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단과 난간 (13)
어떤 것의 끝
“건우 형!”
“형.”
아끼는 이들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듯 눅눅하게 들려와, 류건우는 가물거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감각들이 서서히 돌아오고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곧바로 도끼로 온몸을 난도질한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와 류건우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의식이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이제 천천히 회복하실 일만 남았어요.”
“나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냐.”
“오늘로 7일째에요.”
울먹이는 목소리는 류건우가 육지로 떠나기 전까지 8년 간 그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박문대의 것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이 체감이 났다. 류건우는 끙끙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인어의 형상을 한 박문대,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류청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를 본 충격에 류건우는 아픔도 잊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어어, 형! 안 돼요, 진정하세요!”
“류청우, 네가 왜 여기 있어?”
“형을 여기까지 데려온 게 청우 님이에요!”
“아. 그런데 왜 아직...”
류건우는 익숙하게 저를 휘감는 물을 보며 확신했다. 이곳은 물 속이다. 인어인 자신들이야 이곳이 본래 영역이라지만, 인간인 류청우는 본래 들어올 수 없는 곳. 류청우를 뜯어낼 듯 살피던 류건우는 뒤늦게 류청우의 옷깃 안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노란빛을 발견했다.
“제가 드렸어요. 아무래도 형이 깨어나시는 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주춤거리고는 있지만 분명하게 제 생각을 밝히는 박문대에게 고개를 끄덕인 류건우는, 박문대의 발언에서 뭔가를 직감한 듯 미간을 일그러뜨린 류청우에게 그대로 선고했다. 평소와는 다른 냉랭한 목소리가 내리꽂히자 주변의 온도마저 내려간 듯 한기가 스며,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류건우의 양쪽 어깨를 꼭 붙잡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지금은 박문대 이능이 너를 보호하고 있어서 괜찮은데, 그 보석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야. 목적을 이루면 보석의 빛이 희미해지지. 빛이 사라지면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고.”
“...”
“내가 일어나는 거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 지금쯤이면 대충 수습됐을 것 같은데.”
직전까지만 해도 온순하던 류청우의 기세는 돌아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사납게 돌변했다. 왠지 듣지 않아도 그 답을 알 것 같아서, 류건우는 어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류청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류건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류청우는 착실하게 류건우의 복장을 뒤집었다.
“아니, 안 가.”
“왜.”
“어떻게 찾은 형인데, 이제와서 나한테 떠나라고 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는데.
류청우는 아차 싶었던 듯 입을 다물었지만 류건우는 그 뒤로 생략된 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류건우는 저와 눈을 맞추는 류청우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다,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류건우와 시선을 마주하던 류청우 역시 류건우의 눈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노란 지느러미와 검푸른 지느러미,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본모습. 류건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여기에 나나 박문대 없이 너 혼자 있었다면 네가 지금 보는 건 인어의 영역이 아니라 평범한 계곡 바닥일 거다.”
박문대가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따금 길을 잃고 영역을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인어들도 있었지만 이곳의 인어들은 그런 적이 없었다. 이곳은 완전한 인어의 영역, 평범한 인간은 감히 접근할 수조차 없는 지하였으니.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인어는 죽은 사람들이야. 다르게 말하면 인어의 영역은 저승과 다를 게 없다고. 넌 지금 산 사람의 몸으로 저승에 온 거야.”
“마, 맞아요. 그래서 청우 님을 보호해드리려고 제 이능을 조금 나눠드렸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해요. 완전히 보호할 수도 없고요.”
“들었지. 그러니까 돌아가. 내가 널 강제로 보내기 전에.”
류청우의 표정은 평온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거칠어진 음색과 낮아진 목소리에 류건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싫어. 그럼 나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건데.”
"그게 나나 저 녀석이 너한테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니까. 날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눈 뜨는 건 보게 해야지. 저 녀석도 그런 생각이었을 거고."
박문대가 고개를 끄덕이고, 류청우의 목에 걸린 노란 빛이 조금 더 흐려졌다. 그건 류청우가 이곳에 무사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저 빛이 사라지는 순간 류청우는 살아있는 몸이 저승에 들어온 대가로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경계의 무언가가 되어 끝없이 구천을 떠돌 것이었다. 그런 결과는 원치 않았던 류건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봤으니 이제 네가 여기 더 있을 명분은 없어.”
류청우는 빠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젓는 모습은 흡사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과 비슷했다. 평소였다면 하고싶은 대로 하라며 그냥 받아줬겠지만, 이건 말 그대로 류청우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류건우는 몰려오는 통증에 자신이 누워있던 바닥을 짚었다. 허겁지겁 제 등을 받치는 박문대의 팔에 반쯤 몸을 맡긴 채, 류건우는 류청우를 직시했다.
“왜.”
“...”
“이유가 있어야 해. 다시 말하지만 너는 생자生者고 여기는 사자死者의 영역이다. 본래라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곳이야.”
그 말이 끝나고서도, 류청우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머뭇거림은 이유를 만든다기보다 말해도 될지 망설이는 것에 가까웠다. 류건우는 예전에 만들어진 흑진주 하나를 몰래 꺼내 손에 쥐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흑진주였다. 류청우로 인해 흘렸던 눈물, 류건우가 만든 것 중 가장 강력한 이능을 품은 것.
“류청우, 돌아가.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
“죽고 싶기라도 한 거냐. 살아남았으면 그냥 살아, 나 따라올 생각 하지 말고.”
“...”
“이건 안 돼, 류청우.”
“... 싫어.”
류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시간은 계속 줄어드는데 류청우는 도통 설득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류청우가 설득될지 고민을 거듭하며 류건우는 다시 경고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류청우, 지금 당장-”
“싫다고, 형이랑 다시 떨어지는 거!”
류청우는 고개를 숙인 채 꽤 오랫동안 입술을 깨물었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 화내서 미안해.”
“됐다.”
자신과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그 말에, 류건우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류청우의 기억을 돌려줬을 때부터 예측했던 사태였다. 아니, 어쩌면 저를 그리도 따르던 어린 시절부터. 이럴 것을 알고도 충동을 합리화한 것이 자신이어서. 그 가늘고 질긴 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이어버린 건 결국 류건우였기에.
“하지만 그래도 너는 여기 남으면 안 돼.”
“형.”
“박문대, 나 잠깐 나간다. 금방 올 거야.”
“건우 형, 지금은 쉬셔야..”
“네가 준 것도 있고, 괜찮아. 금방이야. 따라와, 류청우. 나가서 얘기해.”
류건우에게 손이 붙잡힌 채 류청우는 순순히 그의 형을 따라갔다. 목에 걸린 보석의 빛이 점점 부스러지고, 옷소매가 천천히 물에 젖기 시작했지만, 류청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옆에 그가 정을 주었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류건우가 하는 것이라면 결국 류청우는 따를 것이어서.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등지듯, 류건우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이동진이 연결된 계곡가였다. 류청우가 류건우를 안은 채 도착한 곳. 눈에 익은 곳이었다. 류청우는 몰려오는 나쁜 예감에 이동진의 반대편으로 슬슬 뒷걸음질쳤지만, 그보다는 류건우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그의 뜻에 류청우가 반기를 들 수 없도록. 류청우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한 탓에, 류건우는 탄식을 뱉었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옅은 슬픔이 스민 목소리. 류청우는 류건우를 향해 왜 슬퍼하냐 물으려 입을 벌리고, 그러지 말라며 손을 뻗으려다, 문득 제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애초부터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눈앞의 형이, 류건우가, 제 머릿속을 뒤섞는 것 같은 감각이 찾아왔다.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낯익은 인어가 든 수조 앞에서 자장가를 들었던 어느 날과도 같은 감각.
“그랬으면 지금 네가 이곳,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맬 일도.”
류청우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류청우를 묵직하게 채우던 무언가가 서서히 존재감을 잃는 느낌이 몸서리치게 싫었지만,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어깨를 다친 이후로는 다시 흔들릴 일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충격은 그런 것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나 따위로 힘들어할 일도.”
몸이 제멋대로 끌려 이동진으로 다가간다. 류청우는 어떻게든 멀어지려 했지만 다리에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것도 필요 없었을텐데.”
그 말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류청우는 점점 희미해지는 눈앞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류청우는, 결국, 그의 뜻에 저항할 수 없었다. … 누구의 뜻에? 류청우는 자문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아주 나중에. 네가 명을 다하는 날 다시 만나는 거다.”
흐드러지는 별빛이 류청우의 눈을 푸르게 빛냈다. 눈앞에 선 존재의 턱에서 아름다운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그제서야 류청우는 제 볼을 타고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다. 눈물에 찬란한 별빛이 흩어지며 순간 눈이 부셨다. 아무 소리도 없이 거세게 일어난 바람이 그를 삼켰다. 이윽고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류청우가 무사히 돌아간 것을 확인한 류건우는 그대로 눈을 감고 수면 아래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 , 류청우.”
원망이든 뭐든, 네가 명을 다하면 그때야말로 무엇이든 받아주겠다고.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류청우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그를 반겼으나, 근 일 년동안 있었던 최심부의 천장은 아니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사용했던,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의 천장. 오랜만에 보는 바깥이었다. 유폐된 자신이 왜 최심부가 아닌 바깥에 있는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던 탓에, 류청우는 조금 머뭇거리다 문을 열었다.
“청우냐?”
“아버지.”
류청우를 본 그의 부친의 손이 거세게 주먹을 쥐었다. 류청우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그의 부친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손을 쥐었다. 그제야 현실감이 드는 듯 붕 떠 있던 부친의 눈에 경악과 환희가 뒤섞였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잘 모르겠어요. 눈을 뜨니 이곳이었는데... 혹시 아시는 게 없으십니까.”
“아니, 아니... 너는 어제까지만 해도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연우도 나도 너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날 어느 폐전에서 널 봤다는 걸 마지막으로 지금껏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해서... 아니, 그보다. 다친 곳은 없느냐? 괜찮아?”
“네, 다친 곳 없이 무사합니다. 아. 아버지,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느냐.”
잠깐의 재회 후, 류청우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류청우가 기억하던 때로부터 7년이 흐른 후라는 것과, 전 가주가 죽은 후 흔들리던 가주의 자리에 재종형인 류철우가 아니라 제 동생인 류연우가 앉았다는 것. 복귀 보고를 위해 가주를 찾아간 류청우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을 보고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이미 부친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크게 놀라지도 않는 동생을 보며 조금 아쉬워한 것도 같았다.
“하하! 결국 꿈을 이루셨군요, 가주.”
“맞아, 오라버니.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꿨던 꿈이야.”
새침하게 말하는 류연우를 보며 작게 웃은 류청우가 정중하게 가주를 향한 예를 올렸다.
“류 가의 청우, 복귀했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오라버니.”
남매는 서로를 보며 싱긋 웃었다. 류연우와 류청우의 옆을 비치고 지나가는 투명한 오전의 햇살이 뒤꽂이에 닿으며 산란했다. 전날 밤 유독 반짝였던 흑진주가 박힌 그 뒤꽂이였다.
“뭘... 어디로 간다고, 오라버니?”
“저 산을 타고 가다보면 아주 깊은 곳에 계곡이 하나 있어. 거기에 갈까 하는데.”
“아니,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왜 갑자기 간다고 그래? 안 돼, 못 보내. 사람 모자라. 안 그래도 저 꼰대들 감당하는 거 힘들어 죽겠는데 나 혼자 죽을 순 없어. 오빤 내 파벌이야. 오빠 가면 쪽수 모자라서 안 된다고. 절대 못 가. 내가 못 가게 막을거야.”
“하하.”
“이익!”
새카만 눈으로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류연우를 앞에 둔 채 류청우는 온화하게 웃었다. 류연우의 눈에 그건 네가 친 방어진 따위 얼마든지 뚫고 나가주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류청우의 귀환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덧 눈가에 주름이 생긴 류연우는 예전과 비교해도 변한 것 하나 없는 얼굴의 오라버니를 보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 와중에도 이가 상한다며 걱정하는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사람 약을 올리는지. 그렇다고 해도 유폐 끝에 오랫동안 실종되었다 간신히 돌아온 류청우를 생각하면 그의 부탁은 들어주고 싶은 것이 가족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류연우는 류청우의 출가를 선선히 허락했다.
“좋아, 가. 대신에 정착하는 곳이 어딘지는 나한테도 알려 줘.”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최소한의 기별은 보내라는 부탁. 그나마도 안 들어주면 그만인 것이었다. 류청우는 정말 그걸로 충분하겠느냐며 머뭇거렸지만, 류연우는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썩 가버리라며 오라버니의 다리를 걷어차버렸다. 바위처럼 단단한 다리 탓에 찼던 발을 부여잡으며 주저앉긴 했지만, 어쨌든. 양친과 동생의 포옹을 마지막으로, 류청우는 가볍게 떠났다.
류청우를 보낸 후 처소에 들어가 힘없이 털퍼덕 주저앉은 그는 언젠가부터 항상 제 머리에 꽂힌 뒤꽂이를 슬쩍 뽑았다. 누가 준 건지, 왜 준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차고 다니지 않으면 이유도 없이 불안했던 탓에, 언젠가부터 류연우의 쪽진 머리에 항상 꽂힌 그것이었다.
“이거라도 줘서 보낼 걸 그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았을 것 같다고, 류연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류청우는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가파른 산이었지만 아직 20대 초반의 체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류청우에게는 그렇게까지 험한 길도 아니었다. 길도 길이었지만, 심지어는 그 흔하다는 산짐승 하나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 속에서도, 류청우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를 향해 걸었다.
“여기구나.”
계곡으로 갈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류청우가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고 떠난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류청우는 이 산까지 찾아온 뒤로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다. 그 앞에 나타난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류청우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계곡가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떠나고 싶지 않은,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었다.
“! 그게 사실입니까, 형?”
“어. 그러니까 네가 슬쩍 가서 확인해 봐. 아니다 싶으면 내쫓고. 부탁한다.”
“좋아요! 김래빈이랑 같이 가도 돼요?”
“그러던지.”
“그, 건우 형. 저 둘만 내보내도 괜찮을까요...?”
“불안하면 배세진도 같이 보내고.”
“거기 누구십니까?”
류청우는 뒤에서 들리는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작게 만들어진 망태기를 든 아이 둘과 지게를 진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류청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람을 하던 도중 잠시 쉬던 참입니다. 객께서는 뉘신지요.”
“저희는 이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약초를 캐다 잠시 쉬던 참입니다.”
“김래빈 바보!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돼!”
“바보는 너야, 차유진!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건 실례라고 말했잖아!”
뜬금없이 투닥거리기 시작한 아이들 탓인지, 뒤에서 아이들을 보며 손으로 붉어지는 얼굴을 가려보려던 청년은 류청우를 보고는 쭈삣쭈삣 손을 내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원래 이러는 아이들이라... 죄송합니다. 헌데 나으리께선 어찌 이리 깊은 곳까지 오셨습니까? 이 근처는 산짐승이 많아 마을 사람들도 오길 꺼리는 곳입니다.”
청년은 예의바르게 말을 걸었지만, 그 아래엔 경계가 숨어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류청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보낼 생각이든, 신세를 질 생각이든 현지 주민에게 밉보여 좋을 건 없었으니까.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오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다행히 산짐승을 만나지도 않았고.”
“이곳이 그냥 돌아다니다 올 만한 곳은 아닌데.”
순간 청년의 뒤로 무언가 일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본 류청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청년은 짐짓 놀란 체를 했다.
“왜 그러십니까?”
류청우는 잠시 그 근처를 응시하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다시 표정을 풀었다. 얼굴엔 겸연쩍은 미소를 띄우고, 목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면서.
“죄송합니다, 산짐승이 지나간 것 같아서.”
“아. 어, ⎯⎯ 형이 다 막았다고 했는데.”
청년의 혼잣말 속에 있던 어떤 단어에 류청우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청년의 입을 향했다. 들려서는 안 될 것을 들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청년과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류청우의 눈에 꽂혔다.
“보셨습니까, 형?”
“어. 차유진 너는?”
“봤어요! 이 사람 맞아요.”
잎새로 스민 빛을 받아 푸르게 비치는 눈 속, 희미하게 일렁이는 유색은 분명 그들의 형이 남긴 흔적이었다. 청년, 배세진은 소매에 숨겨두었던 류건우의 흑진주를 손바닥에 넣어 쥐었다.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흑진주로부터 반응이 있을 터. 셋은 류청우를 낚기 위해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 저희 형님이 근처에 사십니다. 이 근방은 산세가 험해서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을텐데, 안내해드릴까요?”
류청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하룻밤 정도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희 형님이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그러니 나으리께서 가면 좋아하실 겁니다. 밤의 산은 위험하기도 하고요.”
“저희도 오늘은 형님 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염려치 마십시오!”
“맞아요! 형도 좋아해요. 나으리도 좋을 거에요!“
가만히 있던 아이들까지 합세하자, 류청우는 결국 다수결에 굴복했다. 아이들이 승리감에 작게 주먹을 쥐는 것을 본 류청우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냥 웃었다. 딱히 틀린 말을 들은 것도 아니긴 했다.
가는 길 내내 시끌거리던 아이들은 계곡을 바로 앞에 둔 오두막 앞에 도착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해졌다. 계곡가에 딱 붙은 위치를 살피며 의아해하는 류청우를 뒤로 한 채, 청년은 문을 두드렸다.
“저희 왔어요.”
배세진은 손바닥이 저릿거릴 정도로 진동하는 구슬을 꾹 쥐었다. 그가 류건우에게 전해들었던 이능의 해제 조건은 단 하나, 류청우의 수명이 다하는 것. 그리고 구슬이 반응한다는 것은 해제 조건이 충족되어 류청우가 곧 사자의 세계에 들어올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류청우 역시 그들처럼 별 문제 없이 눈앞의 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것.
문 안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기척을 확인한 배세진은 쭈삣거리며 한쪽 팔을 김래빈에게, 다른 쪽 팔을 차유진에게 내어준 후 심호흡을 하고는 오두막의 바닥을 쿵, 밟았다.
예의없는 행동에 류청우가 기겁한 것도 잠시. 배세진이 밟은 곳을 중심으로 바닥의 무늬가 일렁이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눈을 크게 뜬 류청우가 배세진을 보자, 그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김래빈을 필두로 류청우, 차유진, 배세진이 차례대로 공간에 발을 들였다. 김래빈의 손에 이끌린 채 걷던 류청우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입구가 사라진 뒤였다.
“입구가,”
“그냥 감춰진 거에요.”
배세진은 짧게 대답한 뒤 김래빈과 함께 류청우의 옆에서 움직였다. 기억에 없으나 분명 기시감이 드는 전경에, 류청우는 조용히 배세진을 따랐다. 주변은 어느새 공기 대신 물로 가득 차 있었으나 류청우는 호흡에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건우 형, 저희 왔어요.”
“오냐. 고생했다.”
“히히! 그럼 우리 김치볶음밥 해줘요!”
“저녁 때 해줄게. 그때쯤 이세진이랑 선아현 불러와.”
“와우!”
신이 나 방방거리는 아이는 어느새 붉은색 꼬리를 반짝였다. 옆에 있던 아이 역시 보라색 지느러미를 빠르게 펄럭이고 있었다. 류청우는 반짝이는 비늘에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강한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노란 인어가, 그리고.
“류청우.”
익숙한, 아니. 그리운 목소리였다. 류청우는 아주 천천히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와 닮은, 그러나 조금 더 차갑고 처연한 얼굴. 물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저를 응시하는 검푸른 눈을 보자 머릿속에 파도가 들이쳤다. 류건우와 함께 지냈던 모든 시간의 기억과 감정. 그 무게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류청우는 한참 후에야 젖은 목소리로 눈앞에 선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건우 형.”
유색의 인어, 류건우가 대답했다.
“오랜만이다.”
어째서 잊었던 걸까, 왜 꿈으로 치부해버린 걸까. 멋대로 떼어내고 기억을 지운 것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오랜 시간동안 그의 근간을 이루었던 이에 대한 깊은 친애, 긴 이별의 부산물처럼 남은 그리움마저 이리 선명한데. 범람하는 것들이 그저 흘러넘치도록 둔 류청우는 천천히 류건우에게 다가갔다. 류청우가 류건우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리의 감각이 흐릿해지고 무언가 돋아나며 물 속에서 이동하는 것 특유의 저항감마저 사라졌고, 그제야 미지근한 온기가 그의 손에 잡혔다. 류청우는 잡힌 온기를 온 몸으로 끌어안았다.
제 품에 안긴 이에게서는 반갑다는 말도, 보고 싶었다는 말도, 그 어떤 환영의 인사도 없었지만 류청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젠 류건우와 함께할 수 있으리란 것을.
- 본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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