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빙

[청우건우] 細氷 - 미리보기

240521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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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사? 류청우 x 무당 류건우 au

A5 / 무선제본 / 본문 150p(변동가능성 有) / 약 9만 자(변동가능성 有) / 비매품

웹발행 예정 有 / 철저하지 않은 고증

* 본작은 원작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뒤얽힌 실을 풀기 위해 신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 조금 다르게 말하면 팔자가 꼬여 신과 얽힌 사람. 물론 애초에 신과 신력으로 이어진 이 가문 사람들 중 안 그런 사람이 뭐 그리 드물겠냐만, 그 중에서도 유독 꼬인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망설이지 않고 한 사람을 꼽을 것이다. 반대로 이 중 그나마 가장 팔자가 핀 사람을 꼽아보라면 그 역시 한 사람이 꼽힐 것이다. 전자는 류건우, 후자는 류청우. 태어난 환경부터 무당이 된 계기, 걸어온 길의 모든 것이 정반대인 이들은 이 가문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상극이었다. 나이도 가까운 그들을 보고 혹자는 류건우가 있어 류청우는 안 꼬여도 될 팔자가 꼬였다고 평했다. 피로 이어지지 않았기에 도리어 철저히 능력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 세계에서, 상극의 존재란 그런 것이었다.

류건우 역시 어느 정도는 그에 공감하는 바였다. 그에 더해 안 그래도 꼬인 제 팔자도 류청우 때문에 더 꼬인 것 아니냐는, 가문의 다른 이가 들으면 경을 칠 생각도 곁들여서.

류건우는 새카맣게 일어나는 제 신력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젠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그만큼 많이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류청우는 절대 그런 것 아니라며 가문 사람들의 타박을 쳐냈지만, 혹자는 류청우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류건우의 책임이라며 목숨을 노려오기도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류건우가 저승의 신과 이어진 존재라서.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난 밤이면 류청우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류건우의 상처를 보살폈지만, 정작 류건우는 무덤덤했다.

지난밤 역시 그런 숱한 나날들 중 하나였다. 류건우는 열에 가물거리는 시야를 멍하니 놔둔 채 흐르는 생각을 방치했다. 그 옆에는 다 터져버린 헝겊조각 몇 개가 곱게 놓여 있었다.

남는 헝겊을 누덕누덕 기워 솜을 채워넣은 강아지 모양의 인형. 그건 류건우가 아주 어릴 적, 자신이 강아지를 유독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희미한 그의 양친이 없는 손재주를 그러모아 직접 만들어주신 류건우의 애착 인형이었다. 당시만 해도 류건우는 그 인형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았다. 인형이 망가지면 또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 믿음이 산산히 부서진 것은 류건우가 시왕 중 하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세상에 노출된 순간이었다.

 

“건우가, 송제왕의 선택을 받았다고...?”

“괜찮아, 괜찮을거야. 건우야, 걱정 말고. 엄마랑, 아빠랑, 지켜줄 거니까, 울지 말고...”

 

자신이 그때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울고 싶었던 건 그 말을 하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류건우는 열기에 터질 것 같은 폐를 안고 그렇게 생각했다. 뒤에선 여전히 저를 쫓아내려는 사람들이 지르는 고함이 환청처럼 들렸지만, 류건우는 왠지 웃고 싶어졌다. 기억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 힘을 가진 아이가 어떻게 우리와 섞여 산단 말이오?”

“에잇, 꺼지거라! 그런 불길한 아이를 어찌 이 마을에 들이려 하느냐!”

 

처음 몇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발을 들이는 마을마다 그 마을의 당골이 내려와 호통을 치고, 겨우 발붙인 마을에서도 눈칫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도, 역시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어머니도 사랑하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핍박은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핍박이 아니라 무뢰한이었다. 불길한 힘을 가진 아이가 떠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어느 질 나쁜 무당의 수하들. 류건우는 나중에야 그 무당이 지금의 가주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네가 불길한 힘을 다루는 아이라는 거지.”

“네 이놈, 얼른 조아리지 않고 뭘 하느냐! 이이가 뫼시는 신이 누군지 알고!”

“그래봐야 저승신 아닙니까, 불길한 힘이 커봐야 불온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불길하고 불온한 애 하나 빼내려고 온 가족과 마을을 불살랐나. 류건우의 온몸엔 저항하며 베이고 찢긴 상처가 가득했고, 그 대가로 그는 손과 입, 발을 완전히 제압당했다. 붙잡힌 류건우는 이제야 겨우 정이 들기 시작한 마을이 온통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비난과 질타를 받으면서도 기어이 저를 품은 어머니와 아버지, 처음엔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았지만 티나지 않게 저를 살뜰히 챙겨주던 늙은 당골도, 제 얼굴에 기가 죽은 채로도 기어이 쪼뼛쪼뼛 다가와 제게 예쁜 공깃돌을 주고 간 어린아이들도, 괜히 헛기침하며 네 암만 박수라도 이런 건 배워야 한다며 바둑과 장기를 가르쳐주던 동네 어른들도, 모두가 그 무뢰한들의 칼에 베이고 뜨거운 불길에 비명을 질렀다. 그 당골들은 이런 미래를 예측하기라도 했던 걸까. 우리 엄마 아빠는 괜찮은 걸까. 움직임마저 잃은 남자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어물어물 떠올랐다. 그때 제 머리에 닿는 시원한 손길에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형, 괜찮아?”

 

류건우는 열에 들떠 감기려는 눈꺼풀을 애써 끌어올렸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푸른 기가 도는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푸른 기가 도는 눈, 그리고 그의 외양을 그렇게 만든 새파란 영력. 류건우는 남은 체력을 끌어모아 흐릿하게 웃었다.

 

“청우 왔냐.”

“응, 나 왔어.”

 

류건우는 몸을 일으키려다 엄습하는 고통에 눈을 찌푸렸다. 가물거리던 시야가 뚜렷해지자, 온화하던 류청우의 얼굴엔 아주 잠깐 냉기가 들어섰다. 류건우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누가 그랬어, 형?”

“그런 거 아니고, 난 괜찮아.”

 

류청우는 대답 대신 류건우의 몸에 시선을 두었다. 이불로 덮여있어 잘 보이지는 않으나, 고작 손을 움직이는 것도 저리 힘겨워하는 걸 보면 안 보이는 곳의 사정은 뻔했다. 드러나는 혈관들은 죄다 검게 물든 채 불룩 튀어나왔을 것이고, 당연히 기운 역시 엉망진창으로 얽혀서 류건우의 신께서도 복구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을거다. 신이 복구를 맡고 있으니 인세의 것은 거기에 개입할 수도 없을거고. 바람을 모시는 류청우라면 그 영력으로 도움을 줄 순 있겠지만 류청우의 형은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류청우는 머릿속으로 이런 짓을 할 만한 후보를 찬찬히 간추리다, 류건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너 혹시 나갈 일 있으면 문 좀 닫아줄 수 있겠냐.”

“응? 그거야 당연히... 아. 알겠어, 형.”

 

본래라면 류건우 혼자서도 얼마든지 강력한 결계부를 쓸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그의 모든 신력이 내상을 치유하는 것에 쓰일 것이니까. 류청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라도 있으면 류건우는 돌아오는 밤을 조금 더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류건우가 이 모양이 된 것을 류청우가 알게 된 이상 홀로 두지도 않을 것이었지만. 류청우는 괴황지와 주사를 꺼내 깔끔하게 결계부를 써내려갔다.

 

“그림 솜씨가 제법 늘었는데.”

“응? 어, 그렇게 잘 그리진 못해. 하하.”

“네가 처음 그렸던 부적을 생각하면 그런 말 안 나올텐데.”

 

류청우의 귓가가 순식간에 달아오르자, 류건우는 조금 더 입꼬리를 올렸다. 류건우가 놀리면 놀리는대로 반응하는 저 귓가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몇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다른 예를 들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닥을 기어다니는 그림 실력 정도일까. 그때보다야 지금이 낫긴 했지만, 어쨌든. 물론 부적은 쓰인 내용보다는 그에 담긴 의지가 더 중요하니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해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지만, 어쨌든 류청우의 삐뚤빼뚤한 그림 실력은 예전부터 쭉 류건우의 놀림감이 되곤 했다. 류건우의 장난에 당해주며 부적을 완성시킨 류청우는 곧 모든 문에 결계부를 붙여 외부와 격리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제부터 류건우는 뒤엉킨 기운을 정돈하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이 공간에서 류청우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것이었다.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괜찮아. 나야말로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한걸.”

“됐다. 방해만 없으면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하시니까, 늦어도 사흘 후면 괜찮아질 거야. 그때까지만 좀 부탁한다. 사례는 넉넉히 할 테니까.”

 

그 말을 들은 류청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웃었다.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고, 실제로 류건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류건우는 류청우의 호의에 대가를 지불하고야 말았다. 류건우에게 류청우란 딱 그 정도라는 선언을 들은 것만 같아서, 류청우는 씁쓸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아주 약한 바람을 불러내어 류건우의 열을 식혔다. 열기에 가물거리던 류건우의 눈꺼풀이 다시 감긴 것을 확인한 류청우는 조심스레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내고 이불을 정돈해준 뒤 주변을 정화하고 류건우의 회복을 돕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두툼한 창호지를 투과한 새하얀 달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류건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그가 말했듯 정확히 사흘 후였고, 그가 류청우의 결계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딱 나흘이 흐른 후였다. 류건우가 나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류청우는 류건우가 며칠간 고열과 오한, 탈수 증세에 시달린 탓에 원기가 많이 상했고, 신력 역시 회복되어야 하니 며칠만 더 있다 가라며 붙잡아댔다.

 

“나 의뢰 받은 거 있어. 더 이상은 못 뺀다.”

“하지만 형, 지금은 쉬어야 해.”

“그렇게 봐도 안 통해. 이미 많이 늦었어, 더 미루면 걷잡을 수가 없을 거다.”

“신력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잖아. 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려운 일일텐데.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조금만 더 회복하고 가, 형.”

 

류건우는 제 옷소매를 붙잡는 류청우를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띄웠다. 그가 자신의 걱정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처럼. 도대체 류건우의 안에서 제가 무슨 사람일지 예측조차 되지 않아서 류청우는 쓰게 웃었다.

 

“그게 싫으면 저랑 같이 가요. 형이랑 내가 같이 있으면 좀 더 낫겠지.”

“안 되는 거 알지.”

 

류건우가 받는 의뢰는 주로 망자, 그 중에서도 특히 사기邪氣와 한기가 오랜 시간동안 진득하게 고여 뭉친 탓에 어지간한 무당 선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의뢰였다. 십대왕을 모시는 류건우였기에 그런 의뢰를 받는 것이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가문에 속한 그 많은 무당 중 류건우에게만 유독 그러한 의뢰가 들어간다는 건 무언가의 농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알았지만, 류청우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류건우는 축 처진 류청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금방 끝내고 올게. 이번 의뢰 끝나면 같이 밥 먹자. 기다려.”

 

제가 섭섭해하는 것을 알면 그럴 일이라도 하지 말던지. 류건우는 항상 류청우가 내어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빠지지도 않았다. 미움받고 싶지도 않았고, 멀어지고 싶지도 않아 류청우는 류건우의 떠나는 뒷모습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류건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주의 호출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류청우와 꼭 함께 와야 한다는 전언에 류건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언하는 이 또한 마찬가지로 이마를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그분이 왜 너를 자꾸 청우와 붙여두려 하시는지 나는 도통 모르겠구나.”

 

류건우는 지금 제 앞에서 성질을 부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잠시 떠올렸다. 류건우의 바로 윗 항렬이었으니 그에게는 이모뻘인 사람이었다. 그래, 잊어서는 안 됐다. 류건우는 결코 이곳에서 환영받는 이가 아니었다. 류청우와 며칠 같이 있었다고 그걸 잊어버리다니, 류건우는 속으로만 혀를 차며 눈앞의 이를 마주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제게 아주 우호적인 편이었다. 일단 저주부터 내뱉고 보진 않았으니까.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너희 둘은 상극이야.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서로를 깎아먹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떼어둘 이유는 충분하다고 내가 네게 일러두지 않았니. 가주께서 그걸 모르실 리가 없으신데.”

“허면 이모님께서 말씀을 올리시지 그러십니까.”

“내가 안 올려봤겠니? 그저 웃고만 마시니 물러날 수밖에.”

 

얼마간 더 투덜거리던 그는 신력을 일으켜 류건우의 몸을 샅샅이 살폈다. 지난 의뢰에서 내내 상극인 류청우와 붙어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류건우도 순순히 그에 응했다. 별 이상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청우에게는 내가 전하마. 너는 지금 바로 가주님의 처소로 가거라.”

“예.”

 

류건우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주가 호출했으니 아마 또 귀찮은 의뢰로 떠나게 될 것 같았다. 이전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지 만 하루가 겨우 지났는데, 어째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류건우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탈탈 털었다. 조금 까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렸다.

 

“형?”

“빨리 왔네.”

 

류건우는 가볍게 눈을 맞추었다. 류청우는 그에 멋쩍은 웃음을 돌려주었다.

 

“왜 웃냐.”

“그게.”

“너 뭐 알고 있냐?”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뭘 쑥덕거리느냐!”

 

문 안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류건우와 류청우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들이 이 가문에 처음 들어왔을 적 직접 회초리를 들어 그들을 가르쳤던 그 서슬 그대로인 목소리에, 둘은 얌전히 가주의 말을 따랐다. 다만 기껏해야 새로운 의뢰겠거니, 생각하며 안일하게 들어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날벼락같은 소식 하나였다.

 

“새 일원이 나타났다. 그 아이를 데려오너라.”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남아다. 나이는 너희보다 세 살 어리고. 보면 알 것이니 생김새는 필요없겠지. 이 아랫마을에 있으니, 최대한 빨리 데려와 가르치거라.”

“가주께서 가르치시지는 않으십니까?”

“너희 때야 너희가 워낙 어렸으니 그냥 내가 가르쳤다만, 지학을 넘긴 남아라 하지 않았느냐. 여아였다면 내가 가르쳤겠지. 그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너희가 가르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느냐?”

“... 가주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면 항렬이 꼬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류건우의 머릿속을 스쳤지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가주의 명에 류건우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으니까.

아이를 데려오는 것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가까운 마을이기도 했고, 아이에게 내림굿을 한 무당 역시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찾아간 신당에서 둘은 아이의 신어머니가 일부러 항렬자를 주어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류건우가 아이와 눈을 맞추며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 아이는 벼리 강을 써 강우綱佑라고 했다.

류건우가 신력을 사용해 모시는 신의 이름을 확인한 후 아이에게 어느 신을 모시는지 넌지시 물어보자, 무당이 류강우를 대신해 차사 중 한 분을 모신다며 조심스레 귀띔했다. 류건우와 류청우는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무당에게 고개를 숙인 뒤 류강우를 데려왔다. 그렇게 가르치고 훈계하며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과 해선 안 될 것들을 머리에 새겼다. 아이가 그걸 잘 소화했는지는, 글쎄. 그가 그저 웃으며 알겠노라 대답만 한 탓에 류건우는 파악할 수 없었다.

저승의 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가문 사람들의 특성상 류건우는 일부러라도 류강우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다. 문제가 있다면, 가문에 입적되고 얼마 되지 않아 눈치 빠르게 그러한 기류를 읽어낸 그 아이가 류건우를 배척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였다. 류건우가 가르치는 것들을 흘려듣는 이유도 아마 그것에서 기인했을 터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미 청우 형님과 같이 하기로 한 터라.”

“건우 형님께서는 계십시오. 제가 청우 형님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언뜻 보면 그저 연장자를 공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한 악의에 이미 익숙한 류건우가 보기엔 명백한 배척이었다. 그것도 직속 선배인 류건우는 배제한 채 가문의 중심 인물 중 하나인 류청우만을 끼고 도는, 아주 익숙한 형태의 차별. 류청우 역시 이를 눈치채고 대응하려고 했지만, 류건우는 일단 놔두라며 류청우를 막았다. 류건우는 아직 약관도 되지 못한 어린애기도 하고,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니 두고 보자며 저보다 더 속상해보이는 류청우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분위기가 점차 심화되며 가문의 행사에서 류건우가 쭉 맡아오던 중요한 역할을 류강우에게 기어이 강탈당한 날, 류건우는 류청우의 손에 들려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헝겊 인형을 떨떠름하게 보았다.

 

“이게 뭐냐.”

“음, 인형?”

 

류건우의 표정이 더 떨떠름해졌다. 그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던 류청우는 결국 속내를 실토했다.

 

“형이 갖고 다니던 인형이 찢어진 걸 봤거든, 그때. 찢어진 부분을 맞춰둘까, 싶긴 했는데, 형도 알겠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더 망가질까봐.”

“... 그랬냐.”

 

류건우는 류청우에게 받은 헝겊 인형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바느질에도 영 서툰 류청우가 직접 만들었는지 모양이 굉장히 독특했다.

 

“무아당舞雅堂 선아현 씨한테 부탁하지 않고?”

“그분은 요새 바쁘시기도 하고, 이건 내가 직접 만들고 싶었거든. 음, 모양이 좀 그런가.”

 

류건우는 류청우가 목덜미를 매만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인형을 옷자락 안에 넣었다. 이전에 갖고 다니던 인형이 망가지기 전 항상 두었던 자리였다. 그걸 본 류청우가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마음에 드냐.”

“응. 받아줘서 고마워, 형.”

“내가 고마워야 하는 거 아냐?”

“하하!”

 

그 말을 들은 류청우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를 내며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류건우도 피식 웃었다. 웃느라 잔뜩 휘어졌던 류청우의 눈은 저를 슬며시 안았다 떨어지고는 도망친 류건우 때문에 휘둥그레졌다.

 

“형? 형!”

“오지 마. 도망갈 거야.”

“아, 정말. 형! 어디 가는데?”

 

문 너머로 도망치는 류건우를 기어이 잡은 류청우가 류건우를 뒤에서 꽉 안고는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달려서인지 빠르게 두근거리는 가슴팍의 열기에, 류건우는 꼭 사로잡힌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 * *

 

행사 준비에 돌입하면 류청우는 행사의 주역 중 하나로서 바빠질 것이므로, 류건우는 아직 한가한 류청우가 제 옆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을 그냥 놔두었다. 류건우는 그저 혼자 있다가 괜히 시비가 걸리느니 류청우를 옆에 두고 좀 귀찮은 게 낫다, 했지만, 류건우의 입가에서도 작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류청우가 옆 방으로 돌아간 뒤의 깊은 밤, 류건우는 인형이 들어있는 쪽의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을 그냥 두었다. 잠깐의 만족스러운 기분을 굳이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깊은 새벽, 견디다못한 류건우는 결국 인형의 속을 까뒤집었다.

 

“형, 오늘 장 열리는 날인데 같이 구경갈래요? ... 형?”

 

그래서 다음 날 아침 류청우가 또 제게 찾아왔을 때, 류건우는 한숨도 자지 못한 퀭한 눈으로 류청우를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너덜너덜해진 헝겊인형이 들려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박에 알아챈 류청우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항상 다정하고 부드럽던, 그래서 아직도 아이같은 동생의 얼굴이 그렇게 일그러지자 류건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류청우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는 것을 류건우는 못 본 척했다.

이건 선을 넘는 것이다. 류청우가 류건우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속내 따위 나누지 않는, 그렇게 무겁지 않은 관계로 지내는 것 뿐이다. 지금처럼, 마치 저가 저주의 대상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그랬느냐며 당장이라도 가문을 뒤엎을 듯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그래, 가자.”

“형, 이건...”

“가자고.”

 

서늘하게 선을 긋는 것. 그것은 이제껏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만 했던 류건우가 류청우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선에 다가와준 사람을 뒤로 하고, 류건우는 헝겊 조각을 이부자리 위에 던져둔 채 옷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섰다. 주인이 없는 방에 홀로 남을 수는 없었기에 류청우는 떨어진 헝겊 조각을 보며 입을 꽉 다물었다가, 고개를 돌려 류건우를 따랐다. 장터를 향해 걸어가면서 류건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류청우에게 질문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모르는 것처럼 일상적인 어투였다.

 

“그래서, 이번엔 뭐 다른 거 나온다는 얘기라도 돌았냐.”

“... 어, 글쎄. 보부상들이 이번에 많이 왔다던데, 뭐라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렇겠네. 단 것 있으면 좀 사 가자. 머리 쓸 때 주전부리로 먹으니까 좋던데.”

“근데 형, 그렇게 먹고 양치는 하는거야?”

“잔소리는.”

 

류청우가 류건우의 실없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동안 장터에서는 연신 흥정하는 소리와 호객을 위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곱게 차려입은 비단 철릭을 보고 포목점의 주인이 그들을 불렀고, 훤칠한 외모를 본 장신구 상인도 그들을 불렀다. 곳곳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를 쏙쏙 피해가며 류건우가 산 것은 꿀에 절여 잘 말린 정과와 강정, 엿, 타래과, 곶감이나 떡 같은 군것질거리였다. 류청우는 그런 형을 말없이 뒤따랐다. 피곤해지면 쉬는 대신 습관처럼 입에 단 것을 쏟아붓는 류건우에게는 그것을 절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한 번에 다 먹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너는 무슨 어린애 다루듯이 날 다루냐.”

“으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류건우에게서 등짝을 한 대 얻어맞은 류청우가 하하 웃었다. 그제야 같이 웃는 류건우에게 마음이 쓰여서 류청우는 괜히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류청우를 보던 까만 눈이 주위를 휙 돌았다.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류건우는 가만히 무릎을 굽혔다. 그건 누군가를 닮아 더없이 정순하고 맑은 기운이었다.


(샘플 분량 약 1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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