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rd,

. by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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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2월 28일.

 

날씨 맑음. 근래에는 며칠이나 날이 맑고 바람도 괜찮아. 이른바 순풍에 돛 단 듯,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바람이 배를 밀어주는 시원시원한 날씨지. 하지만 내 배는 아직도 바다 한가운데를 떠돌아다니고만 있어. 항로에 탄 것도 타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말이야. 좀처럼 항구에 닿을 기미가 없네. 분명 날씨는 이렇게나 좋은데.

네게 첫 편지를 쓴 게 눈꽃 1월이었으니 그 사이에 백 일이 족히 지났을 텐데, 그동안 충분히 익숙해지고도 남아야 하는데 요즘에는 부쩍 실수가 잦아. 이렇게 맑은 날씨에 돛도 올리지 않고 갑판에 혼자 앉아서 멍하니 있다던가. 오전을 다 보내고 오후나 되어서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람을 흘려보내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지. 다시 생각해도 웃겨. 대체 정신을 어디에 빼놓고 있는 건지.

배 이야기는 이쯤하고, 네 편지는 마지막 항구에서 한꺼번에 받았어. 몇 달 치 편지가 쌓여 있어서 생각이 날 때마다 하나씩 읽는 중이야. 항구를 도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편지를 주고받기도 꽤 오래 걸리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눈꽃 2월 말이면 시클라멘 영지의 축제가 끝난 건 물론이고 너도 북부 시찰을 끝내고 공작성에 돌아간 후려나. 어쩌면 잠깐 친정에 돌아갔다던 부인께서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겠네. 설령 아니더라도 이 편지가 바다를 건너고 설원을 넘어 네 손에 들어갔을 때는 모든 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후일 거야.

네 심란한 마음도 그때에는 가라앉아있기를. 네가 쓴 문단마다 네가 내쉬는 한숨이 느껴져서 나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 고작 몇 줄의 글로 네 감정이 전해져 온다니, 이런 부분까지 공명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었을 텐데. 잉그리드, 난 진심으로 네 고민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짧기를 바랄 뿐이야. 그래야 내 고민 역시 짧아질 테니.

 

네 그리운

마리에드로부터.

 

 

 

모래 2월 19일.

날씨는 맑음. 히엘릭의 섬들도 하나둘씩 장마 기간을 맞이하고, 바다 한가운데도 예외는 아니야. 며칠 전부터 나흘 정도 연속으로 하늘에서 비를 퍼붓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잠시 햇빛이 나더군. 덕분에 며칠간 밀린 편지를 한꺼번에 쓸 마음이 생겼어.

바로 직전에 비가 한창 내릴 때의 일이야. 항로 길목에서 작은 상선을 하나 만났지. 바다에서 우연히 길이 겹쳐 마주친 배끼리는 서로의 시간이 허락하는 잠시라면 상대의 배에 방문하기도 해. 땅의 사람들이 각자의 저택에 모여 사교 활동을 즐길 때, 바다에서도 그들 나름의 우아한 체계가 있는 셈이지.

어쨌든, 그 상선은 선원 한 명 없이 선장 혼자 먼 곳까지 배를 몰고 나온 나를 궁금해했고 내가 항해에 잔뼈가 굵은 뱃사람이라는 걸 알자 무척 기뻐했어. 그쪽은 무역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상인들이어서 어디 배울 곳도 마땅치 않았나 보더라고.

그들은 바다에서 장마를 만났을 때 어떻게 정비해야 할지, 지나가는 비인 줄 알았더니 폭풍우가 되어 내리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무사히 짐들을 지킬 수 있는지 물어봤어. 나는 성실히 상담도 해주고 하는 김에 배도 좀 둘러보면서 자잘한 고장 몇 개도 고쳐줬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선박 정비와 수리만큼은 꽤 하잖아. 다들 나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답례로 술을 몇 병이나 안겨주더라니까. 나는 술병을 안고 내 작은 배로 돌아가는 대신 거기서 상선 선원들과 술판을 벌였고.

그 배의 선원들은 날 마음에 들어 했어. 술까지 들어가면 친해지는 건 금방이잖아. 하지만 선장은 그런 내가 기꺼울 리 없겠지. 갑자기 갑판 위로 올라온, 출신도 경력도 모르는 사람이 제 선원들의 신뢰를 산 것도 모자라 자기보다 더 친해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선장이 어디 있겠어? 나도 참, 이런 기본적인 것도 까먹다니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들뜨기라도 했었나 봐.

결국 선장은 나에게 장갑을 던지며 갑판 결투를 신청했어. 승부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내가 졌어. 정확히 말하면 져준 거지. 선장이 나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고 그가 평소에 선원들에게 이놈 저놈 막말을 일삼는 개자식이어도, 배의 책임자는 그니까. 선장이 자기 휘하의 선원도 아니고 외부인에게 무릎 꿇는 모습을 보는 건 선장을 평소에 얼마나 싫어했는지와는 관계없이 마음을 들쑤셔놓기 마련이거든. 마냥 속 시원하게 볼 일은 아니야.

뭐, 이런 이유 말고도 내가 평범한 사람과 검을 부딪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는 싸움에 열을 내는 건 바보 같아. 친절하게 속임수까지 써줬더니 좋았던 술판 분위기는 당연히 와장창 깨져버렸고 나는 거의 쫓겨나듯이 내 배로 돌아갔어. 적어도 그쪽에서 날 죽이려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물론 나 말고 그쪽에게 말이야. 난 바다 위는 무법의 영역이며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몹쓸 놈들이 제일 싫거든. 곱게 돌려보낸 역사가 없지.

이 이야기의 결론은…… 상대에서 내게 위협을 가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이기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거야. 상대가 나와 싸워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더더욱. 전혀 정당하지 않잖아. 내가 그를 이기고 의기양양하기보다는 차라리 져주는 게 나을 때도 있어. 그편이 상대를 비참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서 상대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이미 누군가는 건방지다며 싫어하겠지만.

이름은 가명으로 대서 다행이야. 용의 아이라는 걸 들켰다면 더 귀찮아질 뻔했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네 친구가.

 

 

파도 2월 11일.

 

날씨, 비. 습관처럼 오늘 날씨를 먼저 썼지만 사실 이번 편지는 오늘의 바다가 어땠는지, 항해의 진척은 어땠는지 하는 이야기를 쓰려고 펜을 잡은 게 아니야. 오늘에서야 나는 네 편지를 전부 읽었고, 그리고…… 전에 쓴 편지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마저 하려고 해.

네 편지를 다 읽고 갑판에 드러누워 있자니 몇 년 전의 겨울이 떠올랐어. 네 결혼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네가 나에게 결혼에 대한 의견을 구했지. 나는 네 선택이라면 어떤 이견도 없다고 대답했고. 그때의 나는 분명 네 결혼에 찬성했고 지금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때와 같은 대답을 할 거야.

그때에도 지금에도, 앞으로의 미래에도 나는 시클라멘 공작성의 객이고 네 기사로서 네 선택을 존중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 시클라멘의 안주인을 들이는 일이나,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네 결혼에 내가 말을 얹을 자격은 내게 주어진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 후의 행동은…… 확실히 모순된 것들이었지. 나는 계속 너와 너의 주변에 관여해왔어. 내가 네 침대에 눕는 건 부가적인 행동이고 그래봤자 우리 관계는 공명이며 페어, 주군과 기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었거든.

잉그리드……, 너는 배우자 외에 다른 상대가 있는 건 귀족 사회에서 큰 흠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네가 속한 세계가 특이하기 때문이야. 그 특수성은 귀족 사회가 가지는 권력에서 기원하고, 너는 그 권력의 정점에 가까운 사람이지. 내가 간과한 건 이거였어. 규칙과 통념을 깨트려도 괜찮다고 허락된 것은 너뿐이고 나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 행동이 너로 하여금 그 규칙들을 깨트리게 만든다는 것도.

이렇게 다시 쓰고 보니 한동안 고민했던 이유가 훨씬 뚜렷하게 보이네. 그래. 난 네가 속한 세계도 그 안의 너도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며 그 결과로 나는 시클라멘 성과 너를 떠나 바다에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이 이토록 오래 가벼워지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네가 그립기 때문일 거야. 가끔 너를 끌어안는 악몽을 꿀 만큼.

네가 나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든 전보다는 훨씬 명확해졌으니 이 목적 없는 방황을 정리할 방법을 찾아야겠지. 그래도 아직 물이나 식량은 얼마간 더 버틸 수 있을 테니 좀 더 항로를 떠돌아다니다 못 버티기 직전에나 아무 항에든 들어갈까 해.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으면 그때 닻을 내려도 괜찮겠지.

이 편지가 하루하도 늦게 네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데비, 마리에드, 너의……

무어라 써야 할지 모를 말로 끝을 맺으며.

 

 

 

눈꽃 3월 20일.

날씨. 아침에는 비가 꽤 많이 내렸는데 저녁이 되자 세가 좀 죽었어. 내일 새벽이면 완전히 갤 것 같아. 그리고 난 지금 배 위가 아니야, 잉게. 히엘릭 북부 쪽의 항구에서 잠시 체류하려고 해. 지금 계획으로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 더 있을까 싶지만, 상황에 따라서 더 늘어날 수도 있겠어.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생각은 없어. 어쩌면 이 편지는 네가 내게 썼던, 읽기 싫으면 태워버리라고 한 대목의 복수일지도 몰라. 잉게, 너도 마찬가지로 다음 문단에서 네 기분이 상한다면 이 편지는 그냥 찢어버려. 난로에 던져 넣고 없던 것으로 해도 좋고.

저번 편지에서 어떤 초짜 상선을 도와줬다고 했지. 좋게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도 했었고. 아직 배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을 때, 유난히 내 말을 잘 들어준 청년이 하나 있었어. 누데르잔 출신이고, 뭐라고 했더라, 지금은 상선에서 허드렛일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더 큰 배의 항해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난 열심히 해보라고 했고 그 후에 상선을 내리면서 딱히 다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 항구에 도착해서 그 애를 다시 만났지 뭐야. 나보다 먼저 이 항에 그 상선이 지나갔는데, 글쎄 거기서 충동적으로 내리고 말았다나. 그 애, 사실은 내가 용의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대. 그리고 내가 져주는 걸 보면서 선장이고 선원들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그 애가 먼저 날 알아봤고 우리는 또 술을 마셨어. 그리고…… 음, 술은 자제력과 이성적인 판단을 앗아가는 만악의 근원이지.

여기는 작은 항구라 오가는 배가 많지 않아. 그 애는 좀 더 큰 항구에 가면 다시 자신을 고용해줄 마음씨 넓은 배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거기까지만 동행할 수 있을지 물어봤어. 오해하지 마, 아주 정중한 태도였고 거의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거든. 나는 그러라고 했고, 다음 목적지는 수도 근처의 항구가 될 거야.

다행인 건, 내게 지켜야 할 명예 같은 건 없다는 점이겠네. 내게 기대를 거는 사람이 없다면 실망하게 할 일도 없다는 것까지.

 

마리에드 데비로부터.

추신. 어떤 반응을 바라는 건 아니야. 너무 유치한 짓이잖아. 난 그냥 네가…… 이 편지를 진작에 찢어버렸으면 좋겠어. 활활 타올라라, 바닷물 먹은 종이여. 소금기 묻은 재나 되어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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