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아카이 슈이치에게는 빚을 졌다. 그건 빚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라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기도 했다. 조직의 일원은, 결코 내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라이가 아니라, 아카이 슈이치에게 빌어, 살아남았다. 증인이 될 생각이 없다고, 협조할 생각 따위는 없다고 말했음에도 그는 내게 FBI의 증인보호프로그램을 권했다. 만약 그의 권유에 응했다면, 나는 양지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기적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 테고, 어느 누구와도 깊은 교류를 갖는 게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전해온 어떤 세계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세계일 테지. 적어도 늙은 노인의 사타구니 속에 고개를 파묻어야만 하는 세계보다야, 목을 졸리는 와중에 마치 환희라도 느끼는 마냥 굴어야 하는 세계보다야. 그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야 하는 세계보다야. 조금 번거로울 테고, 사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겪어온 삶의 여로에 비하면 그다지 번거롭다고 말할 만한 것도 되지 못할 터였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죄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과거의 내가 저질렀던 수없이 많은 죄에 짓눌려 죽는다고 할지언정, 내가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든지 하는 고결한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는 주지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바라던 게 아니었다고 할지언정, 나는 죄를 저질렀고, 혹은 그 죄에 동참했다. 변명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 변명할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거대한 증오나 원망에 의한 살인보다도 더 악질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의 무게조차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불과했으므로. 선하게 살고 싶었다면, 그 옛날의 날에 죽었어야지. 반대로 말하자면, 그 옛날, 살고 싶었기에 나는 기꺼이 선하게 사는 일을 포기했다. 어떠한 고귀한 사명도 존재하지 않고, 한낱 비루먹은 어린 아이에게 선하게 살기 위해서 죽으라는 말은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가. 인간의 탄생은 내던져짐이다. 나는 그 거리에 내던져진 것이었고, 살아가는 것을 골라왔다. 그게 설령 수없이 많은 죄악을 요구한다고 해도, 살아남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다가, 버본을 만났고, 버본이 나의 의미가 되었다. 다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전부 바쳤다. 그게 전부였다. 그 모든 행위에는 행복해져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든지 하는 대단히 고결한 자의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골랐고, 그건 사실 그 무엇보다도 ‘행복’이라는 걸 추구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요컨대, 나는 내가 바라마지 않는 행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이란 소리다. 그게 누군가의 고통일지라도, 혹은 어느 누군가가, 내가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을 염치없다고 비난하고, 불행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그러니 아카이 슈이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대단히 고결한 죄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그 제안을 고를 수 없었던 것뿐이다. 증인보호프로그램은 FBI의 시선이 따라붙을 테고, 행동의 제약이 될 테니.
그것은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구태여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보호해야 할 중요한 인물들은 앞으로 몇이고 더 있을 터였다. 나는 그 시스템이 없더라도, 이미 ‘죽은 자’로 처리된 이상, 눈을 피해서 살아남을 정도의 재주는 지니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그 시스템이 시선을 끄는 수도 있었고. 무언가를 행한 이상, 그것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었다. 아카이 슈이치가 제안한 그 양지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걸 포기한다면, 내 한 몸 숨기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태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존재한 적이 없는 인간이 또 다시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유령이 또 다시 유령이 되는 일이 어려울 리 없지 않은가. 양지의 인간보다, 음화의 유령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은 법이었다.
설령,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의미 없이 숨을 쉬었고, 그렇게 연명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이었다. 모든 초점은 생존이었다. 그게 가축이나 다름없는 삶이건, 아니면 차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비루먹고 구질구질한 삶이든. 신이 정말로 잔인한 게 있다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살아가고 싶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온갖 고통 앞에서 처절하게 으스러지고 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질 정도로 덧없는 것이기도 했다.
죽으면 끝이었다. 그건 모든 괴로움의 종식이기도 했으나, 모든 가능성의 끝이기도 했다.
나는 살아남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생을 연명했다. 그렇게 살다가, 버본을 만났고, 그는 나의 의미가 되었다. 그것으로 살아있었던, 다만 숨을 연장하는 작업에 불과했던 모든 일들은 가치가 있었다. 그게 얼마나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삶이었든.
그러니까 아카이 슈이치의 손을 빌어 살아난 지금도 그랬다. 아마도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은, 그러니까 내가 행동하길 바라는 방향은, 양지의 세계에서 살아갈 의미를 발견하는 일일 테다. 아마 그것 역시도 언젠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고르기로 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 자살이 유예되었다면, 애석하게도 나는 그 유예된 삶을 의미 있게 쓸 대상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카이 슈이치의 호의가 무색하게도 말이다.
조직은…. 조직은 위험한 곳이었다. 그들 자체가 죽음이기도 했고, 언제나 죽음의 곁에 있기도 했다. 버본이 그곳에 남아있는 이상, 목숨이 위험한 일은 앞으로 몇 번이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스카치처럼 정체가 발각되어서 처리될 수도 있었고, 라이처럼 제 스스로 몸을 빼내려고 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목숨을 걸어야만 할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를 위해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양지의 세계로, 다시 그의 그 ‘인간다움’의 세계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단지 그 가능성으로 충분했다. 나는 아카이 슈이치의 모든 안배와 제안을 저버리고 몸을 감췄다. 그의 동료들은 그 본인만큼 유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빚을 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건 2년이 지난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 내 삶에 있어서 그는 분명 거대한 의미였다. 그가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던 것으로 충분히 그랬다. 그리고 내가 그의 호의를 저버린 것도. 조직의 비호를 받을 수 없었지만, FBI의 시선을 피해 제 몸 하나 감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범죄자도 아닌 이상은 더더욱. 나는 밑바닥을 전전했다. 어린 시절과는 달랐다.
내가 이곳에 도달한 것은 그에게 진 빚 때문이었다. 히로타 마사미.
아니, 그 이름은 날조된 이름이었고, 미야노 아케미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은행 강도는 세련되지 못한 범죄다. 은행에서 대량으로 훔쳐내는 현금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돈, 요컨대 보통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돈이 아니라, 다른 은행에서 들어오는 돈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은행이 가장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당연히 현금수송차량이 들어올 때다. 전자금융은 추적이 들어오기 너무 쉬웠고, 그나마 추적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현금이었다. 은행 강도는 두 번은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한 번을 시도할 때, 가장 많은 것을 얻어야만 한다. 파이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 크기를 최대한으로 키워야만 하는 것이다. 가담자들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분란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각자 만족스럽게 나눠가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파이가 아닌 이상, 설사 은행에서 돈을 빼냈더라도, 정말로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담 그렇게 커다란 파이가 생기는 때가 언제냐, 하면 현금수송차량이 들어올 때였다. 현금보유량이 최대로 될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빼돌린 현금에는 문제가 생긴다. 현대의 지폐에는 일련번호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현금수송차량을 통해 들어온 현금은 그 일련번호로 추적할 수 있었다. 시중에 돌고 있는 돈이라면, 그 개개의 일련번호를 확인할 수 없다지만, 본점에서 막 빠져나간 현금은 사정이 다른 법이었다.
그러므로 정말로 돈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라면, 은행 강도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은행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현금수송차량을 목표로 축소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랬다. 리스크에 비해서 얻는 것은 이렇게 불확실한 범죄를 대체 어느 범죄조직이 저지르겠는가. 추적할 수 있는 돈은 쓸 수 없는 돈이다. 그건 정말로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범죄였다. 수억 단위의 현금을 빼돌렸다고 할지언정, 정말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되지는 않지. 고액권 지폐를 야금야금 쪼개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리고 너무 많은 시도가 필요하며, 일련번호를 알고 있는 돈을 언제까지고 놓칠 정도로 무능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숙달된 이라면, 저지르지 않을 일이었다. 조직은 이렇게 서투르고 어설프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직이라면, 능히 이 돈을 빼돌릴 수도 있겠지. 이 세련되지 못한 범죄는 어디로 보나 조직의 소행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주 무관하지도 않겠지.
미야노 아케미는 간부의 자매였다. 연구원인 그 간부는, 제 부모의 연구를 뒤이어서 하고 있다고 했나. 나는 진에게 들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회고했다. 내가 미야노 아케미를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가 ‘라이’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흔적을 쫓는 것 역시도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비교적’이 붙기는 하지만.
‘라이’의 배신은, 그가 조직으로 들어오는 교두보 역할을 한, 그의 연인 ‘미야노 아케미’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조직은 위협을 만든 요인을 좌시하지 않는다. 내가 오래도록 조직에 몸담으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조직은 극도의 조심성으로 언제나 몸을 사린다는 것이었다. 보스, 그러니까 그 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그 분에게 라이가 직접적인 위협이 된 이상, ‘미야노 아케미’는 빠르나 늦으나 처리될 운명이었다. 설령 그녀의 자매가 조직에서 귀애하는 연구자라고 할지언정, 그 ‘진’이 몹시도 만족스럽게 여기는 연구자라고 할지언정, 바뀌는 것은 없었다. 아니, 그나마 그러한 간부가 그녀의 자매였기 때문에 그녀는 배신자를 조직 내부로 끌어들이고도, 지금껏 처리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야 옳았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라이도, 그의 본래라고 할 수 있는 아카이 슈이치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미야노 아케미를 선택하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 터질 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을 몸에 칭칭 동여맨 채로 연명하고 있었다.
한 때 표면의 세계에 속했던 미야노 아케미를 추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베르무트처럼 ‘천의 얼굴’을 지니진 못했으나, 남의 뒤를 쫓을 정도의 얼굴은 몇 지니고 있었다. 나는 남녀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체구였고, 본래의 모습을 감추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미야노 아케미의 주변에 눌러앉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똑같은 모습을 유지할 필요도 없지. 소모품의 얼굴들이었다. 적당히 쓰고 버리는. 공들일 필요가 없는 얼굴들은 추적하기도 어려운 법이었다.
그녀가 표면의 세계에서 지녔던 것들은, 그저 그녀를 얽어매는 또 다른 이력일 뿐이었다. 좀 더 쉽게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아마, 그녀가 잠입의 수단이 되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나처럼 완전히 지저에 속한 이들에게는 손이 닿지 않았을 테지만, 한 때 표면에서 이력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손 정도는 닿을 수 있었겠지. 잠입을 위해 쓰기에는 그럭저럭 구미에 맞는 대상이었다.
미야노 아케미 정도의 여자의 흔적을 쫓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코드 네임도 받지 못했고, 그녀의 동생처럼 대단히 특별한 재능을 지녀서, 조직에서 기를 쓰고 감시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직에 몸을 담았고, 표면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표면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미 공범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조직의 간부로 남아있는 여동생을 버릴 강단이 없기도 할 터였다. 이미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상대에 필요 이상의 힘을 투입할 조직은 아니었다. 하물며, 곧 처리해버릴 패였으니.
한 때 라이의 연인이었던 여자. 그녀가 조직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딱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겠지. 그 간부라는 동생이 제정신이라면, 알아봐야 목을 죌 뿐인 이야기들을 제 언니에게 했을 리가 없을 테고, 그렇다고 자력으로 조직의 정보를 캐낼 정도로 그녀가 유능할 리도 없었다. 만약, 그 정도로 유능하다면, 누군가의 잠입 수단으로 이용되지도 않았을 테고, ‘은행 강도’ 따위의 일을 벌일 리도 없었겠지. 그것도 어디로 보나 쓰고 버릴 패인 게 훤히 보이는 조직의 계획에 응해서. 고작해야 ‘히로타 마사미’라는 가명 하나를 방패삼아, 강도질할 은행에 잠입했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정말로 이 모든 게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두 번 다시 표면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테다. 조직이 정말로,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이 지저를 전전하는 수밖에 없었을 테지.
비린내가 났다. 지겨운 비린내였다. 그들이 짠 계획이 완료되었다. 모든 게 끝난 뒤에 남은 것은 싸늘하게 식어가는 여자와, 훔쳐보고 있던 나뿐이었다. 조직의 계획이 끝날 때까지는 손을 뻗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종막을 내린 이상, 그 뒤로 손을 뻗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서 목숨을 건 언니라…. 이 일이 끝내면, 조직에서 빼내 주겠다는 말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적어도 그 동생 쪽은 ‘우수한 두뇌’라서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을 테지만, 위협을 끌어들인 미야노 아케미는 죽음으로써 조직에서 배제할 심산이었겠지. 구질구질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아카이 슈이치에게 빚을 졌다. 고작해야 수단이었을 여자가, 그에게 과연 얼마나 의미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진의 안목을 믿어볼 법도 했다. 그가 구태여 이 구질구질한 방식으로 그녀를 살해한 저변에는 어느 정도 라이에 대한 증오가 도사리고 있을 테니.
히로타 마사미의 환부에 지혈제를 주사하고, 대강의 처치를 했다. 수술을 하기 전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족했다. 피가 묻은 그녀의 옷가지 위로 기름을 뿌렸다. 콸콸 기름이 쏟아졌다. 나는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히 창고 곳곳에 기름을 뿌렸다.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총상의 고통은, 익숙하지 않은 이가 쉬이 견딜 게 되질 못했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났다. 창고의 입구에는 아직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귀찮게 됐군. 소위 ‘증발’하기 위해서는, 이 소년을 처리하든, 아니면 무슨 수를 쓰든 해야 했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저 이 소년 역시 창고와 같이 처리해버렸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이 마사미 씨를 조종한 흑막인가!”
대꾸해줄 가치는 없었다. 소년이 손목시계의 유리뚜껑을 내게 ‘겨눴다’. 무언가를 ‘쏘려는’ 건가. 대체 무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총기가 아닌 이상 썩 위협이 되질 않았다. 소년은 히로타 마사미가 어느 정도의 응급처치가 완료된 것을 확인한 뒤로는,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손목시계로 겨누고만 있는 것으로 보아, 단발성인가 보군. 지금 그가 내게 그걸 쏘지 않는 건, 성인 여성을 혼자 운반할 수 없기 때문. 그러나 내가 저 소년이었다면, 미야노 아케미가 때를 맞추지 못해 죽는 것을 감안하고, 쏴버렸을 터였다.
“대답해…!”
“코…, 코난 군…?”
“마사미 씨!”
불을 붙이는 건, 미야노 아케미를 옮긴 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 꼬마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한 뒤에. 빈 기름통을 창고 안쪽으로 던져 넣었다. 빈 통이 나뒹구는 소리가 창고를 적적하게 울렸다. 지문이나 흔적 따위는 조금도 남지 않을 터였다. 그들의 대화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조직에 대해서 누설하려는 쯤, 미야노 아케미의 입술을 손으로 짓눌렀다. 네가 말해도 될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에게 이야기할 법한 내용이 아니었다. 꼬마가 시계를 겨누려는 찰나, 손목을 잡아 제압했다.
“너는 똑똑한 꼬마처럼 보이니 이야기해주지. 이 이상 연관될 생각은 버려. 이 일은 영원히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선 안 돼. 그러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끝날 거다.”
진이라면, 그래. 충분히. 일곱 살짜리 어린 아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과연 그런 걸 알기나 하는지 의문이군. 잔뜩 긴장한 꼬마의 명치를 강하게 올려쳤다. 멍이 들 테고, 어쩌면 갈비뼈가 좀 부러졌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죽여서’ 끝내는 것보다야 나았다.
아카이 슈이치에게는 빚을 졌다. 내가 그곳에서 죽었을 미야노 아케미를 빼돌린 건, 그 정도의 이유에서였다. 그 과정에서 미야노 아케미가 죽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히 필사적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수단이었을 뿐인 그녀가 정말로 아카이 슈이치에게 유의미한지도 모르는 마당에, 전부를 거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은 그저 내버려두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기도 했다. 아카이 슈이치는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으니, 모든 게 다 무의미한 일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나는 미야노 아케미를 표면의 세계로 빼돌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버려둘 수도 없었다. 조직이 붕괴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녀를 끌고 다녔을 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폭력이었다. 납치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를 설득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내 목적은 그녀의 신뢰를 얻거나, 혹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혹여 그녀가 아카이 슈이치에게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빌어 빚을 갚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그 여동생이 있던 제약회사가 불탔다는 기사를 본 그녀가 좌절할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여동생의 일은 슬프지도 않았고, 유감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몰인정하게, 마치 물품처럼 그녀를 끌고 다녔을 뿐이다. 그건 조직이 하던 일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그 어디에도 그녀의 의사는 속해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어쩌면 체념한 것일 수도 있다. 살아갈 의미를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 그랬듯. 아니면 내심 반발하고 있지만, 조직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 모든 건 오늘로 끝이었다.
조직은 붕괴되었고, 나는 마침내 그겻을 확신했다. 그래. 그 거대한 조직이 무너진 뒤로, 곳곳에서 그 공백으로 몸살을 앓았다. 조직이 얼마나 추악한 곳이든, 그 규모만큼,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나는 내가 알던 곳들이 전부 무너지고, 뒷골목의 지각변동이 확실해진 뒤에야 움직였다. 아카이 슈이치에게 연락을 넣었다. 사적인 연락망은 아니었다. 그저, 그 FBI가 지닌 공식적인 경로에 흔적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그것이면 충분히 추적해올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이쪽에서 구태여 흔적을 지우면서 도망치지 않는 이상은 더더욱. 조직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인간이라면, 더욱 기를 쓰고 따라붙겠지.
한적한 카페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놓았다. 미야노 아케미가 묵묵히 내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나와 잘 대화하지 않는다. 나도 그녀에게 말 붙이는 일이 별로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비협조적이지는 않았다. 도주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협력은 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언제까지?”
“기다리다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걸로 끝일 테니까. 나는 카페 밖으로 빠져나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날이 제법 무더웠다. 내가 아카이 슈이치에게 빚을 진 게, 겨울의 초입이었으니,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날씨였다.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전자기기는, 아까 그 휴대전화가 전부였다. 나는 거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새로운 얼굴을 제법 꼼꼼하게 뒤집어쓰고, 전철을 탔다. 레이건 역에서 내렸다. 지금쯤이면, 아마 도착했겠지. 편의점에서 선불 전화를 구입했다. 나는 내 스스로 눌러본 적 없지만, 익숙하기 그지없는 번호를 눌렀다.
“라이.”
-너는 대체….
“네가 그 때 했던 제안은, 그 여자에게나 해. 빚은 이걸로 끝이야.”
-지금 어디야.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나는 비행기 시각을 확인했다.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혹은…. 아마도 내가 지금 그를 찾아가는 일은, 썩 현명한 일은 아닐 테지. 그렇지만 이미 어리석은 일이라면 많이 해왔으며, 나는 실제로도 어리석었다. 만날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가 다시 양지의 세계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랐기에 그랬다.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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