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12)

반추의 끝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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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끝난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일까. 예상했던 것만큼 속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류건우는 잠시 수조 안을 응시하다, 류철우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수조 방을 떠났다. 유일한 존재 가치인 수조를 못 쓰게 만들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류건우는 활과 화살통을 멘 채 저를 졸졸 따라오는 류청우를 흘끗 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류청우에게 최심부의 처소에나 박혀 있다 전부 끝났을 때 나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리 되었을 것이었다. 류청우는 어쨌든 저 때문에 이 전투가 시작된 것이니 자신이 나와봐야 되지 않겠느냐며 제법 그럴싸하게 류건우를 설득했던 것이다. 류청우를 혼자 시신과 같은 건물 안에 두기엔 찝찝하기도 했고. 어쨌든 이미 따라나온 류청우를 도로 떼어낼 수는 없었으니 류건우는 가만히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고는 류청우를 불렀다.

“류청우.”

“네, 형.”

“가주한테 갈 건데.”

그걸 왜 자신에게 말하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류청우에게 류건우가 대답했다.

“별로 좋은 꼴은 못 보여줄 것 같은데. 좀 떨어져 있어.”

류청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얼굴에는 반항심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그렇게 약하지 않은데.”

“알고 있는데, 그래도 보여주기 싫은 건 있는 법이야.”

“그럼 더 싫어요. 그런 걸 형이 혼자 감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류건우는 그 발칙한 말에 입을 벌렸다가 쓰게 웃었다. 그건 꼭 류청우가 자신과 함께 가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저를 더 이상 어린애로 보지 말아달라는 것 같아서. 그러나, 그래.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류청우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류청우가 기억을 잃었던 때마저도. 그래서 류건우는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곧 고집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마음대로 해.”

그러자 류청우도 빙긋 웃는다. 담백한 웃음이었다.

“네.”

류건우는 발을 옮겼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흔들림 없이 걷고 있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류청우가 가만히 류건우의 손을 쥐었다. 류건우는 잡힌 손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류청우와 류건우를 본 주위의 누군가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류건우는 소리가 나는 쪽에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익숙한 얼굴의 청년이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둘에게는 막내 당숙인 사람. 그는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니었기에 류건우는 본 체 만 체 슥 지나갔다. 류청우는 멍하니 굳은 당숙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류청우.”

“왜요, 형.”

“안에서 안 좋은 소리가 들릴텐데, 지금이라도 어디 딴 데 가있지 그래.”

“안 돼요.”

“허.”

싫은 것도 아니고, 안 간다는 것도 아니고, 이젠 그냥 저가 떠나면 안 된단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류건우에게 주어진 시간은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조금 모자랐다.

“그래. 그럼 나 들어간다.”

류건우는 누군가 이미 한 번 침입했던 듯 반쯤 부서진 문을 물끄러미 보고는, 문고리를 툭툭 두드렸다.

“가주님, 류건우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때처럼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들어간 가주의 방은 그때와 달리 난장판이었다. 무언가를 찾으려던 듯 잔뜩 어질러진 서랍과 상에, 서류로 보이는 종이뭉치는 바닥에 되는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가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임금께서 하사하셨다며 고이 관리하던 난 화분은 제자리를 잃고 쓰러져 흙을 토해냈고 보료와 이부자리는 위아래가 뒤집어졌을 뿐 아니라 겉과 속까지 찢겨 드러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가주가 주저앉아 있었다. 한때 더없이 영명한 이로 신망을 받았지만 이제는 이지를 잃어 그저 허울뿐인 가주. 그 가주의 이지를 흐트러뜨린 장본인, 류건우는 그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시야로 류씨 가문의 가주, 자신의 당백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백부님. 아직 흑진주를 착용하고 계십니까.”

“...”

가주는 멍하니 류건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이 저 꼴인데도 충격이고 뭐고 비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류건우가 다시 말했다.

“꺼내십시오. 그걸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주는 순순히 류건우의 지시에 따랐다. 본래 귀걸이로 가공했던 흑진주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곱게 꼰 비단실에 꿰어 목에 걸어둔 것이 백의 위에서 은은하게 광채를 발했다. 류건우는 무릎을 굽혀 가주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진주를 집었다. 가주에게는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제 진주를 잡으십시오.”

가주의 손이 류건우의 손과 동시에 진주와 접촉했다. 류건우의 손이 진주에 닿자, 흑진주가 그에 공명하듯 영롱하게 빛났다. 그제야 가주의 눈이 커지며 생기가 돌아왔다.

“거, 건우야.”

“예, 당백부.”

“처, 철우만은, 살려, 살려다오. 나, 나는 그저 철우가 걱정되어서...”

기껏 기력을 되찾고 하는 첫 마디가 고작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원인의 구명이라고 생각하며, 류건우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제가 언제 그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까.”

가주가 잡고 있는 흑진주에서는 여전히 빛이 났다. 류건우는 진주가 품은 기억을 천천히 가주에게 투영했다. 의원을 데리고 급박히 달려온 끝에 서 있었던 한 사람과 두 시체, 땅에 널브러진 채 달빛을 받아 검붉게 반짝이던 칼, 그리고 누군가의 혈액이 뚝뚝 떨어지는 또 다른 칼을 들고 빙긋이 웃던 범인. 가주의 고개가 점차 빠르게 흔들리며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소리에 신경쓰는 사람은 없었다.

“건우야, 그건,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가주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더냐. 그 일을 저지른 게 다른 아이였다면 결코 그리 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헌데 그 아이는 내 뒤를 이을 아이란 말이다, 응? 가주의 적장자이지 않더냐. 내가 그 아이를 위해 어찌 살았는지 안다면, 응, 정말로...”

“예, 당백부님. 다 압니다.”

가주의 얼굴에 일시적인 희망이 빛났다. 류건우는 그 얼굴을 그대로 보며 입을 열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철우 형님이 돌아가신 것도 어찌 할 도리가 없었고, 종조부께서 그리 되신 것도 저로선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 몸이 절벽에서 추락해 산산조각날 것을 알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고, 제 양친의 숨이 끊어지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처, 철우가 죽었다니? 아버님께서 그리 되신 건 네 어찌 아느냐, 건우야?”

“당백부님께서 하실 수 있는 선택 역시 하나입니다.”

“말해라! 철우를, 내 자식을 어찌 한 게냐?”

“곧 만나실 텐데 그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으아아아악!”

류건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고 무미건조했지만, 꽉 쥔 주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류청우가 위태로이 선 몸을 조심스레 지탱했지만, 류건우는 그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언뜻 닿았던 피부가 데일 듯 뜨거워 류청우가 화급히 류건우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류건우는 다시 한 번 류청우의 개입을 거부했다. 이 일만큼은 류청우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탓에 류청우는 뻗은 손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류건우, 네놈, 네놈을 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니라. 네놈 때문에 내 모든 것이... 내 아들, 내 아버지, 내 직위... 내 모든 것이 네놈 손에...”

류건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만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었다. 류씨 가문의 가주에게 대대로 전해졌다는 보검, 가주가 그리도 아끼던 것.

“크헉!”

아주 어릴 적 처음으로 잡았던 작은 검. 조금 크고 나서는 그저 몸을 움직이기 위해 가볍게만 휘두르던 것. 그마저도 인어가 되고 나서는 잡을 일이 없었기에 류건우는 아주 오랜만에 검을 잡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세 살 버릇이란 건 무서워서, 류건우의 몸은 익숙하게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거, 건우야. 건우야.”

가주는 검을 든 류건우를 보았고, 그 끝이 자신을 향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검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까지. 그게 가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류건우는 검을 뽑고는 크게 휘둘러 날에 묻은 피를 떨어뜨렸다. 점점이 튄 핏방울이 소매에 묻었다. 그럼에도 혈흔이 남은 검날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붉게 반짝였다. 두 개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전 가주에게 머물렀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위태로이 서 있는 류건우의 뒤로 류청우가 다가갔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류건우의 신형이 그제야 무너졌고, 류청우는 저에게 기대오는 뜨거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류청우.”

“형, 괜찮아요? 체온이...”

“괜찮아. 너 예전에 내가 다니던 상점 위치 기억하냐.”

“그야 당연하죠.”

고개를 끄덕이던 류청우는 퍼뜩 떠오르는 신빙성 있는 추측에 입술을 떨었다.

“형, 설마...”

“어. 거기에 외부로 통하는 이동진 하나 있거든. ... 괜찮으면 좀, 데려다주라.”

“형 지금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잠시 쉬고 움직이는 게,”

“류청우.”

류건우가 재차 류청우의 이름을 불렀다. 잠깐의 걱정조차 사치라는 듯 독촉해오는 류건우의 그 한 마디에 류청우는 문득, 자신은 형이 불러주는 제 이름에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령 그 입이 거짓을 담는다고 해도,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해도.

“그렇게 하면 형 몸이 괜찮아지는 거에요?”

“... 그래.”

“알았어요.”

찰나의 머뭇거림이 마음에 걸렸지만, 류청우는 열감이 느껴지는 류건우를 조심히 안아든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류청우에게는 항상 서늘하게 느껴지던 체온이었기에, 혹여 저 때문에 품안에 있는 미약한 숨결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질까, 류건우를 안은 류청우의 팔에는 힘이 들어갔고 다리는 어느새 빨라졌다.

사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류청우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주의 시신을 확인했으니 저를 지지하던 파벌을 찾아 소식을 전하고 가주의 상징을 받으면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건 류청우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으니 뒷수습도 그의 몫은 아니라고, 류청우는 저에게 속삭였다. 항상 책임과 의무에 짓눌리던, 비틀린 계기로 그 무게에서 벗어난 이가 저지른 최초이자 최후의 일탈이었다.


깊은 산중의 어느 계곡. 노란색 지느러미를 가진 어린 인어, 박문대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 밖 큰 바위에 그려진 이동진 앞에 서서 반대쪽이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음 한켠에 불안은 있을지언정 초조하지는 않았지만, 당장 몇 시진 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그건 자신이 도운 인어에게 – 박문대는 류건우에 한해 ‘돕다’로 표현했지만, 다른 인어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관계를 ‘키운다’로 표현했다 – 뭔가 이상이 생겼을 때 찾아오곤 하는 직감이었다. 인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류건우가 무심코 삭일에 물 밖으로 나갔을 때라던가, 이능을 수련한답시고 삭일의 한낮에 물 밖으로 나가 한계까지 이능을 뽑아쓴다던가, 기어이 인간의 손에 잡혀 길고 긴 외출을 감행하던 날에 질리도록 느꼈던 것. 박문대는 저를 키운, 나이를 헤아릴 수 없고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조금 많이 다른 그 인어에게서 전달받았던 것들을 복기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었다.

“... 어!”

제 앞에 있는 이동진이 발동을 알리며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박문대는 그 이동진을 그린 존재가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 문양은 자신이 류건우에게만 가르쳐 준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리고 그 기대는 반 정도만 맞아떨어졌다.

“형! 이게 무슨... 어, 처, 청우 님?”

의식이 없는 류건우를 조심스레 안아든 남자는 박문대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는 키도 골격도 더 커졌고 얼굴도 성숙해졌지만, 류건우의 옆에 있으면 반짝이는 그 눈만큼은 예전과 똑같았으니까. 남자 역시 박문대를 알아본 듯, 일순 눈을 크게 떴다.

“문대야?”

“네, 청우 님! 아, 아니, 우선은 형부터... 이리 주세요. 물로 들어가면 조금 괜찮아질 거에요.”

“아, 내가...”

류청우는 박문대의 지시를 받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류건우의 몸을 물에 담갔다. 물이 닿자 스르륵 생겨난 꼬리는 류건우를 닮아 붉은 노을 속에서도 지독히 검었다. 류건우의 몸을 한 바퀴 휘감고 돈 차가운 물이 물결치며 류청우의 손을 간지럽혔다.

“열이 엄청 많이 나네요. 이능을 너무 많이 쓴 것도 있지만...”

 

깊은 산 속에 위치한 계곡은 유독 빠른 일몰 덕에 슬슬 달이 뜨고 있었다. 잠시 류건우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상태를 확인한 박문대는 빠른 손길로 실에 꿴 구슬 모양의 작은 황옥 하나를 꺼내 류건우의 목에 조심스레 걸어주었다. 희미하던 달빛이 황옥을 통과하며 한 곳으로 모여들자, 박문대는 황옥에 손을 대어 이능을 흘렸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류청우가 물었다.

“지금 상태는.”

“... 좋지 않아요. 용케 살아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박문대는 붉어진 눈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건우 형은 맨날 남은 그렇게 챙기면서 왜 자신은 안 챙기려 드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는 박문대에게 류청우 역시 속으로 격하게 동의했다.

“그래도 이걸 해 드렸으니까 곧 의식은 차릴 수 있을 거에요.”

류건우를 보며 입을 우물거리던 박문대가 조그만 목소리로 류청우에게 말을 걸었다.

“청우 님, 괜찮으시다면 저랑 건우 형이랑 같이 이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오래는 안 되겠지만... 그, 날이 많이 따뜻해지긴 했는데요, 그래도 여긴 깊은 산이라 청우 님께는 추울 거에요.”

그 말은 자신은 이 환경에서도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고, 류청우는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말을 하는 박문대가, 나아가 류건우 역시 류청우와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드릴게요. 몸에 지니고 계시면 물 속에서도 자유롭게 다니실 수 있어요.”

류건우와 마찬가지로 목에 작은 황옥을 걸고, 그것이 쉽게 빠지지 않게 옷 속에 잘 갈무리한 류청우는 박문대의 인도를 받아 류건우를 안아들었다. 곧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계곡에 있던 세 인영이 사라졌다.


“가주가 사망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형님. 후계자는 최심부로 달려간 이후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요.”

“청우 군은 어디 있나?”

“최심부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곳은 소식이 빠르게 전달되지 않으니.”

“어찌 되었든 최심부에 가 보긴 해야겠는데... 자네, 무얼 하나. 같이 가 보세.”

류청우의 부친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느릿하게 검집에 넣었다. 단순한 감이었지만, 아마 류청우는 이미 저 곳을 빠져나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저를 부르는 파벌의 일원들과 함께 최심부로 향했다.

“형님!”

사람이 여럿이니 나누어 찾아보자는 제안에 따라 적당히 빈 구역을 뒤지던 류청우의 부친은 희미하게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가주가 저 모양으로 살해된 시점에서 후계자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으니까, 어쨌든 안 가볼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 이게 무슨 일이더냐, 이 아이가 왜 여기 있어?”

“모, 모, 모르겠습니다. 문을 여니 이런 광경이...”

아무런 장식물도, 최소한의 가구조차 없이 황량한 방의 한쪽 벽을 가득 차지한 거대한 수조. 수조는 최근까지 관리되었던 듯 내벽이 깨끗했고 물 역시 냄새 없이 맑았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그 안은 크게 오염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는 떨리는 손을 느릿하게 소매 속에 숨겼다.

“... 철우 군의 시신이 아닙니까.”

“아니, 어찌 이런 일이...”

류청우와 마지막으로 접촉했던 그 역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왜 수조가 있는 것인지, 왜 류철우가 수조에 잠겨있는 것인지. 내막을 알 만한 사람은 전부 의식 불명, 사망, 행방불명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그는 조용히 수조에서 눈을 돌렸다. 그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일원들도 최심부를 떠났다. 시신은 물에서 건져올려 사람이 없는 후원에 대강이나마 수습해둔 상태였다.

후계자와 가주가 모두 사망한 것을 확인한 이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상을 준비하는 동시에 후계 구도를 결정짓기 위한 회의에 돌입했다. 결론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나왔다. 기존에 후보로 꼽혔던 인물들은 모두 사망했거나 실종되었고, 그렇다고 갑작스레 다른 인물을 찾자니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곤 한 명 뿐이었다. 방계의 여인, 가주의 자리와는 가장 거리가 먼 신분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항렬자를 받아 어떻게든 족보에 그 이름을 올린 자, 류연우. 대외적으로도 대내적으로도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입지였으나, 류연우는 가주의 계보에 기꺼이 이름을 올렸다. 그는 가주직에 오르자마자 거센 반발을 뚫고 가문의 체재와 가풍을 뜯어고치고, 자신을 비롯한 휘하 가솔들의 실력을 끌어올리는 등의 부단한 노력과 갈고 닦은 교섭 실력을 통한 오랜 투쟁 끝에 류씨 가문의 위상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만월의 달빛이 고요하게 비치는 밤, 류연우는 이부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찬찬히 살폈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류연우가 가주의 자리에 오르던 날 그의 침소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환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흑진주를 중심으로 잘게 쪼개진 샛노랗고 투명한 황옥이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뒤꽂이. 누가 준 것인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흑진주를 보면 어쩐지 인어가 된 그의 큰오라버니가 떠올랐기 때문에 류연우는 그것을 제 패물함 깊숙한 곳에 놓아두고는 만월이 뜨는 날에만 몰래 꺼내보고는 했다. 흑진주에 손가락이 닿으면 들리는 작은 자장가 역시 그의 큰오라버니를 떠오르게 했으니까. 그리고 그 산만한 덩치로 헤헤 웃으며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닐 다른 오라버니를 생각했다. 그래서 류연우는 아주 막연하게, 그들은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 순간, 흑진주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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