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사 그레이브스의 은퇴준비

퇴고 X 낙서글

사내는 의자에 앉아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국장직에 복귀한 지는 일주일, 퇴원한 지는 한 달, 자신의 저택 지하에서 구출된지는 여섯 달이 지난 후였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많은 사람이 이 자리를 스쳐 지나갔고 각자의 이유로 직위를 내려놓았다. 수많은 일이 생겼고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다. 퍼시벌 그레이브스는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수많은 서류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그가 처음으로 지친다는 생각에 빠졌을 즈음, 누군가 국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 아, 티나.”

티나 골드스틴은 이제 그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능했고, 정직했으며, 정의로웠다. 아직 경험이 조금 부족하다는 게 약간의 단점이었지만, 동시에 그 점은 그에게 있어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드는 성향과 더불어서.

“복귀하신 걸 보니 기쁘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나쁘지 않네. 아직 조금 갑갑한 느낌은 있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고.”

그래서 사내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된 것 같다고.

“무슨 일인가? 보고할 일이라도?”

“아, 네. 결재를 받아야 하는 서류가 있는데, 겸사겸사 괜찮으신가 싶어 인사도 드리러 왔어요. 오늘 아침에 생각해보니 복귀하시고 정식으로는 인사를 못 드렸더라고요.”

“뭐 어떤가. 서류 이리 주게.”

피식, 사내는 짧은 웃음을 흘리고는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었다. 언제나처럼 정갈하고, 깔끔한, 군더더기 없는, 완벽에 가까운 서류였다.

“여기에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이것만 추가하면 바로 결재해주지.”

“아, 네!”

티나는 황급히 달려와 깃펜으로 사내가 가리킨 곳에 날짜를 적었고, 곧 사내도 펜을 받아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탁탁 소리와 함께 가볍게 서류를 정리한 사내는 자신의 믿음직한 후임이자 후배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여기 있네. 그리고 티나.”

“네, 그레이브스 씨?”

“여기 이 서류, 자네가 조금 도와줄 수 있겠나? 이것들은 모레까지 처리해도 되니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사내는 자신의 옆에 놓인 산더미의 서류 중 몇 가지를 꺼내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티나는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네, 빨리해서 가져올게요.”

“천천히 하게. 급하지 않아. 이만 가 보게.”

사내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티나 역시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집무실을 나섰다.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에 놓인 서류에 머무른 채였다.

 

*

 

그러던 다음 날, 티나는 말끔히 정리된 서류를 들고 오전 중에 사내를 방문했다.

“벌써 끝냈나?”

“예, 여기 있습니다.”

티나는 긴장했으면서도, 뿌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띈 채 사내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사내는 서류를 들고 한 장, 또 한 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몇 군데 수정해야 할 곳들은 있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워. 다른 오러들에게 시켜보아도 이 정도의 퀄리티는 기대하기 어려운데.’

사내는 티나의 작업에 매우 흡족한 듯 보였다. 마지막 검토까지 끝낸 사내는 책상 위에 툭, 서류를 내려놓았다.

“고생했네. 몇 군데만 고치면 되겠어.”

그 말에 티나의 얼굴에서는 긴장이 사라지고 기쁨만이 남았다. 그러나 곧, 다시 긴장이 티나를 휩쓸었다.

“퇴근하기 전에 잠시 들르게. 할 말이 있으니.”

티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물론 사내는 자신이 무척이나 존경하는 선배이자 윗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일 외의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 사람인 탓에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신지 미리 여쭤봐도...”

“나중에 오면 알게 될 거네. 이만 가 보게.”

단호하게 말하며 자신의 서류로 시선을 돌린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티나는, 결국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방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되어갈 즈음, 티나는 시계를 바라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혹시 지난번 현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

하지만 고민만 하는 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곧 퇴근 시간을 알리는 정시 종이 울리자, 티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레이브스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왔군. 잠시만 기다리게, 이 서류만 마무리하고. 아, 앉지, 티나.”

“어, 네, 네!”

사내는 티나를 집무실 소파에 앉히더니, 손을 부드럽게 휘둘러 주전자를 가져와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낯설다는 듯, 티나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안절부절,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곧 사내는 커피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곤,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저, 그레이브스 씨. 혹시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부르셨는지 이제는 여쭤봐도 될까요?”

사내는 커피만 한 모금 들이킬 뿐, 잠시 말이 없었다.

“티나.”

“네, 국장님.”

“조만간 나는 물러날 생각이야.”

“네?! 아, 아니, 복귀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혹시 아직 몸이 안 좋으신가요?”

“우선 진정하지. 아직 좀 먼 일이니까.”

사내는 놀란 그의 모습에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내가 기억하는 티나는 신입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조금 더 침착해지고, 동시에 조금 더 과감해지긴 했지만. 역설적인 말 같지만, 티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은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정리할 일도 많네. 지금부터 준비해도 몇 개월은 걸릴 거야. 몸이 불편하거나 일이 힘든 건.. 전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네. 그저,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뿐.”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알겠지만 국장직을 내가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건 아니네. 의회에서 동의를 받아야만 하지. 다만 내가 물러나기 전에, 후임을 추천하는 건 가능하네. 그래서 말인데, 티나.”

“네, 네, 그레이브스 씨.”

“나는 자네를 추천하려고 하네.”

“....... 네?!?”

기껏해야 추천할 만한 사람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물어볼 줄 알았던 티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놀라 반쯤 소파에서 튀어올랐다.

“저, 저를요?!”

“그래.”

사내는 언제나처럼 침착했고, 이미 마음을 굳힌 채였다. 그는 티나의 잠재력을 알았고, 재능을 알았다. 원래라면 몇 년은 더 지난 후에 후임으로 추천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고, 지금이야말로 그가 필요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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