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오렌지 슬라이스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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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천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페놀 냄새가 났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버본이 총을 쐈고, 옆구리에 직격했다. 스치는 수준이 아니라, 정확히 박혔다. 지혈제 하나를 고스란히 주사했고. 아주, 아주 조금 더 살고 싶다고 여겼다. 이곳에서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만, 더 버본이 내게 남긴 그 달콤한 인간의 향기를 맡보고 싶다고. 그래서 그저 고통을 연장하는 수단밖에 되지 못할 조치를 취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마치 고도처럼 나타난 것이 라이였다. 꼴이 가관이라고 했던가. 담배 냄새를 맡았고,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구태여 내가 죽는 장소에 찾아온 이유라고 하면, 뻔했다. 내 유체에 혹시라도 조직과 관련된 정보가 남아있을까 싶어 찾아왔겠지. 죽기 직전에 내가 소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빌어서라도, 그는 조직의 정보를 얻고 싶었던 것이다. 여차할 때를 대비하여 지니고 있던 총이나, 아니면 자살용 독약, 휴대전화나, 신분증 따위. 내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죄다 털어내다 보면, 조직의 티끌 정도는 붙잡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별로 유의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라도 때를 맞추는데 실패해 조직원이 나를 죽이고, 유체의 소각마저도 끝낸 뒤라면, 수확이라곤 조금도 없었겠지만, 해볼 가치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겠지. 아니면, ‘간부’를 처리하러 온 다른 ‘간부’를 확보해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나의 죽음이었다. 라이가 취할 행동 중 어디에도, 나를 살려놓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품속을 뒤지려던 손이 멈췄다. 지금 나는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니라, 얇은 환자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소지품들은 모두 다 사라져있었다. 라이가 거둬갔을 테지. 권총도, 독약도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살려놓은 이유가 뭘까. 정보를 원한다면, 애석하게도 내가 라이에게 팔 수 있는 정보란 별 게 없었다. 팔아봐야 위험해질 뿐이다. 라이도, 나도. 별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험주의적 공산혁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로 때가 무르익기 전에, 모험심으로 해보는 공산혁명은 실패하고, 에너지를 소모할 뿐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여기서 정보를 넘긴다고 한들, 그건 ‘모험주의적 공산혁명’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지금의 라이는 성공할 수 없다. 라이가 치고 들어간다면, 조직은 그저 그가 물은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운 모습을 취할 게 분명했다. 조직은 그럴 역량이 충분히 존재했다. 라이가 잠입을 포기했던 시점에서, 조직의 괴멸은 연기되었다. 기약 없는 연기였다.

내가 여기서 라이에게 정보를 좀 넘겨본다고 해서, 바뀌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늦었다. 라이와 그의 동료 FBI 요원이, 그도 라이의 발목을 잡았던 멍청한 수준이라면 더욱이 덤벼든다고 한들, 실체에는 결코 닿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 환영에 닿았던 손은 썩어문드러지겠지. 조직은 제게 이를 드러내는 놈들을 보아 넘겨줄 정도로 무르지 않았다. 처리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라이만큼 유능한 인물이라면, 조직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조직의 눈에서 몸을 감출 재간 정도는 되었다. 아니, 어떻게든 몸을 감추고 숨을 죽여야만 했다. 나의 처리를 담당했던 버본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랬다. 나는 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셈이었다. 내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 무엇이 되었든, 설령 그것이 스스로의 죽음이라고 할지언정. 버본에게 위협이 된다면….

그러나 과연 다른 이들도 그럴까? 라이나 내가 조직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곧 일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의미하진 않는다. 뻗은 손은 순식간에 괴사하고, 그곳으로부터 감염이 시작되어, 곧 관련자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증발하겠지. 라이가 나를 살려서 원하는 것이 정보고, 그것으로 조직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그건 몽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라이가 그런 망상을 할 정도로 몽상가인가. ‘조직’에 잠입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정말로 ‘제정신’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는 의심스럽기야 했지만.

그렇다면 라이는 대체 왜…. 도통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뇌리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이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인간은, 라이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답해줄지도 알 수 없었으며, 설령 그가 답해준들, 그에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라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모로보시 다이라는 이름으로, 미야노 아케미라는 여자를 빌어 조직에 스며들었고, FBI 수사관이었으며, 대단한 실력을 지닌 저격수고,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 잠입을 포기했다는 게 전부였다. 실제로 라이가, ‘아카이 슈이치’라는 이름을 지닌 FBI 수사관인 그가 어떤 인종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실력이야 거짓말이 아닐 테고, 아무리 무능한 동료라고 할지언정,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나, 고작 그 뿐이었다.

팔목에는 튜브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링거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수액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통증이 심하지 않은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진통제가 섞인 수액이겠지. 그리 익숙한 경험은 아니었다. 조직은 규모가 있었고, 그만큼 비합법적인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연결고리가 있는 곳들은 제법 수가 되었다. 그 중에는 도박장이나, 혹은 풍속업소 따위의 곳들도 있었지만, 응당 양지에 속해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곳들 역시 있었다. 가령, 병원이라든지, 아니면 호텔이라든지. 조직의 규모는 밖에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코끼리의 고사를 아는가. 조직과 적대하겠다는 외부인들은, 대개 코끼리의 발이나 코, 혹은 상아 따위를 더듬을 뿐, 그 전체의 모습을 모르는 맹인들이었다. 너무 거대한 것을 눈앞에 두면, 인간의 시야란 너무나도 비좁기 마련인지라, 차마 그 전체의 모습을 조망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 거대함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고, 바보짓을 하는 게다. 여하간 조직은 거대했고, 신원이 불분명한 이들이 쓸 수 있을 병원쯤은 몇 구비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사람을 소모품으로 쓰는 곳이라고 한들, 코드네임을 부여받을 정도면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 때문에, 내다버릴 정도로 조직은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멍청했다면, 코드 네임을 받을 정도의 이들이면 옛적에 조직에서 벗어났겠지.

내가 코드네임을 받은 것은 한참 전의 이야기였다. 의료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랬다. 그러나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어쨌든 진통제가 섞인 링거를 맞고 있는 경험은 더욱 그랬다. 얼마든지 의료 서비스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여유가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아주 급한 경우가 아닌 이상, 병원에 입원하는 일은 드물었다. 제아무리 조직의 병원이라고 할지언정, 병원인 이상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니 더욱. 총상은, 글쎄. 병원에 늘어져 있어야만 할 정도로, 대단한 범위에 속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는다면, 수술이 끝나는 대로 병원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병원의 링거가 아니더라도, 통증을 죽일 방법 따위는 얼마든지 있었고. 사실, 이런 링거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통제이기도 했다. 진이라면 입에 진통제를 쑤셔 넣고, 움직이라고 할 터였다. 나 역시도 그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링거에서,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이.”

따라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라이 한 명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라이를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아무런 무게도 가질 수 없었다. 신뢰한다는 이유로 위험하게 만드는 건 불합리하다. 적어도 두어 명은 더 대동했어야지. 라이와 나는 결코 서로를 믿을 정도의 사이. 그러니까 적대적인 입장임을 알면서도 홀몸으로 마주할 정도의 사이가 되질 못했다. 만약 내가 그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면, 그러니까 마음대로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처지였다면, 나는 두어 명은 응당 동행했을 테고, 꼼작도 할 수 없도록 약물에 절여놨겠지.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했을 테다. 라이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더욱. 그러나 그 반대라면, 그러니까 라이에게 나는 그 정도로 경계할 가치가 없다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고 할지언정,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총상을 입은 상태라고 해도, 코드 네임은 괜히 받는 게 아니었다. 나는 라이를 살폈다.

“일어났나? 일어났더라도, 깨어나지 못한 체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봐야, 무의미하지 않나. 조직에서는 처리된 몸인데, 도대체 뭐를 기다려서 깨어나지 못한 체를 해. 내가 생각했던 모든 건, 거기서 끝났는데.”

그래.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게 끝난 그곳. 나는 요 몇 년 간 그 마지막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버본이 풍기는 그 인간의 냄새를 맡은 뒤로, 내 모든 생각의 초점이었다. 비록 불분명하던 시절이 있었고, 라이가 스카치의 죽음을 빌어 조직의 신뢰를 산 뒤에야 명확해진 마지막이었다고 할지언정. 내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떨어져나간 이상, 나는 마땅히 기다려야 할 게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게 있다면, 버본이 남겨준 그 희미하고 작달막한 온정일까.

“살려준 이유가 뭐야, 정보를 원하는 거라면, 내가 내뱉을 말은 아무것도 없어. 무의미하고, 전부 위험해질 뿐이니까.”

“호오, 전부?”

“그래, 너나 나뿐만 아니라, 전부.”

버본 역시도. 내 뒤처리를 했을 버본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너무 컸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 말미암아 조직에게 덤벼든다는 건, 내가 가장 안전하게 만들고 싶었던 소중한 보물을 위험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가. 조금 안타깝군.”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내뱉는 건 좀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기야, 그렇게 뻔뻔하니, 조직의 눈을 속이고 잠입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 FBI의 수사관치고는 놀라울 정도였다. 능숙하게 조직과 동색인 마냥 행동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추잡하고 더러운 체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점에서 라이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가 스스로 제 모습을 들추어낼 때까지, 그가 선량한 세계에 속하리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지. 그를 의심했던 진이라고 한들 그랬다. 다른 마피아나, 범죄 조직에 속해있다면 모를까, 설마 FBI일 줄은.

“뻔뻔하다라…. 그 말, 고스란히 돌려주지.”

“뭐?”

“너는 내게 스카치를 언급했지. 그렇다면 적어도 근 2년 동안, 너는 내가 FBI의 잠입조사관인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직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왜지?”

라이의 눈동자는 초록색이다. 나는 물끄러미 그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유는 명료했다. 언젠가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여겼기에. 조직에 바로 말해버리는 것보다도 훨씬 효과적으로,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패였기에 그랬다. 나는 조직과 동종의 인간이었지만, 진처럼 충성스러운 인간도 아니었다. 조직에 유리한 일이라는 게 곧 내게 좋은 일이란 법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바라마지 않는 일을 위해서라면, 조직의 손해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왜, 나에게 도움을 줬나.”

“딱히, 널 도와줄 생각 따위는 없었는데. 내가 원하는 일에 쓰고자, 입을 다물었을 뿐이지. 나는 어디까지나 내 이해관계를 위해서 움직였고, 그 와중에 오히려 너를 이용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지.”

그러니까 나는 라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보를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문을 통해서 유효한 정보를 얻어내는 일은 요원한 일이었다. 사람의 정신은 섬세했고, 망가뜨린 상태에서 내뱉는 정보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내가 가족이나, 친인을 지녀, 그들을 빌미로 협박한다면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가진 것은 옆구리의 총상이 전부였다. 그 시점에서, 그가 해야 될 선택은 적어도 나와 이 지루한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었다. 진이라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단언한 시점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진은 협조한다고 하더라도, 용건이 끝나자마자 처리했겠지만. 그리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비정하다고 라이를 매도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수사관이었고, 나는 조직의 일원, 범죄자였다. 누군가의 삶을 박탈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그래.”

“물어볼 건 끝났나? 그러면, 끝내지 않겠나.”

“끝내?”

“그래. 내가 생각했던 마지막은 그 항구였으니까. 물어볼 게 끝났다면, 끝내고 싶군,”

라이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나는 단 한 번도 라이에게서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와 나는 어디까지나 같이 일을 하는 사이였을 뿐이고, 우리의 일이란 그렇게 다정하고 살가운 관계를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왕 살려둔 걸, 다시 죽게 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뒷맛이 안 좋아서 말이야.”

“그러면 고문이라도 할 생각인가? 구식이군. 설사 그렇게 알아낸들, 네가 그 잠입에서 실패한 이상 조직에게 타격을 입히는 건 무리야. 그 정도 조언은 해주지. 네 실패는 조직의 수명을 연장시켰고, 정말로 조직을 무너뜨릴 생각이라면,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과연 그 때가 언제 올 지는, 혹은 실제로 도래할지조차도 알 수 없지만. 버본이 그저 그 때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혹은, 그가 그의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조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아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고문 따위는 하지 않아. 너는 아직 젊고, 죽기에는 너무 어려.”

죽기에 어리다라….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죽음에 적당한 나이 따위는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삶들을 수없이 많이 알았다. 밑바닥이란 그랬다. 가축만도 못하게, 간신히 헐떡거리며 숨을 연명할 뿐인 삶들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정보를 얻어낼 게 아니라면, 일찌감치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버본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는 한, 어떠한 말도 입에 담지 않을 것이었고, 그러한 이상, 나를 살려둔다는 건 자원낭비일 뿐이었다.

“너를 살아가게 해주마. 이미 살린 이상, 그 정도의 책임은 져야겠지. 언젠가 네가 자발적으로 내게 모든 걸 이야기하도록, 꾀어내볼 심산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입을 여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 그만둬.”

“살려준 이유를 물었었지?”

“그래.”

“나도 잘 모르겠군.”

나는 내가 라이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실감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깔로 일렁거렸다. 그러니까, 내 앞에 서있는 남자는 아마도 ‘라이’가 아닐 것이다. 진이 이야기했던 이름을 떠올렸다. 아카이 슈이치. 그래. 내가 알고 있는 라이가 아니라, 아카이 슈이치가 나를 바라보았다. 일순 당장이라도 그 시선에 꿰뚫려서 죽어버릴 듯했다.

“너는 너무 어려.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게, 그 답이 되어주지 않겠나.”

“순, 엉터리인 소리를 하는군. 기껏해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으면서 어리니까 어쩌고 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나? 나는 조직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야. 나를 살려두는 건, 오답일 뿐이지.”

“그럴지도 모르지.”

아카이 슈이치가 입술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입이 심심한 듯했다. 생각해보면 라이는 제법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이었다. 그건 아카이 슈이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군.

“그래도, 살아갔으면 해.”

기이한, 정말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초록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의 종지부는 연기되었다. 내 삶의 의미였던 버본은 내 옆구리를 쐈다. 머리도, 심장도 차마 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라이, 아니 아카이 슈이치에게서 삶의 유예를 선고받았다.

내 모든 목적은 이미 그 항구에서 완결되어버렸음에도,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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