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비안

[벨비안] 잿빛 구원

W.콩떡님

1차 by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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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떡님 추천 브금 *‘’*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증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에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

.

나무에 소복이 쌓인 흰 줄기는 느리게 찾아오는 봄의 열기에 못 이겨 물망울이 맺혀 떨어 떨어진다. 벨 엘가도, 그 한 명만 바라본다면 평범한 정장을 입은 사내라고 생각하겠지만, 바로 그의 곁에 긴장한 듯, 경직된 몸짓을 하고 있는, 다소 말 걸기 꺼려지는 인상에 같은 정장 차림이 그이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 보아, 우리가 흔히들 아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못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꺄르르륵~ 하하하~”

평화로운 어느 성스러운 성당과 같이, 밖에서는 아이들은 평화로이 놀고 있고, 안에서는 축성을 받은 신도들은 기도를, 성가대는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평화롭고 성스러운 곳에 어울리지 못하는 그가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이런 곳에 제가 서 있을 자리는 아니라고, 아니 그조차 관심도 없는 장소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곳에 서성이고 있는 이유는 어젯밤 받은 한 브로커의 문서 때문이었다.

한참 다른 세력과 맞부딪혀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약 유통 루트에 저가 보아서는 안 될 얼굴을 봐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성당에 사제로 자리를 잡고 있던

파비안 그레이슨.

“이런 추운 날에 다들 이 노래 부르려고 여기 오는 거야? 천국 가려고 애쓰네. 안 그래?”

곁에 있던 다소 긴장되어있는 조직원들에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내뱉고서는 그는 성당 근처를 둘러보았다.

가령, 이 날씨에 더욱 매섭게 보이는 성모상이라던가. 그는 이 성당에 조형물 정도로 보이는 성모상 주변에 있는 푸르름을 머금고 있는 수북이 쌓인 나뭇가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때도 한참 추운 겨울이 지났을 때였었나. 그때는 이렇게 춥지 않았었다. 그가 일로 파견을 나갔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바로 눈 앞에 들엉오는 그의 앞, 벽 쪽에 놓인 십자가에 나뭇가지 같은 것을 올려두고서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파비안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이거? 사제가 축성한 편백나무 가지야. 종려나무 가지는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거 나중에 태워야 하는 시기가 있는데….”

...이런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그가 사제도 아니고, 관심도 없었던 그가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저 지금 눈앞에 그를 압도하는 마리아상을 위로 올려다보며 대충 기도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그는 슬 시끄러운 마당에 눈을 돌렸다. 아이들은 이 우중충한 이들이 있든 말든 숨이 벅차도록 뛰어놀고 있었으며, 자세히 보니 그 아이들의 이마에는 까만 가루로 된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초롱, 미사가 원래 저런 거였어?”

꽤 이상하게 보이긴 하는지 조직원한테 물어보니 안 그래도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조직원은 그의 말을 경청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소의 미사는 말씀을 나누는 것에 그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순절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아, 사순절. 그래 태운다는 게 저 마리아상에 있던 나무를 태운 건가? 그는 그리 이런 문화 애는 관심이 그다지 없어서 다른 쪽에 또 시선을 두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십자가…. 함께 묵상…. 사순절 기간….]

현수막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걸 보아하니, 조직원이 말한 사순절 기간인가 그는 생각했다. 무어라 쓰여 있는 걸 또 자세히 바라보니,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야서 53장 5절-]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뭐, 사순절을 알리는 현수막이었으니 이 문구도 사순절을 대표하는 문장이겠거니 읽고서는 옆으로 시선을 또 옮기면 그제서야 사순절 기간이 보였다. 보아하니…. 딱 오늘부터 시작이었더라. 그는 딱딱히 긴장된 채로 서 있는 조직원을 힐끔 보면서 꽤 이런 데에 지식이 있다는 데에 작은 감탄사를 속으로 내뱉었다.

“성당 바깥쪽은 다 둘러 봤고, 이제는 안으로 들어가 봐야 알 거 같은데.”

“같이 따라가겠습니다.”

그는 여유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당 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굳게 닫혀 있을 줄 알았던 건물에 문은 살짝 열려서는 오르간 소리와 경건한 성가대 합창 소리가 흘러나왔고 틈새 사이로 비춰보면 모두 사람들이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누가 들어간다고 해도 화낼 인간이 더 웃기는 모양새가 될 터, 그는 고민 없이 문을 열고 신성한 곳에 발을 들였다.

역시,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곳의 분위기는 확 가라앉아있었다. 경건한 멜로디와 모두 각자 각기 다를, 간절한 기도를 십자가에 못 박힌 신 앞에 서서 하고 있었고, 좀 더 멀리 둘러보면, 일어난 사람들은 줄이 가운데에 몰려있었다. 그 가운뎃줄 맨 앞에는 그토록 그가 찾던 파비안 그레이슨이 서 있었으며, 그는 평소 검은색 사제복이 아닌, 보라색의 전례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찾았다 우리의 신부님’

그는 눈에 파비안이 들어오자, 좀 더 빠른 걸음, 좀 더 큰 보폭으로 신도들이 서 있는 줄에 슬쩍 껴서는 앞으로 자연스럽게 슬슬 가고 있었다.(멀뚱히 서서 가만히 있던 조직원의 옷깃을 끌어 같이 끼어 줄을 섰다) 만약, 이 줄이 놀이공원에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줄이었다면 이 둘을 욕하고 끌어내릴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성스럽고 평화로운 성당이다. 모두들 그가 간절하고, 성스러운 의도로 줄을 섰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 줄을 서서 새치기를 당하더라도 한 걸음 물러서서 그가 앞으로 갈 수 있게 가만히 두 손 모아 줄을 기도를 하며 줄을 설 뿐이었다.

그렇게 한명 한명 앞으로 가면 그가 찾던 사제, 파비안이 눈에 보인다. 그는 신도들에게 직접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읊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가 브로커가 준 명단에 있었던 것도 새까맣게 까먹은 듯, 미사에 집중하는 그를 보며 피식 웃으며 ‘참 열심히도 한다니까.’와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도 전, 바로 그와 눈이 마주치는 거리가 되었다.

“보게 되어서 다행이야.”

파비안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알아봤고 그는 그런 온화한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그리 불평을 하진 않았다. 그저 이런 신실한 사람들 속에서 저 자자신이 자연스레 섞여있는 상황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하는지, 온화하게 웃는 ‘사제’인 파비안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웃어보일 뿐이었다.

파비안은 그를 평소와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분명 숨기는 것만 같은 눈이라는 것을 그는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파비안은 그런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재가든 단지를 들고서 엄지에 재를 묻히고 그에게도 똑같이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며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형제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런건 쟤한테나 해주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츠리는 그를 보고서는 파비안은 그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거야. 이 미사가 끝나면 고해실로 와. 네가 궁금해 하는 걸 알려줄게.”

내가 올 짓을 네가 다하고. 앞에 말은 삼키고 그는 그저

“그래, 우리 이야기 좀 해.”

미사가 끝나면 텅 빈 성당에 스테인글라스가 길게 뻗은 의자를 하나하나 비추어 또 다른 ‘성스럽다’라는 걸 형상화하듯 보여주고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움, 어쩌면 성당은 사람이 있을때나 없을때나, 이 둘은 굳게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가벼이 흘러지나간다.

이런 텅 빈 제단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사가 다 끝나 모두가 없는 지금, 그가 서 있는 저 왼쪽 한켠 고해실에 불이 반짝 켜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거지?”

“네. 고해실에 불이 켜지면 앞에 신부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거니까요.”

조직원 말에 알겠다는 시늉 어린 고갯짓과 함께 그는 신부가 들어가 있는 문 쪽에 손을 대며 조직원한테 한 번 더 묻는 듯 입을 뻥긋거렸다. 조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 되는 일이라고 했으며 대충 농담 식으로 한 일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손을 떼고 신도들이 들어가는 자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였다.

조용하다.

덜컥 신도 자리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잠깐의 공백 사이로 사제, 파비안의 기도문 읊는 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고해실에 앞쪽은 작은 커튼으로 가려져 상대방에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사제의 묵주를 세고 있는 손과 전례복이 살짝 보이는 정도였다. 그 옆에 벽에는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친절히 적혀 있는 걸 그는 봤지만, 이런 절차를 따라하고 진심으로 무엇을 고백하러 온 이는 아니기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커튼을 당장 들춰버릴 것만 같은 거리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요-. 여기, 사제님 보러 왔는데.”

“아하하, 형제님은 잘못하신게 없나요?”

고해실에 형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대답에도 파비안은 작지만 호쾌한 웃음을 내며 말했다.

“...어휴, 담배냄새. 또 담배 피우고 왔지? 좀 끊으라니까….”

“신부님, 여기는 잔소리를 들으러 온 곳이 아닌데 말입니다. 나 정도면 약에도 손도 안 대고 아주 착한 놈이지.”

그는 붙여져 있는 절차를 손으로 쓸어 만지다가 장난스레 비싯 웃더니 약이라는 제 말에 떠올랐는지 말을 이었다.

“약…. 그래, 내가 궁금해하는 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 네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어렴풋 짐작이 가. 오늘은 그래서 온 거야?”

그는 보이지도 않을 낯에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사제도 아닌데 매일 출근하듯 올 수는 없잖아.”

“음, 그것도 그렇네. ...그럼 무슨 설명을 해줄까? 가루를 사들인 건 내가 맞다는 이야기?”

만약 어디 아무개가 이렇게 쉽게 긍정했다면 쉽게 발설한 서비스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을 만한 발언을 어느 한 사제가 시원하게 고백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놀란 듯 그는 말을 바로 받아내지 못하고 한숨 돌리고서는 입을 다시 열었다.

“무슨 바람이야?”

“그냥 필요해서?”

“그건 내가 구해다 주면 되잖아.”

“부탁했으면 줬을까.”

“왜, 좋게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사제 형이 궁금한 게 생겼다는데.”

그 둘은 사이좋게 말을 빠르게 주고받다가 그의 말에 파비안은 어깨에 힘을 풀고서는 묵주를 슬금 보이는 탁자 위에 올리고 다시 한마디를 했다.

“고려하는 정도라면 곤란했거든. 꼭 필요했던 거니까. 보나 마나 내가 이마에 해준 거에 손댔을 거 같은데…. 그거 웬만해서는 지워내지 마.”

파비안 말이 정답이다. 그는 성당에서 이마에 십자가가 그어지자마자 밖으로 나와 문질러 지우려 노력했다. 참 고집 있는 십자가라서인지 잘 안 지워진다며 읊조리면서 말이다.

“...이런거 묻히고 다니는 것도 웃기잖아, 파비안.”

“어차피 머리 내리고 다닐 거면서. 이번만 말 들어줘. 너를 노리는 무언가가 있어.”

고집 있는 십자가 아니냐며 읊조렸을 때가 생각난다. 이마를 문지르는 걸 바라보던 조직원이 넌지시 다른 곳을 바라보며 했던 말인데,

“그 가루의 효과는 고양감 정도에 그치는 편이었지만, 색이 잿빛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라는 보고서를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떠오른 그는 생각난 곧장 그대로 파비안에게 말했다.

“지금 나한테 그거 발랐지. 형도 뭘 노리는 거 같은데? 나한테서 말이야.”

그의 한마디가 그를 불편하게 했을까? 저 답답한 커튼 사이에 이상하게도 일순에 억눌린 괴로운 소리와 함께 뿌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순간적으로 펄럭이는 커튼 사이만을 걸치고 있던 거리에서 떨어졌고 파비안에 말이 이어진다.

“...하하, 내가 너한테서 뭘 노리겠어. ...방어막이야.”

방어막?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와봐, 얼굴 볼래.”

“지금은 안돼.”

“언제 되는데?”

금세 불붙을 것만 같은 분위기로 옮아간다.

“...안돼.”

그리고 정체되는 말들과 점점 불안해지는 그. 하지만 서로는 고해실에 있기에 얼굴을 마주 바라볼 수 없음에 답답할 뿐이었다.

“얼굴에 금 발라 놨어? 왜 이래 진짜.”

“...얼굴이라면 아까도 봤잖아.”

신경질적인 말에도 꿋꿋이 대답하는 그가 성에 차지 않아서는 짧게 혀를 찼다.

“궁, 금한 건 다 물어봤어?”

하지만 그가 이러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듯, 커튼을 열어젖히지도, 문을 부숴 꺼내 보지도 않고서는 아까보다는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파?”

“...걱정해주는 거야? 착하네. ...조금”

목소리에 확실히 힘이 빠졌다. 저 커튼 틈새에 보이는 그의 손을 보면 잘게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더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하잖아. 약 이상한 거 자꾸 주워 먹지 말고.”

“...하하, 네 걱정이나 해.”

“적어도 밖에 애가 지켜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히 농담조로 던져 보지만 그는 점점 대답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왜 그러지? 생각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듣기조차 힘들 게 겨우겨우 혀를 씹으며 대답을 하듯 입을 열었다.

“그거, 다행, 이네.”

“...?”

“나랑 있으면…. 벨, 네가 위험해 최대한, 멀리, 멀리 가서, 여기로, 돌아, 돌아오지 마. ...부탁할게…. 너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어.”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이제는 참기 힘든지 이 앞에 문짝을 부숴버릴까 견적을 눈대중으로 재는 찰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불길하다.

“알겠지? 곧장 나가. 그리고 명심해. 잊으면 안 돼. 그 가루. 그걸 쫓아낼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야. 그걸 이마에….”

“파비안?”

“그래서 나는….”

“...”

“나는….”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이 답답한 문짝이라도 부숴버릴까?”

“있잖아 벨, 너는 구원이라는 걸 믿어?”

바로 조금 전과는 다르게 파비안의 목소리는 맑고 아무런 고통 하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질감에 눈살을 찌푸렸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나, 너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거 같아.”

저 건너로 넘어갈 생각이었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버린다. 분명 파비안 그의 목소리였지만 그가 아니라는 걸 그는 느낄 수 있었으니까.

“벨? 들어봐. 나는 이 얘길 해야만 해. 구원이란 건 본디 죄에서 구한다는 걸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으매 이것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된다는 거야. 새로운 죄 또한 사라지게 될 거고”

파비안은 횡설수설한 말을 숨을 돌리 새도 없이 줄줄이 내뱉었다. 아까와는 완전히 딴판으로 구는 자세로 말이다.

“너는 죄가 있잖아.”

파비안의 말에 그는 어떤 농담도, 웃음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사제이기 때문에, 네 죄를 없애 줄 수 있어. 죄를 없애 구원할 수 있다고. 걱정할 거 없어. 너는 그냥 나와 함께 하기만 하면 돼. 아아, 너를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텐데.”

도저히 이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집착과 광기가 얽힌 말들에 그는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우당탕.

그런 혼란스러운 사이, 그의 맞은편, 파비안의 자리에 의자가 밀어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아마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어지러운 괴상한 공포심에 이제는 제 공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이 소리가 그렇게나 토악질이 나오는 소리였는가.

나무로 된 고해실의 검은 커튼은 같이 무너져 내리며 동시에 무언가가 고해실 안을 빠르게 짓쳐들어온다. 평균 새 정도의 크기를 가진 그것은 이따금 관절 달린 더듬이들과 까맣고 반짝이는 촉수를 꿈틀거리다 삼각형의 비늘로 덮인 골진 날개를 파르르 떨며 눈꺼풀 없는 커다랗고 새까만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미쳤네.”

그의 말에 저 괴물의 촉수는 그에게 쏜살같이 얼굴을 노려 뻗었고 그는 겨우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피해낸다. 당연히 그 정도 괴물이 뻗는 촉수에 고해실의 벽을 꿰뚫고 파편을 우수수 떨어트리는 바람에 먼지가 일지만, 그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촉수가 원위치로 되돌아가는 역겨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 괴물은 쉭쉭이는 소리를 내며 다시 천막 안으로 빠르게 돌아가 버린다.

“...”

그는 찢어발겨진 천막 너머에 자신을 노려보는….

파비안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까맣게 물든 눈으로 벨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인간….”

파비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파비안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잘난 인간 하나 살리겠다고 방지책까지 준비 해두었을 줄이야….”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린 파비안은 박살이 나 흔들거리는 고해실도 못 되는 천막 너머 문을 열고 나가 사라져 버린다.

“하아…. 하아….”

그 파비안, 괴물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옆에 뻥 하고 뚫린 벽을 보더니 숨만 새액새액 쉬다 바로 고해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식은땀을 닦고서는 그 엄청난 괴물과 고전한 것치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조직원을 바라보고 자주 보던 그 사제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냐 물었더니, 조직원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대답을 했고, 그는 다시 그 박살이 난 고해실을 뒤돌아보자,

돌아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깔끔한 사제의 방과 파편이 튀어있는 내부가 언뜻 보일 뿐이었다. 파편을 본 조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저쪽 뒤에 파편을 뒤로 가리키며,

“...이거 내가 한 거 아니야.”

조직원은 슬쩍 파편과 안쪽을 보는 듯하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유통 경로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번 접선 장소는 내일 새벽 5시 나리 성당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들 간이 엄청나게 크네요.”

나리 성당이라…. 그 어디도 아닌 바로 여기다. 파비안이 사제로 있는 이 성당. 기가 찬 그는 코웃음을 치자 조직원이 더 말을 이었다.

“접선하는 쪽은 저희 쪽과 자주 싸우는 A패밀리 쪽입니다. 그리고…. 수취인은 보스가 신경 쓰시는 그 사제님인 것 같고요.”

“아-. 진짜 어디에 묶어놔야, 아니….‘그쪽’은 묶어둘 수 없을 것 같은데. 알았어. 일단 귀가할래. 오늘은 여기서 더 이상 볼 건 없는 거 같다.”

“네, 바깥에 차 대기 시켜두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이 성당에서는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다른 말로는 뭐, 볼 거 다 본 거 아니겠는가. 그는 내일 새벽에 또 와야 할 이 성당을 다시 한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차를 타고 귀가한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며 마냥 지나가는 건물들을 보며 그는 오늘 밤은 참 지난한 밤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띠리리링-.]

전화 알람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휴대폰을 보니, 새벽 5시, 이른 아침의 쌀쌀맞은 공기가 뺨을 스쳐 지나간다.

“...”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새벽, 죽은 듯이 푸른 하늘이 낮게 깔린 도시에 풍경은 매번 봐도 스산하다. 이런 스산한 새벽이라서 그런지 어제의 기억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하지만, 그는 그 성당에 꼭 가야 했다. 제 모든 목표를 위해서라도.

그는 어제의 그 익숙한 성당에서 내려 저를 태워 여기까지 온 조직원에게 설렁 손짓을 하고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낮보다는 확실히 찬 공기에 어깨를 으쓱이며 밝은 성당 안을 보다 슬금 발을 움직이면, 저 장엄한 대성당 가운데에 십자가가 보인다. 그리고 저 십자가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어? 젠장, 망했다!”

익숙지 못한 녀석이 벨을 재차 확인하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도망을 치지만, 바로 도망쳤으면 모를까, 늦은 선택에 그 둘에게 그대로 잡힌다.

“제대로 안 잡고 뭐 해?”

“죄송합니다.”

군기 잡힌 조직원은 팔을 잡아끌어 잡고 있던 녀석을 그의 눈총에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커헉.”

그대로 녹다운된 녀석은 입에서 피를 겨우 뱉고서는 헉헉 숨을 쉬기 바빴고 그는 저 녀석이 튄 이유가 뭔지 알아야 하기에 발부터 머리카락까지 쭉 훑어보자, 낯이 익은 얼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마약 건으로 사사건건 부딪치던, A패밀리의 마약 접선책이었다.

“아저씨, 나는 당연히 알 테고, 사제 형 만나러 왔어?”

“...예 ...예? 형…. 이요?”

“파비안 그레이슨. 그런 이름 만나러 온 거 맞아?”

그는 슬쩍 주변을 살피며 계속 물었다.

“그, 네! 맞습니다! 갈색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사람인데…. 그, 그런 이름이었어요! 저한테만 약 받아간 게 적어도 세 번은 넘었을 겁니다. 지난번에도 엄, 엄청나게 주문을 했고요. 신부가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는지…. 아, 그리고 약을 이런 이른 아침에만 받아가더군요. 밤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접선책은 말 한마디만 잘 못 했다간 성당 앞에 묻힐 걸 느꼈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정보까지 술술 이야기를 다 했다.

“이 약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어?”

어제, 내가 형과 만난 시간이 밤이었었나…? 그래서…. 그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녀석에게 물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마약이라 어느 정도는…. 다른 것보다 환각도 훨씬 강하고, 뽕도 오래가요.”

“그러니까, 사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지. 나랑 같이 기다리자.”

여전히 메다꽂아 제압한 상태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접선 책에 그런 제안을 하자 그는 이상하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허겁지겁 품에서 프리필드 단위로 포장된 주사기 두 개를 꺼내 건네줬다.

“저, 저는 그냥 이것만 전달하면 되는 거라. 아니다 이거, 그냥 드릴게요, 가지세요. 가지시고 저는 보내주십쇼….”

손을 달달 떨며 건네주는 주사기를 자세히 확인해보면, 검은 액체가 들어있는 역시 몸에는 좋지 못해 보이는 주사기였다. 그는 순순히 보내 달라며 술술 불어내는 접선 책이라는 녀석이 참 의아해서는 눈길을 거둔 채 조직원에게 말했다.

“보내주면 보복할지 어떻게 알고…? 저 녀석, 저기 묶어서 어디 보내버리자.”

“알겠습니다.”

“아니, 안돼! 안돼!!! 저기요! 보, 보, 보, 보스!!!”

시끄러운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다 그는 조직원에게 턱짓을 하다 입을 열었다.

“초롱, 손수건 있어?”

시끄러운 건 저 조직원도 마찬가지였는지 묶여 있는 접선책을 바라보다 손수건이 있냐는 말에 손수건을 꺼내 얼른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받은 손수건을 들고 다시 뒤로 가더니, 접선 책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한테 시키지 그러셨습니까.”

“됐어, 뭘.”

사제 형 오려면 늦으려나….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조직원은 휴대폰으로 적당한 곳을 물색하는 연락을 취하는 듯 핸드폰에 시선을 두다 눈치를 보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보스, 인계만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뭐, 다녀와.”

“감사합니다.”

그렇게 접선책이 사라지고 나면 성당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분명 신부가 온다고 했는데,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다라…. 그렇다면 직접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었다.

어제와 같이, 주변을 둘러보면, 제이 먼저 눈에 띄는 십자가가 보인다.

그는 십자가 아래쪽을 가벼이 둘러봤다.

“음….”

십자가 아래에서는 성당의 모든 곳이 다 보이는 곳이다. 대리석, 혹은 상아로 만들어진 듯한 예수상은 보라색 천이 둘러져 있었고 파비안이 어제 입고 있었던 전례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걸 잘 살펴보진 않았으니 말이다) 예수상의 가시관은 참 살벌하게도 실감 나 보이는데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살벌한 가시관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건가? 싶지만 넘어가기로 한다. 대충 다 훑어봤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어제와 같이 성모상 쪽으로 가 보면,

성당 구석 자리, 예수상과 같이 대리석, 혹은 상아로 만들어진 듯한 성모상에도 보라색 천이 둘러져 있었다. 어제 봤던 전례복과 색이 비슷한 거 같지 않을까 싶다고 생각할 때, 그 아래에는 어제는 볼 수 없었던 작은 종이가 보인다.

[사순절을 기념하며 40일간은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를 바칩니다.]

“...이렇게 묵주를 돌리면서 각각 신비라는 이름으로 다섯 단의 기도를 드리는 거야. 각각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가 있는데…. 고통의 신비는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실 때를 기리며 기도하는 거지.”

뭐, 파비안이 이런 말을 했었던 거 같기도,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마냥 생각하다 어제까지의 일까지 생각이 뻗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저 너머에 있는 성당 의자에 시선을 옮겼다.

성당에 길고 긴 의자. 모두가 나란히 앉아 십자가에 못 박힌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나무로 된 의자다. 그런 의자는 뒤가 넓어 책상처럼 책을 펼칠 수 있는데, 마침 저 의자에 성서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그가 다가가 성서의 얇은 종이를 넘기다 보면, 형광펜으로 찍찍 그어진 강조된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 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테오 복음 27장 46절-]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 그는 밑줄 그어진 강조된 문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용한 성당 안, 백색 소음이 귓가에 울리자, 제가 오래 보고 있었는지 다시 다음 장을 넘긴다. 다음 장에는 뭐 뻔하디뻔한 이야기들밖에 없었다. 우리가 흔히들 아는 종교 서적에 지루한 이야기들.

“...재미없다. 어제 그 고해실이나 봐볼까?”

사제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도 열 수 있는지도 보고 말이지.라는 생각도 끝나기 전에, 고해실은 테이프로 줄이 처져 있었다. 어느 사람도 못 들어오게 단단히 말이다. 찍찍 그어진 성당이랑은 어울리지 못한 조금은 위협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저 테이프가 붙여진 고해실 옆에는 종이 하나가 붙어 있었다.

[고해실이 무너진 관계로 당분간 고해성사는 지하 소강당에서 진행합니다. -구도화 신부-]

아무래도 어제의 소란이 났으면 문제가 생길 만하지. 응, 지하 소강당에서 하는구나…. 굳이 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그는, 고해실은 다 봤는지, 그 자리에서 나왔다. 부하도 기다리랴, 형도 기다리랴, 바삐 구경하든 움직이든 발을 멈추고 근처 의자에 앉아 손가락 장난, 발 장난 좀 하며 쉬어본다.

조용하다.

참 신기한 곳이지. 낯선 사람이 여기저기를 들추고 다녀도 그 누구 하나 물어보질 않으니. 성당은 원래 이런 곳인가? 언젠가…. 한번 행사에 놀러 오지 않겠냐며 물어보던 형이 문득 생각난다.

“전례실에 가자.”

전례실 문 앞에는 사람이 있다는 듯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가 안에 있는 게 분명한데 좋지 않은 예감에 그는 켜져 있는 불을 바라보다 살짝 문을 연다.

불길한 예감과는 다르게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난 문 너머 광경은….

새까맣다.

불이 꺼져서 보이지 않는다면 눈을 조금 끔벅이면 앞이 어느 정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문을 열었으니 밖에 있는 빛이 새서라도 앞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문 너머는 다른 차원이 있는 것 마냥, 발 한마디 내밀면 그대로 알 수 없는 끝없는 암흑 속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거대하고 칠흑 같은 동공. 압도한다.

그는 위험함을 느끼고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아, 물러나려고 했다. 물러나려 몸을 뒤로 돌기 전,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

“내 구원에 어서 와.”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하게 웃은 파비안은 그의 목덜미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겨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젖은 호흡이 질척하게 서로 얽히고,

그는 파비안의 손에 떠밀려 전례실 안쪽으로 떨어져 내린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전례실 문 안으로 밀리면, 그 뒤에는 바닥이 없다.

그는 검은 공간 아래로 밀리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

일어나려고 하면 등 뒤에서 딱딱함이 느껴진다.

뒤로 만져보니, 아까 봤던 그 성당 의자 같다. 이런 의자에 묶였을까,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팔을 휘둘러 본다. 혹시라도 행동을 못하도록 누군가 묶어 두진 않았는지 말이다. 다행히도 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사지 모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분명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만 같았는데, 사지 모두 멀쩡하니 그는 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 그래, 성당임을 알 수 있었다(성당 안쪽은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부서지고, 낡아 거미줄이 이곳저곳 쳐져 있는게 마치, 부스러져 버린 공간 같았다.

“...”

듬성듬성 구멍이 나고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비춘다. 그 빛을 따라 시선을 따라 옮기면, 저 전례대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는 자연스레 그가 누군지 바라보았다.

보라색 제의가 가장 눈에 띄었고 잘 보니 전례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백발의 사제는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이외에 미동조차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백발의 사제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볼수록 낯이 익어보여 그는 불길한 기운을 뒤로 숨기고 한발짝 한발짝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파비안이다.

“...”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는 익숙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비릿한 향,

기분이 나빠지는 쇠 냄새,

그다지 좋지 못한,

다름이 아닌 피비린내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은 파비안의 양손이 피투성이인 것을 봐버린다.

바닥 아래도 툭, 툭, 떨어지는 피를.

“파비안.”

그는 그런 상황에 섣불리 그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의 손에서 맺혀 떨어지는 핏망울들을 바라보다 이름만 나지막이 불렀다.

“...벨.”

파비안은 그런 벨을 쳐다보지 않은 채 손을 모으고 말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사람을 죽였다는 그 치고는 읊조리는 목소리에 고저가 없어 기계같이 들렸을 수도 있겠다. 무언가를 참회하듯 깍지 껴 손이 덜덜 떨리면 망울진 핏방울들이 옷을 물들이고 더럽혀 버린다.

평소에는 초나, 성서가 올려져 있던 전례대 위에는 사람이 눕혀져 있었고 머리가 터진 것처럼 피투성이인 남자, 그 또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슬쩍 전례대를 바라본다. 혹여 아는 사람일려나?하는 마음에 말이다.

허나 다행인 건지, 그것은 당신과 안면을 튼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워낙 피투성이에 훼손이 많이 되어있는 시체라 이목구비의 식별조차 힘들었지만 말이다. 얼굴이 훼손되었으니 그는 당연히 그것의 손이나 신체 규격따위를 슬 살펴보고서는 낯선 모양새에 그는 툭 말을 뱉었다.

“저쪽이 먼저 잘못했겠지”

“너를 노렸어. 수많은 죄를 저지른 너를 노렸기에 어쩔 수 없었어.”

잠시 붉게 물든 손을 내려다보던 파비안은 바닥에 손을 짚어 몸을 일으킨다.

“네가 저지른 죄들을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더라.”

대리석 바닥에 시뻘건 핏자국이 남는다.

“있잖아 벨. 내 죄 하나를 공유하지 않을래?”

지나치게 간결하고, 지나치게 공허한 목소리였다.

“시체 묻는 걸 도와줘.”

“......난 힘쓰는 일 못하는데 누구 시키면 안돼?”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공허한 시선으로 벨을 바라보는 파비안은 여전히 고저 하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잠자리에 들어서 너랑 나밖에 없을거야. ...안되면 어쩔 수 없지.”

“어디다 묻을건데?”

“...그러네. 마당?”

“비켜, 그러면. 거기로 가져가게. 아, 초롱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지럽게 훼손된 사제로 추정되는 그것을 영차 들어낸다. 그렇게 들어내면, 파비안은 순순히 뒤로 물러서 비켜주며 겨우 질질 끌어내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체인 줄 알았던 남자는 살아있었다. 그가 들쳐 업을 때 ‘으윽’하는 소리가 미세하게나마 귓가에 들렸으니 말이다.

그 소리가 착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아직 심장이 뛰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숨도 쉬고 있었다.

“살아있는데?”

경찰에 신고한다면,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제로 추정되는 그것이 숨을 쉬자 생긴 여러 선택지에 그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파비안이 먼저 말했다.

“...그럴 리가.”

“이대로 살리면 형 죄는 없는 거 아니야?”

파비안은 그런 단순하고 순수한 대답에 예상치 못한 말인 듯, 눈에 순간 이채가 돌더니 옅게 웃어 보였다.

파비안의 입꼬리가 올라가니 이상하게 공간이 일렁인다.

“...널 노렸던 사람인데 살려줘도 되겠어?”

여전히 그의 대답을 믿지 않는 눈치로 피투성이의 사체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는 잠깐의 생각 끝에 대답했다.

“그런데 살리면 형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 맞잖아. 난 얘 없어도 항상 적 많은데. 한명이 늘어봤자 뭐.”

“난, ...마음대로 해.”

애매한 대답에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바라보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으면 묻어.”

그의 말에 파비안의 시선이 죽은 사제에게 머물렀다가 벨의 얼굴로 옮겨갔다.

“...됐어. 미안, 괜한 고생을 시켰네. 내려두고 이리와봐.”

“그렇다면야.”

그는 그 사체를 내려두고 파비안에게 걸음을 옮기지만, 엄연히 다른 안색과 태도에 조금은 경계하듯 바라봤다.

파비안은 그가 순순히 다가와 주면 그 사실이 못내 기쁜지 배시시 웃으며 여전히 피로 붉게 얼룩져 있는 손을 내밀어 보인다.

“불안해서 그런가봐 손 좀 잡아줘.”

그는 파비안의 웃는 얼굴을 한번, 피로 붉게 얼룩진 손을 한번 바라보고서는 파비안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을 잡는 순간, 파비안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목을 조여왔다.

“...!”

말도 안되는 힘이었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었으며 그렇게 정신이 흐려지면 제가 발을 딛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피할 새도 없이, 무너지는 성당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 네 죄를 지울 방법을 알고 있어. 나는….

나는 죄가 없는데도, 그는 흐려지는 감각을 느끼며 계속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엘”

“...벨 엘가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흐릿한 시야를 깜빡이며 눈을 떠내면, 그는 사람들 한복판 사이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하기도 전에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쥐어져 있는 기분에 묵직해진 손을 확인하면,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권총에 시선을 두다 일단 이름을 불렀던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다.

“설마 넋 놓았냐 그새?”

“너 그러다가 네가 총 맞는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치고 주변 분위기는 싸늘하고 무겁기만 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낯설지 않은 장소,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아아, 그는 이들의 얼굴을 알 것만 같다.

벨이 아직 마피아로서 입지를 다지지 못했을 때, 자주 보았던 동료들이라면 동료들이다.

마치…. 과거에라도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스 앞이야. 정신차려.”

그는 다른 손으로 목가를 쓸다, 보스라는 소리에

“보스?”라고 말을 내뱉었고,

빛이 들지 않는 구석, 헤진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금은 벨 엘가도, 그가 보스직을 승계받았지만, 이때 당시의 보스는, 그의 아버지, 그래, 꼭 저런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같은 색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연스레 권총을 쥔 손, 아니 손 모두를 뒷짐 해 보였다.

“야 너 뭐해?”

뜸을 들인다 생각했는지 어디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뭐 하는 중이었는데? 다시 눈빛을 보내면, 그 눈빛을 받은 이가 ‘미쳤냐?!’라는 듯 입을 벙긋이며 그의 뒤편을 향해 턱짓했다.

그는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을 그제야 바라봤다.

땅을 구르고 잔뜩 얻어맞아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밧줄에 묶인 사람.

아아-. 알 것 같다. 조직을 배반해 죽여야만 하는 배신자를 처단하는 이 자리.

그런데 참 그 얼굴이 낯이 익었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지,

죽어가야 할 자리에 파비안이 있었으니 말이다.

“...”

무릎을 꿇은 파비안은 미동이 없었다. 마치 죽음을 알고 있는 것마냥 말이다.

누군가 말한다.

“빨리 해치워.”

수많은 눈들이 벨 엘가도, 그를 바라보고 있다.

“괜찮아 벨, 나를 쏴.”

그게 너와 나의 구원이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파비안. 벨, 그는 일단 총구를 든 채 다가갔다. 무릎을 꿇은 파비안의 시야에 맞춰 몸을 굽혀 앉고선 총구의 앞이 아닌, 등을 파비안 턱밑에 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파비안은 턱밑에 총신이 닿아도 역시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한다.

“다른 사람들 말을 들었잖아?”

“사제복은 어디 가고 배신자의 옷을 입고 있냐는 말이야.”

“...사제복은 또 뭐야?”

그는 이해가 가질 않는 표정으로 또 물었다.

“그런 순한 얼굴로 조직 생활을 했다고 주장할 참이야?”

“...하,”

침묵을 한참 지키던 그 시선을 마주하다 이죽 웃더니 이윽고 광소가 되어 터져 나온 그가 욕설을 내뱉으며 말한다.

“씨발, 안 통하네.”

파비안은 목을 빼어 숨이 닿을 듯한 지근거리에서 비웃듯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안이 있을 것 같아?”

“그 얼굴로 말하면 좀 상처긴 하는데.”

그는 총구를 옮겨 심장께에 댄다. 시선을 내려 파비안을 한번 보다가 비웃는듯한 얼굴을 바라봤다.

“나 죽인 거 기억하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그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동그랗게 뜨인 눈이 비웃듯 둥글게 말렸다.

그는 닿은 총구에 무게를 더 실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예쁜 구멍이 뚫리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이거, 어디까지 허상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고민에 빠지는 찰나,

파비안은 그의 총구에 무게가 더 실리니 시선이 제 가슴께를 향했다가 되레 파비안 저가 몸을 숙여 총구와 바짝 붙었다.

“...”

그는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크게 해를 가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기에 근거리에서 파비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얼굴에 죄가 있었던가?

파비안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싸늘해진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뭘 따져?“

”당신이 날 한번 죽인 적 있거든? 쌤쌤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총구를 당기자,

탕-!

터진 화약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고,

파열음이 귓가를 스치면

파비안의 몸이 무너진다.

심장을 노리고 쏜 총알이 그를 관통하고 지나간다.

읍, 허억, 하고 간헐적으로 터지는 폐부에서부터 올라오는 숨소리와 서서히 바닥을 적시는 시뻘건 웅덩이,

느릿하게 숨이 끊어져 가는….

...

그는 제 손등에 튄 혈흔을 훔치고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미쳐가고 있나?

그런 생각할 틈도 주고 싶지 않은 세상인지, 파비안으로 보이는 이는 입에서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며 고통에 사정없이 일그러지던 표정이 일순, 평소의 그 얼굴, 그 어투로 되돌아갔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가는 그 시선이 벨 엘가도, 그에게로 머물렀다.

“세상에는 여러 방식의 구원이 있어. 그리고 네가 그 구원을 원했다면,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벨, 괜찮아, 다음에는 좀 더 나아질 거야.”

“...”

벨은 어떤 미동도 없이 낮은 자세로 그 말을 듣는다.

또다시 주변이 일렁인다. 그는 이제 다음이 있다는 걸 아는 듯, 처음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무너져 떨어져 내려가는 폐허들,

부풀었다가 뻥 뚫리는 바닥들,

그는 스러지는 주변에서 작은 목소리를 듣는다.

“...벨”

파비안이 목이 메여 착해진 목소리에 울컥 핏덩이를 토해내며 이어 말했다.

“손잡아줘.”

그는 망설임이 더 생겼다. 총구에 있는 탄창을 확인하고, 수납한 다음, 그 손을 쳐다봤다.

“이게 그 구원의 과정이야? 난 지옥 같은데.”

...

화약 냄새와 비린내가 머리를 어지럽히자, 손등 위로 그의 손을 덮었다.

꾸륵꾸륵 피어오르는 피거품이 꼭 웃는 얼굴처럼 보였다.

파비안의 몸이 땅으로 꺼지며 검은 가루처럼 흩어져 버린다.

발치에 한 뼘 정도 머물러 있던 바닥 또한 같이 먼지처럼 흩어지면, 망연자실하게 밑으로 또 떨어져 내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그래서 말인데, 이거에 대해서는….”

“아? 이보세요, 벨 엘가도 씨.”:

“듣고 있어?”

“협상 중에 졸아요. 지금?”

그는 들리는 소리에 눈을 느릿하게 떠본다.

툭툭, 정강이 쪽을 구두 굽으로 두드리는 느낌이 든다. 그는 희미한 시야를 눈을 몇 번 꿈뻑이면 겨우 찾아낸다.

미묘하게 서늘한 공기,

고풍스러운 소파와 벽지,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지는 오래된 위스키의 오크 향과, 옅은 담배 냄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보고서들….

마피아들 간의 협상 자리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앞의 누군가를 바라보면, 맞은편의 협상 자리에는 파비안이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입을 리 없는 정장을 잘 차려입은 채로 말이다.

“...잘 잤어요?”

파비안은 기가 찬단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고,

“안 잤는데요?”

그 눈을 뻔뻔하게 보며 그는 말했다.

그러자, 파비안의 구긴 눈이 더 가늘어진다. ‘뭐, 그러시겠지.’

뇌까리며 온더락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위스키를 부어 홀짝인다.

벨은 그런 그의 모습이 새롭긴 하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앞에 있는 보고서들을 들을 보기 위해 테이블로 시선을 돌린다.

테이블에는 유통 보고서가 올라와 있었다. 다른 세력과 맞부딪혀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약 유통 루트, 연루된 사람들의 얼굴이 나열된 보고서였다.

“마침 잘 봤네.”

파비안은 턱짓으로 보고서를 가리키며 잔을 내려놓고 이어 말했다.

“그래서 이 유통 건은 어떻게 할 거예요?”

파비안은 다시 턱을 괴었다. 그의 홉뜬 눈이 가늘어지며 귀찮음과 피로가 뒤섞인 느른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읊조린다.

“요즘 그쪽이 약이 줄줄 샌다고 보고가 수도 없이 올라와.”

보고서를 보고 있자면, 불과 얼마 전 그가 결코 보아서는 안 되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보고서…. 낯이 익다 했더니 그때의 보고서와 같아 보인다.

사제복을 입고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익숙한 낯,

파비안의 얼굴이다.

같은 얼굴의 마피아는 사진을 툭툭 가리킨다.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인 걸 인지했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한마디를 뱉는다.

“우리 쪽에서 샐 리가?”

그러자, 그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듯,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럼, 우리 애들이 잘못 봤다고? 사실이 그렇잖아.”

“...”

“...아, 됐다.”

파비안으로 보이는 이는 만사 귀찮다는 듯한 어투로 손을 휘적거리며,

“알겠어. 책임 안 물어요. 대신 이렇게 하자고.”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시선을 그에게 주며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거기 유통자들 색출해서 우리한테 넘겨줘.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할게.”

그는 보고서 속 사진을 보다가 삐딱하게 파비안을 보며 말했다.

“묘하게 아까부터 상사가 명령 짓 하는 모습이네? 협상이 아니라 하청 개념으로 보려고 그랬나?”

“......자존심은. 당신네에서 새는 걸 우리가 떠안게 된 마당에 내가 숙이고 들어가는 것도 이상하죠? 안 그래?”

저쪽도 마주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아까 가리키던 사진을 눈짓하며,

“우리 조직원이 아닌데 왜 우리 쪽에서 샌다고 표현해? 그쪽 애들이 내 애인이라도 된다고 그래요?”

그 말을 가만히 듣던 파비안은 한숨과 함께 의자에 늘어졌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서는 말했다.

“후, 그래, 미안해요.”

“응, 알면 됐어요.”

파비안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눈을 까뒤집고 고갤 내젓다가 테이블에 엎어져 피로한 낯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투닥거리든 말든 그쪽 구역에서 뭘 지지고 볶든 세기의 사랑을 하든 내 알 바가 아닌데. 신경 좀 안 쓰이게 해달라는 거지. ...응?”

“구역 관리는 ...좀 더 관심을 기울여보죠.”

그는 피로한 낯으로 올려다보는 파비안의 낯을 한 이를 보며 ‘이런 얼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적당히 급변하는 상황에 맞장구쳐주는 중인데, 일반인은 이미 이런 상황에 있었다면 미쳤겠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아니, 저도 그러는 중인지도 모르겠다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파비안은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유통자도 넘겨주면 고맙고.”

“상황이 된다면.”

이마저도 일반인이라면 벌벌 떨 상황에 그는 보고서에 있는 파비안의 사진에 강아지 귀나 그리고 있었다.

.

상대방은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속이 편해졌나 다시 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하는 양을 천천히 지켜보고 있었고.

그의 낙서는 점점 망해가는 중일 뿐이었다.

“흐음….”

뭐가 잘못된 건지 한참을 보고 있으니 파비안이 말을 툭 던진다.

“...그림 재주는 없네.”

“아, 좀 상처.”

파비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림을 슬금 보다 그를 빤히 바라본다.

“...신기해라, 어떻게 이렇게 적응을 잘할까?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그러게, 왜 그럴까. 제정신이 아니어서?”

빙글 입꼬리만 올려 웃어 보이다가

“지옥이 왜 그 얼굴로 왔을까라는 생각.”

그 말을 들은 파비안을 닮은 이는 느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 것 같아?”

그는 그이의 말에 보고서 끝을 잡고 그 앞의 얼굴과 대조해보듯 보다가 대답했다.

“현실은 아니겠지. 스토커의 상상 같기도 하고.”

그이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틀어 낙서 된 사진을 잠깐 봤다가 짙게 웃었다.

“어떻게 확신해? 현실일 수도 있지.”

현실이라, 오랜만에 봤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지만, 떨쳐내고서는 말했다.

“반대로 현실이라는 증거 있어?”

그가 말하는 데에 한참 시선을 머물다 ‘파하하’하고 웃으며 몸을 늘어트렸다.

“재밌네. 그럼말이야,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나? 여기에 있는 모든 게 그 사제의 심상이라고. 여기에 있는 모든 게 정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그는 아무런 고저 없는 표정과 말투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취향이 독특하네”

취향이 독특하다는 말에 그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내 취향이?”

“어. 그런 말 처음 들어?”

“처음이지. 그런데 정정은 하고 가야겠군. 따지자면 이건 모두 파비안 그레이슨이 원하는 것들이야. 죄를 지어 타락한 너를 어떻게든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는 것. 나는 이 피와 파멸에 대해서 책임이 없어.”

능청스러운 웃음과,

“네가 책임지는 거지. 무너지는 것은 네가 아니야. 그가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은 거야? 오, 그거야말로 독특한 취향인걸?”

“왜 이래, 밑바닥도 살만해”

“내 의견이 아니래도?”

“취향이라 할 게 있나…. 그래서, 지금 뭐 할 건데?”

그이는 즐거운 얘기라도 하는 듯 들뜬 얼굴을 하고 소파 등받이를 받침대 삼아 턱을 괴고서는 말했다.

“아까부터 보아하니…. 내가 들어앉은 게 이 몸인 게 여간 맘에 안 드는 게 아닌 것 같잖아.”

그도 여유로운 손으로 펜을 굴리다가 자신을 가리킨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쪽, 많이 비싸다?”

그에 그이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간들이 희귀한 것에 눈깔이 돌아가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군. 한 번만 말해봐.“구원받고 싶다”라고”

“지금 그런 말을 앞에 말해놓고 따라 하라고 하면…. 따라 하는 바보가 있겠어?”

“다른 인간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네. ...뭐, 좋아. 다른 건 몰라도 우린 너를 이 안에서 내보내지 않을 순 있지. 영원히 너를 이곳에 가둬 둘 수 있단 얘기야.”

“감금플은 내 취향이 아닌데.”

“파비안 그레이슨은 현실에서 점점 미쳐갈 거고, 너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을 것이고.”

그이는 그의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도 그이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구원받고 싶지 않음을 피력하는 벨에게,

파비안이 파비안처럼,

파비안답게, 파비안으로밖에 보일 수밖에 없도록 말한다.

“손 잡아줘”

그는 방금 말했던 것과 같이, 영원히 가둬보던가 하며 뻗대려다가, ‘손 잡아줘’라는 그런 말에 파비안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두었다.

이 반복되는 마무리를 들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행동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맨입으로?”

“맨입?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어?”

“이 정신 속에서 벗어나게 해줘.”

“...”

그는 파비안의 웃는 모습을 봤다.

파비안은 그에게 속삭인다.

“그럼 한 마디만 해줘. 그러면 들어줄게.”

“......”

평소를 표방하던 입이 다시 이죽 웃으면 한순간에 몸이 검은 재가 되어 흩어져 내린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이 붕 뜬 느낌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 다른 것만 같다.

눈을 들어 올려보면 부드러운 이불이 바스락거린다.

하얗게 햇빛이 부서지며 주변을 쬐고, 주변을 살피면 아기자기한 화병이 놓여져 있고 저 푸른 커튼이 가린 그림자는 방안을 온화하게 감싸고 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침대부터 바라보면, 침대는 참 푹신푹신하며 한 사람이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정도의 싱글 침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꼼지락거리던 몸으로 이불을 들춰 협탁을 살피면, 협탁에는 성경책이 있었다.

자기 전에 읽어보기라도 하는지 약간 빛이 바래고 손때가 묻은 성경책.

책을 팔락팔락 넘기면, 하나의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복음 19장 10절-]

“...”

그는 나머지도 팔랑 넘겨보다 성경책은 그대로 두고 화병에 시선을 둬 본다.

탐스럽게 핀 푸른 장미가 화병에 꽂혀 있었다. 문득, 그는 이 방이 익숙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거의 평생을 보아왔다고 해도 빈말이 아닐 것 같은 익숙한 느낌,

이런 기시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서있다 창문을 바라봤다.

푸른 커튼이 쳐져있는 평범한 창문, 누구의 취향인지 적어도 나쁘지 않은 센스를 가진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간밤에 무언가 깔고 자기라도 했던지 몸이 좀 배기는 것 같기도 하고, 서서히 정신이 또렷해지며 그는 천천히 깨닫는다.

그래, 벨 엘가도, 그의 집이다.

제 집인걸 깨달으며 또렷해진 정신에 이제야 거슬리는 것은 배기는 듯 한 감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뭘 깔고 잔 거야?’라는 생각에 이부자리를 다시 살펴보면 침대는 여전히 푹신했고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올리던 손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이 들면 주머니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는 플라스틱 조각 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개별 포장된 검은색의 액체가 담긴 주사기 두 개다. 접선책에게서 받아낸.

“...”

이런 어리둥절한 사이 방문 너머 발소리가 들린다.

슬리퍼로 마룻바닥을 슬슬 끄는 소리.

“뭐야, 깼어? 깼으면 말을 하지.”

느긋한 목소리다.

평범한 낯빛으로, 이쪽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부스스한 얼굴. 파비안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주사기를 여전히 쥔 채, 그런 그의 나른한 모습을 보면, ‘아, 현실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한다.

“아침 해놨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

문 너머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집 안은 평온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어떠한 일도 없었던 것 마냥.

그는 섣불리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다 겨우 입을 뗐다.

“이상하다. 왜 꼬시지? 방법을 바꿨나?”

그의 말에 파비안은 내내 맹한 표정이다, 한쪽 눈썹이 휘 들린 얼굴로 말했다.

“...뭐라는 거야. 대학교가 사람 다 망쳐놨네…. 아, 내가 할 소린 아닌가?”

“내가 대학생이야? 아, 그런 상황이구나.”

“...혹시 어디 아파? 병원 예약 잡을까?”

“아냐. 그래서 지금 동거하는 설정이야?”

“...알겠어 내가 잘못했어. 과제 할 때 도와달라고 안 늘어질게. 진짜 이상해…. 무슨 설정 타령이야? 일본 만화로 취향 노선이 바뀐 거니?”

그의 말에 손에 쥔 주사기를 굴리며 현실이 아닌 걸 되뇌인다.

그래, 어느 정도 어울려주자.

“아침……. 잘…. 만들어…?”

“하다 보니 느는 것 같긴 한데…. 알잖아? 거창한 것들도 아니야. 어서 나와.”

“...”

여태껏 겪어왔던 것 중 가장 무방비한 모습의 파비안의 손목을 순간 잡아 힘을 짧게 준다. 균형을 살짝 잃은 몸을 침대 위로 안착시키고 일단 우위를 잡는다.

“음, 그래서 거래처 다음에는 무슨 설, ...무슨 관계야?”

파비안은 푹신한 침대라도 집게 핀에 뒤통수를 부딪쳐 씁- 소리를 내다가 황당하게 그를 올려다본다.

“너야말로 뭘 하고 싶은 건데? 키스?”

그는 ‘키스’라는 말에 그는 그의 말에 잠깐 멍을 때리고 바로 말을 뱉었다.

“...? 적어도 가짜한테는 안 해”

“이번엔 가짜라네…. 미치겠다 정말.”

그의 어깨를 잡아 도로 일으켜 세우며 뺨에 짧게 입 맞추고 휘적휘적 방을 나섰다.

“나 양치도 아직 안 해서 입엔 못 해주겠다.”

저항 없이 일으켜 세워졌다가 그가 나서는 모습을 보고서는

“아까 전 모습보다는 확실히 세긴 하네….”

주사기 사용법을 안 것 같다가도 명확히 갈피가 잡히지 않아, 부서지는 햇빛을 보다 커튼을 걷어버린다.

커튼 너머로는 평화로운 도심의 풍경이 펼쳐져 보인다. 꿈만 같지는 않은 풍경, 현실로 돌아오지 않은 건 확실한데 저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는 그는 방을 나선다.

방을 나서보면 식탁 위에 놓인 크루아상 샌드위치가 보인다.

파비안은, 마치 저의 집인 양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하다 벨을 보고서는 턱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커피 마실래?”

그런 파비안을 눈으로 좇다가 일단 가리킨 식탁에 앉았다. 순순하게 “응”이라 하며. 파비안은 아직 잠이 덜 깬 낯으로 추출 완료된 커피가 든 머그잔과 벨 몫의 샌드위치를 옆에 두고서 새 캡슐을 끼워 넣었다.

“그럼 먼저 먹고 있어.”

“...먼저? 괜찮은데.”

이 상황에 적응한 듯 말을 받아치지만, 낯선 상황에서 식음료를 먹기에는 그의 경험상 꺼려졌다.

그가 먹질 않고 있어도 파비안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추출 완료된 제 몫의 커피를 들여 곧장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래? 하긴 자고 일어난 직후엔 뭐 안 먹히긴 하지….”

파비안은 살펴보는 시선으로 보다가 조금 찌푸리며 입을 다시 열었다.

“잠은 다 깬 거야?”

그는 그런 파비안을 마주 보며 구경하다 “아직 더 깨봐야 할 것 같아”라고 중의적으로 받아친다.

“내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너도 참 아침잠이 많네.”

“...”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식탁 위에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앞의 파비안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지금, 파비안도 분명 가짜일 터,

하지만 그가 보는 제 앞에 있는 파비안에게서 작위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의 성정 상 무언갈 꾸며내는 중이라면 미세하게나마 티가 날 텐데 말이다.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옅은 걱정과 남아있는 졸음이 정도뿐일까.

파비안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눈이 마주치자 웃어버리며 말했다.

“너무 빤히 보는데, 내 얼굴 뚫어버리게?”

“아니 뭐, 평소에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여러모로……. 겪는 중이라 새롭네. 그럼……. 형은…. 대학생?”

살짝 떠본다.

“...아직 잠 덜 깼네…. 그럼?”

파비안은 그의 질문에 이제는 조금 질린 기색으로 대답했다. ‘어제 대체 뭘 보고 잤길래 그러는 거지?’라고 중얼거리며 말이다.

“그럼 뭐 물어볼래. 만약에 형이 사제고 내가….”

그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찾느라 말을 끌다가 이어 말했다.

“...아무튼, 경찰이 싫어하는 짓을 하는 위치야. 그럼 어떨 것 같아?”

“...”

파비안은 그의 엉뚱한 질문에 벙긋벙긋 말하진 못하고 혼란이 인 얼굴로 잠깐 고개를 갸우뚱 해보기도 했다가 찬찬히 뜯어보듯 빤히 바라봤다.

“좀 꿈꿨다고 생각하고 진지해져 봐.”

“......무슨 조합인지부터 모르겠는데…. 뭐, 폭력 행사하고 회개하러 찾아오는 상황이야? 좀 설명을 해줘 봐 그럼.”

“회개할 생각은 없, ...아니, 내가 옆에서 막 약도 해. 누구도 막 패.”

“약?! 네가?!”

그는 엇나가는 포인트에 잠시 할 말을 잃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냐. 내가 아는 사람이 약하고 누구 패는데 그 와중에 아는 사제 형이 있었나 봐 근데 그 사제 형이 구원해주겠다고 한대. 그래서 물어봤어.”

“구원?”

파비안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그는 그런 얼굴을 보면 식탁에 무게를 싣던 자세를 바로 하고 쳐다보았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 생판 남인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를 따져….”

그는 전 상황들보다 대화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했다.

“근데 형은 어디서 자?”

“...너 오늘 아침부터 진짜 이상한 거 알지. 우리 같이 살잖아…. 여기서 잤지.”

그는 앞의 상황을 되짚어보다가 눈앞의 커피를 보고 ‘여기서 잤다고?’요 생각하다 내렸던 고개를 들어 몇 번 멀거니 눈을 깜빡이다 물어봤다.

“우리 잤어?”

“......말 안 꺼내기로 한 거 아니었니.”

그는 이 모든 걸 연출된 세트장인 것처럼 보고 있다가 흥미를 가졌다. 명백히, 호기심을 담아서 본다.

와, 충동적?

“사…. 아니, 형답지 않은데.”

...새삼 실내 구조를 눈으로 훑어보다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내가…. ‘실수’할 리가 없는데”

“...그래도 한 건 사실이지.”

잠자리에 위아래가 궁금했지만 속으로 말을 삼킨다. 주제를 넘기고 그나저나, 학생 흉내를 낼 순 없으니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뭔지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은 다 깼어.”

“별말씀을”

“...얄미워.”

“다른 주제로 안 넘어가면 누가 위였느냐고도 물어본다?”

“...”

“아, 물어봤네, 미안.”

“누가 대답해준다니?”

파비안은 입을 꾹 닫고 빈 접시들을 들고 일어난다.

“매정해”

파비안은 빈 접시들을 들고 설거지를 하러 가며 말했다.

“매정할게. 아, 그러고 보니 나 말야. 이상한 꿈을 꿨다? 따지고 보면…. 네가 아까 물어본 거랑도 연관이 있으려나. 네가 마피아 보스인 꿈이었는데,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이유로 죽어라 쫓아 오더라고.”

파비안은 그런 말을 하며 돌아서서 작게 웃음을 보였다.

부드럽고, 평상적인 파비안의 말투 그대로를 구사하며.

그는 그저 ‘그렇게 열심히 찾아갔었나?’라는 생각을 한다. 인위적일 정도로 평화로운 말투와 공간의 분위기에 오히려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그의 말을 들었다.

겪어보니 어때, 이곳은? 마피아도 아니고 이상한 일에 휩쓸리지도 않는 세계 말이야.

여전히, 작위적이란 느낌은 티끌만치도 느껴지지 않을 자연스러운 낯이다. 어떠한 기대감도, 감정의 고저 따위는 없는 일상적인 어투로 파비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서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제는 은근히 구슬리는구나. 그는 어느 정도 상황에 맞춰 대답하던 걸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

“......가짜인 세계인데 좋을 리가.”

“그래….”

이곳에 남지 않겠다고 말한 그에게 파비안처럼 보이는 것은 말했다.

“하지만 너는 나갈 수 없어.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너는 나와 함께 하는 거야.

”난 너무 과하게 집착하는 사람은 별로더라.“

설핏 웃는 그것. 그는 마다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그대로 둘은 마주 보았고 파비안으로 보이는 그것은 여전히 평온해 보이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네. 난 네가 좋은데 말이야.“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명심해. 잊으면 안 돼. 그 가루. 그걸 쫓아낼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야. 그걸 이마에... ...하하, 내가 너한테서 뭘 노리겠어. 방어막이야.“

”그 잘난 인간 하나 살리겠다고 방지책까지 준비해 두었을 줄이야.“

스쳐 가는 기억에 수중에 든 주사기의 끝을 만져보다가 앉아있는 몸을 일으켰다.

”이리 와봐.“

”내가 왜?“

”뭘 물어? 근력으로 내가 질 것 같으니까 친절하게 부른 거잖아. 아, 됐다. 진짜….“

그는 제자리에 못 박혀 있듯 서 있는 파비안처럼 보이는 이에게 한숨을 푹 내쉬며 다가갔다. 헐렁헐렁 걸으면서 다가가는 데 무리가 없는지, 주의해서 그것의 얼굴을 바라본다.

”...멍청한 건지 대담한 건지.“

그것은, 그의 다가오는 발걸음 따라 무감한 시선을 두다가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성큼 다가선다.

”내가 쫄보면 진작에 이 자리 박차고 다른 거 했겠지.“

”...인간들 중 혹자는 그걸 두고 이성적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이는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서는 그의 낯을 빤히 보다 턱을 움켜잡고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질 거 같다면서도 다가오는 건 뭐 하는 짓이야, 자살?

“뭐, 비슷한 거. 도박”

배려 없는 행동에, 턱을 쥐고 있는 것이 불편했던 그는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갖추고 있는 그 몸이 나보다 키 크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거야? 화나네, 진짜. 직접 하는 건 오랜만인데 잠깐 따끔해.”

턱을 고정시킨 팔목을 오른손으로 잡고 반대 손으로 그이에게 주사기를 찔러 넣는다.

주사기를 찔러넣어 보면 이상하게 이건 인간의 피부가 아닌 느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사기 입구 부분은 당연히 부서지며 벨의 손이 액체로 흥건하게 젖어 들어버린다.

신기하게도, 젖어 든 액체는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파비안에게 닿은 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이 어이없는 광경에 ‘뭐 이런 게 있어?’ 싶다가도 앞서 봤던 검은 것을 떠올리면 납득이 되는 것만 같았다.

파편에 스쳐 손에 따끔하고 아린 감각이 옅게 느껴져 손 언저리를 보았다가 앞에 그이를 바라보았다.

“...어쩌나. 정말 자살이 되게 생겼네.”

당황이 서렸다가 끝내 남는 것은 조소. 짧게 뱉어낸 숨 같은 웃음에 부드러워진 손길이 턱에서 뺨으로 올라가 다정하게 매만졌다.

“...어쩌려고 이랬어, 응?”

연민 섞인 시선이 큭큭 거리더니 비웃음으로 변모한다.

“아 좀….”

손길을 슬 피하려 약간 고개를 돌리고선 말한다.

“안 해본 것보다 낫잖아. 진짜 열 받게 구는 거 알지?”

말을 대충 던지고 그가 바로 고개를 내려, 그이에게 발을 걸었다.

방심하고 있던 그이는 휘청하고 순간 균형을 잃었고, 그는 흐트러진 숨을 바로잡으며 균형을 잃어 앉은 몸을 밀고는 그 위에 제압하듯 앉아 버린다.

“비웃는 거 끝났어?”

포기하지도 않고, 같은 말을 할 것 같은 얼굴을 한 파비안의 얼굴에 흥미가 서리다 입을 비집고 파고드는 손에 와락 표정이 구겨져 버린다.

“끅-”

괴로운 외마디 소리와 함께 크게 들썩인 몸에 반사적으로 뱉어낸 숨이 파고든 손을 핥고 지나가면 표정에 고통이 서리는 게 보인다.

충혈이 된 듯, 검은 혈관 따위가 흰자 위를 뒤덮다 주춤하며 얼룩진 시선이 그를 노려봤다.

“...”

하지만 그는 익숙하게 반항, 반동하는 이의 몸을 무의식적으로 누르고서는 그이의 얼굴을 살피면,

그는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거짓된 평온이 흔들린다.

어쩌면 지속 되었을지도 모를 허상에 점점 금이 가더니,

천천히,

천천히,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

.

.

눈을 깜빡이면, 두 사람은 성당의 가장 위, 지붕 끝에 서 있었고,

파비안은 지붕 바깥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비와 눈이 뒤섞여 두 사람에게 쏟아져 내리면,

곧 그는 웃음을 터트린다.

환하게,

울 것만 같이,

행복한 얼굴로,

스러질 것처럼.

“...하하!”

파비안이 웃었다. 허나, 겪은 게 꽤 있는 그는 가만히 그를 보다 이름만 부른다.

이름이 불리면 파비안은 기쁜 듯이 입꼬리가 둥글게 말린다. 눈은 검게 죽었지만 말이다.

“벨”

“뭐가 그렇게 재밌어?”

그는 파비안의 위태로운 모습에 잡아 오는 게 나을 거 같아 거리를 좁혔다.

“재밌냐니,”

웃음기가 서려 들뜬 목소리가 새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그냥. 네 의지에는 정말 감탄했어. 그뿐이야.”

“...아, 또야?”

“그 의지는 여전히…. 돌아가고 싶니?”

“응. 난 여태껏 불만이 없었어. 나야말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정말로.”

파비안의 고개가 푹 수그러든다. 젖은 머리칼 사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입매는 웃는 것도 같지만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머잖아 고개를 들면 단정한, 평소 같은 파비안의 표정이었다. 단조로운 목소리에 담담히 다시 말을 뱉는다.

“그럼에도, 불만이 없었으니, 돌아가고 싶다. 라는 거겠지?”

그는 파비안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평소에 아니꼬웠어?”

그의 직설적인 말에 파비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부정한다 한들 네가 쉽게 믿어주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어.”

“...형한테 잘못한 건 없잖아. 존중해 줘.”

마지막 벨이 했던 말에 파비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구원받지 마. 그냥, 그냥 나랑 이 지옥 속에 있자. 나를 위해서 여기 있어 줘. 이 제멋대로인 오만에 어울려줘. ...나는 말이야, 아마 너를 구원할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하지만, 그게 이런 방식은 아니겠지.”

찰나의 정적,

“나는 은도 금도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네게 줄게. 일어나 벨. 걸어갈 시간이야.”

가만히 듣다가 의아해진 벨은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고 마지막으로, 파비안이 말했다.

“손, 잡아줄래?”

그는 여러 번 들어왔던 말에 의아한 기색을 역력히 띄웠던 안색이 조금은 희게 피로해진다.

“......원한다면?”

파비안 그는 긍정도 부정도, 어떤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뿐이다.

“......”

그는 비와 눈으로 체온이 낮아진 손을 다가가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마주 잡힌다.

지붕 바깥으로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던 파비안은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파비안은 잡힌 손을 바라보고 그제야 눈매가 휘어졌다.

“...같이 있어 주려고?”

그는 지붕 아래를 순간 봤다가 그 얼굴을 마주하고 턱 막힌 숨을 쉬었다.

“짐작은 가지만 진짜 그걸 원해?”

그걸 원하냐. 파비안은 그의 얼굴을 물끄럼 바라보다 그 시선을 잠시 쫓았다. 그리고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끄트머리의 반대편, 그에게로 몇 발자국 내디뎌 젖은 손으로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손이 차네 거칠어지겠어.”

“누구 때문에 오랜만에 온몸이 아파”

파비안은 저가 붙잡은 손, 따스하게 토닥이다 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어. 고마워.”

“날 아끼는 건 알겠는데 이런식으로 좋아하지 좀 마.”

한숨 쉬고,

“... ...알면 됐어.”

뚱하게 보는 그를 보며 파비안은 옅게 웃으며 말한다.

“유념할게.”

두 사람은 살아남았고, 이 지옥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아, 약물의 탓일까, 눈앞이 어질어질 해진다.

몸을 차갑게 때리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온화하게만 느껴지고, 이내 맞잡은 두 손만의 온기가 머릿속에 남는다.

남는 것은 그 둘 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억누르며 천천히 눈을 뜬다.

일어나려고 하면 등 뒤에 딱딱함이 느껴지는데 안 봐도 성당 의자 같았다.

그도 덩달아 속이 울렁거리는 착각이 들어 입가를 가리고 몸을 틀어 의자와 주변을 살피면,

그는 성당 의자에 누워 있었다.

여전히 이곳은 따스하게 햇빛이 내리비치고,

여전히 닫힌 고해실과 보라색 옷을 입은 성모상, 그리고 십자가가 있었다.

몸을 일으키면, 전례대 앞 누군가가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떨어지는 빛을 받으며 서 있던 이는 천천히 돌아서는데,

파비안이었다.

그는 상체만 일으켜 가까운 앞에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고 그 얼굴을 바라본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에 흠뻑 젖은 채, 인류의 구원자이자 길잡이이자, 길 잃은 어린양들의 아비를 향해 기도를 올리던 이는 벨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다가온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옆자리에 자연스레 몸을 들이밀어 앉더니, 잠시 허공을 헤매던 손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노곤한 기색으로 다가오는 걸 조용히 지켜보다가 옆에 앉은 파비안이 따듯한 손길로 토닥여주자 입을 열었다.

“지금은 제정신이야?”

그의 질문에 파비안은 끄덕이며 제정신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그는 바로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나?”

“...얄궂게도 전부”

스테인드글라스에 화려하게 부서지는 빛들을 보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우리가 잤대.”

“...그 말 할 것 같더라.”

“그거 대답 안 해주던데 형은 알 거 아니야.”

“그게 그렇게 궁금해?”

“응. 형, 이번에는 양치했어?”

결국, 참다못한 웃음이 터지고 만다.

“키스해달라는 거야?”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실컷 놀려놓고 웃음이 나와?”

“뭐래니 애가 정말, 누가 내 동생 실컷 놀렸는데?”

파비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 봤다. 웃음이 터져 오래 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할 말이 참 많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말을 삼켜낸다. 그리고, 간단히 눈만 돌려 십자가를 보고 뜬금없이 말했다.

“주님도 이 정도는 납득 하셔야 해.”

그는 파비안의 다른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불쑥 거리를 좁혀 뽀뽀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정화. 이대로는 안되겠어서.”

뽀뽀를 일방적으로 받은 파비안은 짧게 벙쪄있다가 이어진 그의 말에 또 웃어버린다.

“그걸로 정화가 되겠어?”

파비안은 애정을 듬뿍 담아 그의 머리칼 정돈도 하고 결 따라 쓰다듬다가 십자가를 등지고 서서 벨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입을 진하게 맞춘다.

꽤 이미지에 맞지 않게 호흡만을 교환하다 입술을 떼고서 그는 말했다.

“갑자기 억울하네, 왜 여유로워?”

투정 부리는 와중, 파비안을 직시하는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간다. 설마 하는 표정이 보이는지 파비안은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깨까지 으쓱이면 그는 역시, 그럴 리는 없다며 뻔뻔한 사고로 넘어간다.

파비안은 그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만도 같지만 구태여 입을 열진 않는다.

“돌아갈래”

“벌써 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는 듯 뒤적이며

“이상한 거 더는 사지 말고, 제발.”

그리고 벌써가냐는 말에 뒤적이던 행동을 뒤로하고 물었다.

“그러면?”

“고마워서 한번 안아볼까 했지.”

헤실 웃으며 파비안은 그에게 편안한 표정을 비춘다.

그런 얼굴을 바라본 그는 한마디를 또 했다.

“진짜, 십자가 앞에서 큰일 나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파비안은 양팔을 벌리려다 그의 말에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큰일이랄게 뭔데?”

양팔을 벌리려던 기색을 눈치챈 그는 순하게 다가와서 먼저 꼭 안았다. 근거리에서 보라는 듯이 한숨을 쉬다가 가까운 귀와 목가를 입질하듯 깨물어버린다.

“...그만”

입 장난이 점점 올라오면 움찔거리다 그를 멀리 떼어냈다.

“이해했어. 피곤하겠네. 가봐도 돼.”

“...다시 봐.”

“응, 조심히 들어가”

...그러면 많은 사람이 떨어져 나가 서로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며,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

또 불법이 성하여 많은 이의 사랑이 식어 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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