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건우

파괴의 순간

청우건우, 사서 류건우 AU

티온랩실 by 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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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수정

류건우가 사서로 일하고 있는 도서관은 동네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단골손님인 몇몇 초등학생들이 어린이 열람실에서 동화를 읽으며 신나게 토론하고, 청소년 몇몇이 류건우가 고민하며 작성해 걸어둔 추천 도서 목록을 정복하며 서가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일상의 낙인 안온한 삶.

책이 상하지 않도록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 햇빛을 막기 위해 쳐둔 얇은 커튼이 바람에 맞춰 살랑인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투명한 햇살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면 류건우는 슬쩍 그 앞으로 다가가 아침 햇살을 만끽하곤 했다. 출근 직후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류건우는 그렇게 일상을 시작한다. 사람이 적은 오전에는 서가를 둘러보며 잘못 꽂힌 책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거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오후가 되면 카운터에 앉아 잡무를 처리하거나 그날 손에 잡히는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상할 정도로 스마트폰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었지만, 류건우는 아무 불평 없이 일상을 즐기는 듯했다. 그렇게 수많은 책을 관리하고 읽는 것이 사서 류건우가 즐기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예산이 많고 일거리는 적은, 소위 말하는 괜찮은 곳으로 발령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류건우는 굳이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외딴 도서관을 선택했다.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그는 이유 없는 악의를 받아내는 것에 지쳤고,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마저 버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오직 책이 그의 낙인 삶으로.

  “안녕하세요. 이 책을 빌리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이곳까지 오게 된 이유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류건우는 얼마든지 다시 안온을 찾아 도망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다. 또다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그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회원이신가요.”

  “아니요.”

대출 절차를 안내하면서도 류건우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류청우라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서도. 이미 도서관에 있던 사람들이 류청우를 알아보고 카운터 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류건우는 눈치챘다.

양궁 금메달리스트, 전 국가대표, 팀 코리아의 막내. 류청우의 이름 앞에는 화려한 수식어가 몇 개나 붙는다. 그리고 전 국민이 붙인 그것들과는 달리, 류건우만이 붙일 수 있던 수식어도 있었다. 류건우가 그것을 떠올린 찰나, 류청우가 작게 웃어보였다.

  “나중에 또 올게요. … 건우 형.”

그 말을 남긴 류청우가 도서관을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류건우는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달려가 형체 없는 것들을 물에 쏟아냈다.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학생들이 류건우를 걱정스레 보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였다. 토해진 것은 애정, 열등감, 두려움, 죄책감, 그럼에도 결국 사랑. 그를 옭아맨 기억에 류청우가 연관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후 류건우가 택했던 것은 도피였다. 부당한 원망이 류건우를 잠식하는 와중에도 류청우를 사랑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서,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선택했던 거였는데.

  “어떻게.”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와, 류청우.

다음날부터 류청우는 끈덕지게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류건우의 거부반응은 시간이 지날수록 엷어졌다. 사람 없는 오전, 서가 사이사이 마련된 푹신한 빈백에 몸을 맡긴 류청우는 적당히 두꺼운 자기계발서 한 권을 꺼내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시선에 담던 류건우는 묵묵히 다른 서가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정리해야 할 책이 한 무더기였다. 작은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 높은 곳의 책을 꽂고, 분류번호가 잘못된 책을 찾아 빼내는 일의 반복. 작은 글씨를 오래 보고 있자니 눈이 뻐근해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누르던 류건우는 소리 없이 제 옆으로 다가온 인영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저, 죄송하지만 이 책이 원래 어디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류건우는 류청우의 손에 들린 책을 빠르게 집었다. 이런 책이 있었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류청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른 서가로 떠났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이 넘어도 마찬가지였다. 류청우는 누군가에게 추천이라도 받았는지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책을 골라 읽었고, 항상 비슷한 핑계를 대며 류건우에게 말을 걸고는 온종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가 폐관 시간이 되기 직전에 도서관을 떠났다. 그래서 류건우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류청우라고 해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류건우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두 사람이 같이 살던 집을 뛰쳐나오던 그날을.

-

류건우가 류청우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가의 어느 골목이었다. 동아리 회식 중 잠깐 담배를 태우기 위해 나온 류건우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울던 류청우를 적당히 달래 돌려보낸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언젠가부터 류청우는 류건우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류건우는 류청우의 치근덕거림을 받아주는 범위가 점점 늘어나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연인 관계를 맺었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였다.

오랜 기간 만나던 두 사람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알고 지낸 지 팔 년, 사귄 지는 정확히 삼 년 째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류청우가 양궁 금메달리스트이자 일종의 셀럽으로 이름을 날리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기도 했다. 어디에서 정보가 샌 건지 류청우와 류건우가 함께 살던 집에 스토커가 붙었다. 류청우는 합숙으로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주된 피해자는 류건우였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이사를 하고 번호를 바꾸는 정도에서 그쳤을지도 몰랐다. 류건우는 주위에 피해가 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는 편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면, 류청우가 전지훈련을 간 사이, 그 스토커가 류건우 홀로 머무르던 집에 침입해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직후 해외에 있던 류청우가 다급히 귀국했지만, 몸과 마음에 모두 상처를 입은 류건우가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퇴원 수속을 밟고 집에 돌아온 날, 류건우는 이별을 통보했다. 류청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커플링을 빼두고, 단출한 짐을 꾸려 그대로 떠나버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류청우가 도서관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류건우는 차분히 정보가 샐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지역에는 연고가 없고, 드나드는 학생들이라고 해서 딱히 류청우와 인연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 떠올린 거다. 류청우가 흘리듯 이야기했던 소꿉친구의 이름이 이 도서관에 찾아오는 몇 없는 성인 독자 중 한 명과 같다는 걸. 물론 억측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류건우의 직감은 한 번쯤 확인해보는 게 어떠냐는 결론을 내렸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세진 씨. 혹시 저분과 안면이 있으신가요.”

  “… 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기는 한데요. 그건 왜…?”

  “아뇨, 별건 아닙니다. 오늘은 그 책인가요.”

  “네, 좋아하는 작가님께서 곧 신간을 내신다고 해서 오랜만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정답. 류건우는 목을 주물렀다. 어디에서 정보가 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이 사람의 잘못은 아니었고,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얼굴을 비췄던 사람인지라 알게 모르게 정도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직을 신청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류건우는 차분히 남은 일감을 정리했다. 폐관 시간이 가까워지자, 류청우가 카운터로 다가왔다. 손에는 두어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대출하려고 하는데요.”

  “대출 기간은 14일이고, 2회까지 연장 가능하십니다. 연장 1회당 7일씩 기간이 연장됩니다.”

책의 바코드를 찍으며 기계적으로 주의사항을 읊어준 류건우가 책을 류청우에게 건넸다. 손끝에 매끄러운 종이의 질감이 아닌, 조금 투박하고 까슬한 살갗이 닿았다. 기억하던 것보다 약간 거칠어서, 류건우의 손끝이 흠칫하며 떨었다. 그 모습을 류청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책의 대출 기간이 끝난 후에도 연장 신청만 접수될 뿐 류청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체되기 직전에서야 겨우 나타난 책은 배세진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전에 했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증거였지만, 류건우는 심란했다. 배세진이 가볍게 인사했다.

  “반납이에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이 책은 다른 분이 빌리셨던 것 같은데.”

  “청우 말씀이시죠. 그, 청우가 조금 바빠서. 제가 대신.”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마무리 지을 일이 많은데, 제때 반납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잠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배세진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혹시 어디 가실 일이라도 있나요. 마무리라고 하시길래.”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남에게 관심이 많았던가. 하기야 물라고 던진 떡밥이기는 했다. 류건우는 선선히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 옮기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체도서는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아서요.”

  “아. … 여기 다니는 사람들이 조금 서운해할 것 같은데요.”

류건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본래 말수가 많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대화는 그 정도에서 끝났다. 배세진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이르게 도서관을 떠났다. 류건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달력을 확인했다. 다음날은 휴관일이었다.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저녁. 흐릿한 가로등이 비추는 도서관 앞길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홀로 서 있는 인영이 막 도서관의 문을 잠그고 뒤돌아선 류건우의 눈에 걸렸다. 적막한 돌길 위로 부드러운 달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교차하며 두 갈래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푸른 기가 돌던 머리카락은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검게 빛난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끝의 끝에서 흐릿해지며 길과 하나가 되었다. 조금 차가운 가을바람이 류건우의 머리를 스치며 불었다. 늦가을과 초겨울, 애매하기 짝이 없는 계절의 온도. 

  “건우 형.”

류건우는 아무 말 없이 가방끈을 꾹 쥐었다. 진작 식어 사라졌어야 할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상의 변주, 류건우가 버리지 못한 과거의 잔재. 손끝이 차게 식었다. 안경 너머 보이는 류청우의 얼굴이 조금 슬퍼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자, 류청우는 조금 웃었다.

  “다행이에요.”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생략된 말이 들리는 것 같아 류건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옷소매를 잡는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물리적인 힘은 아니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자그맣게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과거, 류청우가 류건우에게 어리광을 부릴 때의 습관이었다.

  “잠깐만 시간 내 주면 안 돼요?”

  "뭘 하고 싶어서."

그러면 류건우는 괜히 마음이 약해져, 이게 류청우의 노림수라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여 주곤 하는 것이었다. 주위를 쓱 둘러본 류건우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 일단 집에서 얘기하자."

  "네."

류청우는 유순하게 대답하고는 류건우의 뒤를 졸졸 쫓았다. 류건우가 사는 작은 자취방 앞,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연 류건우가 눈짓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얼른 신발을 벗고 가볍게 씻은 류청우는 식탁에 앉은 류건우와 차려진 간단한 다과를 보고는 얌전히 류건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류건우였다. 그가 내뱉은 건 단 한 마디였지만, 지금의 그들을 꿰뚫는 한 마디.

  "헤어졌잖아."

류청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류건우는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따뜻한 우유가 담긴 잔이 류청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밤이니까 라떼는 좀 그래서."

헤어졌다면서 쓸데없는 곳에서 다정하다. 류청우는 괜히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말했다.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집에 돌아왔더니 커플링만 남긴 채 깔끔히 사라진 류건우와 일방적인 이별 통보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류건우는 고개를 살짝 숙인 류청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 말고도 좋은 사람은 많을 텐데."

  "형만큼 좋은 사람은 없어요."

그 말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칼같이 대답하는 류청우를 보던 류건우는 한 손을 들어 목을 주물렀다. 엷게 깔린 긴장감, 그 아래로 흐르는 건 희미한 슬픔과 우울. 류건우는 혀를 슬쩍 찼다. 잘못의 대가는 류청우의 몫이 아님을 상기한 류건우가 중얼거렸다. 류청우의 귀에 닿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네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어. 상황이 나빴던 거지."

  "그럼 지금은요?"

  "류청우."

류청우는 잠깐 움찔거리다가도,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별 당한 직후부터 떠올린 의문에 대한 류청우의 결론이었다.

  "형이 없어지고, 계속 고민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그것만큼 류청우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도 없을진대. 설득을 위해, 혹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계획에 대해 바삐 돌아가던 머리가 들려오는 말에 뚝 멈췄다.

  "답이 나오지 않았어요. … 그래서 다시 형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었으니까. 아마 짐작하셨겠지만 세진이가 많이 도와줬고요."

  "그때 일은. 다시 말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때 문득 생각났어요. 형이 입원했을 때 경찰에서 온 연락에 뭔가 있었다는 게. … 처음이 아니었던 거예요. 이런 일이."

류건우는 식탁 아래로 내린 손을 꾹 쥐었다. 손톱이 파고드는지 손바닥이 아렸다.

  "그래서였던 거예요. … 아니에요?"

반은 맞췄고 반은 아직이다. 류건우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만 감수하고 넘어가서 될 일이었으면 안 떠났을 거야."

류건우라고 떠나는 길이 마음 편했을 리 없다는 걸 류청우는 알까. 범인이 체포되며 지르던 소리는, 언젠가부터 닥쳐오던 지독한 압박은 아직도 류건우의 악몽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류청우를 놓으라고. 다 같이 죽어버리기 전에."

류건우는 견디지 못하고 제 앞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마셨다. 류청우의 눈이 크게 뜨여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보다 여윈 류청우의 얼굴에 류건우는 쓴웃음을 삼켰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류청우는 류건우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 류건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서웠거든."

류건우의 차가운 손끝이 류청우의 얼굴을 스쳤다. 류청우는 아무 말 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부볐다. 그 모습이 얼핏 고개를 도리도리 젓던 어린 류청우를 떠올리게 했다. 제 얼굴이 어떤지도 모른 채 류건우는 손바닥에 닿는 온기를 느꼈다.

  "야."

손바닥에 입술이 닿았다. 순간 올라오는 찌릿한 감각에 류건우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류청우가 살짝 웃었다.

  "그럼, 형이 저를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건 아닌 거죠."

류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제가 더 잘할게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어느새 류청우가 류건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두 손은 이미 류청우에게 잡힌 뒤였다. 부드러운 우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형."

류건우는 가만히 류청우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오랜만에 보내는, 뜨겁고 사랑스러운 밤이었다.

-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류청우가 눈을 떴을 때, 류건우는 없었다.

  “형?”

옆자리는 한참 전에 온기를 잃어 싸늘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류청우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집 안을 뒤졌다. 절로 떠오르는, 그가 처음으로 류건우를 잃었을 때의 감각.

  “건우 형.”

그 공간에는 류청우 뿐이었다.

-

간단한 짐과 스마트폰만 챙겨 나온 류건우는 도서관의 숙직실에 있었다. 기껏 동트자마자 몰래 집을 빠져나온 것이 무색하게도, 류건우가 갈 곳은 이곳뿐이었다. 다행히도 휴관일이어서 당장은 아무 일 없겠지만, 잠깐의 유예일 뿐이었다. 이건 도망밖에 되지 않는 것을 류건우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갉아먹고 있는 기억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일개 사서에게 행해진 다수의 집요한 압박과 그 결과로 얻은 심신의 상처는 떠올릴 때마다 류건우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류청우는,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류건우의 트리거가 되어버린 류청우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 사실이 류건우의 목을 죄었고, 그게 류건우가 류청우를 떠난 이유였다. 엉킨 실타래가 풀릴 방법은, 류건우의 눈에는 요원하기만 했지만.

지난밤 류청우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류건우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찾기 쉬운 곳으로 도망쳤으므로, 당연히 류건우는 금세 류청우에게 발견되었다. 이유를 묻는 류청우의 얼굴이 참담해서, 류건우는 말없이 류청우를 품에 안았다. 잔잔한 떨림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류청우가 물었다.

  “... 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가요?”

조금 긴 호흡 끝에, 류건우가 대답했다.

  “그래.”

끝에는 조금 충동적인 이유가 덧붙었다. 

  “네가 필요해.” 

떠나겠다는 결심이, 괴로움과 두려움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

  "형."

  "왜."

  "그때 대답을 못 들었어요."

무슨 대답을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류건우는 문득 떠오른 기억을 되새겼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게 아니었냐는, 그들이 다시금 마음을 확인했던 그 밤의 질문.

  "알잖냐."

  "한 번만 다시 들려줘요, 건우 형."

자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옷소매를 슬쩍 붙잡고는 큰 몸을 구깃구깃 접어 제 품에 안기는 류청우를 토닥이던 류건우는 기어이 한숨을 뱉었다. 작게 숨을 터트리며 웃는 류청우를 괜히 찌릿 노려본 류건우가 다시금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사랑해, 류청우."

  "사랑해요, 형."

가만히 류청우를 토닥이던 류건우가 입을 열었다.

  "나 내일 출근해야 해."

  "알아요. 그러니까 딱 한 번만. 네?"

오늘만 한숨이 벌써 몇 번째인지. 류건우는 한숨을 푹 쉬고는 대답했다.

  "그래, 한 번만."

류청우가 류건우를 가볍게 안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끝으로 방문이 닫혔다. 이제부터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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