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봄꿈

“청우야, 왜 혼인을 안 하겠다는 거니. 네 나이가 벌써 몇 인 줄 아는 게야?”

“제 나이는 제가 제일 잘 알지요.”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니! 네가 약관弱冠에 든지도 한참이 지났다. 어휴, 얘, 청우야. 물론 나 듣기 좋으라 하는 말인 줄은 안다만, 이 서라벌 땅에 널 보고 볼 안 붉히는 처녀들이 없다더구나. 개중에 아무나, 너 좋다는 순진한 애들 중에 하나만 고르면 된다는데, 왜 그게 싫단 말이야.”

“저는 아무하고는 싫습니다. 그리고 혼인도 관심 없어요, 어머니.”

“청우야!”

기어코 방안에서는 큰소리가 났다. 문밖에서 자리를 지키던 계집종들이 눈짓을 주고 받았다. 다 자란 작은 주인님이 혼나는 게, 고매하신 주인 마님이 언성을 높이시는 게 벌써 몇 달 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문제였다.

작은 주인님 혼인 문제.

한창 혼사가 오갈 나이엔 전쟁터 한복판에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나서는 방안에서만 머무르며 두문불출하였다. 심지어 내려주는 관직도 다 마다하고. 다만 딱 한 번 연등회에만 수척해진 얼굴을 비추었다. 거기서도 온 처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눈길 한 번 안 주시고 댁으로 돌아오셨다. 높으신 분들께서는 전쟁으로 잃은 낭도들을 기꺼이여긴 것에서 그 연유를 찾았다. 그리하여 도련님이 정신을 차리고 바깥 외출하였을 땐, 대왕께선 기뻐하며 곧장 대나마에 임명했다. 게다가 임시이긴 하나 병부경兵部卿 자리까지 내어주었다. 그쯤 되자 정신을 차린 건, 서라벌 콧대 높은 귀족 나으리들이었다. 파진찬 댁 장남에 대對 가야전에 참전한 화랑, 거기에 곧장 병부경에 임명. 그게 류가네 장남 류청우의 수식어였다. 혼기가 다 지나긴 했으나, 전쟁 후유증으로 미치광이가 되었단 소문이 돌지만, 뭐 어떤가.

유채는 생각했다. 팔자 좋~다고. 그 높은 뼈다귀骨로 태어나 좋은 거 다 누리고, 전쟁에서도 대장 노릇하며 포로들을 끌고 와,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안 해도 높은 뼈다귀라는 이유로 종놈들이 다 해줘. 게다가 아랫 것이야, 그저 주인이 붙여주는 짝에 군말없이 ‘예’ 하고 납작 엎드려 제 서방, 임자 맞이하는 거지, 저렇게 제멋대로 하겠다고 대들었다간 멍석에 말려 매질이나 실컷 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 작은 주인님 팔자 참 좋다고. 입술을 삐죽내밀고 중얼거렸다.

“저와 함께 싸웠던 아이들은 극락정토로 가겠지요. 그렇지만 현생에 남은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네가 출가라도 해서 부처의 길을 걷겠단 말이니? 그렇게라도 해서 죽은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게야?”

“당장 절에 들어가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허락하시면 그리 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유채가 시샘하던 작은 주인님의 투정은 계속되었다. 그걸 듣고 있다가 또 한 번 괘씸한 생각을 해버렸다. 작은 주인님이 콱 공주님이랑 혼인했으면 좋겠다고. 아주 혹독한 처가살이나 당해봤음 한다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화랑이 되고 집안의 자랑거리로 불렸을 때까지만 해도 활짝 웃는 그 도련님 모습에 저도 가슴 설레어 흘끗 훔쳐볼 정도였으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출가하겠다고 투정이나 부리는 집안의 골치, 아니 시름 덩어리였다.

*

찻물과 찻잔이 날아다니는 모자간의 대화 이후, 작은 주인님은 외출을 금지 당했다. 주인 마님은 노복들에게 ‘청우가 바깥에 나가려들거든 반드시 막으라.’며 신신당부했다. 장성한 작은 주인님을 어찌 막냐는 한숨이 마당에서 비질하는 사내종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녔지만, 그는 굳이 나가려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있는듯, 없는듯 제 방에만 틀어박혀있었을 뿐이다. 가끔 방밖을 나서면 바짝 긴장해 눈치만 살피는 종놈들의 사정을 알아봐준 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바닷가도 그렇지 않은가. 물이 주욱 빠지면 꼭 그 뒤에는 큰 파도가 치는 것처럼, 고요히 집안의 터주신이라도 되려나 했던 그가 소란을 일으켰다.

“백좌강회百座講會에 다녀오려 합니다.”

“청우야!”

천연덕스럽게 웃는 그 얼굴이 이젠 두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비단 시비들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사이 좋게 화전을 부치던 주인 마님과 막내 아가씨가 소리를 빽 질렀다. 파르르 떨리는 얼굴이 마치 금이 간 찻잔 같았다.

“오라버니! 정말 출가라도 할 셈이야? 법회엔 뭣하러.”

“그래, 청우야. 이번에는 못 보낸다.”

“오라버니 덕분에 다들 행복하게 살아. 목숨을 잃은 낭도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렇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면 서라벌 전체가 불탔을 거야. 다 오라버니 덕에 살아 있는 거라고!”

“옳지, 선우 말이 맞다. 나도, 네 아비도, 선우도 그리고 건우도 다 네 덕에 사는 거 아니겠니.”

가야군에게는 화랑보단 야차라고 불리는 날이 더 많았다는 그가 석가에 그토록 목을 메는지는 집안의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류청우는 두 여인의 성화에도 입을 꾹 다물고 웃고만 있었다.

결과적으로 류청우는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것은 다 집안의 둘째, 류건우가 주인 마님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어머니, 청우, 형님은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백좌강회에 가는 걸 허락해주시면 형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질 것입니다. 그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래, 건우야. 그게 좋겠구나. 어릴 적부터 네 말은 잘 듣던 아이이지 않니? 부디 점잖게 타일러다오. 응? 나는 우리 청우가 이 땅에 마음 붙이고 살겠다면, 가야인 여자도 괜찮을 것 같아. 정말이야. 이벌찬 댁 사위가 다 뭐니, 우리 애가 미쳤다는 소리가 신라 전역에 퍼질까 두렵구나.”

이벌찬 댁 막내 딸에서 가야인 여자. 이제는 많이 놓아버린 말투였다. 가야인이래도 종살이를 하는 년보다야, 본디 왕노릇 하던 집안 따님을 데려다놓아야 만족하시겠지만. 어찌됐든 ‘가야인 여자’까지 입에 담는 걸 보니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테다.

“그런 말 마세요, 어머니. 잘 이겨낼 거예요. 지금은 조금 마음이 어려워서 그래요. 이럴 때 일수록 어머니께서 잘 다잡으셔야지요.”

주인 마님의 끊이지 않는 푸념에도 류건우는 무릎꿇고 가만히 앉아 경청했다. 종종 그녀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을 뿐이다. 지난 장남과의 대화와 달리 찻잔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유채는 안심했다. 지난 번엔 연이가 깨진 찻잔을 못 보고 밟아 크게 다쳤었는데 이번엔 누구도 다치는 사람 없겠다고. 그리고 침착하고 다정하시기론 서라벌 제일이신 우리 마님이 그렇게 노하게 만드시는 분은 큰 도련님밖에 없으실 거라고, 나이를 같이 먹고도 큰 도련님은 작은 도련님보다 훨씬 바보인 것 같다고 조소했다.

“네 말이 맞다. 느이들 아버지도 안 계신데, 내가 잘 다잡아야지. 느이들 아비 계신 곳까지 우리 청우 미쳤단 소리가 들어갈까 내가 조마조마해. 그래서 지금 정신을 놓아버린게야. 돌아오실 때에 경 치는 꼴 보지 않으려면 내가 잘 해야 할 텐데…. 건우 네가 청우 좀 잘 도와주렴.”

“예, 이번에 제가 잘 이야기해볼게요. 염려 마세요.”

“그래, 내가 널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구나. 이만 일어나보거라.”

류건우는 오래 꿇어 앉아 있어 다리가 저린지 일어나 잠깐 무릎을 통통 두드리다가 제 어머니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뒤돌았다. 내내 찻주전자를 들고 서있던 유채는 주인 마님 손짓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류건우의 미소를 보고 흠칫 놀랐다. 웃는 것도 야차 같던 첫째 도련님과 달리 둘째 도련님 웃는 양은 슬퍼보였다. 뭐가 그리 서글픈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리 힘들어할 줄 알았다면 보내지 않았을 것을….”

눈을 깜빡이고 다시 보았을 땐 이미 뒷모습 뿐이었다. 그러나 주인 마님 후회하는 음성에 몸을 비틀거리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았다. 첫째 도련님 전쟁터에 계신 동안 맑은 물 떠놓고 기도하시던 새벽녘 같이 비틀비틀 걸었다. 오래도록 곱씹을 여유라곤 없어 유채는 상념을 떨쳐버리고 찻물을 비어버린 찻잔에 담아내었다. 아무래도 작은 도련님 다리가 저릿저릿하셨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

곧 두 도련님은 고운 비단옷을 빼어입고 문밖을 나섰다. 그 길엔 유채도 함께였다.

- 부처님 말씀 듣는 자리래두 부릴 년은 필요한가부지?

유채더러 작은 주인님들 나들이에 따라가란 말을 하시자 파진찬 댁 노복 중 제일 나이 많은 모란이가 비아냥거렸다. 심술궂은 말씨였으나 기실 그것은 시샘이었다. 파진찬 댁 주인네들이 아무리 성품이 좋다 하여도 종놈들을 함부로 바깥에 내보이는 일은 없었다. 있어봐야 옆집 아찬 댁 심부름이나, 아니면 저 멀리 대야주 도독으로 계신 주인님께 부칠 편지 심부름이다. 편지 심부름 가는 길은 보통 사내종을 보내기도 하고 범에 안 물려 가면 다행이었으니 어쨌든 고려에서 오신 큰 스님이 여신다는 황룡사 법회 나들이는 계집종들에겐 바깥 공기 쐴 큰 기회였다.

- 얘, 너도 부처님 말씀인지 절륜하단 나랏님 말씀인지 잘 들으면 극락에 갈 수 있는 거 아니겠니? 그러니 시중만 들지 말구 잘 듣고 와서 우리한테도 알려줘.

유채는 생일날도 못 받아본 주목을 다 받아 본다고 생각했다. 모란 언니 시샘이야 그저 하하 웃으며 넘기면 될 일이었지만 눈알 빛내며 달려드는 연이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유채는 부처님 뜻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바깥 구경도 딱히…. 그저 궁금한 것은 작은 도련님이 큰 도련님을 어찌 말로 다스릴까, 였다. 아, 그리고 나간 김에 정과도 좀 사먹어봤으면 했다.

정과나 좀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에 작은 도련님 류건우는 무뚝뚝한 얼굴로 슬쩍 다식을 그녀에게 밀어주었다. 한 사람 당 두 개밖에 안 나누어준 다식을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보자기 채로 건네주었다.

“유채야, 너 먹고 싶다는 정과도 이 앞 큰 길거리에 팔더구나. 내 이름을 대고 정과도 사오고, 살구 과편도 좀 사오거라. 내 글씨를 써줄테니 걱정말고 다녀오렴.”

작은 도련님은 미리 준비해둔 것 같은 비단 주머니도 손에 쥐어주었다. 고운 천 조각이 꽤 묵직한 게 금귀고리 한 서너 쌍은 들어있을 것 같았다. 이걸로 정과를 사오란 건지 서라벌 저잣거리를 통째로 사오란 건지. 거리를 다 도는 동안 대체 뭘 하시려구. 유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쳐다보니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멀리 가지 않으마. 네가 걱정하는 것도 다 안다.”

- 신라 왕이시자 살아있는 부처이신 전륜성왕께서 드시오.

“보아라. 이런 곳에서 어찌 녀석을 설득하겠니. 저어기 황룡사 바깥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더구나. 너도 보았지? 거기서 주인 마님 부탁하신 이야기나 해볼까 한단다.”

정과랑 과편이랑 조금 사오라며 금붙이 수어개를 쥐어주시는 작은 도련님은 세상 물정은 잘 모르시는 듯 해도 생각은 깊으신 분이었다. 또 목소리는 어찌나 고우신지. 그러니 유채는 온통 부처님 생각 뿐인 청우 도련님께서도 유채밭 보여주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면 알아들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나랏님이 절륜하단 건 잘 모르겠으나 이런 지루한 곳에선 예쁜 각시 얻으란 얘긴 못 할 거란 건 쉬이 알 수 있었다. 흘끗흘끗 옆에 앉은 청우 도련님 눈치를 보는 건우 도련님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고. 그래서 청우 도련님께 딱 붙어있으란 마님 명령이 있긴 했으나 눈치껏 행동하기로 했다.

“나으리. 저 종살이 그만 하란 말이시어요? 이거 들고 갔다간 제가 저잣거리 물건 다 사서 장사하겠어요. 아님, 관에 끌려가 맞아 죽거나요. 그냥 글씨만 주시어요.”

“내가 잘 몰라 미안하구나. 혹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유채꽃밭으로 오너라. 왜, 너도 본적 있지 않니.”

“예, 예, 알지요. 작은 도련님이 제 생일날마다 데려가주신 곳 말씀이시지요?”

“그래, 맞다. 얼른 다녀오련. 뭘 사오랬는지는 기억하고 있니?”

“예, 살구과편이랑 정과요.”

종이 한 장 달랑 들고 유채가 저 멀리 사라지자 류건우는 류청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류청우도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백좌강회는 다 핑계였구나.”

제게 말을 거는데도 류청우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류건우는 근심 가득 담긴 한숨을 내뱉었다. 류청우는 긴 한숨이 닿을 만큼의 거리까지 다가와 속삭였다.

“일어날까요? 형님도, 저도 나눌 이야기가 많잖아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류건우를 일으켜 세웠다. 류건우는 제 옷 소매를 붙잡은 단단한 손에 저항 없이 순순히 따랐다.

*

“청우야, 류청우! 어디까지 가는 게야!”

다급한 물음에 그제서야 류청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전히 류건우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은 단단했다.

“어디까지요? 형님이 저를 버리지 못할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고려 땅이든, 저 먼 천축국이든, 어디든 상관 없어요. 낭도들도, 불법을 구하고 싶단 것도 다 핑계예요. 그저 형님 곁에 머무를 수만 있다면 아꼈던 아이들 몇이 죽든, 가야인들 말대로 야차가 되든 상관 없습니다.”

심부름 보낸 아이와 만나기로 약조한 유채꽃밭을 한참 헤치고 지나왔다. 두 사람이 달음박질을 멈춰 도착한 곳은 강변에 무리지어 심긴 목련나무 아래였다. 꽤 멀리까지 와버렸단 생각이 들었지만 류건우는 그저 류청우를 어르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청우야, 내 말 좀 들어다오. 내가 널 버리다니.”

“저를 버리시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어찌 저더러 혼인을 하래요? 어찌 그 아이에게 귀고리를 내어주셨어요!”

그의 말에 류건우는 흠칫 놀라 귓불을 숨기듯이 감쌌다. 류청우의 왼쪽 귀에 달랑거리는 금 귀고리, 그리고 유채에게 건네었던 비단 주머니 안에 든 귀고리 하나를 떠올렸다.

“….”

“영원토록 간직하겠다 하셔놓고…. 제게 약조하셨잖아요. 형님도 저를 은애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몸이 멀어지고 나니 이제는 아니던가요? 제가 출전해있는 동안 다른 사내라도, 아님 계집이라도 들이셨어요?”

“청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널 두고 어찌 감히 그러겠니.”

저를 나무에다 밀쳐놓고 다그치는 류청우에게 류건우는 겨우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잔뜩 화를 냈으면서도 가벼운 손길에 금방 누그러진다. 류청우는 제 볼을 연신 쓰다듬는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고 흐느꼈다.

“저랑 같이 가요, 네? 형님은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이 제가 다 할 테니까…. 제발요.”

“청우야, 널 은애해. 버리려는 게 아니야. 네 이름이 신라에서 가장 높아지길 바라고, 널 닮은 아이들이 태어나서 또 네 길을 좇아 이름을 널리 알리길 바라. 내가 어디있든 네 이름이 들리길 바란다, 청우야.”

“그러면 형님은 저를 사랑해주시나요?”

“그래, 그러마. 네 아이가 자랄 동안에도 네가 손주를 볼 때까지도. 응?”

“절 두고 혼인도 하지 마세요. 평생 저만 생각해주세요. 귀고리도 다시는 몸에서 떼놓지 마시고. 그리고 계속 은애한다 말해주세요. 제가 잊지 않게.”

류건우는 류청우의 애원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켜주었다. 붉어진 눈가가 안쓰러워 손끝으로 쓸어주다가 저보다 더 큰 사내를 제 품으로 밀어넣고 다독였다. 오랜 만에 차려입은 비단 옷이 젖어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 우는 소리를 다 들어주고만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류청우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 맞춰 주세요, 마지막으로.

*

그 해 늦봄 어느 날, 파진찬 댁 첫째 도련님 류청우는 혼례를 치렀다. 상대는 본래부터 혼사가 오갔던 이벌찬 댁 막내 따님이었다. 류청우가 미쳤단 소문이 돌자 이벌찬 나으리는 다른 사위를 알아보셨으나 막내 아가씨가 결사반대하셨다고. 초봄 법회 나들이 이후로는 류청우에 대한 풍문도 사그라들었으니 이벌찬 나으리께서도 넌지시 혼인 이야기를 다시 꺼내셨다. 두 남녀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절기 다섯 개가 지나기도 전에 혼인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 덕에 유채를 비롯한 파진찬 댁 노복들은 오랜 만에 죽도록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근심하시던 주인 마님은 다시 침착함을 되찾으셨고, 막내 아가씨는 혼삿날 맞춰 돌아오신다는 주인님 소식에 잔칫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다만 작은 도련님 류건우는 식사량이 전보다 줄었고, 조금 수척해졌다.

벚나무 이파리 아래서 치른 잔치 뒷정리를 하다말고, 유채는 뒷뜰로 몰래 빠져나왔다. 뒷뜰엔 류건우가 기거하는 작은 별채가 있었다.

“작은 도련님, 괜찮으셔요?”

“그럼, 괜찮고 말고. 내가 가슴 쓰릴 일이 뭐 있겠니.”

“거짓말.”

“하하, 이제 유채 너는 못 속이겠구나.”

“봄에 살구과편 사오라며 순진한 저를 속이신 이후론 작은 도련님 안 믿으려구요.”

유채는 ‘봄날에 살구로 과편을 어찌 만들어? 그 정돈 바보천치도 알겠다!’며 제게 소리 질렀던 좌판 상인 하나를 떠올리며 매서운 표정을 했다. 그러다 류건우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였을까 눈치를 슬쩍 보았다. 다행히 류건우는 별로 신경쓰진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건네었다.

“미안하다. 그날은 내가 참 미웠겠구나.”

밉기만 하겠나요. 애잔하기도 했답니다.

이 도련님은 어쩌면 이렇게 착해 빠졌는지, 그러니 첫째 도련님 혼롓날도 그저 웃으며 배웅하지. 그녀는 류건우의 미안하단 말에 오히려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그래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류건우도 유채도 한가로이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봄바람이 부는 대로 유채는 다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 비질이나 하러 가야겠다 생각할 무렵 류건우가 그녀를 불렀다.

“그런데, 유채야….”

류건우는 유채를 부르곤 머뭇거렸다. 그녀는 발을 경박스럽게 흔들다가 입을 열었다. 무얼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알리지 않았냐구요? 그야, 꿈인 줄 알았거든요. 봄볕이 너무 좋아서 까무룩 잠이 든 줄 알았어요.”

유채는 그 날을 떠올렸다.

제 앞에 펼쳐진 노란 유채꽃. 그리고 그 뒤에 목련나무 아래 부둥켜안고 입맞추는 연인. 봄볕 아래 따스한 순풍 불어오매 연한 가지가 흔들리며 하얀 꽃잎을 뿌렸고 연인을 숨겨주었다. 누가 저리 애달프게 입맞추나 그 사연이 궁금해서 한 발짝 다가가니 유채꽃 줄기가 발에 밟혀 사부작거렸다. 제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멈춰섰다가 다시 조용히 물러섰다. 손 한 번 뻗으면 닿을까 싶은데, 닿았다간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채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달아났다. 멀리 달아나는 동안 숨이 차고 눈물도 차올랐다.

다시금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그래서 유채는 고개를 슬그머니 떨구고 말을 돌렸다.

“절륜하단 대왕님 말씀이 좀 지루해요?”

“하하, 지루하긴 하지. 그런데 유채야, 절륜한 게 아니고 전륜성왕轉輪聖王이란다. 뭐, 살아있는 부처다, 그런 뜻이지. 돌아가신 법흥왕께서 네 말을 들으면 금탄하시겠구나.”

“땅바닥에 묻혀 계신 분이 어찌 들으신답니까?”

버릇없는 말에도 류건우는 하하! 또 쾌활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장가 가신 청우 도련님 옛 모습 같아서 괜히 싫었다. 그리 웃지 마시라고, 원래 웃던 대로 섪게 웃으시라고 하려다 유채는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유채, 넌 불법을 배워볼 생각은 없느냐?”

“제가요? 빗자루질 하다가 가끔 작은 도련님이랑 수다 떠는 게 제 낙樂이라 부처님 말씀 배울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냐, 그럼 그 낙이란 것 좀 늘려보자꾸나. 유채, 널 데리고 절에 들어가 불법이나 배워볼까 하는데, 같이 가련?”

유채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글도 모르는 제게 진짜 부처님 말씀이나 가르치려는 것은 아닐 터였다.

“종년이 주인님 하라면 해야지요. 정녕 부처님 말씀 배우라 데려가는 건 아니실테고. 무슨 심부름을 시키시려구요?”

“금방 아는 구나. 그래, 네겐 솔직하게 말해야지. …약속을 했거든. 평생 혼인도 않고, 그 녀석만 생각하고, 귀고리도 잊지 않고 하고, 연모한다 말도 꼭 해주기로….”

“예, 알겠습니다. 연서 심부름이나 하란 말이지요.”

유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땋은 머리가 노란 댕기와 함께 달랑거렸다.

“싫으냐?”

“도련님 따라다니려면 큰 주인님께 허락은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연서 쓸 종이랑 먹도 좀 챙겨오고, 또….”

류건우는 환히 웃었다. 그 웃음에 꽤 민망해진 유채는 모르는 척하고 주인님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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