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할로윈 외전 그 이후
"결국 이 때 까지 이 짓거리를 하고 있었네."
천 년 넘게 반복에 갇힌 회귀의 시간을 지켜보는거야 처음도 아니고, 솔직히 재밌는 부분도 있었기에 단하나는 '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딜봐서? 결코 괜찮은건 아니었다. 그저 '괜찮아야 했다.' 단하나는 개쩌는 갓성좌의 시작이자 결과니까. 해피엔딩의 주인공 자리는 결국 양보했다지만 단하나가 Only One이고 The One임은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부정하는 이들이야 있긴 하지만 사실은 불변한걸 어쩌겠나. 최고의 방법은 아니었지만 최선의 방법이었던 또 한 번의 무한 회귀 탑을 세우는 데엔 성공했다지만 그건 이미 한 번 파훼된 방법인걸 스스로도 알고있었다. 집념과 천재성이라면 하필이면 자신인 단하나를 배껴간 만큼 끈질겼던 미리내가 결국 구슬을 깨고말았다. 탑의 꼭대기에 수 백 번을 올랐으나 끝을 내지 못하다가 깨달아 버린 것이다. 가짜세계라는걸. 마치 끝에 다다랐지만 절망을 벗어나지 못한 묘리처럼 무너지기도 했던 미리내지만, 오만방자하여 자신이 생각한 결론에 꽂혀버리는 약점과 끝내 그걸 깨달음으로 뚫어버리는 단하나를 닮은게 문제였다.
빠직.
구슬에 금이 갔다. 미리내의 세계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하나는 긴 시간을 웅크려 앉아있던 몸을 펴서 가볍게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앉아 있었다고 표현했으나 공중에 떠 빙글 빙글 돌며 구경 한 덕에 욕창 걱정은 없지만 오랫동안 안 움직이면 뻐근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오랜만이야."
"저거 저거 결국 미쳐가지고 혼잣말 하는거 봐라."
이른 인사를 건네자 뒤에서 칼같이 치고들어오는 빈정거림이 거슬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거슬림을 티나게 드러낼 순 없었다. 머리를 쓸어내는 척 뒷목에 손을 올리는 묘리와 눈이 마주쳤으니까. 나른하고 질린다는 눈빛으로 입은 웃고있다.
"네가 웃는다니 살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얼굴이야."
"아, 그러셔? 언제부터 '개쩌는 갓성좌' 께서 두려움 따위를 느끼셨을까?"
"나를 두렵게 할 수 있는건 나 뿐 아니겠어?"
"씨발.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왜 기분나빠하는거야?"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그거 깨졌지?"
"의식 아래로 가서 잔다더니 보고있었어?"
"내가 꼭 보고 있어야 알겠어?"
단하나 자신에게 미치진 못하더라도 너무나도 능력이 뛰어나버린 탓에 걱정 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던 정치공작이나 심리전 따위에 이골이 난 묘리였다. 그만큼 비상한 지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 지력으로 시점을 읽어냈을 뿐이라는 말을 한 묘리의 뒤로 수많은 인원이 몰려들었다.
"너..."
"언제까지 혼자 다 하려는거야? 혼자하면 망한다는걸 그렇게 겪고도 배운게 없어?"
"네가 할 말이야?"
"나는 너랑 달리 깨달음을 얻어서, 아군을 좀 챙겼다."
묘리는 의식 아래에 잠들어있던게 아니었다. 수천년을 의식 아래로 떠돌며 깨울 수 있는 최대한의 백호민을 깨워 몰고왔다. 그들의 선두에 무제와 불사자리의 다독거림과 압송으로 합류당한 작약이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체념한건지 뭔지 위험해 보이는 무언가를 모락모락 피워내며 무력하게 딸려오다가 단하나와 눈이 마주치곤 생기가 돌아왔다.
"대마법사니임~!"
절로 이마를 짚었지만 입가가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
“우, 우리 어디로 가, 가는 건가요? 저, 저는 왜, 포대에...?”
현재 심상세계의 쌀포대에 담겨 운반되고있는 이는 세상을 중독시키는 꽃, 작약. 살아있는 생화학병기라는 평에 걸맞게 과연 살아있을 수 있나 싶은 체내 화합물들이 당혹과 공포, 고립감에 물들며 스멀스멀 위험한 상태에 오르고 있었다. 옆에서 그냥 기절시켜서 데려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라며 실실대는 말투는 불사자리의 목소리 같았다. 그러나 현재 들쳐메고있는 납치범은 포대건너로 심상찮은 무게로 안정감을 전하며 다독였다. 손길에 감정까지 담을 수 있는 포근한 벽돌은 무제가 아닐거라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너 혼자있는거 아니니까 오바하지마. 하여간, 전부 잘 길들여진 꼴 하고는.”
툴툴대며 시비조로 말하지만 그 누구도 거역하지 않는데엔 이유가 있다. 그야 묘리니까. 심상세계에서 절대적 존재인 단하나에게 폭행을 가하는 유일한 성좌, 단하나를 제외하고, 심상세계의 도움조차없이 탑의 꼭대기에 오른 적이 있는 지도자이자 무제도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체술을 가진 최강의 암살자. 그리고 단하나를 이렇게 왕따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해낼 수 있는 이가 또 누가 있겠나. 게다가 말을 돌리는 법이 없는 만큼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유와 목적, 방법을 제시하는 깔끔함까지. 강제가 아닌 설득인 만큼 다들 따른 것이다. 단 한명, 작약을 제외하고. 사실 작약도 무조건적으로 단하나를 신뢰하고 추종하는건 아니다. 단지 단하나를 혼자 떼어놓고, 심지어 모르는 상태로 두고 진행하는데에 불안감과 거부감을 표했을 뿐이다. 하지만 묘리의 주장은 강경했다.
“저거 그동안 여럿이서 함께하는 경험을 하더니 많이 물러졌어. 혼자 할 때 가장 능률적인 독불장군형 인재는 가끔 고독을 누리게 할 필요가 있거든. 그래야 반포대교 건너에서도 살아돌아오는거야.”
그 누구도 그게 누구 얘기인지는 묻지 않았다. 묘리역시 추가정보나 진위여부따위는 알려줄 생각 없었고. 하지만 조련사들도 별빛의 경계너머로 곧잘 넘나들었으니 영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긴 했다. 몸이나 정신상태가 어떨지는 몰라도. 확실한건 묘리가 무기는 쥐어줬을지 몰라도 금목걸이는 주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같은 생각을 했음에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끄덕이는 등의 티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묘리는 백호민들에게 눈치라는게 있기는 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눈치보다는 생조본능이 더 강했겠지만. 죽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죽어보는게 영 익숙해지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알았지? 흩어지는 순간 뒤진다. 영영 못 돌아올 수도 있는거야. 내가 왜 혼자오지 않았는지 잘 생각해.”
이런저런 사정으로 꽤나 박살난 공간 아래로 무저갱이 네 명의 성좌를 맞이했다. 기억의 무덤 아래 구정물이 되어버린 백호민 이었던 것 들과 그들의 삶과 환경구성 이었던 것들의 출구없는 배수구. 심연 앞에서 의연함을 유지하는건 심상세계의 성좌들이어도 쉽지 않았다. 라는 상투적인 말을 쓰고싶지만 긴장하는건 포대에서 머리만 찔끔 내밀고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작약뿐이었다. 이전에 단하나는 이 아래까지 별빛의 힘이 닿도록 중계하는 힘을 조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의 파편만 쥐고있는 상태고, 구슬안의 세계에 집중하느라 거둬들였다. 작약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네가 폭발한 덕에 열린 길이긴 한데, 이번에 또 그랬다간 다같이 구정물되는 수가 있어. 정신차리진 못해도 놓지나 말아.”
따스한 말로 기죽인 묘리가 먼저 펄쩍 뛰어내리며 그들의 심연탐방이 다시 시작되었다.
심연에 들어선 후 묘리는 짤막하게 전달사항을 정리했다. 우선, 목적은 최대한 많은 백호민의 자아확보. 심상세계는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만큼 의지의 수가 많을 수록, 강렬한 의지일 수록 유리하다는 추측이었다. 마치 탑의 꼭대기에서 만난 별지기들의 마을처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살을 택할 것. 특히 불사자리를 노려서 한 말인건 백번 확실했다. 유령저택의 경험이 있다지만 그때도 선택적 살생이 있었긴 하니까 말이다. 작약이 폭발하지 않게 주의하라는 신신당부도 더했다. 심연은 자아를 잃을정도로 의지를 상실한 의식덩어리들이 고인 자리인 만큼 파편으로 흩어질수록 다시 뭉치기 어려울거란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약의 폭발사건 이후 작약은 무수히 많은 부식된 시체로 무너지며 의식붕괴에 이른 적이 있고,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의식을 가루로 만들 수 있는만큼 주의를 요했다. 그렇다고 단하나 옆에 두고오면 단하나는 자신을 추종하는 작약의 태도에 취해 현상유지에 안주할 가능성이 있어 일부러 데려왔다. ‘탑’을 없애고 백호민과 윤소현을 해방한다는 목적을 이뤘으니 미리내의 감금이후로는 활력이 줄어들고있다는 느낌을 묘리에게까지 감출 수 없었다. 그저 고집불통의 성격과 약간의 가학적 성향으로 여태까지 버텨왔을 뿐. 게다가 수천 년 후 까지는 알바아니라는 말. 어느정도 진심이 있었을 터였다. 아무리 단하나라고 해도 그동안 지치지 않았을리가 없으니까.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채 실패를 반복하는 자신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곱씹으며 미래를 준비하고, 결국 이루어낸 끝에서 자신은 한 발 물러나는 그 모든 과정과 결과에서 자신이 닳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저 매를 부르는 성격이 스스로를 지키며 밀어붙이는 원동력이 되었을거란게 다행인지 징하다고 할지. 묘리는 단하나에게 절대로 좋은 말 해주고 싶지 않으니까 징한걸로 정했다. 까딱 움직인 손 끝에서 날아든 송곳이 포대를 갈라 작약이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무제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나뒀다. 무제의 눈에는 묘리 역시 불안정하긴 마찬가지라, 약간이라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면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단하나와 떨어진 작약이 무제에게 기대버리는 것도 곤란하고 말이다. 매 순간 순간 맹렬히 돌아가는 눈치와 판단을 지켜보는 불사자리의 눈빛이 즐겁게 휘었다. 단하나를 마주치고 나와 미리내를 엿먹일 궁리를 했던 그 순간 이후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알아들었으면, 가자고.”
싱글거리는 불사자리에게서 뭔갈 느꼈는지 잔뜩 빈정상한 눈빛으로 노려본 묘리가 꼴보기 싫다는 듯 홱 돌아서 앞장섰다. 서서히 별빛이 멀어지며 서로의 존재조차 분간 못 할 만큼 침침해지는 가운데에도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고 시야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각자의 방식으로 성좌에 오른 백호민들 역시 부지런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곧 어둠과 하나된 검은 곤죽덩어리들이 그들을 잠궜다.
“아악! 놔! 놓으라고 시X!”
“말 다시해라.”
“아니! 미쳤냐고! 찌르면서 뭘 말! 으악!”
“다시.”
방금 하나의 곤죽덩어리에서 분리된 백호민 하나가 욕지꺼리를 하다가 짧은 고문을 받길 약 이백 칠십 구 번 째 반복하고있었다. 누가 백호민 아니랄까봐 성좌한테 진심으로 맞으면서도 반항심과 고집하나는 절대 놓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성좌가 되지 못했을 뿐더러 자아를 잃은 채 몇 년 인지도 모르는 긴 시간을 구정물로 지내다가 강제로 멱살잡혀 깬지 단 몇 십 분 만에 수백번의 고문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경계심이나 저항감을 상실하기 마련일테다. 벌써 묘리는 세 자릿수의 백호민을 강제로 깨웠다. 무제도 제압과 다독임을 단짠단짠도 아니고 단맵단맵하게 다스려 의외로 큰 숫자의 백호민을 거느리고있었다. 서로 대화를 굳이 나누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구정물 백호민을 마수 조련사처럼 끌어들여내는 중에도 무제에게는 각자의 방식으로 놀람을 가지게되었다. 다 같은 백호민임에도 독보적인 모습으로 성장한 무제를 보면 그 누구라도 거묵의 그림자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감탄할 수 밖에 없으니까. 심지어 각자움직이는 와중에도 작약의 상태까지 살피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그러나 그도 무적은 아닌지라 간간히 작약의 주변에는 안 그래도 녹아내린 구정물 백호민에서 다시 깨어난 백호민의 자아 였던 것이 구정물로 회귀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특이하게도, 일부 백호민은 초성좌 혹은 개쩌는 갓성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저기엔 비슷한 것 들 끼리 모였다. 라고 묘리는 추측했다.
불사자리는 또 혼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리슬쩍 기척이 약해지는걸 느낀 묘리가 욕을 바가지로 쏟아붓던말건 실실거리며 구정물백호민더미 사이로 멀어지는 걸 붙잡을 여유가 없음에 빡친 송곳만이 뺨을 스쳤을 뿐이다. 당연히 독이 발린 송곳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불사자리 역시 독에는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다. 가장 독보적으로 정신나간 백호민다운 놈이었다.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겠지 생각 할 수 있는 수준의 신뢰가 있으니 다행이라...고 봐야되나? 멋대로 이탈하는 놈을 처단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하염없이 화가 났으나 나름 성좌인 놈이 작정하고 딴짓거리하는 걸 막을 재간은 없었다.
재밌는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심연은 정화가 가능하다. 구정물 백호민을 하나 둘 심상세계의 자아로 되돌려면서 관련된 주변 환경 역시 점차 검은 점액덩어리에서 탈색된 구조물로 변화해갔다. 수천년을 점액질로 녹아내려간 백호민 이었던 것들 위로 계속해서 풍경을 쌓고 유지한 단하나는 정말 인간새끼가 아니었다. 중요한건 이게 된다는 거고, 효과가 입증된 이상 멈출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심연탐험이 길어지면서 상대적으로 멘탈이 약한 백호민이 구정물로 회귀하는 일도 빈번했다. 위에서야 짜가탑의 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가늠되었다지만 지하에 해당하는 아래에선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뭔가 나름의 방법이 있는지 묘리는 작약을 틈틈히 구박하는걸로 마음속의 뭔가를 풀며 ‘아직 멀었으니 걱정마’라는 말 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무제는 혹시 묘리가 작약을 데려온건 단하나와 떼어놓는 이유도 있지만 본인도 대용으로 갈구...기 위해 데려온건가 싶은 의심을 가졌다. 물론 티내지는 않았다.
“단하나가 했으면, 내가 못할까봐.”
좀처럼 혼잣말 하는 일이 드문 묘리의 중얼거림을 무제는 똑똑히 들었다. 무슨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는 묘리 나름의 방법이었다. 무턱대고 무량한 시간이 지나도록 뜻을 꺾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내기. 스스로의 판단력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에 더해 자존심의 동력을 얹었다. 단하나는 백금군주의 회귀를 빼앗고 심상세계를 만들어 해피엔딩까지 버텨냈다. 심지어 그 후 짜가탑을 지키는 두 번 째 회귀의 시간과 마찬가지인 지금의 심상세계까지 지탱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 구슬이 결국 열리는 시점까지 백호민 부대를 몰고 올라가 미리내를 상대할 때 까지 이 짓거리를 이어가는 것 쯤 나도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가지기다. 상황파악도 안되고 의지력도 약한 백호민들에게 성좌 백호민 만큼의 능력과 기여를 기대한 건 아니다. 단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로 무한히 버티기가 가능하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합류하는걸로 충분했다. 아무리 나약한 백호민이어도 자존심덩어리에 고집불통인건 다 비슷하니까. 유난히 유약해보이는 작약역시 외곬수적 면모가 충분하고, 살아있는 폭탄덩어리가 될 만큼 발상에 한계가 없다. 예상외의 기지를 발휘하는 아군이면서도 동시에 최악의 위험물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이유 역시 그 낮은 자존감과 자기학대적 성향 때문인걸 어쩌겠나.
그럼에도 성좌에 이른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정신력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워 깨워내 합류하는 백호민과 그 풍경보다 결국 구정물로 돌아가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지고있었다. 심상세계의 영혼은 죽은 시점에서 더이상 성장하지도 새로이 익히지도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짓거리를 하며 반강제로 합류당한 행군이 몇 백 년, 천 년을 넘기다보면 미쳐버리지 않는 만으로도 이미 초월의 경지라 부를 수 있으니까. 실제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법칙으로 받아들였던 현상을 깨버리고 새로이 성좌가 된 백호민이 있을 정도였다. 별을 읽어낼 단하나는 지상에 있어 아무도 성좌명같은건 알아내지 못했지만.
“올라갈 때가 됐다.”
“성좌를 기다렸던 겁니까?”
“무슨 소리야? 그런 기대를 가질리가 없잖아. 넌 참 희망적이란 말이야. 백호민답지않게.”
“그럼...”
“여행시간 끝났다고.”
무제의 감탄을 무참히 바스라버린 묘리는 곧장 지상으로 향했다. 심연 여행을 하며 한없이 내려가기도 오르기도 반복한데다 수천년의 무저갱은 한없이 넓었음에도 그 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설명하지 않는 묘리에게선 스킬의 도움이 있을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했다. 정작 묘리의 머릿속엔 탈주한 성좌새끼가 이 때가 오도록 코빼기도 안 보였다는 사실이 약간 짜증날 따름이었다. 묘리는 자신의 대열에서 벗어나는걸 용서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시 나타나기는 할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당장 화를 표출하지 않을 뿐. ‘당장’이라고 했다. 눈에 들어오는 순간 송곳이 급소를 찌를지 적당히 팔다리만 조져버릴지는 모른다. 확실한건 최소한 손가락 숫자 이상은 뚫릴거다. 말없이 묘리의 걸음을 따르기만 하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보였다. 사실 온통 희멀건해서 하늘인지 바닥인지 똑바로 구분되는 공간은 아니지만 ‘지형’이라는게 드러나는 곳은 지상 뿐이었다.
“초성좌자식은 또 어디갔어?”
“금방 온다고했습니다.”
“잘난 대마법사님자식 보러가는데 내빼진 않았겠지. 먼저간다.”
D.C. 「2.
이후는 잠깐 도돌이표 찍고 이 자리로 오면 되겠다. 이마에서 손을 뗀 단하나의 다음 반응은 경악이었다.
“너, 너, 너! 미친놈아! 그거 다신 하지말랬잖아!”
“하, 하지만. 이게 제, 제일 전투적인걸요! 나, 낙오자들도 합류시켰어요! 일부는 동의도 받았어요!”
나머지는 강제였다는 뜻이다. 무엇을? 바로 거대한 작약슬라임이다. 탑 꼭대기를 향해 마지막 뻐큐를 담은 폭죽이 된 그날의 슬라임. 무제에게 들려 온 이유는 이동속도가 느려서 작약의 원래 신체 부분만 잡고 달려온거였다.
“야, 여유도 많네? 나 벌써 한 번 뒤졌어.”
발등에 송곳이 밖힌 단하나는 더이상 잔소리도 못하고 꼼짝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 작약에게 이따보자는 손짓만 겨우 남기고. 과연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단하나는 확신의 손짓을 했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작약은 그 손짓에 눈을 빛냈다. 본격적인 전격전이 시작되었다.
“이길 가능성은 낮아. 저녀석은 수천년 간 상상한 모든 위협을 경험했고, 그 상상조차 탑을 벗어난 적 없으니까. 그걸 이겨낸 놈이야.”
“시작부터 재수없는 소리하지 마라. 벌써 한 번 뒤졌는데 부정타게 시발.”
“...”
“타, 탑 밖으로 상상을 확장할 기회에요!”
“맞는 말입니다. 그동안 너무 탑 안에 갇혀있었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 일단 갈겨보는게 백호민이지!”
억지로 희망담긴 말을 던지며 나섰지만 사실 ‘힘’이라는 단어 그 자체와 싸우는데 딱히 긍정적 전망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심상세계라서 무한히 다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 만이 당장 패배하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줄 뿐. 심지어 미리내는 막 ‘탑’이라는 세상을 깨고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심상세계’역시 비슷하게 이격된 공간에 불과해 깨고 나간다는 선택지를 떠올리고, 실행해버린다면 순식간에 백호민들은 세계 자체를 잃기 직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단하나의 자아를 취해 도망친다는 생각보단 제압한다는 생각을 우선에 두고있어서 유예되는 중일 뿐.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면 저 힘 덩어리가 아직 육체를 의식하여 스스로 갇혀있다는 부분이었다. 육체는 손상을 인식하게 한다. 고통은 정신을 흔든다. 무신론적 성기사 식 대검베기에 목을 아슬아슬하게 떨어져나가지 않을 정도로 베인 지금 멈칫한 것 처럼. 묘리조차 가끔 놓칠 만큼 존재감을 흐리는 데에 가장 능한, 영원을 모독하는자의 정석적 가로베기가 정확히 들어갔다. 이런 의외의 순간 결정타를 먹이는 모습이 그 이명을 증명하곤 했다. 목 자른다고 죽는 상대가 아니라는 점 만 빼면.
그러나 그 목이 다시 붙기 직전, 하늘에서 떨어져 습격하는 인원이 있었다. 수십, 수백의 적의로 가득한 광기의 전사가 와르르 쏟아져 습격했다. 미리내 뿐 아니라 같은 모습의 전사끼리도, 주변에 있는 모두를 향해 공격을 쏟아내는 모습에 백호민들도 물러날 만큼 험악한 원군이었다. 적아구분이 없는 원군을 아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몰라도.
“비유?”
“참~ 우리 성좌님들은 너무 백호민 밖에 모르는게 아닐까요? ‘심상세계’는 자아가 불러낸 세계라서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불러내는 공간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동료들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다녔거든요. 안타깝게도 본인이 아니라 기억에서 재생되는 파편뿐이지만, 가능하더라구요?”
특유의 농담조 가득한 무게없는 말투가 심히 거슬렸지만 의미있는 시도였다. 오히려 기억과 상상이 뒤섞여 튀어나온 타인들이 진짜보다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 ‘아수라장’을 연 비유 역시 자기네 끼리 싸우는 고독의 모습에 더 충실해서 무한히 확장해 모든 공간을 살육장으로 만드는 수준으로 퍼지지 않고있었다. 무엇보다, 작약의 유전자 각인때문에 5분이 지나면 죽어없어지는 제약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스킬 ‘연기’ 때문에 자신을 잃고 타인을 읽어내기만 하는 삶을 살았던 불사자리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발상에 단하나가 박수를 쳤다.
“역시, 미친생각은 백호민 중 최고야 네가!”
그러나 탑 내 성좌들 중 최강전력이었던 비유였다지만 사실상 탑 그 자체였던 미리내를 단신으로 무너뜨리기엔 역부족, 일순 시야가 점멸한 뒤엔 수천의 비유가 사라지고 위험한 힘이 넘실거리는 미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양 쪽에서 아이보리 퀸의 상아탑과 아누비스가 덮쳐 가려지는 듯 했으나 하얀 불꽃이 둘의 모습도 지워버렸다. 그 불꽃이 그대로 백호민들까지 태워버리기 직전, 성좌 백호민들의 뒤에서 팅- 소리가 울렸다. 허공에서 백금화가 소멸하며 불꽃이 양 쪽으로 갈려 흩어지는 모습에 뒤돌아본 자리엔 무려 세 명의 백금군주가 서 있었다. 배끼는 것 하나는 제일인 불사자리가 지금 배껴온 지략은 지금 이곳에서 ‘해피엔딩’을 한 번 더 열어보려는 수작질이었다.
“생각보다 맞서볼 만 하군.”
“너!”
순간 묘리가 적대적으로 소리치긴 했지만 바로 공격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비록 백금군주가 레비아탄조차 이기지 못하는 성좌였다지만 백금화를 태우는 스킬의 유용성만은 단 하나의 마법과 비등할 만큼 뛰어났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여 이성이 흐트러지는 와중에도 역천의 귀신은 목적을 위해 어느쪽이 이득인지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답은 아닐지언정 틀린 길을 향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처음 한 번 대검가르기를 쓴 이후 은근슬쩍 농땡이 피우는 불사자리의 발등에 구멍을 내는걸로 화풀이했다.
“나는 목뚝각시다.”
“나는 목뚝각시다.”
“...”
두 명의 장화와 한 명의 목뚝각시. 목뚝각시는 짭 해피엔딩에서조차 여러 모습으로 분열하지 않는게 정말 그 고집을 담은 존재 같았다. 어쩌면 성좌 백호민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모습만으로 보일만큼 완벽하게 일관적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 옆으로 재사자, 흑기린, 자청비, 다시 자청비... 이름을 아는 성기사단이 미리내를 둘러섰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파아-!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모습은 익숙한 다음장면이 아니었지만. 다음은 그림자가 덮쳤다. 심지어 다섯 개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다섯 명의 거묵역시 갑옷이 안에서부터 산산히 부서지며 무너졌다. 아일랜드형제의 폭격과 심지어 낙성좌 터부의 거포가 굉음과 폭발로 시청각을 마비시키기도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블리비언을 기억에 강제로 고정한 단하나가 ‘망각’을 이용해 미리내의 정신을 뒤흔들려고도 시도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다시 지루한 싸움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우리도 다시 가자. 죽으러.”
“그래. 찐막이다.”
단하나는 단 한 순간이라도 묘리에게 경멸의 시선을 받지않는 경우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런 감각은 사치였다.
사치를 다시 누리는데엔 측정불가능한 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야~ 이걸사네.”
fin.
-이하 후일담.
성좌들이 나만 좋아해 썰을 몇 번 풀다가
'ㅍㅌ로 주세요!' 요구를 꽤 여러번 받은 끝에 결국 열어버렸습니다.>23년 12월 이사했지만
비록 첫 포스트는 아니지만요.
캐해석을 신뢰한다는 말들 들으며 응원받은 끝에
(자격증 공부하기 싫어 딴짓으로 쓴다는 동력도 더해) 결국 여기까지 써내었군요.
마지막 대사의 화자가 불명확하게 끝낸게 아쉬우면서도 좋습니다.
사실 고집 대 고집으로 붙으면 영원히 안 끝 날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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