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 3
[ 감사합니다. 선배님. ]
그리고 허연 토끼가 깡총거리며 허리를 꾸벅 숙인다. 그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토끼의 얼굴에 두둥실, 수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없앤 웨이가 포털을 열어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스물 한 살. 미성년자인가 했더니 성인이긴 했네. 가수, 배우. 그 아래에 적힌 소속그룹 30세기 소녀. 뭐야, 이 촌스러운 이름은…? 클릭해보니 11명으로 이루어진 걸그룹 사진이 뜬다. 맨 뒷줄 가운데에 해사하게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지금도 어려보이지만 이 때는 정말 아기같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뒤로 넘겨 다시 그녀의 프로필을 보았다. 프로필 사진 속의 그녀는 오늘 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해맑게 웃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니 이미지 탭에 그녀의 얼굴이 가득 보였다. 순하게 웃는 얼굴들 사이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사진도 보였다. 아이돌이라고 했던가… 스크롤을 더 내려보니 예전 아이돌 시절 사진들이 줄줄이 나왔다. 망사를 입고 유혹하는 섹시 컨셉,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입고 칭얼대는 유아 컨셉, 교복도 입고, 제복도 입고. 정말 안 해본 컨셉이 없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스크롤을 맨 위로 올렸다. 이러니까 그룹이 망하지….
며칠 전에 본 그녀는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할 줄 모르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마지막 앨범을 낸 것이 2022년 봄인데, 첫 브라운관 데뷔를 같은 달에 했다. 앨범활동을 하며 드라마 촬영을 병행했다는 뜻이겠지. 그것도 연기라고는 단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사람이. 대충 훑어봐도 그녀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연기가 항상 똑같다. 얼굴만 보이고 배역이 눈에 띄지 않는다. 역할이 아쉽다. 그나마 무난한 평가가 이 정도였지 소셜이나 sns에는 도가 넘는 악플이 가득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있는 반응은 가끔 뭐에 씌인 것 처럼 괜찮게 하던데. 오늘 리딩 때 봤던 제 평가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분명 내내 긴장에 굳어있던 몸이 한 순간 자연스럽게 풀리며 대사를 했었다. 그녀에게 흥미가 가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번 영화는 윤정우 감독과의 세번째 작품이고, 오랜만의 한국 영화였다. 작품을 망치는 악취미는 없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재능을 틔워야했다. 윤정우, 이 늙은 곰 같은 인간. 제가 가만 두지 못할 걸 알고, 저를 믿고 이런 캐스팅을 강행했을거라는 예상에 뒷목이 뻐근해져왔다.
[ 안녕하세요. 선배님. 보내주신 영화 다 봐서 연락드립니다. ]
“……. 선배님…?”
“문자 말고 전화가 편해.”
“아…. 네…!”
“그래서 어땠어?”
“너무 다 훌륭한 영화였고… 연기도 정말 좋아서 공부가 많이….”
“재미있었어?”
“네…?”
“재미. 그 영화들 재미있었어?”
“…네. 재미있게 잘 봤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봤거든요….”
“오늘 시간 있으면 여기로 와.”
동시에 수애의 핸드폰에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눌러보니 주소지 하나가 보였다. 여기서 차로 20분이면 가네….
“아,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면… 3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응.”
그리고는 뚝 끊긴 전화에 수애가 핸드폰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뭐가 이렇게 자꾸 휘둘리는 느낌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닥 나쁘지는 않은 기분에 짐을 챙겼다. 대본과 볼펜, 그리고 여러 물건들을 가방에 잔뜩 넣고는 차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창 밖에 들어오는 흰색 밴을 본 웨이가 창가에서 멀어져 커피 캡슐 디스펜서 앞으로 다가갔다. 무의식적으로 아메리카노 캡슐 두 개를 꺼내려다가 가만히 진열된 것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디카페인… 아, 카라멜마끼아또. 아메리카노 캡슐 하나를 내려놓고 밝은 주황색 캡슐을 집었다. 머그컵을 내리고 있으니 인터폰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저, 선배님. 김수애입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고 열림 버튼을 누른 뒤 다시 부엌으로 가 머신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물이 끓는 듯 기계음 소리를 가득 내는 머신 안에 캡슐을 넣었다.
“……. 실례합니다…. 계세요…?”
저 멀리서 기계음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머신을 두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중문을 열지도 않고 현관에서 멀뚱히 서있는 모습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중문을 열어주자 꾸벅 고개를 숙인 수애가 제 앞에 쇼핑백 하나를 들이밀었다.
“뭐야?”
“댁에 오는데 빈 손으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매니저는?”
“오늘은… 스케쥴이 없어서….”
“그렇다고 여길 혼자 와?”
골때리는 아가씨네. 미간을 찌푸리고 일단 쇼핑백을 받아든다. 안절부절 눈치를 보는 그녀를 뒤로하고 부엌으로 향해 접시 위에 그녀가 선물한 한과를 늘어놓았다.
“거기 아무데나 앉아.”
“저,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매니저 언니 부를테니까….”
“늦었어.”
“…….”
머그컵에 커피 두 잔을 내렸다. 한 손에는 컵 두개를, 한 손에는 한과를 담은 접시를 들고 나오니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수애가 벌떡 일어나 접시를 받아들었다. 순순히 접시를 빼앗긴 웨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소파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형태에 수애가 머뭇거리며 약간 떨어진 거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직접 운전해서 왔어?”
“아, 네. 지하주차장에 댔어요.”
“아직 어린데. 빠르네.”
“매니저 없이 이동할 때도 있어서….”
“아이돌 아니야? 스캔들 신경 안 써?”
“아… 그룹은 이제 해체해서…. 이제 아이돌은 아니예요. 아니어도 제 스캔들 찾는 기자도 없을거라….”
민망한듯 웃는 수애의 얼굴에 아차, 싶어진 웨이가 수애의 앞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카라멜마끼아또를 밀어주었다.
“커피 마실 줄 알지?”
“네.”
그 앞에 놓인 새까만 아메리카노와 제 앞에 놓인 달큰한 카라멜마끼아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었다. 펜도 꺼내 딸깍이며 펜촉을 빼자 웨이가 대본을 쭉 밀어 저 멀리 보내었다.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자 머그컵을 내려놓은 웨이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너 낯 가리지. 소심하지. 눈치 많이 보지.”
“…….”
“모든 사람이랑 친해지기엔 촬영장 사람 많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연기 할 수 있어야해.”
“…네.”
“봤던 영화 중에서 지금 생각나는 대사 하나 말 해봐.”
“아….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싫은 건 많죠. 회사 유니폼 진짜 불편하거든요.”
“너는 수학 천재야. 근데 여자라는 이유로 여기서 계산기 두들기며 가짜로 금액 맞추고 있어. 기분이 어때?”
“…답답해요. 화도 나고…. 근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내가 제일 짜증나요….”
“눈 감고, 다시 말해봐. 말을 하는거야.”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카만 공간 속에서 희미하게 이미지들이 보인다. 꽉 조인 조끼와 불편한 치마를 입은 제 모습, 한 손엔 영수증을 꽉 움켜쥐고 있다. 속에서 울분이 북받치기 시작한다.
“막… 고졸이라고 표시하는 것도 싫고, 그리고, 출근 할 때 사람들이 막 치고 가는 거. 맨날 나만 비켜. 진짜 예의 없어.”
울렁거리던 속이 이내 분노에서 서러움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웨이가 보였다. 무엇이든 들어 줄 것 같은 단단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리고 억지로 웃는 거. 맨날 사무실에서 만만한게 나니까 억지로 웃고 있는데, 맨날 눈치 보면서 이렇게 웃고 있는거 눈물 날 것 같아요.”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울지 않았을 것이다. 얕잡아 보이면 안 되니까. 울기까지 하면 저를 감성적인 여자로 볼거니까.
“…good.”
커다란 손이 수애의 머리를 덮어 쓰다듬었다. 이내 뚝 떨어진 눈물에 온 몸에 기력이 빠진 듯 빳빳하게 서있던 허리가 힘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저려오는 손을 움직이며 다시 고개를 들자 다정하게 웃는 낯의 웨이가 보였다.
“훨씬 나아졌다. 앞으로 눈 감고 연기해. 촬영할 때도.”
“그건 안 되는데요….”
“그럼 연습 많이 해야겠네. 눈 뜨고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마인드컨트롤 필요해.”
“…그럼 낯 안 가리고, 소심한 성격 고치고, 눈치 안 보는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왜 널 바꾸려고 해? 낯 가리고 소심해도 연기 할 수 있어. 눈치는 좀 덜 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웨이가 턱을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간 눈을 깜빡이는 이 여자는 자존감이 꽤나 낮아보였다. 확실히 이 어린 나이에 이런 삶이면 아니기도 어렵겠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연습을, 나는 칭찬을.
“숙제 준다. 한새영으로 일기 써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마음대로. 하지만 류를 만난 날부터 도망친 날은 있어야 해. 하다가 막히는 부분 있으면 나랑 윤 감독한테 연락하고.”
“그거면 될까요…?”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여기 연습실 와. 이 건물 지하에 있어. 키 줄테니까 레슨 아닐 때도 와서 연습해. 자세랑 호흡, 발음 연습할거다.”
그녀의 손에 작은 열쇠가 쥐어졌다. 열쇠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서 보더니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할 수 있어. 너 잘 한다. 더 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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