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란동

初戀

무언가의 시작점

Dream by 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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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응원하고 있어요. 」

또다. 명헌은 편지의 말머리를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턴가 신발장에 고이 놓여지는 편지 한 장과 자잘한 선물들. 현장에서 잡은 범인은 뜻밖에도 같은 농구부의 1학년 동오였다. 정작 편지를 쓴 것은 다른 인물이었지만. 듣자하니 동오는 소꿉친구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고자 아침 일찍 명헌의 신발장 속으로 편지와 선물을 전해준다는 모양이었다. 명헌이 처음 이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다.

“... 동오. 네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 베시.”

“무, 뭐? 잠깐만, 명헌아. 네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만. 미안하다. 베시.”

"아니, 제발 내 말 좀 들어! 명헌아? 이명헌!"

그렇게 명헌은 한동안 동오를 피해다니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 적도 있었다. 오해가 풀리고서야 명헌은 제 편지들을 다시금 펼쳐볼 수 있었다.

“명헌이 너는 매번 뭘 그렇게 보는거야?”

"... 베시."

앞자리 동급생의 물음에 명헌은 읽던 편지를 고이 접어 책상 아래로 밀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베시. 뭔데 그래? 비밀, 베시. 이 대화를 끝으로 동급생은 시시하다는 듯 다시 등을 돌렸다. 명헌은 이상한 고집이 있으니 더 캐내려 해봐야 제 입만 아프다는 것이다.

이어 울린 종소리에 다음 수업을 위한 교과서와 필기구를 책상 위로 펼쳤다. 지루하기로 유명한 김 교사가 억지스럽게 높은 텐션의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빠르게 칠판을 먹어치워가는 꼬부랑 글씨 떼에 명헌은 자꾸만 하품을 하기 일쑤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하나둘 엎드려 자는 학생도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니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반응이리라.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다. 그럼 알록달록한 것은? 정답은 명헌의 낙서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세 그릇을 먹으며 완성된 해골바가지며 옆자리 친구와 대결한 오목의 흔적이 가지각색으로 남아있다. 

그 끄트머리에 명헌은 익숙해진 삐뚤빼뚤한 (그러나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따라하듯 한 단어를 적어넣었다. 모란

명헌의 팬이라고 주장한 이의 이름이었다. 꽃에서 따온 이름인가. 베시. 동명의 화사하게 생긴 꽃송이를 떠올렸다. 어쩌면 난(蘭)을 뜻할 수도 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름에는 화려하고 고운 태가 났다. 명헌은 무언가에 빠지면 주변에서 무어라 말을 하든 깊게 몰두하는 버릇이 있어 자신에게 매일같이 편지와 선물을 챙겨주는 얼굴 모를 팬이 몹시도 궁금했다. 농구 강호 산왕. 그곳에서 1학년부터 주전으로 발탁된 이명헌. 공식 경기에 나서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게 벌써부터 개인 팬이 생겼다는 사실은 신기하기도,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나 직접 만든 듯한 선물은 더더욱. 그럼에도 편지만은 몇 번이고 읽어 망막에 새겨진 문장을 입버릇처럼 중얼거렸고, 기숙사 책상 밑 작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소중히 보관했다. 

편지의 주인은 혼자서도 재잘재잘 말이 많았다. 누군가 그 편지가 감동적이었냐 물으면 글쎄다. 정성스럽게 편지를 적어준 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명헌은 느꼈다. 빈약한 어휘에 잘못된 맞춤법, 두서없이 써내려진 제 플레이에 대한 감상. 이 편지의 주인은 필시 저보다는 어린 아이일 것이라고. 소꿉친구가 꼭 동갑이라는 법은 없다. 동오는 원래 아이들에게 약했으니까 이해도 되었다. 그래도 명헌은 제 앞으로 온 편지 하나하나가 좋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이토록 응원해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겨내지 못한 명헌은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그 애의 이름을 또 한 번 눈에 담았다.

이후로도 명헌은 경기를 뛸 때면 습관처럼 편지를 챙겼다. 마치 부적인 것처럼. 가방 한 쪽에 넣어놓은 채 말을 건넸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라는데 저는 이미 그 별을 찾은 것 같아요.

그 애의 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응원 부탁, 베시. 하고 중얼거리면 혼자가 아닌 둘이 된 것마냥 기분이 조금 들떴다.

그 날도 그랬다. 이번 인터하이 예선전의 상대는 까다롭다고는 못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수도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일의전심. 완벽한 승리를 위해 명헌도 선배들을 따라 느릿하게 코트로 발을 디뎠다. 심판의 휘슬이 울리고 점프볼을 따내어 첫 공격권을 얻은 상대는 무서운 속도로 점수를 얻기 시작했다. 산왕 역시 점수차가 커지지 않게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상대의 숨을 조였고 경기는 내내 숨막히는 추격전의 연속이었다. 40:33. 뒤처진 점수에도 산왕은, 명헌은 담담했다. 모두가 말하길, 명헌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코트 위 사령탑으로서 진두지휘하여 맡은 바를 수행하는. 볼을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하여 그것이 우리의 득점으로 이어지게끔 경기를 운영했다. 어떠한 상황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그의 침착함은 팀 내에서도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웃기지도 않을 접미어를 붙이는데도 그 누구 하나 명헌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재능을 갖고 태어나 노력으로 다듬어진 보석. 란 역시도 명헌의 그런 점을 강점이라 칭했다.

삑. 푸싱, 앤드 원. 또 한 번의 휘슬이 울리고 상대의 파울이 인정되었다. 산왕의 득점과 함께 주어진 자유투 역시 성공이었다. 올라가자. 산왕은 그렇게 상대의 기세를 꺾으며 점차 점수차를 벌려갔다. 상대의 마지막 타임 아웃 선언. 명헌은 벤치에 앉아 더운 숨을 몰아 내쉬었다. 자연스레 관객석으로 시선을 돌리면 유독 이질적인 존재가 눈에 띄었다. 덥수룩한 머리, 왜소한 체구, 깊고 탁한 눈동자. 명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란.

멀리서 본 란의 첫 인상은 '의외'였다. 꽃을 닮은 이름과 달리 그 애는 무색무취에 가까워보이는 인물이었다. 눈을 가리는 칠흑빛 앞머리에 차가운 표정은 오히려 음침한 느낌까지 주었다. 란은 경기를 분석하듯 냉철한 시선으로 코트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란의 시선은 단연 명헌의 행방을 가장 많이 쫓았다. 명헌은 자신을 꿰뚫어보듯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생소했다. 이후 계속된 경기에서도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한 번 의식하니 더욱 신경쓰였다. 그나마도 중간중간 다른 선수들과 교체하며 벤치로 빠질 때에서야 그 시선은 제게서 겨우 떨어져나갔다. 명헌은 그 애의 눈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승패를 가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산왕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서로를 축하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 사이를 빠져나와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오니 어떻게 안 것인지 그 애가 처음으로 명헌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란은 보기보다 고왔다. 물론,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는 점이 또 의외였다. 상상한 거랑 많이 다르다, 베시. 이래서 글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되는거다, 베시. 깨달음을 얻은 명헌이 고개를 까딱이며 한걸음 다가갔다.

“아, 안녕하세요. 명헌 선수...! 오늘 겨, 경기... 정말 즐거웠어요. 승리한 것도 정말 축하드려요.”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붉어진 얼굴까지. 란은 맞잡은 손까지 바들바들 떨며 외쳤다.

"모란."

힉, 흠칫 놀라며 한계까지 커진 눈이 깜빡인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나. 머쓱해진 명헌이 괜스레 눈알만 굴렸다. 얘는 손도 곱다, 베시. 명헌은 군데군데 물집 잡혀 울퉁불퉁한 제 손을 등 뒤로 옮겼다. 딱히 자신의 손이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왠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하기 바쁜 모란이 말을 더 이을 낌새가 보이지 않자 명헌은 재촉하듯 한 마디를 더 꺼냈다.

"늘 응원 고맙다, 베시."

그제야 작은 입술 사이로 아,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나왔다. 여기까지 무슨 이유로 왔는지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아니에요. 그보다… 명헌 선수. 아까 착지할 때 발목을 조금 다치지 않으셨나요? 이거 전해드리려고 온 거예요."

란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보호대며 붕대 등을 바리바리 싸들어 내민다. 이에 이번에는 명헌이 놀란 듯 미세하게 눈을 키웠다. 그래봐야 표정엔 변함이 없지만. 

"...티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베시."

"그래도 알 수 있어요."

그야 저는 당신의 팬인걸요. 란이 배시시 웃으며 손에 쥔 것들을 명헌의 손에 전달했다. 같이 뛴 선수들도 알아채지 못한 경미한 부상을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리 쉽게 캐치할 수 있나? 팬은 정말 대단하다. 베시.

"잘 쓰겠다. 베시."

수줍어 우물쭈물 하면서도 란은 명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 부끄러우면 고개를 돌리면 될텐데 란은 제 눈동자에 명헌의 모든 순간을 담겠다는 것처럼 물러나는 법 없었다. 불편한 침묵이 지나고 뒤따른, 그럼 이만 가볼게요. 조곤조곤한 말투. 용건은 끝났는지 미련 없이 돌아서는 것이 퍽 아쉬워지려던 찰나 그 애가 멈춰 서 다시 명헌을 돌아보았다.

 

이 말을 못 전하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명헌 선수, 전 당신의 경기를 계속 보고 싶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직선으로 뻗어오는 목소리엔 더이상 떨림 한 점 남아있지 않았다. 명헌은 온전히 자신만을 향해 온 마음을 전하는 그 애를 보며 생각했다.

너는 란(瀾)이다.

내 몸 적시는 줄도 모르게 천천히 스며드는 물결이다.

그래서 명헌은 멀어지는 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림. 영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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