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Epiphany - 4

TOHELL by TO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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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이상한 개인레슨을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그 사이 수애의 실력은 놀랍도록 성장했으며 크랭크인 날짜는 성큼 다가와 벌써 첫 촬영일이 되었다. 태양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6월의 아침, 이따가 해가 중천에 뜨면 더 더워질텐데…. 수애는 손부채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삐 움직이며 카메라나 조명들을 셋팅하는 여러 스텝들이 보였다. 드라마 촬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현장 규모에 긴장감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수, 일찍 왔네.”

“웨이, 오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웨이의 모습이 보였다. 가벼워진 호칭 만큼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이라도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부탁을 겨우 들어주었는데 그 후 웨이는 수애를 ‘수’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한새영이 류가량을 ‘류’라고 부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간지러웠다.

“긴장하지 말고. 원래 신인은 긴장 좀 해야하는데 너는 긴장 너무 많이 한다.”

“심호흡 다섯 번, 눈 감고 대사 먼저 속으로 말해보기. 명심할게요.”

“좋다. 잘 할 수 있어.”

“오늘 촬영 이따 해 지면 하시는 거 아니였어요…? 너무 일찍 오신 것 같은데….”

“제자 잘 하는지 보러왔다.”

무뚝뚝한 얼굴에 수애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진다.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까치발을 빼꼼 들어 차 너머의 현장을 다시 한번 살폈다.

“많이 더울거라 그늘에 계셔요.”

“물 많이 마셔라. 야외 촬영 수분 보충 중요하다.”

“네, 걱정마세요.”

“배우분들 모이실게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조연출의 외침에 수애가 차에 내려놓은 짐을 챙겼다. 대본이나 펜, 물통 등 내용물을 확인하고서는 웨이에게 눈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파주의 현장. 산길을 따라 곡선으로 돌아가며 깔린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덩그러니 있는 낡은 건물. 이 건물이 영화의 배경이었다. 철거 예정이던 폐건물을 임대하여 두달간의 공사를 마쳤다고 했다. 멀리서 다가온 새영의 남편 역인 남자를 보고 수애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오늘 잘 부탁해요. 첫 촬영부터 빡세서 어떡해.”

“괜찮아요.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편하게 해주세요.”

“그래요, 힘들면 꼭 얘기하고.”

첫 촬영은 영화의 도입 부분이었다. 영화의 이름이 같이 떠오를 예정이라 미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윤 감독이 신경쓰는 구간이라고 전해들었다. 틀린 말은 아닌지 직접 제 치맛자락에 흙먼지를 세심하게 묻히는 윤 감독의 모습을 보고 수애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여기 고정이니까 태섭이 새영의 머리채를 잡고 이 동선을 쭉 따라 건물 안까지 들어가면 돼. 밖에서 모습이 안 보이게 아예 안쪽까지 들어가버리고.”

“머리카락 살살 잡을테니까 수애 씨가 알아서 잘 따라와야해.”

“저…. 선배님, 제가 끌려가야하는데 힘을 주고 있으면 끌려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괜찮으시면 그냥 잡고 가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 힘들텐데….”

망설이는 남자의 모습에 수애가 윤 감독을 바라보았다.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던 윤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카메라가 셋팅되고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 두 남녀가 자리를 잡았다. 수애가 심호흡을 하며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가볍게 수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얇고 긴 머리카락이 두꺼운 손에 감기자 감독이 손가락으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3, 2, 1. 슛.

S#1. 모텔 앞마당/D

로우앵글 깨진 아스팔트 바닥과 모텔 건물,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신발 바닥에 깨진 돌조각들이 밟히며 걷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좌측에서 슬리퍼를 신은 태섭의 발이 등장한다. 뒤이어 등장하는 새영의 맨발. 주황색 원피스 아래로 상처투성이 맨발과 다리가 보인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상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새영의 머리채를 붙잡고 모텔로 향하는 태섭. 새영은 체념한 듯 버둥거리지는 않지만 제 발로 걸을 생각이 없는 듯 다리에 힘을 풀고 질질 끌려간다. 두 사람이 모텔 안으로 들어간다. F.O

컷! 감독의 외침에 남자가 수애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에 남자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애를 일으켰다.

“수애 씨, 괜찮아요? 손에 힘 풀리면 놓칠 것 같아서 너무 꽉 쥐었네.”

“아니예요. 선배님 덕분에 마음 놓고 연기했어요.”

두 사람이 모니터링을 위해 그늘로 들어왔다. 어느새 온 건지 웨이가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하는거 보셨을까? 대사는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저도 모르게 기대한 수애가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없앴다. 감독 옆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니 방금 촬영한 내용이 작은 모니터로 재생되고 있었다.

“음, 좋네. 표정도 연습 많이 했나봐? 카메라 안 걸릴텐데 표정 좋다. 지금 감정 좋으니까 한번만 더 찍고… 우리 오늘 야외 씬 더 있나?”

감독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던 스탭에게 물었다. 잠깐 시선을 올려 고민하던 스탭이 감독에게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더 없습니다. 이후로는 다 실내예요.”

“그래, 그럼 순서 조금만 바꿔서 새영이랑 태섭 씬 조금만 더 찍자. 둘 다 괜찮지?”

“전 괜찮은데….”

“저도, 저도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바로 들어가자고.”

그렇게 첫번째 신의 촬영이 한 번 더 이루어졌다. 상의 후 몸을 비트는 방향을 바꾼 덕분인지 새영의 얼굴이 카메라를 스쳤다. 모니터에서 발견된 그 찰나의 절망적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감독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다음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막 아래의 대기공간에 쪼그려 앉아 미니 선풍기로 바람을 쐬고있는 수애 앞에 웨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 웨…. 선배님!”

“괜찮아?”

머리카락은, 쓸린 다리는, 후덥지근한 날씨는. 모든 질문이 함축된 것 같은 말에 수애가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웨이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본을 들어 그에게 들이밀었다.

“선배님, 저 지금 들어가는게 씬 35래요. 그 때 선배님이 여기 클로즈업 있으니까 표정 신경써서….”

“몸 사리면서 해. 아직 초반이야.”

“그치만…. 후회 없이 하고싶어요. 이런 기회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수애 씨!”

“네! 가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저 다녀올게요.”

해사하게 웃으며 짐을 내려놓은 수애가 그를 스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웨이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누르며 손바닥을 얼굴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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