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명단과 난간 (9)

그림자와 경계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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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충동, 혹은 그저 감춰진 속내. 그 작은 끄덕임이 어느 쪽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류청우가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류건우가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류건우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본래였다면 가주의 이지를 흐트러뜨리고 불안정한 류철우의 지위를 이용해 후계 구도를 확정짓기 위한 내전을 유도하고, 승자가 가려진 후 가주에게 걸린 이능을 해제해 혼란에 빠진 권력 구도를 외부에서 개입해 집어삼키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름만 남았다 해도 류씨 가문이라면 어디라도 박대하지 않을 것이었고, 만일 그것이 왕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테니까. 류씨 가문은 유능한 무장을 수없이 배출해 낸, 왕실로서는 버리기 아까운 가문이니까. 그걸 위해 부러 흑진주가 왕실로 유출되는 것을 유도하기도 했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제 동생들의 처지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었다. 급격히 몰락한 명문가의 일원들이 다른 명문가의 일원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류건우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류청우는 류건우의 계획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이었고, 류건우는 장애물을 치우는 대신 새로운 길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때 류건우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

“왜.”

“나와주면 안 될까요.”

류건우는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달빛을 보고 시각을 가늠했다. 자신이 얼마나 류청우와 같이 있을 수 있는지 계산하고, 함께 있을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에 젖은 남성의 형상이 달빛 아래 드러나고, 그 손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류건우가 물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았으면서도 류청우는 계속 제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류청우.”

어딘가 아픈 건가, 싶은 걱정이 순식간에 류건우의 머릿속을 점령한다. 극도로 불안해진 류건우가 빠르게 류청우의 어깨를 잡아끌려던 순간.

“...!”

“형.”

류건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바닥에 뉘여진 상태였다. 그 위로는 류청우가 바닥에 팔을 짚은 채 류건우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달빛은 휘영청 밝았지만, 류청우의 얼굴은 달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류건우는 그 표정을 꿰뚫어볼 수 없었다.

“며칠 전에 연우가 들렀다 갔어요.”

류연우, 류건우가 모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항상 제 오라버니인 류청우의 손을 잡고 팔랑팔랑 뛰어오던 여자아이, 류건우의 또 다른 사촌 동생. 류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류청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연우가 형이 사라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줬어요.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던데.”

“아직 살아계시냐.”

“네.”

“만나게 되면 안부나 전해드려라.”

말을 끝낸 류건우는 류청우의 눈을 피해 고개를 비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어느 때보다도 엇갈린 시선. 확신에 가까웠던 의심은 마지막 조각을 통해 확신이 되었다. 류청우는 저를 피하는 류건우의 검푸른 눈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새하얀 달빛을 받아 얼핏 푸르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 유색의 눈은 마치 지난날, 류건우가 저에게 이능을 사용했던 날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류청우가 류건우에게 원하는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테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몸을 갑작스럽게 잡아채어 바닥에 눕혔는데도 류청우의 숨결은 단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것이 류건우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류청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할아버님만이 건우 형의 일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하셨던 것 같아요.”

“... 그랬냐.”

모두가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여건을 따져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랬다.

“제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연우가 그러더라고요. 정작 제 기억 속에 형은 없는데.”

“뭘 바라는 거냐.”

류청우는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류건우는 자신이 더 이상 류청우의 결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어에 대한 전설을 확인하고 싶어요.”

이전에 류건우가 질문하고 류청우가 대답했던, 인어에 대한 네 가지 이야기. 그 중 어느 것을 말하는 건지는 간단히 짚어낼 수 있었다. 인어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설, 인어와의 입맞춤이 잊었던 기억을 되돌려준다던 이야기.

“형에 대한 기억을 찾고 싶어요.”

다만 그렇게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짚어낼 수 없었기에 류건우는, 몇 달 전 재회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류청우를 보며 정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기억하고 싶다고.”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류청우를 보며 류건우는 상황을 확인했다. 류건우의 몸은 힘도, 체격도, 기술도 류청우에 비해 모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류건우가 자력으로 이 상황을 탈출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고 류건우는 류청우에게 더 이상 이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자연스럽게, 류청우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었다. 기억을 돌려주는 건 사용한 이능을 걷어가는 것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류건우는 류청우에게 기억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계획이 비틀리지 않기를 바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류건우는 류청우가 자신을 굳이 기억하길 바라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어린 인어가 물었을 때, 류건우는 가벼운 말투로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에 매일 필요가 뭐 있느냐고 말했더랬다.

“왜.”

그래서 류건우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이유를 묻는 것뿐이었다. 제 뜻에 반하려는 동생을 쳐낼 수가 없어서, 제가 사랑하고서도 결국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의 뜻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서.

“그게 더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류청우의 대답이 류건우에게 충격을 준 것이었고.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형은 아마 기억을 되찾으려고 하셨겠죠.”

“...”

크게 뜬 유색 눈동자와 진한 청색을 머금고 내리뜬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깐 류청우의 대답을 곱씹고는 고소를 머금은 류건우가 류청우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서로의 숨결이 얼굴을 스치고 구름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던 달빛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어리는 순간, 두 개의 달그림자가 주인을 잊고 뒤엉켰다.

입맞춤을 나눌 땐 눈을 감는다던데. 류건우는 눈앞에서 형형하게 빛을 반사하는 류청우의 눈을 보며 예전에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물론 자신이 그걸 인식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통념과는 한참 멀어지기는 했다. 류청우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건 류청우를 보고 있는 자신도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니까.

입술만 붙인 채 그 이상 덤벼들지 않는 류청우를 대신해, 류건우는 먼저 입을 벌렸다. 입구를 연 건 류건우였지만 침범은 류청우의 몫이었다. 서늘하게 파고드는 점막의 온도가 더없이 기꺼워서, 류청우는 조심스럽게 류건우의 뒤통수와 목덜미를 감쌌다. 그러는 중에도 달그늘이 든 청남색 눈동자는 미동 하나 없이 류건우를 보고 있었다. 검푸른 눈은 그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느릿하게 감겼다.

부드럽게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고, 말캉한 살덩이를 얽으며 맞붙는 뜨거운 열기 사이로 젖은 소리가 들렸다. 숨 쉴 틈 없이 밀려드는 류청우의 기세에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류청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애처롭게 매달려오는 류건우를 안은 류청우가 그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맞닿으며 아주 깊은 곳에서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통 차기만 하던 방 안에는 어느덧 안개같은 달빛과 손끝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열기가 가득했다.

한참을 이어지던 입맞춤은 류건우가 류청우의 어깨를 밀어내며 느릿하게 막을 내렸다. 류건우가 고개를 물리는 대로 따라오는 은사를 쪼듯이 끊어낸 류청우는 그제야 기억하게 된 자신의 형을 온전히 품에 안았다. 류건우는 류청우의 팔 안에 갇힌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스로 기억을 돌려준 이상, 이제 류청우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형.”

“오냐.”

“... 건우 형.”

“그래, 청우야.”

“형, 가지 마요.”

“... 류청우.”

류건우는 류청우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기어이 그것을 이루어줘야 성이 풀렸으니까.

생사의 경계, 벗어날 수 없는 덫에 제 발로 걸어들어갔다는 걸 알면서도, 류건우는 점점 강하게 저를 얽매는 그 팔에 그저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승산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숙부님.”

“그들과 우리의 무력만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길 확률은 삼 할 정도. 다만 가주의 권한으로 직속 부대를 부릴 수 있다면 육 할 정도.”

“못 쓸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유일한 후계자인데.”

유폐된 놈이 대체 무슨 힘이 있어 치고 올라오겠냐는 둥, 죽었든 실종됐든 돌아오지도 않는 패륜아는 뭘 잘났다고 그렇게 싸고도는지 모르겠다는 둥, 류철우는 숙부의 속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중년의 남성은 쉴새없이 입을 나불거리는 제 조카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늘같은 아버지와 영민한 형님의 뜻에 따라 조카, 류철우를 차기 가주로 밀고는 있지만, 그의 눈은 조카에게서 가주로서의 자질을 찾지 못했다.

“철우야.”

“예, 숙부님!”

“네가 아직 가주가 된 것이 아닌데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류건우는 강상죄를 저지른데다 아버지께서 직접 명하셨으니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류청우는 무가 출신으로서 무술을 펼칠 수 없으니 사람구실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 무엇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성은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꾹 참았다. 반박할 말은 한가득 있었지만 듣는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류철우가 말해준 것을 천천히 정리했다. 다음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치열하게 벌어질 물밑 작업을 어떻게든 방어해보기 위한 목적이었다.


“청우 아범 왔느냐.”

“예, 아버지. 진지는 드셨습니까?”

“그래. 아범은 별일 없었는가.”

“연우가 시집 안 가고 가족들과 계속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투정부리는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류청우의 조부는 하나뿐인 손녀의 이야기를 듣고 껄껄 웃었다. 그가 가문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항렬자를 주며 족보에 올린, 이제 막 열일곱이 된 그의 손녀는 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인 오라버니들과 달리 해맑고 당차 늘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었다. 오라버니들이 그리 되고 난 후로는 어떻게든 밝게만 있으려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린,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음에도 그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해 작금의 후계자 경쟁에는 끼지도 못하는 그의 손녀.

“연우가 그러는 걸 청우는 알고 있느냐.”

“...”

그의 아들이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류연우는 아직 어리다는 것을 핑계삼아 작은 체구에서 나온 날렵함과 은밀함을 십분 살려 내킬 때마다 류청우를 보러 심부에 드나들었고, 간혹 류연우의 손을 잡은 류청우의 모친도 같이 들어가곤 했다. 들켰을 때의 핑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의 아들, 류청우의 부친은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으니 제멋대로 심부에 드나든 것이 들키기라도 했다간 그 대가가 상당히 혹독할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지만 아들에게 그리 물었고, 아들은 알면서도 그 참담함을 어찌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마 알 겁니다.”

부자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한참을 흐르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들 쪽이었다.

“형과 형수를 그리 보내셨을 때 말입니다.”

“9년 전 말이더냐.”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짐작될 듯 합니다.”

“... 그렇더냐.”

“저는 청우를 저곳에서 구해낼 겁니다. 그게 제가 아비로서 해야 할 도리겠지요. ... 그때 아버지께서 하지 못하신 일을 제가 해 볼까 합니다.”

“그래.”

“건우 일도,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조용히 아들의 눈을 응시했다. 9년 전만 해도 다소 유약한 면이 있던 아들의 눈에는 어느덧 강인함이 새겨져 있었다. 그건 아마도 부자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이 정해지니 세력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류청우의 부친이 합류했다는 점에서 파벌은 명분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가 직접 류청우를 가주로 만들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류청우를 지지하는 파벌에 합류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 속내를 짐작한 그는 죽은 형이 자주 짓던, 그림같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청우의 의사는 확인하신 겁니까?”

“아무렴 그랬겠지요, 청우가 제 아비의 뜻을 거부할 리 없잖습니까.”

“우리가 찾아갔을 땐 끝까지 답을 주지 않았으니까 말이오.”

“그래도 제 아비인데.”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이까, 청우도 싫어하지는 않는 기색이었소.”

파벌은 류청우의 동의가 없더라도 그를 가주로 추대할 것이었고, 류청우도 그의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류청우를 빼낼 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적당히 주워담던 류청우의 아버지는 문득 전날 어렵게 찾아간 류청우를 떠올렸다.

‘저는 탈출하려고 해요, 아버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나는 네 뒤에 있으마.’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마주앉은 이들 사이에는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류청우는 제 아버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시간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간만에 보는 아들의 개구진 미소에 그는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었더랬다.

‘그럼 나가고서는 뭘 하고 싶으냐.’

‘건우 형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해요.’

‘그래, 네가 어릴 적에 건우를 참 잘 따랐었지. ... 나도 사람은 풀어두었다. 그들에게 전언을 넣어둘까?’

‘아뇨,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음, 아마 바닷가로 갈 것 같아요.’

‘왜? ... 아니, 아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를 회상에서 깨운 건 어깨를 가볍게 치는 손길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말씀하셨는지요.”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하겠다는 것까지.”

“가용한 병력은 저쪽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그들이 가주의 권한까지 이용한다면 더더욱이요. 속전속결로 해야 승산이 있을 겁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대화에 녹아들었다. 혈육을 치고 권력을 잡겠다는 이야기가 평범하게 나도는 이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류청우를 도망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형.”

“왜.”

류건우와의 입맞춤 후, 기억을 되찾은 류청우는 부쩍 류건우에게 치대는 중이었다. 그동안 못 치댔던 걸 보충이라도 하려는 건지, 매일 밤 찾아올 때마다 나와달라며, 옆에 있으면 안 되겠냐며 어리광을 부리는 통에 류건우는 정말 하루하루가 새롭게 기가 막혔다. 그나마 어릴 때처럼 다짜고짜 제 이부자리를 들고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늘은 안 되겠죠.”

“너 오늘이 삭인 거 알고는 있는 거냐.”

“알았어요, 형.”

부드럽게 웃고는 있지만, 어깨가 슬쩍 처진 게 분명 시무룩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삭에 물 밖으로 나가는 건 인어들에게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까. 전에 나갔던 건 말 그대로 뼈를 깎으며 나갔던 것이라, 류건우는 그 후 며칠동안 몸 곳곳이 끊어질 듯 저려오는 걸 류청우에게 내색하지 않느라 죽을 맛이었다.

“기억은 잘 돌아온 것 같냐.”

“음, 네. 제가 밤마다 찾아오는 게 귀찮다면서 밤에 안 자고 밖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댓돌 귀신 이야기를 해 주던 것도 기억나요.”

“그런 건 왜 기억하냐.”

“그런데 그런 귀신이 정말 있어요?”

“아니.”

류건우는 예전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류청우를 보며 결국 웃었다. 류청우도 웃었다.

“형, 웃고 있네요.”

“그러냐.”

“하하.”

웃고 있다고 말해도 더 이상 자신을 쫓아내지 않는 류건우를 보며, 류청우는 내심 안심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줄어들었다는 것 같아서, 이승에 아무 미련도 안 남은 것 같던 사람에게 미련이 생긴 것 같아서.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여즉 이곳에 남은 건지는 알 수 없어서, 류청우는 여전히 마음을 졸였다.

“류청우.”

“네, 형.”

“전에 나랑 같이 바다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했지.”

“네.”

“그거 지금도 유효하냐.”

“당연하죠, 형.”

류건우는 류청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방금까지 웃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을 만큼 가라앉은 표정에 류청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왜 굳이 바다냐?”

“형이 인어니까요.”

왠지 류건우가 조소를 지은 것 같다고, 류청우는 생각했다.

“인어는 무조건 바다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왜 한거냐.”

“아니에요?”

“나는 계곡에 있었는데.”

“그럼 계곡으로 할까요.”

“산세가 가파라서.”

“같이 가려고 체력을 키웠나봐요.”

별빛만이 어둑하게 비치는 방 안, 밖에는 봄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찌륵거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 고요 속에서 류건우의 목소리는 유독 또렷했다.

“그러냐.”

“네.”

“근데 그 험한 곳까지 네가 올 필요는 없지.”

“...”

“그냥 잊고 살아. 굳이 힘들게 살 필요 없잖아.”

류청우는 류건우가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가려진 눈은 그 무엇도 쉬이 보여주지 않았다. 류건우도 류청우를 내려다보았다. 일그러진 미간, 조금 충혈된 눈, 피가 날 정도로 깨문 입술. 수조에 반사된 것이 누구의 표정인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뇨, 그렇게는 안 할 거에요.”

“그거 오기다.”

“형.”

“가서 자라.”

류청우는 평범한 동생답게 류건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류청우는 고집쟁이답게 그대로 수조에 다가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에서 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기막혀하는 류건우의 얼굴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지만, 류청우는 아랑곳않고 그곳에 머물렀다.

이렇게 고집부리는 것이 오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래, 류청우도 했다. 평소답지 않은 짓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없이 저다운 짓이기도 하다고.

어떻게든 극복해냈지만 원하지 않던, 피할 수 없던 시련으로 제 근간이 되는 것을 잃는 경험은 여전히 류청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고, 그는 다시 그 상황에 던져졌을 때 한 번 더 이겨낼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으니까. 언제부터 제 형, 류건우가 이토록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류청우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류청우는 다시 류건우를 잃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뒤틀릴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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