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8)

일렁이는 시간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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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는 류철우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멈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류건우는 계획대로 제 정체를 끝끝내 밝히지 않았으리라. 류건우는 한쪽 입을 비틀었다.

아들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든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양친을 살해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발판이 되어 류청우의 날개마저 비튼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당백부님.”

류건우의 이능에 묶인 가주가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쓰는 그 모습에 류건우는 조소를 지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적당히 조절한 위협에서마저 저리도 공포를 느끼는 자가 어찌 한 가족을 박살내는 데에는 그리도 박정했는지, 묵직하게 고동치는 심장에 류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제게 손을 대신 것은 넘어가겠습니다, 다만.”

잠시 창 너머를 보던 류건우가 다음 말을 이었다. 차가운 무표정을 띤 인어가 남자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남자는 떨리는 눈을 크게 뜬 채 저를 내려다보는 인어와 마주했다.

“제 가족들에게 손을 대신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박문대, 그리고 류청우. 류건우가 제 목숨만큼 사랑한, 그의 사람들.

류건우는 수염을 파들거리는 가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사람들이 얽힌 것에 대해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인어인 류건우에겐 그렇게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서. 혹여 거짓말로 시간이 낭비될까, 이능으로 진실만을 말하게 유도하면서 류건우는 빠르게 사고를 전개했다. 쏘아붙이듯 문답이 오갔다.

"첫 번째. 내 양친을 살해해야만 했던 이유는 정말 그것뿐이었습니까, 그때 내가 본 것이 실로 전부입니까?"

"후계 문제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내 종제 내외에게 해를 끼치려 하겠느냐! 그것뿐이네. 진정 그것뿐이야."

"두 번째. 내게 현상금을 건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 고작 그 돈을 받겠다고 그 일과 아무 관계도 없던 그 아이마저 살해한 이는 누구입니까."

"그, 그 일은 나도 유감이구나. 범인이 뉘인지 나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내 고조부님까지 올라가야 연결되는 먼 일족이었던 걸로 안다."

“세 번째. 청우 어깨, 당백부께서 지시하신 일입니까.”

“아니야!”

비명처럼 터지는 목소리가 텅 빈 방에 메아리쳤다. 미간을 찌푸린 류건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사방에 엷게 드리워진 달빛이 다시금 인어의 의지를 받고 춤추듯 너울거렸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 류건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청우 어깨를 상하게 한 건 당백부께서 지시하신 게 아닙니까.”

“아니, 아니다. 내 아무리 철우에게 눈이 멀었다고 한들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잖느냐! 누가 뭐래도 청우는 이 가문의 자랑이다. 그런 아이에게 해라도 끼쳤다간 내 어찌 될 줄 알고 그러겠느냐?”

류건우가 조용히 생각에 빠지자, 가주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청우가 다친 건 1년 전 전쟁에서였다. 눈먼 칼에 어깨를 관통당했고 그 상처가 잘못되어 사경을 헤매었어. 너는 청우를 그리도 아꼈거늘 어찌 그걸 모르느냐?”

반쯤 감긴 채 자신을 내려다보던 류건우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본 가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인어의 자비 아래 영민하게 굴러간 머리는 하나의 의문점을 찾아냈기에.

“헌데 너, 청우가 어깨를 다쳐 유폐된 것은 어찌 알고 있느냐?”

“...!”

“누군가 네게 소식을 전해준 게 아니라면 알 리가 없을 터인데. 설마 청우가 이곳으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고.”

류청우가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을 것을 전제로 하는, 그의 사정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 자부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류건우는 명백한 부외자였고. 류건우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인어의 이능을 만만하게 보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철우가 아무리 경솔하다 해도 네 앞에서 굳이 청우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을게다. 내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거든. 아버지께서는 인어 이야기만 하셨겠지. 워낙 그러한 분이시니. 그러니 우리 말고는 너를 찾아올 이가 없는데, 너는 이미 청우가 어딜 다쳤고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알고 있구나.”

다급하게 따라붙는 류건우의 반응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가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좀전의 두려움은 이미 말끔히 사라진 후였다.

“네가 정녕 내가 알던 건우가 맞다면, 이만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나는 내가 네 동생을 가지고 겁박할 일이 없길 바란단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힘이 들어간 손을 본 가주는 킬킬거리며 웃고는 자조적으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도 내가 이지를 유지할 때의 일이겠지만.”

“당백부님.”

“그래.”

“예전과 똑같으시네요.”

“그러냐.”

“예.”

“네 아버지도 살아있었다면 똑같이 말했겠구나.”

류건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리 말하면서도 가주는 자신이 지시한 일에 후회 한 점 없을 것이었으니까. 그게 류건우가 기억하는 가주의 모습이었고, 지금도 그랬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편히 쉬거라.”

“예, 가주 어른.”

방을 나서는 순간 인어의 자비는 끝난다. 흑진주의 힘에 이끌려 흐늘거리며 걸어가는 가주를 계속 주시하던 류건우는 그의 기척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방 전체를 채우던 이능을 거두었다. 예민해졌던 신경이 사그라들며 기다렸다는 듯 지독한 두통이 그를 반겼다. 류건우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수조 벽에 몸을 기대었다. 벽에서는 차가운 수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방에는 꽤 오랫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청우야.”

류건우는 혀 끝에 올라오는 이름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와 떼어낼 수 없이 얽히고 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 사람의 이름, 생명마저 잃은 류건우에게 남은 유일한 미련.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목 끝까지 차오른 괴로움에 몸을 맡긴 채, 류건우는 그대로 서서히 주저앉았다.

“대체 왜.”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알던 사실을 확인받은 것에 불과했다. 류건우는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냐. 다들 행복하게 잘만 살던데, 왜.”

류건우와 연을 끊지 않은 이들은 전부 죽었거나,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류건우의 양친이 그러했고, 류건우를 인어로 만들어준 어린 인어, 박문대가 그러했으며, 류건우를 유독 따랐던 류청우도 그러했다. 이것이 운명인지, 누군가의 계획인지, 그게 아니면 정말 지독하게 겹친 악연인지 류건우는 알 수 없었다. 달빛이 그의 눈가를 맴돌았다.

 

“오늘 안건은 새로운 가주 옹립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 이지가 흐려진 가주를 대신해 문중 회의를 주최한 회장 대리 류철우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암암리에 떠돌던 가주 교체설에 대한 답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저는 현 가주의 후계자인 류철우를 가주로 세우고자 합니다.”

“재청합니다.”

“동의합니다.”

가주의 유일한 아들 류철우,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길러진 류철우를 가주로 만들자는 사람은 주로 류철우의 숙부들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의견이 터져나왔다.

“철우의 자질에 대해서는 굳이 말을 얹지 않겠습니다. 허나 저 멀리 저잣거리에도 퍼진 것이 가주 대리의 참행이거늘.”

“류철우 군 외에 후사로 삼을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거늘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가주께서 멀쩡히 살아계신데!”

“그 가주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계시잖소. 이지가 돌아올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데 후계를 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외까? 솔직히 말씀하시게, 자네 지금 내가 철우 군을 후계자로 밀고 있어서 반대하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순식간에 전각은 회의장에서 언쟁의 장으로 바뀌었다. 물건만 날아다니지 않을 뿐 더없이 살벌한 분위기에, 밖에서 몰래 듣고 있던 류연우는 누가 찾지 못하도록 잘 숨긴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들키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가루가 되도록 혼날 테니까.

“철우가 아니면 누가 후계자가 된단 말이오!”

“철우와 같은 항렬이면서 능력이 뛰어난 아이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요, 방계인 게 문제라면 그 아비를 전 가주님의 양자로 입적시키면 그만인 것을! 당장 청우만 해도 훌륭하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았소! 건우가 단번에 소과를 통과했던 것은 어떻고. 철우는 관직에도 음서로 겨우 올라 이립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것을!”

“그런 사람이 청우가 유폐될 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구려?”

“지금 말씀 다 하셨소?”

언성은 점점 높아지고, 내용은 점점 더 날것이 되어간다.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에 대한 회의감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그래도 류연우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귀를 기울였다. 그가 얻는 정보가 곧 그의 오라버니에게 전해질 정보였기 때문에.

“애초에 청우가 유폐된 과정도 영 석연찮았지. 현명하셨던 가주께서 그런 결정을 함부로 내릴 리 없거늘. 혹시 그것도 다 철우가 꾸민 짓 아니오? 저보다 열두 살 어린 녀석에게 쓸데없이 열등감을 가져 사주한 일 아니냔 말이오!”

“말씀을 가려 하십시오, 종조부님!”

“건우 일에도 영 개운치 못했지. 제 가족에게 칼을 휘둘렀다니, 그 아이가? 건우는 청우가 두각을 드러낸 뒤부터는 검을 내려놓고 붓을 잡아 감각을 다 잃은지 오래였거늘 어찌 갑자기 칼부림을 했다는 겐가?”

갑작스레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류연우는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그의 조부에게서 나오는 저 이야기는 분명 9년 전, 제 오라버니가 열두 살 때, 저는 아홉 살 때 있었던 그날에 관한 것이었다. 류연우가 밀려오는 충격을 흘려보낼 새도 없이 전각 안에서는 말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이전부터 이 이야기는 반드시 해보고 싶었지. 말과는 다르게 건우가 무술에 재능이 없던 건 아니었네. 그저 제 종제인 청우가 워낙 뛰어나니 그 아이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 검을 내려놓은 것이었어. 조부로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네만 그 아이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말릴 수가 없었어.”

류건우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류연우의 조부 외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제 아버지조차 아무 말을 얹지 못하는 것에 류연우는 숨을 멈췄다. 잠깐의 정적 끝에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싸움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무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니 문과에 응시하겠다고 한 게 건우였단 말일세. 아무 계기도 없이 검을 다시 잡을 아이가 아닌데 그 아이가 갑자기 패륜을 저지르고 도주해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누구라도 의심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그 넓은 전각 내부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제 조부의 목소리 뿐이었다. 류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침묵은 저기 있는 모두가 그날의 진실을 눈치채고도 묵인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무도 가주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네. 그 누구도. 누군가의 마수가 있던 건 아닌지 조사해야 할 의무를 모두가 방기했어. 가주도, 후계자도,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지.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가인 이 가문이 전하의 눈치를 보며 주저앉은 것도 그 무렵이었네. 이리 말했는데도 저 아이가 차기 가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우의 직계로서 기꺼이 검을 뽑을 걸세.”

류연우가 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전각의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멀쩡한 얼굴은 아니었으나, 류연우와 가까운 촌수의 사람들은 특히 더 그랬다.

한참을 기다려 마지막으로 떠나는 사람이 전각 문을 잠그는 것을 확인한 뒤, 류연우는 오랫동안 쪼그리고 있던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최심부를 향해 달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류청우가 이 이야기를 몰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류청우는 기척을 숨기지도 못하고 달려들어오는 동생을 갑작스레 맞이했다.

“오라버니!”

“연우야?”

“오라버니, 물어볼 게 있어.”

“뭔데.”

평소와는 사뭇 다른 동생의 기세에 류청우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오라버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 내일은 뭘 할 거야?”

“뭐?”

“나 진지하다고.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알아야 할 게 있어서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 봐.”

갑자기 최심부까지 쳐들어와선 엉뚱한 걸 묻는 동생을 타박할 만도 했지만, 류청우는 잠시 놀란 표정만 지었을 뿐 여전히 평온했다. 도리어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은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된 후로 시간이 지났잖아. 정말로 아직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듣는 질문에 류청우의 머릿속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언젠가의 봄날이었다. 류청우가 어깨 부상에서 막 회복되어 재활을 위한 훈련을 하던, 바람이 유독 살랑이고 햇살이 이상스레 반짝이던 날. 깊은 우울 속에 침잠한 오라버니의 앞에서 조심스레 미래를 이야기하던 동생에게 류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오늘, 그로부터 일 년이 흐른 지금 똑같은 질문을 받은 류청우는 느리게 사고를 전개했다. 이상할 정도로 미래에 대한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 류청우에게 있었던 변화는 단 하나였다. 본래였다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 류건우. 류청우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바다에 가 보고 싶어.”

“바다?”

“응. 내일 갈 수는 없겠지만.”

그 단어를 말하는 류청우의 얼굴엔 아무 걱정 없던 예전에나 볼 수 있었던 편안한 미소가 떠 있어서, 류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오라버니를 응시했다.

“오라버니.”

“응.”

“뭐 때문에 바다에 가고 싶어졌어?”

류청우는 한 손을 들어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음, 계기는 있지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뭐, 누구랑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거야? 알았어, 더 안 물어볼게.”

“하하.”

류연우가 갑작스레 이곳에 들이닥친 이유는 하나였다. 곧 불어닥칠 찻잔 속 태풍에서 제 오라버니가 찻잔 밖에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굳이 미래를 언급한 건 그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잡혀 원하지 않는 일에 휘말릴까 시험해본 것에 가까웠다.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이 있다면 쟁취하기 위해 기꺼이 달려드는 것이 류연우가 아는 오라버니, 류청우였으니까.

그리고 류연우는 제 오라버니의 대답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더없이 추상적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류청우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리란 희망. 류연우는 자신이 들은 것을 류청우에게 천천히 풀었다. 대답을 듣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렇게까지 해놓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건 모양이 퍽 이상했으니까.

“이걸 오라버니한테 숨겨선 안 될 것 같아서.”

서문을 연 류연우가 거친 표현은 최대한 깎아내며 들은 것을 류청우에게 말했을 때,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꽉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을 뿐이었다. 그걸 보고 아주 잠깐 전하지 말았어야 했는지 돌아보던 류연우는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라 해도, 적어도 류연우의 상식 선에서 류청우가 류건우의 이야기를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해줘서 고마워, 연우야. 너도 충격받았을 텐데.”

“괜찮아?”

“응.”

금세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류청우에게 류연우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유폐된 후로 언젠가부터 제 오라버니가 저에게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았으니까. 그건 말 그대로 최심부의 비밀이니 딱히 서운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류연우는 말을 더 얹지 않고 깔끔하게 자리를 떠났다. 회의에서 그런 말이 오갔던 만큼 누군가 류청우를 찾아올 가능성도 있었고. 류연우는 괜히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럼 나 간다, 오라버니. 바다 갈 땐 나도 데려가야 해.”

“하하, 그래.”

폭풍처럼 밀려왔다 갑자기 떠난 동생의 뒤를 배웅한 류청우는 잠시 망설였다. 본래라면 동생이 전해준 대로, 오늘 회의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 집안 어른들이 그를 찾아올 수 있으니 서둘러 처소로 복귀하는 게 맞았다. 다만 류청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입을 통해 전해진 류건우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형.”

머릿속을 어지럽힌 주범을 불러봤을 뿐인데 터질 듯 휘몰아치던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류청우는 맑아진 머리로 생각하며 아주 천천히 발을 옮겼다. 류청우의 처소가 있는 방향으로.

회의가 그렇게 파장된 후, 가문 내에서는 은밀한 회담이 몇 차례 열렸다. 후보로 내세울 류청우의 의사를 확인하고, 적당히 주무를 수 있는 다른 후보를 찾아내고, 어떻게 해야 명분을 세울 수 있을지 치열하게 토론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류청우에게는 하등의 의미도 없는 지난한 시간. 그 시간을 비추는, 밝게 떠오른 봄밤의 달은 구슬처럼 동그랬다.

“어제도 오고 싶었는데.”

“어쭈.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하냐?”

“하하.”

지친 얼굴을 한 류청우가 수조 벽에 툭, 등을 기대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류청우가 말했다.

“형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말이에요.”

“...”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뭐가.”

“방계인 저에게 어른들이 자꾸 가주 자리를 권했을까요.”

류건우는 등을 보인 채 앉은 류청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펴졌던 어린시절의 등을 떠올렸고, 모진 바람에 뒤틀렸을지언정 여전히 곧게 서려고 노력하는 등을 보았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린 아이에게 들이밀어진 선택지는 순간의 판단만으로 고르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어.”

“형이 있는데도요?”

“분야가 달랐으니까.”

바로 납득하지는 못한 듯 살짝 모로 기울어진 고개를 보고 류건우는 피식 웃었다. 널찍한 어깨와 등, 상투까지 단정히 틀어올린 뒷모습은 완연한 성인이었지만 그의 눈에 류청우는 여전히 어린 동생이었다. 류건우는 가볍게 답했다.

“너는 무인이고 나는 문인이니까. 최소 삼파전이었을 걸.”

“아.”

“그렇게 되기 싫어서 붓을 잡았는데 결국은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

꾸닥거리던 류청우의 고개가 앞으로 휙 기울었다. 하는 것을 보니 무릎을 모아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모양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류건우가 입을 열었다.

“류청우.”

“네, 형.”

“가주 하고 싶냐.”

“아니요.”

제법 단호한 답이 튀어나왔다. 류건우는 이유도 묻지 않고, 설득도 하지 않고, 그냥 질문했다.

“탈출할래?”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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