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데이트

10:28

휴대폰 화면 속의 숫자는 야속하게도 아직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도 30분이나 남았다. 변하지 않는 네 자리의 숫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지하철 역이 횡단보도 바로 옆에 위치한 바람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박문대가 기다리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 딱 맞춰 나오겠지.’

일찍 나온대도 이렇게 일찍 나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박문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어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그럼 식당 앞에서 만날까? 아님, 지하철 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도 되고.

- 만나서… 만나서 같이 가요.

- 그래, 여기서 거기까지 1시간 정도 걸리니까 음, 11시에?

- 네, 11시. 내일 봐요, 형.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가자고 할 걸 그랬다며 박문대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같이 가자고 한 건데, 역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생겼다며 전날의 제 선택을 후회했다. 또 이른 아침부터 옷을 고르고, 일찍 출발하고도 늦을까봐 발걸음을 재촉한 자신을 속으로 신랄하게 까내렸다. 1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10시 50분까지는 도착해야지. 아니, 혹시 형이 일찍 올 수도 있으니까 40분까지? 그럼 집에서 5분 정도 걸리니까 30분에는 출발해야겠네. 혹시 모르니까 좀더 일찍 나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박문대는 한숨을 크게 내뱉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 역사 내로 내려가려는 사람들을 피해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문대야!”

오지 않을 거라고 속단했던 상대가 제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제게로 달려왔다.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에라도 걸린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세상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던 박문대는 어느새 제 앞에 선 류청우가 툭 건드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문대야, 미안. 늦었지.”

아직도 약속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는데도 류청우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일찍 와서 기다린 건 자신인데 뭐라고 사과를 한단 말인가. 박문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네, 아니, 아니에요. 제가 일찍 온 건데요.”

“아냐, 그래도 내가 더 먼저 왔어야 했는데. 오래 기다렸어?”

“저도 이제 막 왔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이제 갈까?”

네, 가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겠네. 그러게요. 도착하면 바로 밥 먹을까? 형 아침 먹었어요? 음, 너는?

*

주말 오전의 2호선엔 사람이 가득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바깥에 나온 것 같았다.

주말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건지. 날이 좋아서 그런가. 평소였다면 인상을 찌푸리고 잔뜩 짜증을 냈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박문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덕분에 류청우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말을 몇 번인가 되묻자,

- 사람이 너무 많다, 그치?

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 뒤로는 계속 바로 코앞에서, 누가 조금만 밀면 입술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와- 류청우 속눈썹도 잘 생겼네. 입술도…’

덕분에 박문대는 류청우의 얼굴을 요모조모 꼼꼼히 뜯어볼 수 있었다. 류청우의 귓불이 점점 빨갛게 물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제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박문대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굉장히 어색했다. 박문대 또한 자신이 그를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만큼. 박문대도 어색하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덜컹-

커브를 도느라 열차가 크게 흔들렸다. 손잡이를 잡고 있었음에도 박문대는 비틀거리며 옆으로 기울어졌다. 똑바로 서려고 다리에 힘을 주는데, 어깨에 큰 손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쥐었다.

“조심.”

다정한 목소리로 류청우가 귓가에 속삭였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 위에 양손을 갖다대며 식히려고 노력했다. 다시 한 번 열차가 흔들리자 비틀거리다 류청우와 어깨가 부딪쳤다. 자신보다 온도가 살짝 높은 손이 어깨를 감싸고 당겼다. 류청우를 올려다보니 난처한 얼굴로 저를 바라본다.

“미안, 넘어질까봐.”

“아, 아뇨. 괜찮아요.”

이번에는 어깨 위에서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박문대는 이동하는 내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류청우 쪽을 볼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제 쪽을 보고 있다면, 그래서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그러면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볼을 식히던 손을 내려 가슴 언저리에 갖다대었다. 쿵, 쿵,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박문대는 평소 귀가 찢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지하철 소음이 달갑게만 느껴졌다.

*

“영화 많이 무서웠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상영관에 둘만 남아있을 때까지도 굳어있던 박문대는 건물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도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봄, 때이른 개봉이라 덜 무서울 거라 생각하고 자신만만하게 봤는데 그에겐 무리였다. 그러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데, 아니, 영화를 보자고 말하던 류청우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박문대는 다시 전날로 돌아간대도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대신 미리 스포일러를 꼼꼼하게 보고 나왔겠지.

그러나 류청우는 전전긍긍하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맘에 안 들었을까 먹구름 잔뜩 낀 것 같은 표정으로. 얼른 안심시켜주려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박문대는 생각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넵, 진짜 무서웠어요. 아직도 심장 떨려요.”

“미-”

“형이 손 잡아주면 덜 떨릴 것 같은데.”

류청우 입에서 자동반사된 미안하다는 말을 싹둑 자르고 선명한 욕망을 드러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박문대는 말을 뱉은 다음엔 아차, 싶었는지 땅바닥만 보고 있었다. 어정쩡하게 흔들리는 팔이 고심 끝에 골라입었던 청바지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괜히 말했다, 후회도 잠시, 지하철에선 어깨를 단단하게 감쌌던 손이 제 손을 쥐었다.

“이제 괜찮아?”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머리 위에서 류청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운동화 신발 끈만 쳐다보고 있느라 보이진 않았지만 류청우의 미소가 선명히 그려졌다. 평소 제게만 지어주던 그 표정일 게 분명했다.

다리와 교차되며 흔들리는 팔에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슬금슬금 입 꼬리가 당겨졌다. 광대가 끝도 없이 위로 올라갔다.

이제 카페 갈까? 네, 형은 카페 가면 보통 뭐 마셔요? 나? 나는 그때그때 다른데, 보통 신메뉴 마시는 것 같아. 진짜요? 응, 궁금하잖아. 문대, 너는?

*

지하철-점심 식사-영화-카페-저녁 식사-지하철

그리고 박문대의 집 앞.

그는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이 왜 이렇게 짧은가 하고 한탄했다. 모퉁이 하나만 돌면 제가 사는 아파트 입구가 금방이었다. 이왕이면 저어어 안쪽이면 더 좋았을텐데. 아님 청우 형이랑 같은 아파트면 더 좋고. 엄마아빠는 왜 이런 데로 이사 오자고 한건지. 청우 형이랑 같은 아파트로 이사가면 안 되냐고 졸라볼까. 박문대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 저 이제 집 다 왔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벌써 다 왔네. 오늘 재밌었어, 문대야.”

“저도요. 진짜로.”

“하하- 다행이네. 혹시 그럼 대답해줄 수 있을까?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대답을 아직 못 들은 것 같아서.”

아.

지난 주 학교에서 류청우와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대답.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 문대야, 좋아해. 너는 어떤 것 같아? 나.

당연히 좋지.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지도 않은 상대한테 고백을 받았다면, 이렇게 데이트하러 나왔을까?

아쉬움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말고… 응? 나 어떻게 생각해?”

맞잡은 손에 땀이 배는 게 느껴졌다.

정말 긴장하고 있구나.

“형, 저도 형 좋아하죠. 형, 저는 오늘 이거 데이트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박문대는 활짝 웃었다.

데이트.

그 단어를 내뱉을 땐 살짝 가슴이 떨렸다.

다시 되뇌어봐도 기분 좋게 떨렸다.

“데이트…”

“네, 다음에도 또 해요. 데이트. 영화 보고, 밥 먹고, 손 잡고.”

“응, 그러자.”

아파트 입구로 차가 한 5대 쯤 들어갈 때까지 떠들다가 박문대는 류청우의 등을 떠밀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겠다며 박문대를 들여보내는 류청우에 그는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뒷모습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뒤를 돌았다가 마찬가지로 뒤돌아서 저를 보는 류청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일봐요. 입모양을 제대로 읽었을진 모르겠지만 대충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 전화할게.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드는 류청우에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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