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2)

가라앉은 사격자, 청우건우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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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우는 무가로 유명한 류씨 가문에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위를 갖춘 인물이었다.

여섯 살에 처음으로 잡은 활에서도, 열 살에 잡은 검에서도 그 재능은 빛을 발했지만 류청우는 사촌 형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쏘았던 활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다. 바람과 햇살마저 숨을 죽이는, 시위를 당기는 그 순간의 고요한 정적과 긴장을. 그 모든 것을 가르쳐준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을.

그래, 류청우는 그야말로 천재라 불릴 재능을 가진 이였다. 류청우는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보다 네 살 많은 사촌 형 류건우의 무위를 뛰어넘었고, 띠동갑인 재종형(再從兄, 육촌 형)이자 차기 가주가 될 류철우는 류청우가 막 지학이 되었을 무렵 검을 사용해 실시한 대련에서 류청우에게 크게 패배했다. 그 이후로 류청우는 류철우의 발끝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류청우는 무과 수석으로 급제했고, 그의 뛰어난 자질을 칭찬하는 왕의 교지를 받아 국경을 수비하기 위해 떠났다. 류청우가 교지를 받아 국경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류청우의 양친과 동생은 잘된 일이라 축하하면서도 류청우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지만, 가주를 필두로 한 집안에서는 그저 영광이라며 류청우의 등을 쳤다. 류청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류청우가 진정 축하를 받고 싶은 사람은 언젠가부터 행방이 묘연한데다, 걱정이 잔뜩한 가족들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류청우는 나라의 안녕이 제 손에 달렸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나이도 아니었으며, 그 직책이 가지는 무게를 모를 머리도 아니었기에.

류청우의 전임자는 꽤 오랫동안 국경을 지켰던 이였다. 나이가 들며 건강이 나빠져 사직을 청했다는 그는 류청우에게 어린 나이에 고생한다며, 이따금 이민족이 약탈을 위해 국경을 넘는 일은 있지만 그 외에 별일은 없을 것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훌쩍 떠났다. 그리고 전임자의 말은 정확히 반만 맞았다는 것을 류청우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은 류청우가 부임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전쟁.

더없이 맑고도 맑은 어느 겨울. 국경선 멀리에서 발견된 무리를 류청우는 여느 때처럼 약탈을 위해 내려온 소규모의 무리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오판이었다. 류청우가 본 것은 그저 정찰을 위해 파견된 이십여 명의 선발대였으며, 추후 밝혀진 전체 규모는 5만 명을 훌쩍 넘었다. 고작 변방에 있는 마을 하나를 약탈하기 위해 그만한 숫자의 군대가 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으므로 그건 분명한 선전포고였다.

상황을 파악한 류청우는 궁으로 전령을 보내고 봉화를 올려 개전을 알리고, 차근차근 준비했던 무기와 성을 십분 활용했다. 류청우에게 모자란 경험과 지혜는 류청우의 휘하 장수들이 채웠다. 갑작스러운 전쟁에도 그의 군대가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것은 분명 그들 덕분이었다.

장수들이 경험을 통해 진을 치고 군을 지휘했다면, 그들의 수장인 류청우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선두에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자랑스레 깃발을 든 채 먼 거리에서 접근하는 적장의 머리를 성벽에 굳건히 선 류청우가 단 하나의 화살로 꿰뚫은 것은, 자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대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적 열세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고, 결국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푸른 철릭 위로 갑옷을 걸친 채, 류청우는 자신이 아끼는 화살통과 활을 매고 검을 든 채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 하나의 희생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던, 치기어린 군인의 몸부림이었다.

 

치열하던 전투의 끝자락.

아직 어리다는 걸 숨기지 못하고 홀로 서툴게 여민 푸른 말액에는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튀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물이 든 철릭과 만신창이가 된 갑옷을 두른 류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시위에 화살을 매긴 채로 주위를 살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추수가 끝난 겨울의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던 드넓은 평원은 이제 붉다못해 검은 자국으로 뒤덮여 죽음을 깊게 머금었다.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는 시체,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둔탁한 쇳소리, 끊임없이 신음하는 부상자들, 그런 이들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원들과 그 사이로 잔칫상이라도 펼쳐진 것처럼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커다란 새가 몇 마리.

적장은 이미 류청우의 화살에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고, 그 잔혹한 광경 속에서도 남은 적국의 장수들은 류청우의 병력에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주려 발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류청우는 다시금 활시위를 당겼다. 적장을 처리한 지금,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들을 교란시켜 다치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적어도 똑같은 이들이 똑같이 전쟁을 걸어오는, 오늘과 같은 광경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

류청우는 활에 화살을 매기고, 목표를 겨누어 활시위를 강하게 잡아당긴다. 요동치는 환경을 뚫고 잔잔한 수면처럼 평정을 머금은 두 눈이, 강하게 시위를 당기면서도 흔들림 하나 없는 곧은 자세에 주변이 멈추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화살의 끝이 향하는 곳은 적의 머리.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는 곧 커다란 소리를 내며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화살은 빠르게 날아가 목표를 꿰뚫는다.

그랬어야 하는데.

활시위를 당기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류청우를 거칠게 불렀다. 다급한 외침에 류청우의 눈이 커졌다.

 

“장군, 뒤에!”

“...!”

 

뒤를 돌아보기도 전의 아주 짧은 시간. 시위를 놓은 류청우의 오른쪽 어깨에 무언가가 박혔다. 류청우가 그것을 인식한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잠식했지만 류청우는 속 편히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류청우는 이를 악물며 제 어깨를 검집 삼은 적을 단검으로 찌르고, 자신이 약해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밀려드는 적군에게 흔들리는 날을 세웠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러기 위해 지금 류청우는 이 전장에 섰으니까. 검붉은 액체가 류청우의 얼굴에 튀는 동시에 손에선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나마 멀쩡하던 왼쪽 어깨마저 삐걱일 정도로 힘껏 무기를 휘두른 끝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을 뒤로, 류청우는 의식을 잃었다. 류청우가 목숨처럼 아꼈던, 그토록 소중한 활은 겹쳐지는 충격에 부서진 지 오래였다.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상처도 잘 아물고 있고."

 

전장에서 귀환한 류청우의 몸은 말 그대로 온몸이 너덜너덜했다. 거친 전장에서 화살을 쏘고, 검을 휘두르고, 하루종일 내달리며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이니 상처 하나하나가 얕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다친 상처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발견된 탓이었다. 류청우의 상처를 확인한 가주는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가문 내의 의각에서 입이 무거운 의원을 수배했고, 의원은 기대에 부응해 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며칠 동안 수없이 고비를 넘긴 끝에 류청우의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가족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옆에서 안도하던 가주가 물었다. 현상, 걱정, 그 모든 것을 제치고 그가 질문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럼 훈련은 언제부터 다시 할 수 있겠나?"

 

류청우의 치료를 맡은 이래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던 의원은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의 모두는 그 질문이 나오자마자 의원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가주는 손을 들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의원의 어깨를 잡아챘다. 가주의 심기를 반영하듯 미간이 거칠게 찌푸려졌다.

 

"이보게."

"짐작하기로는, 앞으로 무기, 특히 활을 잡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무거운 침묵이 바닥에 쌓였다. 가족들은 굳은 얼굴로 의원을 바라보았다. 류청우가 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활을 쏘기 위해서는 근육이 중요하지요. 헌데 근육이 너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뼈대는 말할 것도 없지요. 실혈도 컸고. 무엇보다도 전장 한복판이라 적절한 약이 없었는지 환부가 잔뜩 곯은 상태였습니다. 그 여파로 맥도 아주 약하고 온몸에 열이 올랐던 것을요. 장군께선 말 그대로 용케 살아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으로선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만 건강이 회복되어도 아주 운이 좋은 편일 겁니다."

“알겠소.”

 

류청우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의원이 류청우의 처소를 나간 직후, 무언가를 거칠게 찌르는 소리와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주는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새하얗게 질린 류청우의 가족들에게 고했다. 내치는 것은 가주에게 이미 익숙했고, 따라서 가주에게서 류청우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방계에 불과했다. 과거 류건우가 그리 허무하게 내쳐졌던 것처럼, 그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청우의 상처가 완전히 아문 후에 추후를 의논하도록 하지.”

 

그러니 그 말이 목숨만 앗지 않았을 뿐 실질적인 사형선고와도 다름없다는 것은,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청우야.”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달이 새로이 차고 기울던 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류청우가 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류청우는 자신이 더는 활을 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 말해준 것은 아니었다. 상처가 다 아물었는데도 아주 간단한 동작을 할 때조차 견딜 수 없이 어깨가 아팠으니, 힘과 정교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활은 더 이상 잡을 수 없을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류청우는 넋을 놓은 것처럼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식음을 전폐한 채 처소에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류청우를 보고 가문의 몇몇 일원은 류청우더러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필사적으로 재활 훈련을 해서 겨우 어깨가 최소한의 구실을 하기 시작할 즈음에는 분노했다. 타고난 성정이 온화한 탓에 결코 손을 올리지 않던 류청우의 처소에서는 짐승같은 비명이 몇 번이고 터져나왔다. 분노의 끝에서 결국 그토록 아끼던 화살 더미를 부러뜨리고 나서야 류청우는 타협했다. 활은 이미 마지막 전장에서 부서졌고, 그는 많은 것을 잃었을지언정 자신이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걸 기억했다. 그럼에도 평생을 바쳤던 무술에서 완전히 멀어져야 한다는 점은 류청우를 심연에 가라앉혔다. 그것이 진정 그의 마지막 전장이 되었다는 것이, 그가 바라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류청우의 절망을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류청우가 드디어 그 상처를 딛고 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류청우는 이미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채 가문의 수치로 낙인찍혀 최심부에 유폐된 상태였다. 최소한의 생활을 돌보는 입 무거운 사용인 몇몇과 가족들만이 가끔 드나드는 처소에서, 류청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움직이고 책을 읽었다. 예전의 누군가가 보여주었던 책을.

 

“그러고보니 요즘 건우 형 소식을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아, … 급제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 다시 공부라도 하고 있지 않겠니?”

 

류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형님은 언젠가부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은 저보다 어렸으니 형님에 대해 물어봐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많이 없었고, 형님을 기억할만한 양친과 다른 친척들은 형님의 이야기가 나오면 수상할 정도로 말을 돌렸다.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워낙 일찍부터 훈련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녔으니 과거를 준비하는 형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건우 형…?”

“...”

 

첩첩으로 가려진 작은 전각, 가문의 최심부. 류청우만이 기거하는 그곳은 가문에서도 허락받은 몇몇 인물만이 아주 귀중한 물품을 숨기는 곳이었다. 그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고, 출입은 그보다 더 엄격하게 관리되는 곳이니까. 류청우는 그런 곳에 유폐되어 죽은 듯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를 크게 비관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살아있고, 이건 활을 쏠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예견했던 미래였으니까. 다만 다른 사람이 저와 같은 처지가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깔끔한 편이라는 것에는 동의했으니까.

아마 그래서 놀랐을 것이다. 당연히 어딘가 틀어박혀 과거 준비나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몸이 망가졌다는 이유로 최심부에 유폐되는 것과는 누구보다도 어울리지 않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인어?”

 

그것도 인간이 아닌 형태로.

 

류청우가 그것, ‘인어’를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조용해야 할 곳에 어느 날부터 부산스레 물건들이 드나들더니, 뜬금없이 가문의 후계자가 류청우에게 얼굴을 비쳤다.

 

“오랜만이구나, 청우야. 별일 없었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이곳은 항상 평온하죠.”

“그래, 그래. 부족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전갈하고. 이만 가보마.”

“예. 살펴가십시오.”

 

제 손으로 웃으며 유폐시키고선 이제와서 괜찮냐고 묻는 건 제법 우스운 꼴이었지만, 류청우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류청우는 저를 가둔 가문에 대해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분노를 느낀다 해도, 억울함을 표현하고 싶다고 해도, 훈련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무엇을 해도 본래 자신이 돌던 궤도로는 돌아갈 수 없었기에 류청우는 더 이상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후계자는 이틀에 한 번 정도로 최심부를 찾았지만, 올 때마다 류청우를 만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후계자가 류청우를 만나지 않고 최심부를 떠났던 어느 날, 류청우는 아주 작은 충동을 따라보기로 했다. 무엇을 숨겨두었기에 그리도 뻔질나게 이곳을 드나드는 것인지 궁금해서. 헌데 그 이유가 이것이었다니.

류청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는 벽 한 면을 가득 차지하는 커다란 수조가 있었고, 그 수조에는 사람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존재, 인어가 들어있었다. 투명한 물이 흩어지는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고, 그 빛을 받은 인어의 얼굴은 아름답게 일렁이며 제멋대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류청우가 멍하게 서 있자, 서늘하고 수려한 얼굴이 띤 무감한 표정은 일순 돌변했지만, 류청우가 눈을 다시 깜박였을 때 표정은 다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림자 탓인가, 류청우는 생각했다.

인어의 눈이 저를 향하자 류청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조에는 푸른 기운이 도는 검은 머리카락과 깊은 눈매, 보기 좋게 뻗은 콧대와 섬세한 입술, 날카로운 얼굴선, 햇빛을 덜 받아 창백해진 피부, 다소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어깨,단정한 외양을 가진 사내가 거울처럼 비쳤다. 제 얼굴과 행색을 샅샅이 살피는 것 같은 인어의 눈길에 류청우는 긴장하면서도 조심스레 인어를 마주보았다.

인어의 하반신을 뒤덮은 검푸른빛의 매끄럽고 반투명한 비늘, 부드럽고 우아하게 늘어진 유색黝色 지느러미,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잡힌 꼬리의 윤곽선. 상반신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탓에 훤칠하게 뻗은 뼈대와 마른 몸선이 그대로 보였고, 귀가 있을 자리에는 자그마한 유색 지느러미가 하늘거렸다. 시선을 받은 인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류청우는 조금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훈련을 받으며 수없이 봤던 게 남자의 맨몸인데, 왜 지금은 이렇게 민망한지 알 도리가 없었다. 시선을 피하는 류청우를 본 인어는 슬쩍 눈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목덜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마치 류청우가 자신의 눈을 피할 줄 몰랐다는 것처럼. 익숙한 버릇에 류청우의 눈이 커졌다. 류건우의 예상이 빗나갔을 때, 류건우가 멋쩍을 때 하던, 어린 류청우만이 볼 수 있었던, 자라난 류청우의 것으로 만들었던 두 사람의 습관. 무언가에 홀리듯 자연스럽게 이름 하나가 류청우의 목소리를 입었다. 꽤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건우 형."

 

인어는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누구냐는 한 마디도 없이 그저 처음과 다름없는 무감한 눈으로 류청우를 계속 응시했다. 다만 물속에 일렁이던 빛이 일시적으로 흔들릴 뿐이었다. 그 반응에 기시감을 느낀 류청우가 한 발짝 다가가자, 인어는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가슴이 오르내리며 호흡하는 박자가, 완벽한 무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이, 까딱거리는 손짓의 모양새마저 류청우에게는 익숙했다. 홀리듯 류청우가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인어는 류청우를 향해 거칠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화내는 것만 같은 기세에 멈춰설 만도 하건만, 류청우는 그러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수조에는 여전히 윤슬과 달빛이 뒤얽히며 아름답게 일렁였다.

조금만 더 가면 닿을 것 같은 아주 가까운 거리. 인어는 가느다랗게 입을 벌렸다.

낯익은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부드럽고 깊은 음색의 노랫소리였다. 어린 시절,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형을 찾아가면 들을 수 있었던, 아주 오랜만에 듣는, 오직 류건우만이 불러주던 그것.

 

"어떤 아픔이 와도, 어떤 악몽이 와도, 내 아가, 지나가겠지. 받은 온기를 품고, 받은 사랑을 나눠, 내 아가, 깊은 잠을 자."

 

익숙한 가사와 선율에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명령에 따르듯 류청우의 눈이 감기며 수마가 쏟아졌다. 잠에 취해 가물거리는 시야로 본 인어는 무표정 속 착잡함이 깃든 눈으로 저와 닿는 벽에 손을 대고 있어서, 류청우는 흐려지는 의식으로도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사람은 사라진 제 형, 류건우인 것 같다고.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류청우를 받친 손은 명백히 인간의 것이었다. 핏기조차 없이 그저 새하얀, 뼈마디만이 열기를 빼앗겨 붉은 기운을 머금은 큼직한 손. 수조의 인어가 인간이 된다면 꼭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 생각될만큼 흡사한 분위기의 남성. 수조에 닿던 달빛은 구름에 가려진 듯 흐릿해서, 산란된 달빛에 밝아졌던 방 안도 흐릿하게 어두워졌다. 그럼에도 남자는 시야를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팔에 기대어 어설프게 선 류청우의 몸을 조심히 안아든 남자는 머뭇거리다 수조 앞 맨바닥에 류청우를 뉘였다. 이불도 없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바닥은 차가웠지만 남자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대신 남자는 저도 털썩 주저앉아 자신의 허벅지를 류청우의 베게로 삼고는 유색의 눈동자를 움직여 류청우의 평온한 얼굴을 보았다. 류청우의 머리를 괸 다리는 쭉 펴고 다른 다리는 바닥에 대강 널부러뜨린 남자는 한 손을 받침대 삼아 몸을 뒤로 기울였다. 그 상태로 남자의 반대쪽 손이 류청우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자 류청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엷은 온기를 가만히 느끼던 남자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내려 류청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를 듣지 못한 탓에 남자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얇지 않은 옷감 너머로도 느껴지는 흉터의 감촉은 당시 류청우가 느꼈을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흉터가 있는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매끄러운 살결 사이사이 잡힌 자잘한 흉터들이 류청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남자는 흉터를 만지던 손을 움직여 도로 류청우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잠결에 받는 쓰다듬이 좋아 짓는 그 작은 미소를 보기 위해 남자는 류청우가 깨어나기 직전까지 제 다리를 베게로 내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류청우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애써 눈을 돌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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