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10)

달빛과 간극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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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분명했고, 여전히 류건우는 가주 일가의 혼란을 유도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가짐은 이미 처음과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않으리라는 처음의 다짐이 류청우의 손에, 아니지. 입술에 깨진 탓이었다. 덕분에 요 근래 류건우는 말 그대로 심란했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온갖 잡생각을 지우기도 수 차례였다.

그래도 정말로 일에 집중해야 할 때가 왔다. 류철우가 최심부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기척에 류건우는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그 기척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있는 수조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야?”

후계 구도에 본격적으로 경쟁이 붙는다면 당연히 류철우가 류청우를 찾아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후보가 될 만한 인물 자체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류청우가 자신을 향한 적대감에 대거리 한 번 못 하고 밀릴 만큼 유약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기도 했고. 그럼에도 류청우에게 마음이 쓰이는 걸 어쩌지 못한 류건우는 오감을 바짝 곤두세웠다. 멀리서 류청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청우야. 얼굴이 폈구나, 요즘 잘 지냈나봐?”

“가주님과 형님의 은덕입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헌데 아직도 네 주제는 모르나 봐, 류청우.”

“더 정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류청우는 예상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고 있었다. 본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멀리서 듣고만 있는 류건우도 알 정도였으니까. 다만 류건우가 신경쓰는 건 류철우의 말을 듣고 있는 류청우가 받을 심리적 타격이었다. 류철우가 절대 저 정도로 끝낼 리 없었으니까.

“어른들은 그래봐야 유폐된 놈에게 대체 뭘 바라시는 건지 모르겠네. 넌 하는 것 없이 쌓인 걸 축내기만 하고 있잖아. 응? 그래봐야 아무것도 못 하는 놈이 말이야.”

“...”

“내세울만한 거라곤 그 알량한 재능으로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것뿐인 X끼인데.”

“...”

“그래, 너는 처음부터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 어릴 때부터. 맨날 류건우 그 개X끼한테나 헤실헤실 붙어다니고.”

말끝에 저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류건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던 그 시간 동안 류철우의 성질머리를 감당한 건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류청우인 모양이었다. 류청우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대략 어떤 얼굴일지는 짐작이 갔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겠지. 다만 그것이 정말 평온한 심정에서 우러난 표정일지는 류건우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저 X끼가 진주를 갖고 있던가.”

류건우는 지금껏 진주를 소지한 사람의 기억을 조금씩 건드렸을 뿐, 행동을 조종한 적은 없었다. 행동을 조종하면 이능의 소모가 심한 것도 있지만, 지배당하는 대상이 그 사실을 눈치챌 가능성이 비교적 높았으니까. 그걸 들켜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건 류건우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류건우는 천천히 이능을 사용했다. 류철우의 목소리가 최심부의 담장을 넘어갈 정도로 커지게, 제 발로 방 밖으로 뛰쳐나가게 해서 최심부의 벽에 가려진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검푸른 동공이 푸르게 빛났다. 류건우는 이능을 사용하며 생각했다. 일종의 합리화였다.

‘이왕이면 류철우가 후보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서, 류철우를 지지하는 파벌의 마음이 급해지도록 하는 것도 제법 괜찮지 않나.’

물론 류청우의 귀에 류철우의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적당히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능의 급격한 소모에 빛나는 눈을 시작으로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류건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익은 계획에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기고, 류청우를 지지하는 파벌은 그 빈틈을 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류씨 가문의 '어른'들은 대부분 병법과 군사에 관련된 관청에서 오래도록 근무했기에 진을 짜고 실행하는 것에는 잔뼈가 굵었고, 무릇 급하게 먹은 밥은 체하기 마련이니까. 류건우가 염려하는 건 어른들의 엉덩이가 무거워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지만, 얼마 전 류청우의 부친이 류청우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지는 않을 것이었다.

“적당히 바람을 넣어주셔야 할 텐데.”

류청우의 부친이자 류건우의 숙부인 그 사람에 대해 류건우는 더 이상 별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류건우가 바라는 건 제 숙부였던 사람이 역할을 다해주는 것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능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했다. 상념에 잠긴 류건우의 귀로 아주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들리는 익숙한 고함소리에 류건우는 무표정하게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매끄러운 지느러미의 촉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손가락 끝부터 저릿해지는 감각을 류건우는 익숙하게 무시했다.

“네 가치는 그 전쟁에서 드러누운 채로 돌아왔을 때 이미 끝났어! 분명 내가 꼴도 보기 싫은 거 그냥 묻어버리자고 했는데 왜 살아남아서 사사건건 방해하는 거야 이 X끼야!”

다만 그 발언이란 것은 여러모로 류건우의 생각 이상이었다. 대놓고 왜 살았냐고 물어보는 인성이라니, 류건우의 얼굴이 차게 가라앉았다. 창호지 너머 밝게 비치는 햇살과는 정반대로.

“그래! 아닌 척 하지 말고 그냥 묻었어야 했어! 류건우 그 자식 묻었을 때처럼 너도 그랬어야 했다고!”

“형님,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말조심? 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질이야?”

이능의 역작용으로 예민해진 기감에 여러 명의 기척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류건우는 울리는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상황에 집중했다. 류건우 자신이 당장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류청우가 고운 말만 들을 수는 없었다. 알고 있었고 또 류청우가 잘 넘기도록 어느 정도 방비한 뒤 벌이긴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그 말을 흘려낼 수 없는 건 류건우 본인이었다.

“헌데, 철우 형님. ... 건우 형님을 묻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라앉은 류청우의 목소리 뒤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류청우가 굳이 알 필요 없는 것까지 알아버린 것 같다고, 류건우는 추측했다. 류청우는 어릴 적부터 저를 유독 따랐고, 기억을 잃었다 되찾은 후로는 자신을 향한 애착이 왠지 전보다 더 깊어졌으니까, 그래서 굳이 자세한 정황을 말해주지 않았던 건데. 류건우는 초조한 심정으로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네, 네가 알 필요 없어!”

“형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류건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발, 이쯤에서 누가 좀 끼어들어 달라고 생각하면서.

“이게 무슨 소란이냐!”

“할아버님!”

“류철우!”

철썩. 살과 살이 거칠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최심부를 울렸다. 류건우는 일그러지는 미간을 짚으려다 그제야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심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지만 할아버님, 류청우 이 배은망덕한 자식이!”

“그만하거라!”

전 가주의 노호성에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이 시작되었을 때 몰려온 가문 사람들이었다. 의도한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니 만족스러워야 하는데, 류건우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생각 이상으로 류철우가 그들 형제에게 가진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류건우로서는 자신에게 품은 반감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류청우에게 그 여파가 미치는 건 정중히 사양하고 싶었다. 끝내기 전에 아예 날 잡고 잡아버릴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적당히 미뤘다. 굳이 류청우까지 머무르는 이곳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사양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밤이 찾아왔다. 류청우가 찾아오는 시간.

“형.”

류청우가 수조 방으로 찾아왔을 무렵, 류건우는 평소답지 않게 수조 밖에서 류청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평소처럼 적당히 무표정했지만, 류청우는 도통 가만히 있질 못하는 손가락,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 흔들리는 숨소리를 인식했다. 류청우는 류건우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저 괜찮아요.”

류청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류건우는 류청우의 어깨를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간헐적으로 떠는 마른 몸을 품은 류청우가 조심스레 등을 토닥였다.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은데.”

“류청우.”

“네, 형.”

류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없는 사이 다 커버린 류청우를 애써 품에 우겨넣을 뿐이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부드럽게 웃으며 만끽하던 류청우는 류건우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생각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을 찾아냈다.

“혹시 아까 철우 형님이 찾아왔던 것 때문이에요?”

“...”

답은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답이 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류건우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류청우가 쓰게 웃었다.

“다 들었구나. 형은 예민하잖아.”

“...”

“저 진짜 괜찮아요. 중간에는 안 듣기도 했고요.”

류건우는 아무 말 없이 류청우를 토닥였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손길에 류청우는 더 이상 말을 얹지 않고 몸을 맡겼다. 제게 기대는 무게가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만들어서 류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류청우.”

“네, 형.”

“미안하다.”

“...”

류건우는 뭐가요, 하고 웅얼거리는 류청우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류청우의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따스한 체온이 손에 감겼다. 그래, 제 손에 피를 직접 묻히지 않으려던 처음의 결심은 류청우의 기억을 돌려줬을 때 깔끔하게 접어 버렸다. 그럼에도 류건우가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이곳에 류청우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복수를 결심한 시점에서 류건우에게 남은 거라곤 새로이 얻은 몸뚱이 뿐이었으니 자신이 더 잃을 것도 그것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혹시 종형(사촌 형)께서는 오후에 어디 계셨습니까.”

“최심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나도 들었네. 그게 사실이라면 구도를 뒤집을만한 꽤 괜찮은... 명분이 되지 않겠나? 마침 왕실에 선례도 있고.”

“그렇지요! ... 자네에겐 안 좋은 얘기인가?”

“아닙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며칠 뒤, 달빛이 모든 별빛을 지워버린 밤. 류청우의 처소엔 낯선 손님이 찾아들었다. 여느 때처럼 류건우를 찾아가려다 뜻밖의 손님에게 발목이 잡힌 류청우는 아무 표정도 띄우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그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아서. 눈앞의 객이 반가운 소식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고. 다짜고짜 용건부터 들이대는 건 고마웠지만, 그것뿐이었다.

“청우야. 네가 가주직에 오르는 건 어떠하냐?”

“송구하오나, 소인 어리석어 종조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그리 모자란 아이가 아니라는 건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흠, 아마 이곳으로 네 아비부터 해서 여럿이 드나들었겠지. 직계가 아닌 자들이.”

“...”

“나는 직계의 일원이자 전대 가주다. 따라서 원로로서 이 일을 처벌할 자격이 있느니라. 네 그걸 알지 아니하랴.”

류청우는 조용히 앞에 앉은 노인을 보았다. 제가 내어준 상석에 앉은 노인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객에게 냉수 한 잔 내어주지 않은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건우의 누명도 벗길 수 있도록 협조하마.”

“형님의 누명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철우가 열등감과 투기에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은 나 역시 알고 있으니.”

폭탄을 던진 후, 주름살 잡힌 노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류청우를 관찰했다. 류청우는 시시각각 차가워지는 손끝을 소매 아래로 숨기고 무표정을 가장했다. 어쨌든 답은 한 가지였으니까.

“종조부님. 소인은 현명하신 종조부께서 무얼 원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류청우는 단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 날의 진실은 눈앞에 있는 종조부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허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소인은 종조부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물끄러미 류청우를 보다,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어쩌면 그 답을 예측한 것도 같았다.

“그래, 네 뜻이 이리 확실한데 내 말을 얹어 무엇하겠느냐.”

“살펴가십시오.”

“그래.”

노인을 적당히 전각 앞까지 배웅한 후, 류청우는 발길을 돌려 제 처소로 돌아갔다. 노인이 돌아가는 자신을 계속 관찰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하고.

노인은 류청우가 처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발을 옮겼다. 이번에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인어가 잠들었을 수조 방이었다. 수조 방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푸른 달빛이 방을 가득히 채웠다. 노인은 수조에 대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오늘의 일은 자네의 짓이겠군.”

“...”

인어는 여전히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인어에게 말했다.

“본래라면 그 분노가 두려워서라도 아비의 엄중한 경고를 어기지 않았을 철우가 눈이 돌아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제아무리 아비가 그 모양이라고 해도 말일세. 게다가 기껏 잠잠해졌나 싶었던 투기에 불을 붙이지 않았나. 청우는 곧은 아이라, 그럴 수 있는 성정을 갖지 못했네. 허니 그렇게 만든 건 필시 자네겠지.”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답을 주지 않는 인어를 향해 노인이 질문했다.

“왜 그랬나?”

“...”

“우리 가문에 뭔가 원수진 거라도 있나.”

“...”

“철우가 가주직에 오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겐가? 말해주면 내 그리 따르겠네, 어떻게든 청우를 가주직에 올리겠네. 그러니 말해주게. 부디 내 유일한 손주에게 자비를 내려주게.”

인어의 시선이 그제야 노인을 향했다. 반쯤 감긴 눈에 달빛이 담겨 유독 푸르렀다. 인어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노인의 눈이 커졌다.

“자네, 지금...!”

수조 방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바깥은 잠잠했고, 달빛은 투명하게 일렁였고, 노인은 무언가에 짓눌리듯 쓰러졌다.

“제 목소리가 궁금하다 말씀하셨습니까.”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기억 한구석에 묻혀있던, 아주 오래 전 노인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던 어떤 소년의 목소리에.

“아, 류철우가 가주직에 오르면 안 되는 이유를 알려달라 말씀하셨던가요.”

목소리를 내려던 노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성대에 당황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을 냉랭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인어가 말했다.

“아셨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으셨을 것을.”

노인이 눈을 깜박이던 찰나의 순간, 수조의 인어는 어느새 남성의 모습으로 화한 채였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노인이 쓰러진 바닥에 떨어지며 뚝, 뚝 소리를 내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려 애썼지만, 압박하는 힘은 더 강해지기만 했다.

“제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인어, 류건우가 자신의 종조부 앞에서 자세를 낮추었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더해진 처연함과 우아함은 언뜻 노인의 조카 내외를 떠오르게 했다. 노인은 떠오르는 이름에 안색을 굳혔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노인의 눈앞에 있었다.

“이, 인어가...”

“예, 인어입니다.”

“어찌 건우의 모습으로 나를 현혹시키는가...?”

“현혹이라 하셨습니까.”

노인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자, 류건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얼핏 순수하게 보이는 그 행동에 노인의 뒷덜미에는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거세게 날뛰는 것을 느끼며 노인이 몇 마디를 토해냈다.

“분명, 분명 건우는 죽었다고 했네. 절벽에서 떨어져... 시신조차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제게 인어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믿을 수 없어도 분명 현실인 것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종조부님.”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건 평생토록 인어를 추적한 노인의 신조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구현한 듯, 죽은 이의 기억과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가진 몸이, 죽었다 생각한 사람이 노인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노인의 몸은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엎드린 자세에서도 끔찍하게 올라오는 두통에 노인은 황급히 눈앞의 사람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헉, 으억...!”

“조금만 더 막아주시지 그랬습니까.”

“끄어억...”

“그 모든 것이 예견된 일이었는데.”

류건우는 그 손을 잡지 않았고, 노인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최심부의 수조 방에 방치된 노인은 다음날 밤, 자신의 손자에게 겨우 발견되어 옮겨졌으나 결국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그의 혈족은 노인이 다시 깨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의원의 선고를 받았다.

구심점 두 개를 모두 잃은 류철우의 파벌은 그대로 혼란에 빠졌고, 류청우의 파벌은 그 기회를 놓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말의 망설임은 류청우의 부친이 지워버렸다. 그렇게 진즉부터 자신들이 부릴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끌어모았던 그들은 그대로 개전을 알렸다.


끝의 시작, 그 전날 밤. 보름이 지나 조금 일그러진 달이 흐붓하게 비치는 좁은 마당에 훤칠한 남성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온기를 머금은 밤바람이 사락거리며 류건우의 옷깃을 스쳤다. 류건우는 아주 오랜만에 나무나 종이가 깔린 바닥이 아닌 맨땅을 밟았다. 항상 물에서 지내던 이였기에 자박거리는 단단한 마른땅도, 이따금 걸리는 돌부리도 그저 반가웠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누군가 그의 뒤를 따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류건우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곳엔 류청우가 있었다.

“형.”

“오냐.”

“같이 걸어도 될까요.”

“... 그래.”

조용히 거니는 두 사람의 위로 완연한 봄밤의 달빛이 푸르게 비치고,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잎사귀가 바람에 흐드러졌다. 소담스레 피어난 들꽃 몇 송이에 시선이 머무르길 잠시, 류청우는 살며시 눈길을 돌려 류건우의 옆얼굴을 보았다. 달빛을 받아 언뜻 푸른 기운마저 비치는 새하얀 얼굴과 밤하늘을 떼어 담은 듯 검푸른 눈. 먼 곳을 응시하던 눈이 시선을 느끼고 저를 보자, 류청우는 류건우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류건우의 걸음에 맞추던 류청우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류청우의 손가락이 제 손가락 사이를 얽어오는 느낌에 류건우가 류청우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귓가를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류청우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은 그가 시선을 내렸다. 굳은살이 사라져가는 뼈대 굵은 손 사이로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가락이 얽힌 모습은 류건우의 눈에 겨우살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여리고 화사하게 피어나는, 그러나 그 뿌리는 그저 나무에 기생할 따름인 겨우살이. 산 사람에 대한 미련을 먹이로 피어난, 죽은 사람의 사랑처럼.


+) TMI

1) 시공간적 배경은 대충 조선에서 따온 패러렐 월드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당. 왕실이라던지, 무과라던지, 초시나 대과, 복장 같은 것들을 참고했습니다. 고증에 썩 잘 맞는 건 아니겠죠 흐린 눈으로 부탁드립니다. 중간에 언급된 왕실의 선례는 광*군의 폐모살제 비슷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 가주 측에서 발표한 류건우의 죄목은 부모를 죽이고 형제에게 칼을 들이댄 것, 조선에서는 최악의 죄목 중 하나로 꼽히던 강상죄였기에 가문의 다른 일원들은 좋든 싫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공론화돼서 연좌제로 다 같이 죽기 싫다면.

3) 1편에서 류건우가 쫓겨나간 시점에 류청우는 12살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형이 왜 갑자기 없어졌냐고 묻는 어린이에게 너희 형이 자기 가족을 다 죽여서 쫓겨났어, 라고 얘기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어딘가 비정상인 놈일 거에요. 류청우가 좀 더 자란 후로는 시간이 워낙 오래 지나 류건우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고요. 그래서 류청우는 그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같은 처지였던 류연우 역시 마찬가지.

4) 그날 류청우는 형이 곧 중요한 시험을 봐야 하니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한밤중에 형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날 류청우가 평소처럼 류건우 옆에서 자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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