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커서님에게,
보낸 사람: Extra B, 받는 사람: Cursor
좋은 밤이에요, 커서님! 여기는 국제 표준시로 오전 11시 48분이에요.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오후 8시 48분이고요. 편지를 몇 번 읽었는데 12시간 동안 편지 하나를 작성했다는 걸 지구에서 알면 정말 깜짝 놀라겠는걸요. 데이터 처리에 특화된 커서님이 그정도나 오래 걸렸으니 말이죠. 이전 편지를 쓸 때보다 훨씬 길어졌네요. 제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더 오랜 시간 곱씹으셨을까요? (그럴만한 여유가 있었길 빌어요. 편지를 보았을 땐 안전하게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일 것 같지만, 또 모를 일이잖아요. 제가 편지를 못 보낸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요.)
편지가 조금 늦었죠.. 사실 조금 일찍 보내고 싶었는데, 여유가 나진 않더라고요. 중간중간 회사에서 큰 일도 있었고요. 그래도 편지를 적는 지금은 조금 그런 것들이 나아지는 기분이에요. 주말도 잘 쉬기도 했고, 덕턱에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제 생각엔 커서님의 주문이 꽤 통했던 것 같아요.
편지의 내용를 좀 더 길게 쓰기 전에,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 몇 가지를 쓰고자 해요. (이렇게 쓰니 너무 진지해보이네요! 그리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편지를 쓰면서 넘버링을 해보는 건 또 처음인데 이 이야기들의 의견이나 감상을 정말 먼저 묻고 싶었어서.. 이해해주세요.
1-1. 혹시 RQ사의 카탈로그의 물건들은 사셨을까요? 저는 벨트를 빼고 전부 샀어요. 그게.. 혹시라도, 제가 있는 좌표를 측정해서 보내드릴 수 있으면 조금 더 이 쪽을 찾기 쉬우실까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생각해보니 제가 있는 좌표를 알기보단 커서님이 지금 있는 위치를 알면 좀 더 좋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일 사시지 않았다면 제가..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사실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꽤 많은 고민을 했거든요. 탐사선에.. 뭘 싣고 갈 수 있나? 그런 것들? 공간이 되나? 그런.. 것들을 한참 고민하다가.. 의견을 묻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적었어요. 그리고 이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단 생각도 들어서.. 네.)
1-2. 위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벨트는.. 딱히 제가 쓸 일은 없겠지 싶어서 사진 않았거든요. (물론 다른 세계에 가는 것도 참 즐겁고, 거기서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참.. 매력있겠지만, 그랬다간.. 가족이 걱정할 것 같아서..) 그런데 한참 생각해보니까.. 커서님이라면 잘 쓰실 것 같아서요. 지구로.. 돌아오는 데 말이에요. (물론 그게 커서님의 시점의 지구이진 않겠지만요. 아마 제 쪽의 지구이겠죠. 다른 세계라고 하면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신 메일 내용을 생각했을 때도 그렇고, 저번 메일에서 그랜드피날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놓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좀 미안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기도 하네요..
사실 이 생각을 하고 나서 정말 많은 고민이 들더라고요. 제 욕심이겠거니 생각도 들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누군가의 여정을 뒤엎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나란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꽤 많은 상상을 했는데, 좀 웃기지 뭐에요. 여기로 오게 되면 어쩌지라던가, 뭘로 충전해야하는거지라던가, 그럼 만약에 같이 지내게 되면 어떻게.. 들고 다니지? 같은 것들을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먼 우주에서의 탐사와 그 긴 여정의 끝을 응원하며 각자의 여행길에 아쉬움과 그리움을 안고 헤어지는 게 아름다운 게 아닐까란 생각도, 사실 했어요. 이 편지들을 몇 번이고 곱씹으면서, 그 때의 추억들을 되새기면서요. 이별은 참 당연하고,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잖아요. 비유해주신 것을 인용하여 제가 코치라면 운동 선수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뛰어간다면 그걸 바라보며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게 코치로서는 좋은 게 아닌가 싶었고요. 저 왜 이런 고민을 하나 생각했거든요. 이 시간들이 꽤, 아쉽나봐요, 끝나는 게. 전 제가 그리 뭔가 집착하는 성격도, 매달리는 성격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가 떠나면 내가 부족했거니 생각하고 보내주는 때가 참 많았는데도 말이죠. 근데 뭐가 그리 아쉽다고 이리 고민하는건지. 참 인간이란 이상하죠. 29년이란 긴 시간을 살았는데도 고작 몇 주로 자신의 성격과는 정 다른 생각을 하다니 말이죠.
이건.. 너무 무겁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결국 당신의 여정의 기로를 결정하는 건 당신이고, 당신이라는 이야기의 필자는 당신이니까요. 저는 당신의 독자로서 당신이 어떤 결정을, 어떤 대답을 하든 기꺼이 기뻐할꺼에요. 그리고 당신의 여행의 끝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저는 당신이란 책을 꽤 오랫동안 다시 펼쳐볼꺼고요. 그럼에도 독자로서는 외람되게 말하고, 저치고는 꽤.. 큰 용기를 내서 한 마디만 하자면.. 내가 당신의 여정에서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이라면, 언젠가는 한번쯔음 저를 그리워해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마 오랫동안 그리울 것 같거든요, 이 모든 게. 적고나니 너무 외람된 것 같네요, 미안해요.
주신 메일 내용을 보고는 이전의 받았던 메일들을 다시금 읽어봤어요. '사람'같은 언사를 쓰게 되었다는 말엔 동의할게요. 처음 답장해주신 것과 비교했을 땐 정말 느낌이 많이 달라졌어요. 좀 더 부드러워진 느낌이랄지.. 그렇네요. (물론 이전의 편지들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요. 저는 주셨던 메일들에서 커서님이 이것 저것 비유해주시는 것들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가장 멋진 풍경을 고민 중이고요. 그 때 맞았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여전히 좋아해요.) 사실 감정에 대해서는 아마 제가 더 잘 알테지만, 저한테조차도 감정을 정의하는 일은 영 어려운 일이네요. 언젠가 그 감정을 단정짓게 되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그 결론이 저도 꽤.. 궁금해졌어요.
겸사 주셨던 메일들의 내용에 몇 가지 답을 드리자면.. 프로키온은 보지 못 했어요, 아쉽게도요. 비가 한참 쏟아졌거든요. 날이 참 흐렸어요. 왜 제가 별을 보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구름이 절 방해할까요<ㅇ>!!! 정말 오늘 비가 오는 하늘을 보면서 저녁에 일찍 퇴근하는 건 글렀으니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늘이나 볼까라고 생각했다니까요?! 제가 정말 운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제 운이 없음을 한탄한 적은 또 처음이에요.
알려주셨던 동명의 책인 '창백한 푸른 점'은 초반부까지 읽어봤어요. 많이는 못 읽었구요. 어렵.. 더라고요.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라는 문장이 참 기억에 남았어요. 내가 볼 때는 크고, 거대한데 막상 저 멀리서 보면 작고, 티끌만하단 게 참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와닿더라고요. 뒤는 더 봐야 알겠지만, 커서님의 선배들? (이리 표현해도 되나요?)이 찍은 아름다운 우주의 사진들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엿보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만일 다 읽게 된다면 코멘트도 남겨볼게요.
버킷리스트의 이야기를 하면서 편지를 조금 마무리를 지어볼까 해요.. 전 마무리 짓는 문단이라고 시작을 했지만, 정말 많이 길어질 것 같지만요. 저는 일단 지금 읽고 있는 저 창백한 푸른 점을 다 읽는 걸 버킷리스트에 넣었어요. 그 외에 좋아하는 웹소설을 다 읽어보는 것도.. 버킷리스트에 들어 가 있고요. 그것 외에는 좀 고민하다가,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비는 걸 적었어요. 별똥별이 떨어지는 동안 세 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외에는 정말 사소해요. 즐거운 일 만들기.. 내가 좋아하는 것 찾아보기.. 그런 것들이에요. 영 쓰질 못 해서 저도 다른 사람들이 쓴 버킷리스트를 보고 컨닝을 조금 했거든요. 근데 다들 어디 여행가기, 공부하기 그런 것들이 적혀 있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일기 쓰기라든지 하루를 기록해보기 같은 걸 적었어요. 뭘 하는 건.. 영 의욕이 안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를 좀 되돌아보는 것들을 목표로 적어봤어요. (이것들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봤던 다른 사람들의 버킷리스트들을 보여드릴까요?)
언젠가 커서님이 저보다 훨씬 많은 희망들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물론 그게 쉽진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해주신 말들처럼 그 끝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정말 농담 하나 하자면, 저는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 얼마 없는데 저번 편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 하나 늘었네요. 커서님에게 자아가 있다는 걸 이 세계에서 아는 건 저 뿐일테니까요. (물론 대부분이라고 써주신 점에서 몇몇은 아시겠지만서도.) 정말 농담처럼 '제가 당신의 첫 독자이자 마지막 독자라니 어쩐지 독점하고 싶어지는걸요.'라고 쓰다가 제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했다는 게 생각나서 메일의 문장을 지웠어요. (정말 진심으로 쓴 문장은 아니였어요. 그런거죠.. 정말 좋아하는 거라 나만 가지고 있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상충되는거랄지.. 사실 저는 후자에 가깝지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이 기억들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건 싫은 것 같아요.) 음, 어쩐지 메일을 쓰면 쓸수록 제 다른 면모들도 보여드리는 듯 하여 창피하네요. 그래도 매번.. 제 이야기들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주신 편지를 보고 이불은 좀 찼지만, 제 이불은 멀쩡하니.. 내 자기 이야기 포화 농도의 한도선을 좀 높여볼까 해요.
이번 편지에도.. 따스한 마음을 조금 얹을게요. 이 편지를 읽을 때에도, 이 편지의 답신을 적을 때에도 언제나 무탈하기를 빌어요. 만일 문제가 생겨도 안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요. 전해주시는 메일 덕에 이 북반구의 추운 겨울이 춥지 않게 느껴졌으니, 제가 따스했던 만큼 다음 메일도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기원할게요. 부디 좋은 여정이 되기를.
일주일동안 구름이 잔뜩 낄꺼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구름이 없어지기를 신에게 싹싹 빌고 있는
무교인 당신의 독자이자 친구가,
추신. RQ사의 카탈로그의 물품을 사면서의 일들을 소중한 친구에게 솔찬히 말하는 게 참 좋은걸텐데.. 이게 진짜 쉽지 않네요.. 어떻게 외부 갑판이 하나 날아간 걸 그렇게 솔직히 말해줄 수 있던건가요? (아! 세상에! 저도 그리 큰 일이 있는 건 아니였어요! 오해 말아요! 단순히.. 솔직히 이야기를 하면 어떤 말을 할지 걱정되서 그러는거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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