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7)

사격자와 과녁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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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저잣거리에는 류씨 가문에 대한 소문이 몇 가지 돌고 있었다. 항상 미루는 법 없이 꼬박꼬박 치르던 대금을 미지급하는 사고부터, 가주 어른이 어디선가 그 귀한 흑진주를 구해 이상스러울 정도로 몸에 지니고 다닌다던지, 뜬금없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기도 하고 판단력도 흐려져 실질적인 업무는 후계자가 제멋대로 처리하고 있다는 둥, 얼마든지 꼬투리를 잡아낼 수 있는 대소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오라버니, 요즘 집안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해.”

 

그런 소식을 물고 찾아오는 류청우의 동생은 자연히 불안한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느 정도 입단속을 하는 가문 내에서도 소문을 막을 수 없었음과 동시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날 정도로 널리 퍼졌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후계자가 월권 행위를 하는 횟수가 점점 늘고 있대. 나는 이래저래 가문 일에 다가갈 권한이 없긴 한데… 아버지께서 회의에 들어가실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셔. 어른들 말씀하시는 걸 몰래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그쪽에서 가주직 승계를 요청하려는 것 같다고들 하시고.”

가문의 일에서 손을 뗀 지 제법 된 탓에 류청우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류청우는 생각을 정리하며 묵묵히 차를 우려 동생의 잔을 채워주었다. 잔을 받은 류연우가 굳은 표정을 풀고 고맙다고 말하며 작게 웃자, 류청우도 살짝 웃어보였다. 그러는 류청우의 표정은 여전히 흘리는 것 없이 명료해서, 류연우는 제 오라버니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지는 못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근데 아무래도 그쪽은 지금 가주 어른이랑 다르게 이런저런 뒷얘기가 많다보니까, 파벌에서 다른 후보자를 찾고 있는 것 같아. ... 오라버니라던가.”

류연우는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차를 홀짝였다. 그러나 찻물이 품은 맑은 향과 따스한 온기는 되레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항상 밝던 동생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는 것을 본 류청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뭐가 괜찮아! 사람 구실 못 한다면서 제멋대로 가둔 건 언제고 이젠 마음대로 오빠를 조종하려고 드는데! 오라버니는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아.”

“하하.”

“웃기만 하지 말고! 난 진지해. 어른들도 진지하게 미는 것 같았어. 우리 항렬에 유독 자격이 있는 사람이 적다보니까 더 그러는 것 같던데. 건우 오라버니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까.”

“건우 형님?”

“... 응. 오라버니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다 들었어.”

동생을 향해 부드럽게 웃던 류청우의 고요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사냥감을 앞둔 맹수의 그것으로 변했다. 오랜만에 보는 생기있는 눈에 기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류연우는 화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8년, 이젠 해가 넘어갔으니까 9년 전인가? 어쨌든 그때쯤 가주 어른과 후계자가 나란히 궁에 불려간 적이 있어. 그땐 후계자에게 별다른 품계도 없었고 해서 그냥, 우리 가문의 뒤를 이을 사람이니 전하께서 인사치레라도 하려고 하시는 건지 싶었거든. 나는 궁중 예법은 잘 모르니까. 근데 들어보니까 그런 건 아니래서.”

“... 연우야. 다른 사람들에겐 이 얘기 안 했어?”

“어.”

류청우는 잠시 뜸을 들였다. 류연우는 조용히 류청우의 말을 기다렸다.

 

“나도 전하를 뵈었을 때 들었어. 그때 시점으로는 5년 전의 일이었고, 가문 내에서 어떤 사건이 있어서 그 책임자인 가주와 후계자를 불러 문책했다고. 네가 들은 것과 맞는 부분이 있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니 다행인건가. 그리고 오라버니, 하나 더. 그 시점이면 건우 오라버니가 사라진 시점과 겹쳐. 그때쯤 그 오라버니가 백부님, 백모님과 후계자에게 검을 겨눠서 쫓겨났다는 헛소문이 돌기도 했고.”

“...”

“오라버니, 나한텐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치만 기억에 관한 거라면, 온전한 시점의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을 비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청우 오라버니가 건우 오라버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이상한 거니까.”

“연우야.”

“어쨌든, 조만간 누군가 은밀하게 접선하려 들지도 몰라. 그거 전해주려고 온 거야. ... 내가 준 찻잎은 어디 잘 숨겨두고, 또 전처럼 심란하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알았지?”

류청우는 일단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제야 조금 풀린 얼굴을 한 류연우는 몸조심하라며 몇 번을 당부하고는 조용히 최심부를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처소에서 류청우는 선 채로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머리를 식히기 위한 행동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오늘 들은 것을 차근차근 엮자, 그제야 류청우의 머릿속에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차기 권력자로 후계자를 지지하는 파벌과 그렇지 않은 파벌이 나뉜 상황에서, 현 가주의 이지가 점점 흐려지고 권력 이양이 머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과연 후계자를 지지하지 않는 파벌이 생각할 대안이 누구일지. 그 후보가 될 인물, 후계자와 동일한 항렬인 성인 중 후계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고, 류청우는 그 중 두 손가락 안에 꼽히던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유폐당한 처지지만 그건 후계자의 지위가 주어지면 사라질 제약이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인물도 분명 있을 것이다. 류청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 나고 있는 거냐.”

노을의 끝자락이 밤하늘과 섞이는, 창백한 달빛을 덧씌운 아름다운 색채가 창 틈새를 비집으며 들어왔다. 낯선 이들의 기척도 같이 들어왔다. 분명 가주의 직계만이 드나들 수 있던 최심부에 류청우가 자리를 잡더니, 이젠 웬 엉뚱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적당히 주변을 살피던 류건우는 혀를 찼다. 본래는 드나들 자격이 있는 이들만이 최심부의 존재를 알았지만, 요 근래 그들이 자주 드나들다보니 다른 사람에게도 알음알음 존재가 알려진 모양이었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류건우로서는 보다 많은 사람과 접촉할 수 있게 되었으니 환영할 일이기는 했다. 다만 제 귀에 기척이 들리는 걸 통제할 방법은 없어서 예민한 감각에 조금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녀석은 괜찮나 모르겠는데.”

들리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류건우가 흠칫했다. 그것이 제 목소리임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류건우가 굳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동안,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장지문을 향해 시선을 돌린 류건우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자연스레 표정을 풀었다.

“왔냐.”

“네, 형. 잘 있었어요?”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안부를 묻고 있어.”

“하하.”

수조 쪽으로 다가온 류청우가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 행동에 놀란 류건우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왜 그러냐.”

“형.”

“왜?”

대번에 가라앉는 목소리를 듣던 류청우는 힘없이 웃었다.

“형은 알고 있었어요?”

“뭘.”

엄습해오는 불길함이 류건우를 감쌌다. 그건 무언가 제 뜻대로 되고 있지 않을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제 기억이 온전치 못해요.”

류건우는 문득, 아주 오랜만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그때 기억을 지운 술식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얼마 전 가주 일가에게 사용한 술식이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그 술식은 성공적으로 발동되어 류건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류를 틀었으니까. 다만 저 아래쪽에 묻어두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류건우는 최대한 일반적인 대답을 내놓으려 애썼다.

“무슨 말이야, 너 나이가 몇인데.”

“하하.”

“근데 벌써부터 뭘 잊어버려.”

“제 사촌 형이요.”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류건우는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쥐었다.

“네 사촌 형이 누군데?”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말하냐는 듯한 얼굴에 류청우가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조금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류청우가 보기에 지금 류건우는 몸과 얼굴이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때로는 적당히 돌아가는 것도 빠른 길이었다.

“오늘 어른들이 다녀가셨어요.”

“...”

“원래는 나이를 따져 건우에게 찾아갔을 테지만, 그 사건 이후로 건우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저에게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사람이 네 사촌 형이야?”

“아마도요.”

류건우는 뭐라 말을 얹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가라앉은 침묵에 불을 붙인 건 류청우였다.

“모른다고 말씀드릴 순 없어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저를 위로하시더라고요. 네가 건우를 그렇게 따랐는데 너 역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느냐면서. 저는 그냥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는데.”

"..."

"건우는 누명을 뒤집어쓴 것 아니겠느냔 말도 쉽게들 하시더라고요.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걸 너는 기억할 거라면서."

인어 류건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 자체도 우스웠지만, 그렇게 저와 가까웠고 그렇게... 제가 따르던 사람이었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어요. ... 형.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류건우는 조용히 류청우의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있죠?”

익숙한 질문이었다. 이전에 류청우가 잠든 척한 류건우에게 털어놓았던 그 질문. 그때와 지금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류청우의 의혹이 여러 사람의 말을 거치며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류건우가 그 질문을 외면하고 있지 않다는 것. 류건우는 표정을 지우고 조용히 류청우의 눈을 보았다. 화살을 매긴 채 과녁에 집중하던 어릴 적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난 류청우의 눈은 더없이 차분하고 고요했다.

“형이 말씀해주시지 않는 한 제가 캐낼 수는 없겠죠. 캐낸다고 말씀해주실 성격도 아니고요.”

 

털푸덕 앉아 있던 류청우는 가볍게 일어서 수조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만 나와주면 안 돼요?”

 

류건우는 군말 없이 수조 밖으로 나갔다. 인어가 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물살에 나풀거리던 지느러미는 몸속에 녹아들듯 사라지고, 아름답게 반짝이던 비늘은 늘씬하게 각진 다리로 바뀐다. 류청우의 눈에는 언제 보아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왜.”

나온 채 이유를 묻는 그 행동에서는 고작 몇 달 본 사람에게 느낄 만한 것이 아닌 깊은 신뢰가 묻어났다. 류청우는 뇌를 두드리는 기시감에 따라 류건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따뜻한 손에 미지근한 체온이 닿았다. 류청우가 손에 닿은 온기를 끌어당기자, 류건우의 몸은 아무 저항 없이 끌어당기는 힘을 따라왔다. 두 개의 체온이 맞닿고, 조금 더 창백한 손이 류청우의 몸을 부드럽게 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에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류건우의 눈은 가라앉았고,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류청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느새 주홍빛 노을 대신 새하얀 달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그냥요.”

“인어 한번 안아보겠다고 물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놈이 있네.”

“하하.”

“웃긴 뭘 웃어.”

말로는 타박하면서도 손으로는 정직하게 류청우의 등을 토닥이고 있다. 류청우는 그 손길에 어릴 때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럼 형은 진짜 제 형이에요?”

“몰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는 건 곧 긍정을 뜻한다. 몇 달간 류건우와 함께 밤을 보내며 알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류청우는 판단했다.

 

“형, 답답하진 않아요? 계속 여기에만 있는데.”

“별로. 예전에도 거의 방에만 틀어박혀 살았으니까.”

“그랬구나...”

여전히 류건우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는 류청우를 슥슥 쓰다듬던 류건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도 류청우가 마치 어린시절의 기억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치댔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신이 인어가 된 후 만났던 몇 달 동안 제법 거리감을 좁힌 것도 사실이어서, 류건우는 어딘가에서 류청우가 대충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류청우.”

“네, 형.”

“가주 해 볼 생각은 없냐.”

“어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부담을 주려던 생각은 아니었다며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류건우를 보며 빙그레 웃은 류청우가 몸을 세우며 기지개를 켰다. 품에서 빠져나가는 온기가 괜히 아쉬운지 류건우가 애꿎은 손만 쥐었다 피는 것을 보며 류청우가 말했다.

“저는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따지자면 다른 사람의 지시를 따르는 일이 더 익숙한 사람이고요.”

“막상 하면 잘 할 텐데.”

“그렇게 되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 상황일 테니까요.”

“책임감이냐.”

“아마도요.”

잠시 먼 곳을 보던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상현에서 만월로 변해가는 달이 고고히 빛났다.

“저는... 제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고르려고 해요. 우선순위를 정하고, 상대가 내 예상 밖의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말을 조절하는 거. 그렇게 하는 걸 배웠으니까.”

“...”

“형. 형도 그랬어요?”

류청우가 조금만 더 속내를 숨기는 법을 배웠더라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류건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비슷했을걸.”

류청우는 류건우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답을 정한 듯 단단한 웃음이었다. 류청우가 대답했다.

“그럼 저는 안 하고 싶어요.”

“왜.”

“유폐에서 풀려날텐데 굳이요.”

“그러냐.”

무어라 말을 더 얹으려던 류청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입을 닫았다. 류건우는 제 앞에 선 류청우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기억 속에 남은 어린 류청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밝고 자신감 넘치던 어린아이의 눈과, 현실의 벽에 온몸이 부서질 듯 부딪히면서도 꺾이지 못해 비틀린 남자의 눈이 겹쳤다. 그 눈이 마음에 걸렸다. 류건우는 무엇을 해야 저 눈이 품은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고.”

“...”

“하나 떠오른 게 있는데. 어, 형.”

“오냐.”

“언젠가 저랑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차 한 잔 하실래요?”

“뭐냐, 그건. 고백이냐?”

“하하.”

“류청우.”

말은 저렇지만 결국 류건우는 류청우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이다. 류청우가 지난 몇 달간 본 류건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쓸데없을 정도로 다정해서 마음을 줄 수밖에 없는 사람. 단단한 껍데기를 몇 겹으로 두르고 있지만 정작 그 껍데기 안은 누구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해 누르는 대로 뭉그러질 것만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류청우의 판단은 이제껏 대부분 정확했으므로, 류청우는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류건우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시각이 늦어지자, 졸린 듯 눈을 껌벅이는 류청우를 보고 보는 내가 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돌려보낸 류건우는 머지않아 들려오는 기척에 숨을 죽였다.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현명한 선택을 한 셈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이 시간에 이곳까지 찾아올 이는 가주 일행 정도였다. 그러니 누군가의 기척을 듣고 전 가주, 현 가주, 후계자, 셋 중 누군가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류건우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장지문이 스륵 열리며 가주의 얼굴이 비친 것이다.

“흐흐.”

류건우는 새어나오려는 침음을 애써 삼켰다. 인어의 존재를 아는 다른 사람들과 심리적으로 격리시키고 흑진주의 힘을 계속 사용한 결과, 가주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냉정하게 류건우를 내치고 제 아들을 비호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류건우는 짧은 회한을 마치고 눈앞의 남성을 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그는 류건우의 얼굴을 통해 무언가를 투시하는 것 같았다.

“그래, 기억났다. 어디서 봤던 얼굴인가 했네만. 자네와 꼭 닮은 사람이 문중에 있었지. 류건우라고, 내게는 오촌 조카였는데. 아주 영특한 아이였어. 철우보다는 꼭 여덟 살이 어렸네.”

총기를 잃은 눈으로 인어를 보던 가주가 킬킬 웃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모든 순간마다 기민한 처세술을 선보이던 가주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나, 하며 기억을 뒤지던 류건우는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가주는 나고 그 아이 아버지는 내 종제(從弟, 사촌 동생)니 그 아이도 방계지. 나는 방계에서 뛰어난 인재가 나오는 게 무서웠네. 가문에는 분명히 좋은 일이나, 무가라고 경시하는 이들에게 내보일 자가 있다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이나, 그럼 철우가 저 뛰어난 방계 아이들에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 한다면 그건 안 되니 말일세. 문재로는 건우와 결코 비할 수 없고 무재로는 청우와 견주는 것이 실례일 정도네. 그렇다고 성품이 훌륭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닐세. 내가 그 애의 아비이니 잘 알지. 철우는 가주를 할 인물은 못 돼.”

깨끗한 흰색 침의. 류건우는 뇌리에 새겨진 그 옷을 그대로 입은 그의 당백부, 가주를 묵묵히 응시했다.

“그래도 내가 가주이니, 내 아들이 무탈하게 가주 직에 올랐으면 싶어 철우를 엄하게 가르쳤네. 이왕이면 확실히 권력을 쥐여주고 싶어서 내 평판도 열심히 갈고 닦았어. 이 가문에는 후계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파벌이 있고, 나 역시 파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헌데 안 되더군. 그걸 깨달은 게 8, 9년 전이었네.”

가주의 입에서 나온 건 류건우에게도 중요한 시기였다. 류건우는 괜히 지느러미를 슬렁이며 흔들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철우를 지지하는 파벌은 세가 약하네. 철우의 자질이 충분치 못하니 당연한 일이지. 그나마도 전대 가주이신 내 부친께서 살아계시니 모이는 파벌인게야. 나머지는 예전부터 건우와 청우를 지지하는 파벌로 나뉘었네. 방계라는 단점은 있지만 그거야 그 아이들을 나나 아버님 아래로 입적시켜버리면 그만이니까. 아주 완벽한 후계자감이 아닌가. 이 가문에 드물게 나타나는 문인의 자질을 가진 아이와 어릴 때부터 궁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아이라니.”

류건우가 바란 적도 없던 가주직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는 고백에 그는 가빠오는 숨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천천히 이능을 움직였다.

“그걸 철우가 알게 되었네. 안 그래도 건우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던 아이였는데. 내가 건우 말을 듣고 가솔들에게 초시가 금방이니 조심해달라는 부탁을 한 후로 고작 칠 주야나 지났을까. 자리에 누워 잘 채비를 하고 있자니 건우가 아주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네. 제 아비를 살려달라고.”

가주의 눈은 먼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흐릿해진 눈을 류건우는 최대한 침착하게 응시했다.

“건우야 괴한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범인이 누군지 이미 짐작가는 바가 있었네. 철우가 벼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마음으론 당연히 건우의 아비를 살리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믿었네만, 한편으로는 또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단 한 명이라도 후보가 사라진다면 철우가 보다 안정된 상황에서 가주직을 물려받을 터이니.”

가주는 잠시 숨을 골랐다. 흑진주의 힘에 흐려졌던 이지는 그 힘의 근원인 인어의 허락에 잠시 또렷해졌다. 인어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고, 가주는 그 냉랭한 무관심에 안심했다.

“그래서 죽였네. 시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뼈대도 아물지 못한 열여섯 어린애가 그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아남을 리 없지. 건우를 제거하니 적당한 핑계를 잡아 청우를 유폐시키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가장 유력한 후보 둘을 제거하니 철우의 자리가 조금 더 공고해지더군. 그야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니 당연하겠다만.”

가주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읍! 읍!”

숨을 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가주는 그래서 더 겁에 질렸다. 온몸을 조이는 강한 힘 속에서도 숨을 쉬는 것에만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 가주는 눈앞의 인어가 순식간에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다. 새하얀 달빛에 창백하게 빛나는 인어의 얼굴이, 매끄럽게 반짝이는 검푸른 머리카락이, 짙은 유색의 눈동자가, 기억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이목구비가, 무엇보다도 잊히지 않는 목소리가 그의 기억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가주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의 청년은 돌아와선 안 될 존재였다.

“당백부님.”

명을 완전히 끊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돌아온다면 그야 누구든 그럴 것이다. 류건우는 냉랭한 눈으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 아래로는 (저도 헷갈려서 써두는) 간단한 설정이 이어집니다

- 나이는 류건우 - 1화 기준 16세, 작중 24-25세, 류청우 - 작중 20-21세 정도입니다. 중간에 겨울에서 봄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나이가 바뀌는 걸... 계산을 못했네요 꺄르륵 아무튼 1화랑 7화 이후는 대충 9년 정도의 텀을 두고 있습니다. 8을 보셨다면 오타입니다.

- 류연우, 작중 17-18세, 류청우의 친동생, 류건우의 사촌 동생. 한자는 멀리 흐를 연演, 도울 우佑를 사용합니다. 처음으로 본 손녀가 너무 소중했던 할아버지는 집안의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렬자를 사용했고 기어이 족보에 손녀딸의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tmi로 할머니와 연우의 양친과 건우의 양친도 찬성하는 파였습니다. 이후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무가의 족보에 이름이 올랐으니 이름값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오빠인 류청우와 똑같이 교육받았습니다. 혼담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데, 이제까지 마음에 차는 게 없어서 할아버지랑 상의해 다 걷어차버렸습니다. 당호는 새벽 서曙, 높을 아峩를 사용한 서아당... 으로 설정은 해뒀는데 작중에선 안 씁니다. 연우는 오빠들 보고 커서 씩씩해요.

- 후계자가 될 자격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당대 가주보다 아랫항렬이어야 하고, 이름에 항렬자가 들어가야 하고, 자기 이름이 족보에 올라가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하면 됩니다.

- 뭉대가... 인어가 되기 직전의 나이는 10세였습니다. 류건우랑 처음 만났을 땐 대충 7살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살아있었다면 18-19세쯤 되었겠네요. 예...... 박문대가 인어로 살아가게 된 이야기는 외전으로 가지 않을까요? 작심삼월 끝나기 전에 원작에서 또 국밥즈가 터진다면... 외전 생각해보겟습니다. 근데 저도 나올지 안나올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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