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5)
빛바랜 추억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나요.”
사촌 형제면 좀 데면데면할 법도 한데, 네가 일방적으로 나를 물고빠는 관계였지. 떠오르는 대로 입을 열려던 류건우가 멈칫했다. 그런데 정말 일방적이었던가? 잠시 고민하던 류건우가 재빠르게 사고를 전환했다.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류청우의 기억은 분명 재회한 날 류건우의 손에 지워졌으니, 방금 류청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것.
“무슨 말이냐.”
일단은 부정하는 게 맞다. 그렇게 판단한 류건우는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뇨,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착각이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류청우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귓가를 미미하게 붉히고 그리 말하는 것에 대고 뭐라 추궁할 수도 없어서, 류건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은 어둠과 물이 가려줄 것이라 믿을 수밖에. 속도 모르고 멋쩍게 웃으며 곧 해가 밝아올 새벽에서야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류청우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류건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의 속이 시끄러운 것과는 별개로 오늘도 류건우는 할 일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이 류건우의 단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류청우가 떠나고 반 시진 정도나 지났을까,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달갑지 않은 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류건우는 졸음에 겨워 반쯤 일그러진 눈으로 문 쪽을 노려보았다. 잠에 취한 머리가 멀쩡히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았다.
“이곳입니다, 아버님.”
“여기에 미인루가 있다는 게냐.”
“예. 이전에 철우가 가져왔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물 너머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류건우는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류철우에게는 조부, 현 가주에게는 부친. 그리고 류건우와 류청우에게는 종조부인 사람, 전대 가주가 최심부로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미인루는 어디 있는 것이더냐. 이 늙은이를 이곳까지 걸음하게 만들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지.”
가주는 씩 웃더니 조끼 아래에 숨겨두었던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냈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류건우의 보석인 흑진주였다. 짙은 흑색 속에 깃든 아주 엷은 청색이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이 보석을 발견한 곳이 이곳이었으니까요. 아버님께서는 민담에도 관심이 많으시니, 무언가 아는 것이 있으면 소자에게도 한 수 전해 주시지요.”
한동안 말없이 보석을 감상하던 노인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이고는 눈앞에 펼쳐진 수조의 내부를 보았다. 찰랑이는 물 속, 인어의 짧은 머리카락이 빛을 반사하며 흐드러지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은 훤칠한 뼈대와 마른 몸선이 매끄럽게 잡혀있다.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반짝이는 비늘로 뒤덮인 유색의 지느러미가 물고기처럼 하늘거렸다. 노인은 차분히 말했다.
“인어가 아니더냐.”
“예, 아버님.”
“인어의 눈물은 보석이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있지.”
“그럼.”
“그러니 이 진주는 진품이구나.”
“아무렴요.”
“미인루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인어를 면밀히 살폈다. 그가 들었던 인어 설화에서는 인어의 외형을 대부분 여성의 형체로 묘사했기 때문에 남성형 인어는 그에게도 낯설었다. 한참동안 눈으로 인어를 조사하던 노인은 인어의 새카만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노인과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던 인어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새로운 설화가 곧 퍼지겠구나.”
“하하, 그렇겠지요, 아버님?”
“그래. 헌데 인어는 어찌 잡은 게냐? 철우가 잡았다는 말만 들었지, 그 인어를 어찌 잡았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구나.”
“아, 그렇지요. 그건 사랑으로 가셔서 직접 들으시지요. 철우가 아버님께 무용담을 들려드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허허, 그래.”
두 남자가 수조 방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류건우는 표정을 풀었다. 노인이 자신을 샅샅히 살피던 그 시선은 분명 인격체가 아닌 장식품 따위를 감정하는 눈이었고, 그 덕에 아주 오랜만에 생생한 불쾌감을 느낀 탓이었다. 그래, 그것만 있었다면 오늘의 방문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겠지만, 전 가주까지 이능의 영향권에 올려놓은 것은 류건우에게 있어 상당한 성과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뇌의 강도가 강하면 대상의 주변인들이 눈치채고 방해하는 경우가 많은 탓에 주변에도 적당한 강도의 세뇌를 걸어 목표물이 하는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 밖에 나온 인어들의 불문율이었으니까. 앞으로 류건우가 할 일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엔 슬슬 강도를 올려야겠는데.”
류건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가문 사람들은 가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다. 별다른 세뇌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고, 그동안 보였던 가주의 행보 때문이었다. 수많은 모습이 겹치고 겹쳐 가문의 일원들은 파벌과는 무관히 그에 대한 단단한 신뢰를 쌓았고, 그 신뢰는 돌고돌아 결국 류건우의 심장을 찔렀다.
그래서 지금도 류건우의 이름은 이 가문 내에서 일종의 금어禁語로 여겨지고 있고, 그래서 8년 전 류철우가 날뛰었던 그 사건은 가문 내에서 조용히 묻혔다. 가문 내에서는 묵살됐다지만 국내외로 넓은 정보망을 가진 임금의 눈을 피할 수는 없어 가주와 후계자가 함께 혈육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문책을 당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라의 국방력을 책임지는 핵심 중 하나인 류씨 가문은 그 정도의 가치를 갖는 가문이었다.
류건우는 자신이 쫓기던 시점에 일이 그렇게 될 것을 이미 예상했고, 인어로 다시 태어난 후 예상이 현실로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그래서 복수를 계획했다. 별 건 아니었다. 가주와 후계자를 시작으로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이들이 타인의 손에 휘말리면 일은 하나씩 틀어지기 마련이고, 파벌이 존재하는 이 가문이라면 가주의 이지가 흐트러졌다고 생각한 그 순간 가문 내 권력다툼이라는 진흙탕에 기꺼이 몸을 던질 것이었다. 그들이 쌓은 신뢰는 가주에 대한 것이지 그 후계자인 류철우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가주, 아니, 가주였던 자는 완벽히 돌아온 이지로 자신의 소유였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을 보며 절망하리라.
아마 류건우와 같은 항렬인 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진창의 중심에 서겠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이미 류건우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그 진흙탕에서 어떤 이유로라도 누군가 제 부모님의 일을 기억하고 진상을 밝히기를 원하긴 했지만, 가장 가까운 혈육인 류건우 본인이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시점에서 그건 어려울 것이었다. 사자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건 그런 일이었으니까.
복잡한 생각을 억지로 밀어넣은 류건우는 곧이어 제 머릿속에 류청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휘말리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저나 류철우와 같은 항렬에 적당히 어리고, 혼인을 하지 않아 새로운 가문과 혼맥을 맺을 수 있는데다 가문 최고의 무인이지만 후계자의 손에 억울하게 유폐당했다는 명분도 있다. 여러모로 진창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더러운 일에 휘말릴 연유가 충분했지만 류건우는 류청우가 이미 최심부에 갇힌 아이이니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최심부에 유폐된 탓에 외부 소식은 거의 듣지 못하는 류청우였지만, 그럼에도 류청우의 동생은 가끔씩 찾아와 여러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집안 내부의 이야기, 시장, 축제, 그 외에도 저잣거리에 떠도는 소문 등의 다양한 잡담거리. 근 달포만에 찾아온 동생이 가져온 것도 그런 소식이었다.
“오라버니, 요 근래 이상한 소문이 돌아.”
동생, 류연우에게 푹신한 보료를 양보하고 바닥에 앉은 류청우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들어 동생을 보았다. 항상 어딘가 해탈한 듯 초연한 미소만 보이던 오라버니였기에, 류연우는 모처럼 류청우가 가진 생기를 빼앗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당백모께서 최근 당백부께 큰 소리를 내셨다는 말이 돌고 있어. 오라버니도 알고 있잖아, 두 분께서는 워낙 금슬이 좋으셔서 그 흔한 첩실 하나도 안 들이시는 분들인데.”
“그건 그렇지.”
류연우가 가져온 찻잎을 따뜻하게 우려내 한 잔씩 따른 류청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마지막으로 류연우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류청우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제게도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류연우는 그런 류청우의 기색을 세심히 살피며 차로 입술을 축였다. 적당히 따뜻한 차에서는 차의 향이 거북하지 않게 피어났다. 류청우가 우린 차는 그의 심성을 고스란히 받은 건지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오라버니는 다례를 참 잘 배우셨어. 예전에 어머니께 오라버니가 어느 분께 배운 거냐고 슬쩍 여쭈었을 땐 건우 오라버니에게 배웠다고 들었는데, 나도 그 오라버니에게 배웠으면 이렇게 우릴 수 있었을까? 나 다음엔 찻잎 넉넉히 챙겨올테니까 꼭 가르쳐줘.”
류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보니 그는 누구에게 다례를 배웠던가, 하고.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그건 워낙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라 그런 것 같다며 무심히 넘겼었다. 다만 이건 달랐다. 분명 배운 기억은 있는데 누구에게 배웠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명백히 느껴진 기억의 공백이 껄끄러웠지만, 지금 더 중요한 건 불확실한 공백이 아니라 눈앞에서 저를 북돋아주기 위해 어떻게든 입을 여는 동생이다. 류청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히히. 그래서, 음. 얼마 전에 있었던 친목회도 그렇고, 평소랑 다르게 뒤편이 부산스러웠단 말이야. 당백부께서 말씀하실 때쯤이면 원래 조용해졌잖아. 오라버니도 기억하잖아, 원래는 시작 전에 가장 부산스럽고 시작한 후로는 오히려 정말 다 같이 어울리는 분위기여서 집안 어딜 가도 음주가무를 즐기는 분들이 많단 말이지.”
“그래, 기억 나네. 그 틈에 너랑 나랑 몰래 아궁잇가로 가서 밤도 구워먹고 그랬는데.”
“어? 하하! 그러네, 오라버니도 기억하겠구나. 그랬었지. 오라버니 말고도 다른 오라버니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청우 오라버니한테 내가 빨리 먹고 싶다고 조르니까 불 만지기엔 너희 둘 다 너무 어리다면서 뒤로 밀어내고 자기가 불 만지고 그랬어. 그러고보니 그것도 건우 오라버니였던 것 같은데.”
다시 류건우의 이름이 나오자 류청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류연우의 표정도 미미하게 굳어졌다. 이전에 찾아왔을 땐 류건우의 이야기를 하면 그나마 표정이 풀어지던 것을 알고 일부러 그때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번에는 도리어 그 이야기를 듣자 표정이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차차 물어봐도 된다고, 당장은 기껏 찾은 류청우의 생기를 유지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한 류연우는 황급히 이야기의 머리를 돌렸다.
“아무튼! 이번 친목회 땐 이상한 구석들이 삐걱거려서 여자들 사이에서 뒷말이 좀 나오고 있거든. 친목회 전에 끝났어야 할 비용 처리라던가 시간 배분 같은 게 늦어져서. 일처리야 우리가 한다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분은 가주이신 당백부시니까. 집안일이기도 하고 잘 끝났는데 왜 다시 끄집어내냐는 분들도 많아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류연우가 숨을 고르기 위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류청우는 기억의 공백을 잠시 확인했다. 잠깐의 일탈을 꿈꾸던 저와 동생에게 잘 익은 생밤을 골라 정성스레 구워 먹이고, 제게 다례를 가르쳤으며, 제법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듯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동생. 그리고 흐르듯이 연결되는 그와 같은 이름의 인어.
“연우야.”
“왜, 오라버니?”
“아무래도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류연우가 눈을 크게 뜨자, 류청우는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게 류청우의 표정이 굳어졌던 것과 연관이 있음을 추측한 탓에 짧지 않은 침묵에도 그는 조용히 기다렸고, 기대에 부응한 류청우는 정돈된 생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네가 말한 일들이 내 기억에 없어. 다례를 누구에게 배운 건지, 우리 남매랑 같이 놀았다던 그 형님은 누구인지. 내게 사촌 형님이 있었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어.”
“혹시 최근에 머리를 부딪혔다거나, 어디 다친 적이 있어?”
“아니. 기억상으로는 없어.”
인어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류청우는 말을 아꼈다. 다만 류연우는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당백부께서 엄청나게 화려한 흑진주들을 어디서 가져오셔선 귀고리로 만들어서 하고 다니시더라고. 후계자도 그렇고. 근데 내가 보기엔 그게 크기도 그런데, 음, 빛깔이나 형태가 가히 최상품이었거든. 임금께서도 구하기 어려울만한 그런 것. 근데 원래 도포에 그런 거 해도 되는 거야? 같은 무관이었어도 오라버니는 그런 거 없었던 것 같은데.”
“안 됐던 것 같은데.”
“그래? 뭐지. 아무튼 마마의 탄신 연회가 내일이잖아. 내가 알기로는 당백부께서 아주 좋은 흑진주를 진상한다고 하더라고. 원래는 다른 걸 준비했었다던데 그게 뭔지는 못 들었고.”
“응.”
류청우는 머릿속에 퉁명스럽지만 마음이 따뜻한 인어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던 검푸른 눈물도. 다른 생각을 한 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류연우의 눈에는 아니었나보다. 류청우의 말도 듣지 않고 냅다 손을 내저었으니.
“오라버니는 뭔가 본 게 있을지도. 아냐, 딱히 궁금하지 않아. 오라버니가 안다는 건 최심부에 들어왔을 물건이란 뜻이니까 내가 알 필요 없는 것 같아. 응. 고마워요 오라버니. 아무튼 당백부께선 그 진주를 착용하신 후부터 어딘가 이상해지셨어.”
그건 류청우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최심부에 드나들던 시점부터였지.”
“으으음,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지나서였던 것 같은데.”
“짚이는 부분은 있어. 하지만 연우야, 너는 몰라야 할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지금 오라버니를 만나려 들어온 것도 다른 사람들 눈 피해서 몰래 들어온 거니까.”
남은 차를 호로록 마신 류연우가 일어나더니 스스럼없이 류청우와 포옹을 나누었다. 어딘지 심란함이 묻은 남매의 손끝이 서로를 도닥였다.
“몸 잘 추스르고. 오라버니, 이번에 또 어디 휘말리거나 하면 그땐 진짜 족보에서 파일지도 몰라. 조심해야 해.”
“그래. 너도 조심하고. 곧 혼담도 들어올 텐데.”
“에휴, 그러게. 안 가고 계속 있으면 안 되나아.”
류청우의 눈에는 여전히 어리게만 보이는 동생이었지만, 그래도 지학의 나이는 넘어선 아이였다. 어느 정도는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주 어린 나이. 류청우는 별 말 없이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두툼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방긋 웃는 동생을 보며 류청우는 등을 밀어주었다.
“이제 가야지. 내당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바로 무武로 이름 높은 류씨 가문 최고의 무인 류청우의 유일한 동생인데. 걱정 마.”
“하하. 그래, 조심해서 가. 오늘도 즐거웠어.”
“나도 즐거웠어!”
손을 흔들어주고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동생을 지켜보던 류청우는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마자 표정을 지웠다. 집안에 일어나는 수상한 일도, 자신의 사라진 기억도 모두 저 인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흑진주를 사용한 이후로 이지를 잃기 시작한 사람들은 과연 우연인지, 인어가 떨어뜨린 반짝이는 무언가는 그 흑진주와 동일한 것인지, 동생이 말한 사촌 형 ‘류건우’와 자신이 아는 인어 ‘류건우’는 같은 인물인지. 비현실적인 것들이 머리를 휘저었다. 류청우는 동생의 온기가 남은 보료 위에 조심히 앉아 생각을 이어갔다.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류청우의 특기였으니까.
“의심되는 건 하나뿐인데.”
인어와 처음 만난 날, 수조 앞에서 깨어난 자신. 단언컨대 류청우는 그날 이전 수조 방에 간 기억이 없었다. 갈 이유도, 마음도 없었으니까. 다르게 말하면 그 방은 류청우에게 낯선 곳이었다. 야외 훈련이 잦았던 탓에 특별히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익숙한 곳을 놔두고 굳이 그곳에서 깨어날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누군가가 나를 그 방에서 일부러 재운 건가?”
그 방에 있던 건 자신과 인어 뿐이었다. 들어가기 전 기척을 확인했으니 그건 확실했다. 그러니 누군가 류청우를 재웠다고 한다면 그게 가능한 건 인어 뿐이었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남기는 하지만 전설 속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인어도 실존하는데 류청우의 기감을 피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쯤이야.
“건우 형이?”
다른 정황을 떠올려봐도 특별한 것은 없다. 그 이전에도 류청우는 유폐된 자로서 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니 류청우가 생각하기에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인어 류건우가 내 기억에서 ‘사촌 형 류건우’를 지웠고, 그 류건우가 모종의 인연으로 인어 류건우와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가까워진 거리, 부담스럽다 말하면서도 질색하지는 않던 ‘형’이라는 호칭, 언뜻 비치는 작은 습관들에서 느껴진 기시감, 류청우의 어리광을 낯설게 여기지 않는 익숙함. 그 모든 것에서 느껴진 기묘함의 원류가 그것이었다고 한다면.
해가 기울어지며 어둑해진 방 안, 류청우는 천천히 몸을 굽히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는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문득, 수조 방으로 가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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