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11)

돌아갈 수 없는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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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igger: 질식 !

한밤의 산책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밤이슬이 내리고 새벽노을이 밝아올 무렵까지. 다만 산책의 끝을 고한 것은 지는 달이 아니라, 웬 흰 보퉁이를 안고는 최심부의 문을 박차고 뛰어든 류연우였다.

“오라버니!”

류건우와 류연우는 각자 다른 의미로 긴장을 끌어올렸다. 낯익은 인영을 보고는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금세 사나워지는 동생의 눈매를 본 류청우가 조곤한 목소리로 동생을 말렸다.

“연우야, 아니야.”

“오라버니, 저 사람 누구야? 왜... 왜 저 사람 생긴 게 건우 오라버니랑 똑같아? 오빠는 왜 또 아무렇지도 않게 달라붙어있어?”

“류청우, 류연우.”

똑 닮은 남매가 똑 닮은 표정으로 소리의 근원을 돌아보았다. 류건우는 가볍게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제법 서늘한 표정 탓에 남매의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았고, 류연우는 조용히 삿대질하던 손을 내렸다. 류건우는 그제야 팔짱을 풀어내렸다.

“들어가자. 얘기해줄게.”

셋은 조용히 최심부의 전각으로 들어갔다. 수조 방으로 가느냐 류청우의 처소로 가느냐를 두고 잠깐의 의논을 거친 끝에 류청우의 처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객이 왔는데 차 한 잔 안 내오느냐며,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느냐는 둥 쓸데없는 잔소리로 류청우를 적당히 타박해 자리를 비우게 한 류건우는 삐걱이며 걷는 류연우와 함께 류청우의 처소에 들어섰다. 방문객을 염두하지 않은 탓에 하나뿐인 방석은 류청우의 자리로 남겨두고, 보료에 동생을 앉힌 류건우는 맨바닥에 털썩 앉아 아주 오랜만에 보는 동생과 마주보았다.

“누구십니까?”

보퉁이를 꼭 안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대와의 기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바짝 털을 곤두세운 어린 고양이. 어린 시절의 류청우를 뚝 떼어다 사나움을 적당히 붓고 호기심을 조금 섞으면 저렇게 될까, 싶어 류건우는 작게 웃었다. 익숙한 웃음을 본 류연우의 혼란이 가중될 무렵, 류건우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오라비였던 사람.”

류연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류건우를 보던 사이,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류청우가 들어왔다. 류청우의 손에 들린 물병을 자연스레 넘겨받은 류건우가 방에 있던 화로로 물을 끓이고, 류청우는 다기를 정리했다. 일련의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던 류연우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집안 사람들 모두가 건우 오라버니는 죽었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당신이 내 오라버니란 말씀이십니까?”

“죽었지. 그럼에도 아득바득 살아나 지금 여기 있고.”

“어떻게?”

“어떻게든.”

조용한 방에는 한동안 물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만 들렸다. 물이 적당히 끓어오르자 류건우는 물을 적당히 식혀 찻잎을 담은 다기에 부었다. 류청우의 그것과 매우 닮은, 그러나 한층 정교한 손길에 류연우는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믿고 싶었지만 믿고 싶지 않은, 혼란이 가득한 얼굴에 류건우는 또 웃었다.

“믿든 말든 네 자유야. 어차피 여기 남지 않을 거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으니까.”

“왜...?”

“전하려던 소식이 있을텐데. 그렇지?”

뻔히 보이는 말 돌리기였지만 류연우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 새벽에 괜히 내당을 나서면서까지 류청우를 찾아올 이유는 없으니까. 류건우의 말대로 류연우에게는 전할 것이 있었다. 류연우는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아 맞다! 오라버니. 지금 밖은 개판이야.”

“연우야.”

“표현이 거친 건 미안해. 근데 이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바가 없어.”

류청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류건우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류건우는 부드럽게 휜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류연우의 표정을 보고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어?”

“오라버니네 파벌이 개전을 선언했어. 후계자야 딱히 말할 것도 없고, 가주도 종조부도 그렇게 되시는 바람에 후계자네 파벌은 아예 구심점을 잃어서 제대로 된 대응도 못 하고 있고. 다 정리되기까지 얼마 안 걸릴 거야. 내 예상으로는 길어야 사흘, 짧으면 이틀.”

쏟아지는 소식에도 류청우는 담담했다. 개전 선언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류철우의 발언을 눈앞에서 들은 당사자였으니까. 이 모든 것은 다만 시간 문제였다.

“사실 그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 청우 오빠.”

“응.”

“류철우가 이리 올 수도 있어. 자기네가 질 것 같으면 오빠를 죽여서라도 이기려고 들 거야. 이거 받아.”

류연우는 소중히 품고 온 흰 천뭉치를 류청우에게 건넸다. 천을 걷어내자, 그 안에는 깨끗하게 관리된 활 하나와 화살 한 통이 있었다. 류청우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류연우는 아랑곳않고 입을 열었다. 그때와 달리 미래를 논할 수 있게 된 류청우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가 쓰던 거라 오빠가 쓰던 것보다는 가벼워. 힘이 좀 약하긴 한데, 아마 오빠도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걸.”

“연우야.”

“기껏 차도 내주었는데 마시질 못 하게 했네. ... 확실히 청우 오빠보다 차 향이 깊은데. 만약 당신이 건우 오라버니가 맞으면, 내가 잔칫날에 뭘 가장 먹고 싶어했는지 맞춰봐요.”

류청우에게 전할 건 다 전했다는 듯, 갑자기 류건우에게 튀는 불똥에 당황할 법도 한데 류건우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군밤. 알 굵고 단 걸로 아궁이에 바짝 구워서. 어린 놈 둘이 불 쓰다 손 다 태워먹을까봐 내가 구워줬는데.”

“청우 오라버니가 가장 먼저 잡았던 무기는?”

“활.”

“다례는 누가 가르쳤는데요?”

“내가.”

류연우는 한참동안 뾰족한 눈으로 류건우를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노려보는 느낌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한참동안 그 시선을 받아주던 류건우가 조용히 말했다.

“말 안 하고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해묵은 사과였다. 류연우는 노려보던 것도 잊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에게 받아야 할 사과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그래서 더 와닿는 사과. 어릴 때 모습 그대로 울음이 고이는 눈에 류건우는 조금 놀란 얼굴로 아직 뜨거운 류연우의 찻잔을 팔이 닿지 않는 쪽으로 슥 치웠다. 이윽고 터진 울음엔 서러움이 가득해서, 류건우는 동생을 달래려 묵묵히 팔을 벌렸다. 그것마저도 류연우가 기억하던 큰 오라버니와 다를 게 없어서, 기다렸다는 듯 어릴 때처럼 류건우의 품으로 덤벼드는 어린 동생을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토닥였다.

한참을 훌쩍이던 류연우가 류건우의 품에서 벗어나 제자리로 돌아가자, 눈물로 엉망이 된 옷을 잠시 내려다보던 류건우가 류연우를 보며 물었다.

“괜찮냐.”

“응.”

“그래, 됐다 그거면. ... 가주직은 어떻고?”

방금까지 울던 동생을 달래던 오라버니의 발언이라기엔 조금 이상해서 류연우는 잠시 류건우의 의중을 짐작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야 뭐 누가 후계자 후보로 생각이나 하겠어, 킁.”

“시켜주면 할 생각은 있고?”

“감사하지. 이래봬도 할아버님께 배울 건 다 배웠거든.”

“그래, 그분다우시네.”

“그치.”

가볍게 대답하던 류연우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이어지는 질문에는 류청우도 당황했다.

“나를 가주로 만드려고?”

“안 될 게 뭐가 있는데.”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뻔뻔함도 잠시, 류건우는 슬쩍 목덜미를 문질렀다.

“항렬자도 받았고, 족보에도 올라갔고, 교육도 받았고, 활쏘기도 검술도 배웠으면서 왜 안 되는데.”

“그야 나를 지지하는 파벌도 없으니까...”

“만들면 그만이지. 숙부님도 살아계시는데.”

“...”

류건우의 양친은 이미 한참 전 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떠올린 류연우가 침음을 내었다. 방어 불가능한 기술에 맞닥뜨린 류연우가 드물게 순순히 항복하는 것을 보던 류청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기반은 네가 다시 쌓아야 할 것 같다며 한 손으로 목을 문지르던 류건우가 기척을 살폈다.

“슬슬 해산하지.”

“누가 오는구나. 알았어, 나 가볼게. 내당은 괜찮을거야.”

“그래. 여기 있으라고 하고는 싶은데, 지금은 여기도 안전하지 않아서. 조심해, 연우야.”

“응, 오라버니. 둘 다 몸조심하세요.”

식은 차를 호로록 들이킨 류연우를 보낸 류건우가 류청우의 등을 가볍게 쳤다.

“너도 어디 숨어있어라. 곧 끝날 거니까.”

“형도 조심해요.”

류청우에게 단단히 일러둔 류건우는 류청우의 처소를 나서 수조 방으로 향했다. 류청우는 류건우의 잔소리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을 땐 시간이 제법 흐른 오후 무렵이었다. 멀리서 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들과 함께 있을 땐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에 다시 냉기가 깃들었다.

“지금 진주들이 어디 있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흑진주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은 가주와 후계자 덕에 위치를 파악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진주의 위치를 띄워놓고 가만히 물장구를 치던 류건우가 뭔가를 툭 건드렸다. 건드린 자리에서 빛이 반짝였다.

“연우가 해먹어야 하니까 전투는 최대한 짧게.”

날붙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가 나는 쪽을 무심하게 응시하던 류건우는 다른 곳을 툭 쳤다. 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혼란스럽게.”

애초부터 전투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으니, 짧으면 하룻밤 정도에 전투가 마무리될 것이다. 류연우는 길면 사흘이라고 했지만, 류건우가 생각하기엔 길어봐야 이틀이었다.


이게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지. 쉴새없이 밀려오는 검격을 방어하면서 류철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훈련과는 명백히 다른 무기 특유의 소리에 잠이 깨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문을 열어젖히자 문틀에 화살이 날아와 박히질 않나, 겨우 채비를 마치니 호위를 위해 고용해둔 자들이 지휘를 재촉하고. 이 모든 것이 한 시진만에 일어난 것들이었다. 황급히 가주의 권한으로 가주 직속 호위부대를 전투에 투입해 수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지만 사기는 진즉 떨어졌고, 이미 상황은 그런 것으로는 뒤집기 어려울 정도로 밀린 상태였다. 류철우는 주위를 휙 둘러보았다. 아군은 자신을 빙 둘러싼 형태로 진을 쳤고, 적들은 최대한 살상 없이 전투를 치르겠다는 듯 결정적인 순간에는 몸을 사렸다. 어차피 전투가 끝나면 모두 가주의 소속이 되는만큼 납득이 불가능한 행태는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지만, 류철우가 보기엔 그냥 가지고 노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말하자면 류철우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는 말이었다.

“이익! 다 비켜!”

악을 쓰며 버티던 류철우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쳤다. 본래 전투는 어느 한쪽의 수뇌부, 특히 적장을 죽이면 그 기세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적장, 류청우를 죽인다면 승기도 자연스레 제가 잡을 수 있으리라.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자 행동은 간단했다. 오랫동안 틈을 노리고 필사적으로 검로를 틀어 만들어낸 틈새로 빠져나온 류철우는 최심부로 뛰어들었다. 저를 따라온 아군이 어떻게든 방어진을 구축하는 사이, 류철우는 검을 든 채 류청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드르륵.

몸에 익은 길로 내달린 끝에 류철우가 도착한 곳은 수조 방이었다. 아무래도 최심부에서 류청우의 처소보다는 수조 방에 더 자주 드나든 탓에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수조에 잠긴 인어와, 허공에 반짝이는 빛망울. 분노와 광기에 휩싸인 류철우와 차게 가라앉은 인어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인어를 처리하는 건 급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류철우는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았다.

류청우는 자신의 처소에서 류연우가 주고 간 활과 화살을 손보고 있었다. 활시위를 당겨보고, 화살깃에 제 손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오랜만에 당기는 활시위는 제법 부드러웠고, 확실히 힘이 덜 들어가서 어깨의 통증도 참을 만했다. 손에 익힐 겸 화살을 매긴 채로 바닥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을 때, 처소의 문이 덜컥 열렸다. 류연우가 일찍이 예상했던 그대로, 류철우였다.

“형님.”

“류청우-!!”

흡사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할 때 냅다 상대의 이름부터 지르고 보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류청우는 생각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 이들이 든 것은 어린아이가 쓸 법한 가벼운 막대기 따위가 아니라 살상력을 가진 실제 무기라는 것 정도. 물론 둘의 실력차를 본다면 얼마든지 류청우 혼자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라고, 특유의 신랄한 어투로 류건우는 말했겠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갈무리한 류청우의 입꼬리가 굳었다.

류청우는 제 앞에 선 이의 모습을 차분히 살폈다. 파벌의 수장으로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을 텐데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류철우를 보는 류청우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류청우가 어쩌다 이곳에 유폐되었는지 떠올리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땐 류청우에게도 전의가 없어 이곳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본래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은 류청우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에게서 자발적인 패배를 가져간 사람이 다시금 싸움을 걸어온다면.

힘이 들어간 오른팔이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고, 활을 든 왼팔은 흔들림 없이 그 모든 것을 지지했다. 시위를 당기는 류청우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고요하고 명징해서, 과거 류씨 가문 최고의 무장武將, 그 명성을 그대로 재현한 듯했다. 화살촉이 첨예한 빛을 내었다. 찰나, 검을 치켜들던 류철우의 귓가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멍하니 선 채로 자세를 유지하던 류철우가 상황을 파악한 건 자신이 등지고 선 문틀에 무언가 거칠게 꽂히는 소리가 들린 뒤였다.

“으, 으아, 으아아아악!”

화살이 만들어낸 바람이 스친 오른쪽 귓가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지르는 류철우의 모습을,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류철우를 보던 류청우는 더 이상 대거리할 필요도 없다는 듯 미련없이 처소를 나섰다. 두려움에 악을 쓰던 류철우는 류청우의 뒷모습을 보고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류청우는 이미 저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류철우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 문틀에 박힌 화살을 거세게 뽑아들고는 류청우를 따라갔다.

칼을 바닥에 끌며 불안정하게 걷던 그는 수조 방 근처에서 사라진 기척에 당황하다가, 문득 그 안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권리, 내쫓는다, 그래도 부탁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두려움은 깔끔하게 잊혔기 때문에, 류철우는 홀린 듯이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에는 부서지는 햇빛 아래 선 낯선 이와 류청우가 서 있었다. 어째서 류청우가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지긴 했지만 그보다는 그의 고통을 지워준 목소리가 더 궁금했다. 사고의 흐름이 명백히 이상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형?”

“류청우, 눈 감아.”

“왜, 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류청우를 조용히 달래는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 차분하고 성숙한 미성. 그리고 류철우가 그 무엇보다 질시했던 이의 목소리. 떠오르는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뒤지던 류철우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무엇을 그리 찾으십니까, 형님.”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순간, 류철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조 속에만 있던 인어가 물 밖에 나온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기울어가는 태양빛 아래 드러난 이목구비와 인간의 신체부위가 자리한 그 몸은 분명 류철우에게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류건우?”

“예,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회라 하기엔 좋지 않은 때지만.”

“너, 너 분명 뒈졌다고, 아버지께서...”

“저런. 잘못 아셨나 봅니다.”

비꼬듯 가라앉는 목소리 역시 기억 속 그것과 똑같았다. 새삼스레 분노가 치밀어, 류철우는 검을 쥐었다.

“오냐, 그럼 이번엔 내가 너를 직접 죽여주...”

류철우가 말을 끝맺기도 전, 그가 하는 말 따위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류건우는 순식간에 움직여 류철우의 목을 잡고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그 짧은 시간, 숨이 막히는 고통에 몸을 비틀던 류철우는 자신의 몸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보자마자 마구 발버둥쳤다. 그의 발밑에는 방금까지 인어가 잠겨있었을 수조가 있었으니까.

“악! 아, 안돼! 싫어! 끄아악!”

“목이 상합니다. 너무 큰 소리는 내지 마십시오, 형님.”

“너! 너, 류건우! 류건우우우!”

“제 이름이 뭐 좋다고 그리 부르십니까. 정작 내게 그 이름을 지어주신 분들은 네 손에 그리도 무참히 살해당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류건우가 신경쓰는 것은 류청우가 어떤 얼굴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허락은 받았다지만, 사실 이런 짓을 하면서 여전히 곧고 어딘가 아이같은 그의 동생을 볼 용기도 그럴 마음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이제껏 류철우를 잡지 않았던 이유가 류청우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기에, 그 명제가 박살날 것을 안 류건우는 쓰게 웃었다. 류청우가 원하는 한, 류건우는 류청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으니까.

- 형, 저에게도 그 끝을 볼 권리가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쫓지 말아줘요, 부탁이에요.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조금 전의 기억에 류건우는 눈을 감고 고개를 털었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 제게 일어난 비극의 주범 중 하나를 직접 죽이는 그 순간이 왔다. 그럼에도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밀려오는 허탈함에 마음을 내주지 않으려 류건우는 시선을 올렸다. 어떤 느낌이 들더라도 그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첫 칼질은 내 아버지의 내장을 끊었고.”

류건우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두 번째 칼질은 내 아버지의 가슴을 갈랐고.”

연이어 찾아오는 고통이 숨통을 조였다. 류건우가 쥐고 있던 목은 이미 놓인 지 오래였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은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지웠다. 달빛이 없는 상황에서 이능을 급격히 소모한 탓에 온몸이 저릿해졌지만 류건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 번째 칼질은 목을 꿰뚫었어.”

 

금방이라도 목을 그어버릴 듯하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가라앉지 않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류철우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류건우를 보았다.

 

“내 어머니를 배신한 건 당신이 아니니 지금은 말을 아끼고.”

류건우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다시 까딱였다.

“당신과 당신 아버지의 수하에게 쫓긴 내 몸은 절벽에서 떨어져 수중의 바위에 관통당했고.”

처음엔 배가 미친 듯이 아팠고, 그 다음엔 가슴이, 그 다음은 목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류철우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애써 잡아끌며 어떻게든 류건우와 멀어지려 애썼다. 그러나 공포로 질린 몸은 통제를 잃은 지 오래였다. 제자리에서 움찔거리는 그를 벌레 보듯 내려보던 류건우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수조 안으로 류철우와 함께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

인간의 몸은 기본적으로 물에 뜨려는 경향을 가진다. 단 한 군데만 제외한다면. 류건우는 어떻게든 몸과 함께 수면으로 올라오려 애쓰는 류철우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커다란 물거품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몸도 수면으로 떠올랐다. 류건우는 그건 막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류철우의 마지막을 눈에 담은 류건우는 아주 천천히 류청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

그리고 막혀있던 숨을 턱, 내뱉었다. 류청우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왜 울어.”

방금 전까지 그토록 처절한 비명을 들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류건우였지만, 류청우가 눈물을 흘리는 것에는 그렇지 못했다. 우는 저를 보며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형을 본 류청우는 눈물 고인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조차 슬퍼보여서, 류건우는 참지 못하고 류청우의 눈가로 손을 뻗으려 움직였다.

“...!”

그러나 류건우가 생각하기에 제 손은 더 이상 동생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 못했다. 흠칫거리는 류건우를 보며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낸 류청우가 류건우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엄지로 조심스레 창백한 손등을 쓸어내던 류청우는 소리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혹여 부서지기라도 할까, 살며시.

“형.”

“...”

“괜찮아요.”

그 말을 듣고서야 류건우는 비로소 몸을 낮추고 손을 들어 아주 느릿하게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붉어진 눈가도, 까슬해진 피부도, 다부지게 다물린 입매도. 자신이 갑작스레 사라진 탓에 의지할 이 없이 모진 고초를 홀로 겪어야만 했던 동생을. 이제야 겨우 어리광을 부리는 동생은 그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건지, 류청우는 류건우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형이 잊은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 어쭈.”

“하하. ... 입 맞춰도 돼요?”

“뭐?”

“그 정도로 상처받을 만큼 제가 약하지는 않다는 걸 잊으신 것 같아요.”

“이 자식 봐라.”

형이 저를 타박하는 억양이 제법 찰지다. 피식거리는 웃음 뒤로 많이 컸다,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류청우는 쓰게 웃었다. 류건우는 입을 맞추는 대신, 가만히 팔을 벌려 류청우를 안았다. 강하게 자라버린 류청우의 아픈 어깨에 류건우가 얼굴을 묻었고, 그토록 강해보이던 류건우의 마른 어깨에 류청우가 얼굴을 묻었다. 주변 따위엔 눈을 감아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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