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6)
흐드러진 별빛
한 달에 하루, 달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인어를 보호하는 이능도 약해지기 때문에 인어들은 어린 인어에게 삭에는 절대 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며 몇 차례고 당부하곤 했다. 류건우 역시 막 인어가 되었을 때 저를 인어로 만들었던 노란 인어에게서 삭에는 절대 물 밖에 나가지 말고 무엇이든 조심하라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주의를 받았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삭일, 달이 하늘 너머로 숨어버리는 날.
별빛만 어둡게 스며드는 수조 안에서는 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류건우는 오랜만에 눈을 감고 기억 속을 유영했다.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져 류건우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형.”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닥 부근에 누운 채 몸을 둥그렇게 만 류건우의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건우가 눈을 뜨려던 때, 털썩이며 주저앉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나봐요.”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나 안 잔다, 하며 일어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다. 슬쩍 눈을 뜨려던 류건우는 자는 척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처음부터 형이 싫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류건우는 자신이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류청우와 그리도 허무하게 헤어진 후로 처음 듣는 동생의 속내였기 때문에.
"처음엔 그냥, 인어라서 형처럼 느껴지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저랑은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 다를테니까요. 그래선가, ... 형이 아실진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왠지 의지하고 싶어진다고 할까."
그 누구보다도 명징하던 아이는 류건우가 보지 못한 사이 금이 가 버렸다. 앳된 기가 묻어나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속엣말에는 이전이라면 겪지 않았을 혼란이 깊게 스며 있었다. 그건 지나가던 사람조차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위로를 건네고 싶을 정도로 깊은 혼란이었다. 없는 달빛이라도 그러모아 수조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류건우는 몸을 돌렸다. 그런 류건우의 속도 모르고 류청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례를 저지르는 건 아닐까 싶으면서도. ... 저를 밀어내지 않는 형을 보고 안심한 적도 있어요.”
잠깐의 정적이 펼쳐지고, 류청우는 펼쳐져있던 무릎을 모아 끌어안았다. 미약한 별빛은 수조 안을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에 류청우는 그저 고요하기만 한 방 안에서 수조 안에 잠든 인어를 향해 홀로 목소리를 내었다.
“제게만 있던 습관이 형에게서 보이는 걸 보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류청우가 문장 하나를 말할 때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말을 조금이라도 다듬어보려는 듯 류청우의 입술이 다물렸다. 묵묵히 류청우의 말을 듣기만 하던 류건우의 머릿속에 정적과 함께 무언가 떠올랐다.
“아귀가 맞지 않아요. 형이 제 잠버릇을 알 리가 없잖아요.”
“...”
“제 동생도 모르는 습관을 형이 어떻게 예상하는 건가요.”
“...”
“... 뭔가 사정이 있겠죠. 제게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까요.”
류청우의 간절한 의문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인어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류청우는 무릎 사이로 묻었던 얼굴을 살짝 들며 흐리게 웃었다.
“깼으면 어떡하지. 음, 미안해요, 형. 잘 자요.”
그 말을 하고서도 류청우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그 대신 류청우는 눈앞을 흐릿하게 비추는 별빛을 벗삼아 그저 수조 안을 물끄러미 보고 또 보았다. 무언가를 천천히 되짚어보듯이, 무언가의 흐릿한 향취를 덧그리듯이.
류청우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어버린 깊은 밤에서야 류건우는 눈을 떴다. 애초에 잠든 적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자세로 잠든 류청우의 미간이 살며시 접혀있었다. 모포 하나 들고 오지 않은 류청우를 속으로 괜히 한 번 타박한 류건우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물 밖으로 나왔다. 달이 없는 탓에 이능의 소모가 컸지만 잠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초봄으로 넘어가는 날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기댈 곳 없이 홀로 앉아 잠든 류청우를 응시하던 류건우가 제 몸을 접어 류청우의 옆에 자리잡고는, 류청우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그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었다. 닿은 곳에서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따끈한 체온이 느껴져서, 류건우는 그저 그렇게 앉아 새벽의 노을을 지켜보았다.
“아.”
류청우가 깰 시간에 맞춰 도로 수조로 돌아간 류건우는 눈을 뜨자마자 탄식부터 내뱉는 류청우를 보며 태연히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형.”
“오냐.”
“아침부터 절 봐서 놀라셨겠네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 음, 나중에 또 올게요.”
“그래.”
류청우가 황급히 방을 빠져나가고, 류건우는 류청우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꼭 잘못한 강아지가 꼬리를 말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입이 썼다.
“왜 자꾸 오는거냐.”
정 들게. 입안으로 삼킨 말이 독처럼 달콤했다. 류건우는 텅 빈 손을 괜히 쥐었다 펴며 류청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오늘만큼은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곳에서 기껏해야 남에게 뺏기기 싫은 물건 취급이나 받는 류건우에게 그런 생각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어제면 그 인간들이 올 법도 했는데.”
류건우는 달빛 없이 이능을 쓴 대가로 뻐근해진 몸을 살살 풀어주며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가주 부자가 오지 않는 편이 편하기는 하지만, 온다면 오는대로 상관없다. 더 강한 이능으로 휘어잡으면 그만이니까. 그런 면에서 구전설화에 제법 밝은 전 가주가 정말 자신에게 흥미가 있었다면 어제 왔을 것이다. 인어가 삭에 약하다는 건 알아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전설이니까. 그러니 결론은 났다.
“아직까지 내 존재가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은 거지.”
당연한 자세이기도 했다. 낯선 것이 갑자기 영향력을 키우는 건 기득권의 그 누구라도 경계할 테니까. 류건우는 가만히 팔짱을 꼈다.
“... 아닌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들려오는 기척에 류건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류청우의 발걸음보다 훨씬 무겁고, 기척을 감추는 데 서투르며, 사실 숨길 의지조차 없는 것 같은 존재감이 수조 방으로 다가왔다.
“인어여.”
“...”
“인어라도 인간의 말은 할 수 있을 터인데.”
노인, 전대 가주가 말했다.
“지금도 내 말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보게나, 일그러진 얼굴도 퍽 보기 좋군. 인어의 목소리도 내게 들려줄 생각은 없나. 분명 천상의 목소리일 터인데.”
인어에게 입을 열라고 종용하는 노인의 모습은 류건우의 눈에 퍽 우스웠다. 입을 열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계획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 수가 있었으니까. 같은 이유로 류건우가 류청우에게 목소리를 들려준 것도 류청우가 가진 기억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류건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어에 대한 설화는 몇 가지가 있지. 한 어부가 해변가를 걷다 여자의 상반신과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인어를 보고는 도로 바다로 돌려보냈다는 말도 있고, 아내로 삼았다는 말도 있어. 뭍에 나온 인어에게 잘 대해준 어부에게 풍어를 선물했다는 말도 있고, 인어의 노래에 홀려 자기 자신을 인어의 식사로 바쳤다는 설화도 전해지네. 인어 자체만 보면 인어는 달이 사라지는 삭에는 힘이 약해진다, 인어가 흘린 눈물은 보석이 된다...”
말을 끊은 노인은 방의 가운데쯤 서 있던 몸을 움직여 수조 벽을 코앞에 둔 채로 멈추었다. 류건우의 얼굴과는 두 뼘 정도 떨어진, 상당히 가까운 거리. 벽이 없었다면 팔을 길게 뻗을 필요도 없이 서로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거리.
“내가 알고 싶은 건 인어일세. 평생을 바쳐 인어에 대한 설화를 모았지만 그럼에도 인어는 알려진 게 드물지. 헌데 마침 내 손자가 인어를 포획했다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안배가 아니겠나.”
인어에 대한 기이한 집착. 노인에게는 아직 흑진주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건 그냥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욕망이 온전히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꼭 알려주게나. 인어에 대한 수많은 설화를.”
그 말을 남긴 노인이 떠나자, 류건우는 그제야 치미는 구역질을 내뱉었다. 기이할 정도로 짙은 욕망의 농도는 마주한 사람마저 삼키려 들었기 때문에, 그 욕망을 정면으로 받아냈던 자가 멀쩡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만 예상치 못한 그 욕망은 류건우의 머리에 어떤 발상을 제공했다. 적당히 호기심을 채워주는 척 굴다, 훗날 재기의 구심점이 될지 모를 이들마저 완전히 제거할 방법을.
삭이 지나면 초승달이 떠오른다. 초승달부터 만월을 거쳐 그믐달까지, 달빛이 있는 곳이라면 그 모든 곳이 인어의 영역이다. 류건우는 어린시절 누군가 제 귀에 속삭였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가 류청우에게 전해준 인어 설화는 모두 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생각에 잠긴 류건우의 옆에서 류청우가 가볍게 말을 걸었다.
“형은 인어잖아요.”
“어.”
“물 밖에 나와있으면 불편하진 않아요?”
인어를 처음 본 것만 해도 두세 달을 셀 수 있을 이 시점에 하기엔 조금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류건우는 류청우의 눈을 빤히 보았다. 시선을 받은 류청우는 귀를 붉히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지금 하기엔 좀 늦은 질문이라는 생각 안 드냐.”
“하하.”
그저 웃는 류청우를 향해 저도 작게 소리내며 웃은 류건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히 그렇지는 않고. 불편하면 애초에 안 나왔지.”
“그건 그렇네요.”
제 앞에 털푸닥 주저앉은 류건우를 물끄러미 보던 류청우가 류건우의 다리를 향해 슬며시 손을 뻗었다. 그걸 보면서도 류건우는 류청우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류청우의 손끝에 옷의 촉감 너머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감촉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피부라는 걸 다시금 확인한 류청우가 흘금 류건우의 눈치를 살폈다.
“왜 다 만져놓고 눈치를 봐?”
진심으로 궁금한 듯 말끝을 슥 올린 류건우가 손을 뻗어 류청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류건우의 손이 닿았던 자리 근처를 만지작거리던 류청우에게 류건우가 말했다. 역시 조금 늦은 질문이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인어가 네 눈앞에 있는 건 어떠냐.”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듯 천천히 생각하던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느릿하게 말을 이어가는 류청우의 표정에서 류건우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처음 봤을 땐 조금 놀랐어요. 사람이 물 속에 있는 것 같았거든요. 숨은 어떻게 쉬는 거지, 하고 보니까 그제야 다리 대신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있는 게 보였어요. 그 이후로는, 음. 별 생각 안 들었던 것 같아요. 아, 어릴 때 들었던 인어라는 게 진짜 있는 거였구나, 정도?”
“인어가 처음이라는 것 치고는 굉장히 담담한 감상인데.”
“하하, 그런가요?”
류건우는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찾아왔어. 새로운 얼굴이었는데.”
“그럼 제게 종조부 되는 분이실 거에요. 철우 형님, 아니. 후계자의 자식은 아직 너무 어려서,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다른 사람은 그분 뿐이거든요.”
“그러냐.”
“그분이 뭔가 말씀하셨나요.”
“아니.”
고개를 젓는 류건우의 표정이 서늘했다. 류청우는 더 물어보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고 류건우의 마른 어깨에 기대는 것을 택했다.
“? 뭐냐.”
“... 무슨 이유로 형이 물 밖으로 나올 수 있고 의사소통이 가능한 걸 숨기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류청우를 빤히 보는 유색의 눈동자는 새하얀 달빛을 반사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이 저에게 축객령을 내리던 류건우의 눈과 비슷해서 류청우는 애써 류건우의 체온에 집중했다. 그때 느꼈던 아득한 슬픔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은 우연일까.
“그것 때문에 형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류건우는 묵묵히 새어드는 달빛을 눈으로 쫓았다. 까딱거리던 손가락도, 이따금 깜박이던 눈꺼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오르내리는 가슴팍만이 류건우가 류청우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류청우.”
“네, 건우 형.”
“내가 어쩌다 인어가 되었는지 궁금하냐.”
류청우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류건우의 입을 열게 만들었는지, 그것에 마음이 쓰였다.
“모든 인어는 죽은 사람들이야.”
"..."
“지나가던 다른 인어가 우연히 발견하거나, 생전에 강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인어가 되었으면 가끔씩 새로 태어나지.”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은 망설임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후자였어. 죽어가는 나를 생전의 나와 안면이 있었던 다른 인어가 구해줬거든. ... 박문대라고, 내가 자주 다니던 상점 점원이었는데. 너는 어쩌다 인어가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웃더라.”
박문대. 류청우도 아는 이름이었다. 예전에 누군가의 부탁을 받았다며 집에 자주 드나들던, 순한 인상의 귀엽고 작은 아이였다. 이따금 그 아이를 아끼는 누군가에게서 달콤한 간식 같은 걸 받아가기도 했고, 류청우와 그 아이는 동선이 자주 겹쳤던 탓에 자신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얼굴을 비치지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했었던 터라 류청우는 박문대의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다. 그리고 잠시 뒤, 류청우는 눈을 크게 떴다.
“형도 문대를 알고 계세요?”
“어.”
단답을 내뱉은 류건우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영 꺼림칙해서 적당히 캐봤는데. 나중엔 결국 실토하더라고. 내가 죽기 직전에 내 목에 꽤 큰 금액으로 현상금이 걸렸었는데, 그걸 타먹으려고 어떤 작자들이 그 녀석한테 칼을 들이댔던 모양이야.”
류청우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박문대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과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시기가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류청우의 머릿속에서 사실의 파편이 맞물리며 어떤 윤곽이 그려졌다. 박문대가 심부름을 다녔던, 박문대를 아끼던 누군가가 자신이 잊어버린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림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그대로 끝냈고. 뭐, 근데 나도 그 이후로 얼마 못 버텨서. 어린 놈이 저보다 쓸데없이 덩치만 큰 놈 데려다 살려놓는다고 고생한 것 같더라. 그 뒤로는 뭐, 어영부영 잘 커서 이리로 잡혀왔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류청우는 류건우의 어깨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류건우의 몸을 부드럽게 붙잡아 제 무릎에 류건우를 뉘였다. 류건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류청우를 보았다.
“뭐 하냐.”
“그냥요.”
기껏 눕히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얼굴만 빤히 보는 류청우에게 류건우가 뭐라도 말하려 입을 열었다. 류건우의 기감에 무언가가 포착된 건 그 순간이었다.
“야.”
“네, 형.”
“누구 오는데.”
수조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확인한 류청우가 빠르게 류건우를 수조 안에 넣어주고 방을 나갔다.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출렁이던 수면이 겨우 잔잔해지자 수조 방의 문이 덜컹이며 열렸다. 류청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인물은 전 가주와 후계자였다.
“할아버님, 이 야밤에 왜 이곳에 오자고 하셨어요?”
“그럼 너는 기껏 인어를 잡아놓고 낮에만 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달빛이 있는 그 모든 곳이 인어의 영역이라는 말도 있거늘.”
손자를 작게 나무란 노인이 수조 벽으로 다가갔다. 흐린 달빛이 흩뿌려진 수조 안에서 인어는 차가운 눈으로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은 헤죽 웃으며 소매에서 작은 서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그건 뭡니까, 할아버님?”
“설화를 기록해놓은 것이니라. 새로운 것을 알았으면 마땅히 이전의 것과 비교해 검증해야 되지 않겠느냐?”
“아하! 현명하십니다, 할아버님!”
손때가 탄 서책은 한눈에 보기에도 애지중지 다룬 흔적이 엿보였다. 노인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책의 첫 장을 펼쳤다. 빼곡하게 써 넣은 글씨를 조심스레 손으로 쓸어낸 노인은 손자에게 하나씩 이야기를 읽어주며 인어를 관찰했다. 인어가 눈앞에 있으니 검증할 수 있는 것은 많았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그리고 류건우는 달빛과 목표물이 동시에 있는 긴 시간을 알뜰히 활용해 두 조손의 손에 기어이 흑진주를 쥐여 주었다. 류청우에게 했던 것을 살짝 비틀어 추가적인 기억 하나를 덧씌우면서.
“내부에서 균열을 만드는거지.”
언뜻 떠올렸을 때 헷갈릴만한 기억을 덧씌운 것은 아니었다. 류건우가 덧씌운 것은 가주의 존재였다. 달리 말하면, 노인이 손자를 이끌고 인어를 관찰한 밤은 두 사람의 머릿속에 세 명이 함께 인어를 관찰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세 명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데, 두 명이서 하나를 이상하게 만드는 게 뭐가 어려울까. 최심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특성상 다른 일원들이 교차검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류건우가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노인은 류건우가 집안에서 사라지기 전 이미 모든 파벌과 권력에서 손을 뗀 채 원로로서 공경받으며 살고 있었으니 그 이상의 권력엔 욕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원로이자 전 가주라는 상징성이 있는데다, 인어 설화를 연구한다는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하고. 다만 손자인 류철우 쪽은 달랐다. 현 가주의 유일한 후계자로 낙점받은 이는 언제든지 권력에 눈독을 들일 수 있으니까. 그 후계자가 효심이 지극하다면 이지가 흐려진 아버지를 잘 보필할 생각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절호의 기회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상징성을 가진 이에게 인정받는 이가 다음 가주가 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류건우는 생각했다.
“이미 류철우 머릿속엔 가주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 같고.”
기억에 문제가 발생하고 일처리에서 빈틈이 생기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그걸 알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밥을 떠먹여줘도 못 먹을 사람이었다. 류건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느덧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새벽노을 속 홀로 남은 류건우의 주변으로 붉은 햇빛을 받은 물방울이 아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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