곤 했던 청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기억속에서 안개가 쳐진 듯 희미한 얼굴이었던 아버지 역시 이 곳에서는 대장군으로 이름을 드높인 명망있는 인물이었다. 어머니와 아라는? 제 말에 무슨말이냐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태섭은 그제야 현대를 살아가는 어머니와 동생은 이 곳에선 존재하지 않는, 또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낙마사고로 머리를 다친 장징의 차남 채이흐. 그것이 이 곳에서 제 자신의 이름이다. 아버지 하단은 아들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 서둘러 연의 최남단 국경지역으로 환거하였고, 인원에비해 과할정도로 큰 저택에는 하인을 제외하면 형과 저 단 둘이 전부였다.
텐게스. 준섭은 제 이름이 바다를 담고있다 말해주었다. 현세의 준섭의 운명과 연결이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영 꺼림직했지만 의미자체로는 준섭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대국인 연나라는 광활한 초원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였기에 그들에게있어 바다란 들어는 봤어도 감히 상상해볼 수 없는 그러한 곳이었다. 무한하게 펼쳐진 강.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곳. 그런의미에서 아버지 하단은 내게 텐게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신거야. 아이에게 설명하듯 잔잔한 어조로 설명하고있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태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적 제 키보다 두뼘이상은 컸던 준섭의 모습을 겹쳐보며 태섭은 생각한다. 낙마사고로 머리가 다친 동생을 위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설명해주며 저를 챙겨주는 형.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담겨져있는 모를레야 모를 수 없는 애정. 제가 알고지낸 준섭과 이 곳의 텐게스는 분명 다른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제 형에게는 제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분명 괜찮을거다. 하지만 달싹거리는 입은 쉬이 떼지질 않는다. 채이흐, 괜찮은거지? 다정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텐게스의 시선과 마주친 태섭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아흐(*형).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연의 수도 나란에 위치한 저택에서의 삶도 점차 익숙해져간다. 이 곳에서 정신을 차린지도 벌써 몇달이 지났지만 아직은 좀 더 쉬어야한다는 텐게스의 만류에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큰 불만은 없었는데, 두개의 정원과 세개의 별체가 딸린 저택은 그 크기가 가늠이 가지 않을정도로 넓어 답답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그짓도 최근들어 그만뒀다. 처음에야 이곳과는 다른 환경이 신기해 보는재미가 있었지만 어느순간부터 이곳이 삶 속에 녹아드니 흥미는 빠르게 식었다. 어딜가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하인들도 흥미를 식게하는데 한 몫 했다. 저택 안 생활에 흥미가 식으니 화살은 밖으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니 한번도 밖에 나가본 적 없잖아. 태섭은 최근 잦은 입궁 탓에 좀처럼 얼굴보기 힘든 텐게스를 떠올린다. 대게 해가 질때쯤 들어왔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에젱(*주인)께서 아시면 큰일나요! 옷깃을 붙잡지도 못한 채 다급히 만류하는 하인을 보며 태섭이 말한다.
"에체스, 들어봐. 지금 여기엔 누가 있지?"
"...채이흐 님과 저요."
"그치,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아흐는 없어. 그 말은 즉 우리가 함구하기만 하면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걱정으로 인해 한껏찌푸려진 눈썹을 살살 매만지며 태섭은 저보다 한참은 큰 에체스를 달랜다. 에체스, 그만 걱정하고 일어나. 밖에 나가보자. 금방 나갔다 들어오면 아흐도 모를거야.
연나라는 당시 대륙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라로써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해 갈 뿐더러 그에 못지않은 활발한 무역활동을 해온 강국이라 배웠다. 그 말이 과장은 아니었는지 수도인 나란은 태섭의 생각보다 더 거대하고 활기찬 곳이었다. 윤원제는 카간(*황제) 의 자리에 옹립된 후 선대때부터 애를 먹었던 국경지역의 안정화를 빠르게 이루었고, 그 덕에 타국과의 교역도 선대보다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란의 거리를 보자마자 태섭은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이국적인 용모의 사람들이 연나라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여있었고, 들려오는 언어와, 거리에 보이는 다양한 건축물과 장식들 곳곳에서 그것들을 다시금 확인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태섭의 끊임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건 에체스였다. 채이흐 님, 좀만 천천히가요! 그러다 놓치겠어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 밑에는 간만에 나온 마실구경에 상기된 감정이 묻어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거리 중심부에 들어선 태섭은 일렬로 죽 엎드려있는 인파를 발견한다. 에체스, 저거 봐. 높으신 분이 행차하나보네. 태섭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에체스가 무언가를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채이흐 님, 숙이셔야 해요! 칸쿠(*왕자)의 행렬이에요. 칸쿠? 네, 카간의 아들들이요.
빨리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때까지 숙이셔야 해요! 다급한 에체스의 말에 서둘러 고개를 숙인다. 그럼에도 불쑥 솟아오른 호기심은 제 귓가에 충동을 속삭인다. 얼마나 존귀한 몸이길래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건지. 살짝 보는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수많은 행렬 속에서 고개한번 살짝 든다고 큰 일이야 있겠어. 언제 볼지도 모르는 건데. 참기힘든 충동에 결국에는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눈을 굴려 행렬을 바라본다. 앞뒤로 수많은 행렬을 대동한 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말 위에 올라타있는 카간의 아들. 어둠마저 삼켜버릴 것 같은 깊고 진한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칸쿠는 말에서 내려섰다면 텐게스와 비등할정도의 장신이었다. 당췌 속을 알 수 없어보이는 눈을 바라보며 태섭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기억나진 않지만 저 남자를 알고있다. 머리를 굴려 좀처럼 생각해보려해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선가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리 생각하던 차에 무감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던 칸쿠와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눈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이채에 태섭은 그제서야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행렬이 멈춘것도 그때였다. 잔뜩 긴장한 채 급히 칸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행렬들을 뒤로핸 채 태섭은 서둘러 에체스의 팔을 잡아끈다. 에체스. 도망가야해. 심장은 미친듯이 쿵쾅거리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듯 힘이 풀렸지만 본능이 말하고있었다. 도망가야해.
* 인물명과 단어는 몽골어 사전을 참고해서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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