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앙고스투라 비터스 1 dash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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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 슈이치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스카치에게 말했던 것처럼, 당당히 빼내주겠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아주 작은 사각쯤은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정확히는,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주겠다고.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갈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재량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하거나, 신뢰를 사려는 시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저, 뇌간에 정확히 총구를 겨눈 채, 담담하게 고했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조직의 포위망이 시시각각 좁혀드는 가운데, 그녀는 돌연 나타나 그에게 선고하고 떠나버렸을 뿐이다. 그 선언에는 어디에도 믿어야할 구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다만 그 선언은 아카이의 사고의 표면 위로 파문을 그려 나갔을 뿐이었다. 일종의 혼란이기도 했다. 그녀는 스카치를 언급했다. 스카치에게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 말은 즉, 최소한 그녀는 그 때 제가 스카치에게 이야기하던 것을 엿들었다는 소리였다. 도청기를 통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아니면 그녀 역시도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버본보다도 먼저, 그리고 아카이 자신보다도 먼저,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스카치가 그곳에 오기 전부터 그곳에서 모든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카치가 그 옥상에 올라오기만을, 숨죽인 채, 아주 조용히 총구를 겨누고 있었을까. 아카이 슈이치의 앞에 돌연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스카치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는 너무 뒤늦게 알아차렸고, 모든 것을 버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매정한 인간도 되질 못했다. 조직원들에게 말살 명령이 내려온 뒤였다. 스카치를 사살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이들의 수는 수없이 많았다. 설령 그 중 대부분이 배신자의 처리로 말미암아 조직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조무래기들이었다고 할지언정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숫자였다. 아주 비정해진다면, 그 모든 추적을 뿌리치고 도망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카치는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배신자를 빼돌렸다는 혐의가, 자신과 팀을 이뤘던 이들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매정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물며 살아남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런 불확실한 도박을 위해서, 한 때의 동료였던 이들의 목숨을 내다버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에 쏜 것은 결국 제 심장이었다. 제 동료와, 가족과, 소중한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을 휴대전화였고.

궁지에 몰린 스카치는 차마 주변을 확인할 여력이 없었을 테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때 팀을 이뤘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제 동생을 보아 넘겨준 인간이기도 했다. 스카치는 그렇게 우둔한 인간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발을 걸치고, 몸을 담고 있는 이 거대한 조직에서, 코드네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는 분명히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간 중 하나였다. 그러니 제 동생이 저더러 ‘슈 오빠’라고 불렀던 것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랐을 리는 더더욱. 그가 조직에 잠입할 때 사용했던 이름은 ‘모로보시 다이’였고, 소위 ‘양지’와 연관될 이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다른 조직원이었다면, 그래, 그녀였다면 아마도 제 동생이 다가온 시점에서 사살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게도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을 터였다. 그만큼 제 동생이 제게 ‘슈 오빠’라고 부른 그 장면이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스카치 역시도 분명히 알아차렸을 터였다. 다만, 그는 자신을 대신해 버본에게마저도, 제 동생에 대해 얼버무려줄 정도로 호인이었을 뿐이었다. 제 동생을 빌미로, 제 정체를 밝혀 조직에 팔아넘기는 게 아니라.

아카이 슈이치, 그 자신만이 아니라, 제 동생마저도 연관된 일이었다. 그건 빚이기도 했으며, 그가 살아있는 채로 조직의 손아귀에 붙잡힌다면, 모든 게 위험해질 수도 있는 고리이기도 했다. 스카치는 호인이었다. 제 몸 하나의 안전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협 속에 밀어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상도 못할 잔인함 앞에서, 그가 스스로의 인간성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만약 장담한다면, 그건 오만이었고, 실책이었다.

스카치는 그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리라. 그는 제가 나타나기 무섭게 덤벼들어 권총을 빼앗았다. 차라리 그가 자신에게 겨눴다면, 덜 당황스러웠을 테다. 주변을 둘러볼 여력,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여력쯤은 남아있었을 테지. 그러나 스카치는 스스로의 심장을 겨눴다. 휴대전화와 제 심장을 동시에 꿰뚫을 수 있도록. 망설임이 없지는 않았을 테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을 고뇌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찰나의 일이었다. 리볼버의 탄창을 그러쥐고, 그를 제지하는데 온 정신이 팔렸다. 그는 그 비장함 앞에서 주변을 살펴볼 여력 따위를 지닐 수 없었던 것이다.

실책이었고, 자신의 미숙함이었다. 그리고 스카치의 죽음에는 그 미숙함이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으리라. 버본의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스카치에게서 먼저 권총을 빼앗았어야만 했다.

그녀가 제게 늘어놓은 말은 결국, 그 때 제가 얼마나 미숙했는가의 증언 이상이 되질 못했다. 그녀는 조직의 간부였고, 그들과 동색의 인간이었다. 그 냉혹한 진이 그녀를 신뢰했다. 그녀는 조직에 봉사하는데 더없이 충실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조직을 괴멸시키기 위해서는 간부들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 관찰의 대상들은 어디까지나 그가 접촉할 수 있는 일부의 이들에 불과했으나, 정도를 가늠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분명 진 못지않은 부류에 속했다..

그녀는 만약 필요하다면, 갓난아기에게도 총구를 겨누는데 망설이지 않을 인간이었다. 보편적인 도덕이나, 윤리, 선과 같은 개념들을 조금도 지니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위해서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원하는 일들은 대개 그 모든 것들을 지키면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직의 명령이 만약 그 모든 가치들을 위배한다면, 그녀는 그에 편승할 인간이었다. 그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았다. 언제든 외도를 행할 수 있는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그녀가 대체 왜 2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제가 잠입조사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는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제가 스카치의 죽음을 빌어, 조직의 중구로 다가가는 것을 왜 묵인했는가? 어째서, 침묵했는가. 조직과 동색인 그녀에게 역시도 위협이었을 터인데.

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년에 걸친 관찰이 무색해지는 행동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가 생각했던, 그가 관찰했던 모습들로는 도무지 알아낼 수 없는 답이었다.

그의 신뢰와는 별개로, 그는 그녀가 만들어준 그 작은 틈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포위망을 떨쳐내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혼자라면 모를까, 냉정하게 말해서 도움은커녕 짐밖에 되지 않는 미숙한 수사관을 동행한 채로는 더욱 그랬다. 홀몸이라면, 그녀가 만들어준 틈 따위를 이용하지 않고서라도 능히 빠져나갔을 테다. 그러나 그는 그 미숙한 수사관, 안드레 캐멀을 버릴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이 그를 버릴 것을 촉구할 때, 스카치를 떠올렸다. 그는 스카치에게 빚을 졌다. 그는 제 여동생에 대해 침묵했고, 모로보시 다이에 대해서도 함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심장을 쐈다. 아카이 슈이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의 죽음을 빌미삼아 조직의 핵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죽어버린 자에게 진 빚은 언제나 갚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는 더는 동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더는 버릴 수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스카치의 죽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 이상 동료의 죽음을 짊어지는 일은 도무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설령 그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 조직의 괴멸을 포기하는 일만이 아니라면 족했다. 비록 그 머리와 접촉할 기회를 코앞에서 놓치고, 오랜 시간을 들인 잠입이 실패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 조직에 총구를 겨눌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입을 포기하고, 동료를 살리는 것을 고르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아카이 슈이치는 안드레 캐멀을 버린다는 선택은 할 수 없었고, 짐을 짊어진 채로 당해내기에는 조직의 손은 너무 많았다. 그녀가 만들어낸 그 작은 틈이 아니면, 제 동료와 같이 빠져나갈 묘책이 없었다. 그가 그 작은 사각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건곤일척의 도박이었다. 그가 둘 수 있는 마지막 승부수였을 뿐, 결코 그녀를 신뢰해서 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그 틈을 비집고, 빠져나올 때까지, 아주 ‘우연’하게 번번이 조직의 손을 피해, 포위망에서 멀어질 때까지, 이 모든 것이 함정일 가능성을 셈했다.

조직의 포위망이 헐거워지고, 그를 쫓는 손이 흩어졌다. 적어도 반으로는 줄은 듯했다. 마치 다른 누군가를 쫓기 시작한 것처럼. 덕분에 그는 좀 더 수월하게 그들의 포위망을 따돌렸고, FBI의 권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완전히 추적을 뿌리쳤을 때, 그는 쫓기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가 조직의 시선과 손을 끌었다. 그는 조직의 핵에 다가갔었지만, 그래봐야 최근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너무 멀리 도망친 사냥감이었다. 조직이 그녀에게로 눈을 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조직의 중추에 아주 오랫동안 있었던 간부가 바깥의 세계로 흘러나간다면 그것만큼 골치아픈 일도 없을 터였다. 물론, 그녀 역시 양지의 세계와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기는 했지만. 조직이 손에서 놓쳤을 때 뼈아픈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래, 그녀가 미끼가 되어준 것이다. 조직의 눈을 따돌리고 완전히 도망칠 때까지. 그들의 손아귀가 닿지 않는 FBI의 영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FBI의 동료들 곁에 돌아온 뒤로도, 그녀는 미끼의 역할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며, 조직의 시선을 끌었다. 아카이는 그 사이 숨을 돌렸고, FBI는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가 도망치고 난 뒤로 삼 개월은 족히 술래잡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혹은, 완전히 도망칠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행동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왜 2년 전, 침묵했을까. 왜 자신에게 ‘틈’을 만들어주었는가? 그 작은 틈만으로도 그녀가 처형되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그리고 왜, 미끼를 자처하는가?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러나 그녀는 그들과 동일한 존재였다. 빠져나간들, 과연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때마침 밀항선의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마련된 밀항선이었다. 그녀의 도주 경로를 완전히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추정하는 것쯤은 가능했다. 기이하게도, 그 끝에는 밀항선이 마련된 항구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이 모든 것을 추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명백한 경로였다. 정말로, 정말로 그녀가 도망칠 생각이라면 조금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방법을 썼을 터였다.

그녀는 간부였고, 그만큼의 능력쯤은 가지고 있었다. 홀몸으로 조직의 시선을 피해서, 완전히 따돌린 채 도망치는 게 아주 불가능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훤히 보이는 행동을 하지? 도무지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그 항구로 향한 것은, 사실 그 의문 때문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녀는 아카이 슈이치의 동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소중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선지 느닷없이 그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이다. 컨테이너 박스들 근처에 세워진 차는 익숙한 기종이었다. 그는 그 차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버본.

버본은 자신을 증오했으니, 자신을 도와준 그녀는 단번에 급소를 꿰뚫려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미 죽었다면, 그는 그 유체라도 수습해줄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유체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그 유체에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조직의 정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버본은 그녀의 미간도, 심장도 쏘질 않았다. 그가 쏜 곳은 고작 옆구리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녀는 옆구리가 꿰뚫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칠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출혈량도 제법 되었고. 그는 그 고약한 피 냄새를 맡는 대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품을 뒤적거리고,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머리라도 쏴서 자살할 생각인가?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취한 선택은 의외의 것이었다. 품에서 꺼낸 것은 지혈제였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지혈제를 주사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살아남기 위해서하는 발버둥으로는 턱없이 모자란 일이었다. 그저, 아주 잠시동안 고통을 연장할 뿐인 행동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FBI 관할의 병원으로 데려온 그 스스로 역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코 선인이 아니었다. 그를 도와줬다고 할지언정, 그게 순간의 변덕이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선의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곳에서 죽는 게 차라리 ‘행복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버본과 제법 친밀했고, 버본의 손에 의해서 처리된다는 결말은, 버본에게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괜찮은 결말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자신은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와, 결말을 뒤로 미루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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