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인 청혼을 위한 필수 지침서 上

다이아몬드 에이스 | 미유키 카즈야 네임리스 드림


"나 크면 오빠랑 결혼할래!"

 

뭐어? 어린 미유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애의 당돌한 선언에 어른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진짜로 할 거야! 여자애가 주먹을 꼭 쥐고 힘 주어 말했다. 물론 미유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카즈야가 그렇게 좋아?"

"응!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

"어떡해, 미유키 씨~ 이러다 나중에 둘이 사돈 맺게 생겼네."

어른들의 술잔에 다시 술이 차오른다. 여자애는 미유키의 옆에 꼭 붙어서 작은 손으로 옷깃을 야무지게 부여 잡았다. 멱살을 잡힌 모양새에 미유키의 몸이 자연히 앞으로 기울었다. 여자애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디밀며 말했다.

"오빠. 꼭 나랑 결혼해야 돼! 알았지?"

"뭐어… 너 하는 거 봐서…."

미유키의 대답에 어른들이 다시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번에는 미유키의 아버지도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자식이랑 결혼까지 생각했다고…. XX 개자식, X같은 새끼…."

"알지. 잘 알지. 너 이 얘기만 13번째 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내가 14번째 하는 얘긴데 그런 자식이랑 결혼 얘기 나오기 전에 헤어진 게 다행이라니까? 너희 몇 년 됐더라, 2년?"

"786일!"

"그래, 786일 된 여자친구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게 말이 돼! 그 자식은 쓰레기야. 아주 미친 새끼라고. 그러니까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응? 그런 자식 때문에 속도 버리고 감정 소모할 필요 없어, 진짜…."

"나는 진짜로 걔랑……."

"안 되겠다, 집에 가자."

여자의 친구가 오늘 자 실연의 주인공을 부축해 일어났다. 여자는 훌쩍거리면서 저항하지 않고 친구에게 기대어 일어났다. 

여자는 어젯밤 786일 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이유는 남자친구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였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목격담이었다. 연락 없이 찾아간 남자친구의 집. 남자친구는 조금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그를 집에 들였다. 그런데 신발장 안에는 웬 여자 구두가 있고, 수상해서 집안을 둘러보는데 옷장에 삐져나온 원피스 자락이 보였단다. 설마 아니겠지. 여자는 남자가 부엌에 간 사이에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다른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막 돌아온 남자가 그 광경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없다.'

'…….'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여자는 천장을 한 번 보고, 남자 정수리를 보고,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쭈뼛거리고 선 남자의 바람 상대를 봤다. 안면이 있는 상대였다. 언젠가 봤던 남자의 대학 후배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이런 개막장 전개가 다 있어? 

'야, 내 집 열쇠나 내놔.'

'…여기.'

'네 집에 있는 내 물건 정리해서 택배로 보내. 나 지금 여기 1초도 더 있기 싫으니까.'

'…응.'

여자는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커플링을 빼서 남자 면전에 던졌다.

'X같은 새끼.'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금 당장 로맨스 파괴 예능 토크쇼 프로그램에 제보해도 손색이 없는 지금껏 해온 숱한 연애와 헤어짐 중에 제일가는 최악이다. 

"너 오빠랑은 연락 됐어? 데리러 오겠대?"

"몰라, 그 새끼 아직도 내 문자 확인 안 했어…. 대체 왜 스마트폰을 피처폰처럼 쓰냐구……."

"그게 문자 확인 안 하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네…."

여자의 친구가 중얼거렸다. 안쪽에서 나와 입구 쪽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옆에 늘어진 프라이빗 룸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 나온다. 술 더 시켜? 과장님 제가 한 잔…. 미유키, 또 내빼기만 해! 카즈야, 우리 다 모였어. 오고 있지? 

여자가 복도 중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귀에 들어온 건 익숙한 이름이다. 천천히 눈을 꿈뻑인다. 그런 이름은 흔치 않다. 미유키를 성으로 쓰는 사람은 살면서 두 사람 밖에 못 봤다.

여자는 그대로 소리의 근원지인 룸의 문을 열어젖혔다. 돌발 상황에 여자의 친구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을 뜨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나베? 왜 그래? 스피커로 돌려 놓은 휴대폰에서 목소리가 묻는다. 갈색의 단정한 머리를 한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하며 일반 통화로 전환했다. 

전화 스피커 너머로 들렸던 목소리는 여자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다. 당연하다. 상대는 스피커 너머에 있으니까. 혼미한 정신에 설움이 차오른 여자가 그대로 벽을 붙잡고 영화처럼 스르륵 쓰러졌다.

"허억, 죄송합니다! 바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이거 놔!"

놓긴 뭘 놔 미친놈아…! 친구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여자를 끌어냈다. 여자는 그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헛손질을 여럿 하고 잠금을 푼 후에야 여자는 간신히 휴대폰 단축번호를 누를 수 있었다. 단축번호 2번, 번호 주인의 등 번호다.

괜찮으세요? 안쪽에서 인상 사나운 남자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사이 여자의 휴대폰에서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통화 연결음이 울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클래식 소리에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가 섞인, 전혀 손대지 않은 날것의 연결음이다.

— 아, 나 전화 들어온다. 미안, 나베.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어? 아, 그래. 알았어."

와타나베의 전화가 끊긴 것과 여자의 연결음이 끝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여자의 휴대폰 건너편의 사람이 말했다.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지척에 있던 쿠라모치와 마에조노에게도 들렸다. 그 구린 컬러링에 이 목소리는. 마에조노가 덩달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 놈이 왜 여기서 나오냐.

"흐어엉, 오빠아…."

— 너 울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카즈야, 왜 내 문자 안 봐? 내가 데리러 오라고 문자 보냈는데……."

— 어? 잠깐만… 너 지금 어디야?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뭐?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어딘지 알아야 데리러 가지.

일단 울지 말고, 주변에 누구 있으면 바꿔 봐. 스피커 너머의 사람이 여자를 살살 달랬다. 통화 내용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여자의 친구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안녕하세요! 오빠 분 되시죠? 이 친구가 지금 술을 좀 마셔서… 별일 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 아… 아뇨. 제가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거기 위치 좀 알려주시겠어요?

"네? 아… 여기 위치가…."

저, 잠시만요. 쿠라모치가 끼어들어 휴대폰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의 친구는 얼결에 휴대폰을 그의 손에 건넸다. 주정뱅이를 하나 챙기고 있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유키, 너 우리가 아까 알려준 데로 오면 돼."

— …엥? 뭐야? 쿠라모치?

"이 전화 주인이랑 우리랑 같은 가게에 있거든."

더 정확히는 우리 방 앞에 계시지. 쿠라모치가 힐긋 여자를 곁눈질 했다. 여자의 친구가 어리둥절하게 쿠라모치와 마에조노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문득 두 사람이 낯이 익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의 친구는 술이 확 깼다. 이 두 사람을 TV에서, 그리고 야구 구장에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건 방 안의 테이블에 앉은 몇몇도 마찬가지다.

쿠라모치가 바닥에 늘어진 여자에게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기다리는 사람이 같은 모양인데,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여자의 친구는 계산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여자가 훌쩍이다 고개를 든다. 엉겁결에 합석을 하게 된 본래의 인원들이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미유키랑 무슨 사이인지 진짜 물어 보고 싶다.

떠오르는 가지 수가 별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미유키니까. 하지만 설마 하면서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새끼 설마 우리한테 여자친구 없다고 거짓말 한 거 아냐? 세상에 미유키 카즈야가 누가 데리러 오란다고 넙죽 올 사람인가.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여자의 친구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그새 또 폐를 끼치진 않았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여자의 친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여자가 친구의 옷자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고개를 기울이자 귓가에 목소리가 소곤거린다.

"아… 뭐지? 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TV에서 봤겠지… 거의 다 야구 선수잖아."

"아냐. TV 아닌데…."

여자의 친구는 아까 술이 다 깼다. 상대가 유명 스포츠 선수라는 걸 깨닫자마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저기, 미유키랑은 어떤 사이세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카와카미가 총대를 맸다. 다들 미유키를 놀려 먹을 생각이 만만했다. 여자가 어… 하고 뜸을 들였다.

"오빠예요."

"뭐? 너 성 미유키 아니잖아."

"응, 맞아.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근데… 거의 우리 오빠야. 왜냐하면, 우린 엄청 오래 봤고, 같이 산 적도 있으니까…."

"…?"

와. 누군가 맥없이 감탄했다.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뜬다. 뜬금없이 폭탄이 던져졌다. 혼란한 가운데 서로 눈치를 보는데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이 조합은 대체 뭐야?"

당사자가 납셨다. 딱 봐도 서둘러 온 티가 나는 미유키가 문가에 서 있었다. 여자가 의자를 덜컹거리며 일어섰다.

"카즈야! 왜 문자 했는데 답장 안 해?!"

"그게… 내가 실수로 알람 지워서 못 봤나 봐."

"너는 휴대폰이 벽돌이야?"

왜 있는데 쓰지를 못 해? 미유키의 친구들은 공감했다. 미유키는 기껏 스마트폰으로 바꿔 놓고도 거의 통화랑 문자 기능만 쓰는 놈이었다.

"아… 진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와, 근데 이거 좀…. 그들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미유키가 신선했다. 쩔쩔매는 것 같기도 하고. 미유키가 제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희게 질렸다. 제 미래를 직감한 표정이었다. 미유키가 한숨을 쉬었다.

"저기, 일단 물 한 잔만 줄래?"

너 물 좀 마시고… 정신 좀 차려 봐. 여럿이 동시에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그러니까, 미유키 카즈야가 남한테 손수 물을 떠 먹여주는 진귀한 광경은 정말 괜찮은 수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카즈야, 들어봐. 그 미친 개자식이… 읍!"

"그건 여기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여자의 친구가 여자의 입을 틀어 막았다. 미유키가 눈치를 보다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남자친구랑 싸웠어?"

"으브브… 아, 좀! 그 자식이랑은 헤어졌어!"

"아……."

미유키가 탄식했다. 동시에 그의 친구들도 탄식했다.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건 적어도 지금 미유키와 그런 사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미유키가 입을 가리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일단 집에 가자. 바래다 줄게. 아, 친구 분도요. 같이 가시죠."

"아, 아뇨. 그… 더 폐 끼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친구 분들이랑 시간 보내세요. 저희는 택시 타고 갈게요. 얘는 제가 책임지고 집에 들여다 놓겠습니다."

아뇨. 제가 여기 더 있다간 뼈까지 발라 먹힐 것 같아서. 미유키가 덧붙였다. 스산한 시선 여럿이 따라붙었다. 아하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여자가 미유키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 사람들 카즈야 친구야?"

"어? 응.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한 번 봤지?"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뼉을 쳤다. 그래서 낯이 익었구나. 미유키의 친구들도 기억을 더듬었으나 10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았다.

미유키는 영 여자를 혼자 보내기 싫었다. 그냥 빨리 데리고 집에 가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미유키의 기색을 읽은 와타나베가 슬쩍 웃으며 제안했다.

"두 분만 괜찮다면 저희랑 합석하는 건 어떠세요?"

"네? 저희가요? 하지만…."

"저희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지? 와타나베의 물음에 다들 긍정했다. 여자의 친구가 제 친구를 보았다. 미유키도 여자를 보고 있었다. 제발 그냥 가겠다고 해.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빌었다. 으음, 여자는 팔짱을 끼고 고심하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유키의 친구라면야, 뭐.

"저도 좋아요."

아…. 두 사람이 눈에 띄게 탄식했다. 미유키가 체념하며 테이블의 벨을 눌렀다. 

지금의 그들에겐… 탄산음료가 필요했다. 속을 뚫어줄, 그리고 취기 오를 걱정 없는 탄산음료가.


미유키는 여자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 날은 눈이 내렸다. 일어나서 창밖으로 내다 본 바깥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있었고, 그 눈밭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함께 서 있었다. 미유키는 외투를 챙겨 입고 빠르게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안녕, 네가 카즈야구나.'

코 끝이 발개진 젊은 여성이 어린 미유키에게 인사했다. 그 젊은 여성은 크지 않은 캐리어를 옆에 두고 있었고, 외투의 앞섶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미유키는 젊은 여성이 무릎을 굽히고 자신과 눈을 마주했을 때 그가 품에 아이를 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유키가 관심을 보이자 여성은 지퍼를 내려 아이를 보여주었다. 외투 속의 아이는 자신보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여자애는 울지도 웃지도 않고 커다랗고 새카만 눈을 깜빡였다. 그 여자애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미유키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그러자 머리 위에서 두 어른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젊은 여성과 어린 여자아이는 그날부터 미유키 스틸의 작은 기숙사 방에서 살게 됐다. 미유키는 머리가 좀 더 큰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와 그 젊은 여성이 고등학교 동창생이고,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미유키 스틸에 온 이유가 그가 불운한 사고로 남편을 잃고 홀로 남겨져 오갈 데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 대뜸 친우들이 둘이 같이 산 적이 있다던 건 무슨 얘기냐고 물었을 때, 미유키는 입을 다물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백그라운드를 미유키가 나불거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구나 초면인 사이에 이런 자리에서 가정사를 털어놓기란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작 여자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미유키는 난처하게 웃으며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그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잠깐 있었던 일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여자의 눈치를 잠깐 살핀 후에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화제를 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미유키의 친구들은 눈치 없는 사람은 몇 있어도 다들 성정이 착했다. 그들에게 없는 눈치를 두 배로 챙긴 친구들도 있었다. 눈치 빠른 몇의 주도로 화제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넘어갔다.

그래서, 가정사를 피한 건 좋았는데.

"그래서 제가 옷장 문을 딱 열었더니!"

왜 이렇게 됐지. 미유키가 텅 빈 눈으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옆에서 여자의 친구가 이마를 짚고 테이블만 내려다 봤다. 몇 번인가 바뀐 대화의 흐름 끝에 여자는 지금 바람 피우던 남자친구를 현장 검거한 사연을 무용담처럼 풀어 놓고 있었다. 

내일 대체 어쩌려고? 미유키가 친구들의 반응을 살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들은 이미 여자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이야기가 리얼하긴 했다. 아주 박진감 넘치고. 미유키의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맞장구를 치며 여자의 전 남자친구의 행보에 말을 얹었다. 그거 완전 쓰레기네요. 그리고 그게 여자는 제법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렇게 전 남자친구의 면전에 반지를 내던진 얘기까지 마친 여자가 미유키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우는소리를 했다. 

"오빠, 나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미 그렇게 된 걸…."

 

다 같이 탄식했다. 저딴 것도 위로라고…. 여자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자세를 바로 세우고 책상을 내리쳤다.

"연애 한 번 못 해 본 주제에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푸핫!"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할 말이 없어진 미유키가 입을 다물었다. 여자의 친구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저번에 분명 니나카와 씨랑……."

"니나카와 씨와는 사전 인터뷰 때문에 잠깐 만난 것 뿐이에요. 절대 그런 사이 아닙니다."

미유키가 딱 잘라 말했다. 니나카와는 요즈음 화두에 오른 인기 스포츠 아나운서였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 미유키와 열애설이 났다. 기사에는 미유키와 니나카와가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렸다. 그들의 연애설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도 진짜인 줄 알고 싸인 받아다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라는 거 있지? 참 이상해, 열애설은 주기적으로 나는데 왜 진짜 연애는 못 하는 건지…."

이렇게 잘생겼는데 왜 아무도 안 데려가지? 투덜거리던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번뜩 눈을 떴다.

"어, 아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있었죠? 사귀는 건 아니어도 비슷하게."

근데 고등학교 시절은 물어도 얘기를 잘 안 해줘서…. 여자가 뒷말을 흐렸다. 옆에서 미유키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미유키의 친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때야 말로 저 녀석은 야구만 할 때라 다른 데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죠."

"아닌데. 이상하다, 분명히 있었을 텐데…."

여자가 미유키를 한 번 쳐다 봤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불안감이 엄습한다. 미유키가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왜냐면요, 카즈야가 고등학생 때 여자는 뭘 선물하면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읍!" 

미유키가 황급히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호라, 그랬단 말이지…. 테이블의 사람들의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미유키가 식은땀을 흘렸다.

"너… 너 안 되겠다. 너무 취했어. 일어나 봐. 잠깐 바람… 그래, 바람 좀 쐬고 오자."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여자를 끌고 방을 뛰쳐나갔다. 몇몇이 쫓아 나가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유키가 앉았던 자리에 지갑과 차 열쇠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차피 돌아올 곳은 정해져 있다. 

테이블 위의 안주는 '미유키가 선물을 하려던 여자는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다들 간만에 열띤 토론을 이어 나갔다. 

단 한 사람, 타인들 사이에 댕그러니 남겨진 여자의 친구만 빼고.


"오빠, 나는 진짜 남자 보는 눈이 없나 봐."

"……."

"진짜 좋은 사람이었거든…. 분명히 그랬는데……."

가게 앞 벤치는 아무도 없었다. 미유키가 제 외투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옷 챙기는 것도 깜빡했네.

둘은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이야기의 연장이다. 가게 안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옆에서 한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에 점점 우울이 깃든다. 

"난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할 줄 알았거든."

오래 사귀기도 했고, 우리는 이때까지도 헤어질 때면 항상 아쉬워했으니까…. 미유키와 대화할 때 여자는 결혼에 관한 주제를 종종 도마에 올리곤 했다. 오빠는 결혼 안 해? 운동선수는 다들 오빠 나이에 결혼 발표 하던데. 여자는 결혼에 '로망'이 있다고 했다. 미유키로서는 솔직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유키가 슬쩍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끝과 손톱을 매만지다 손바닥을 간질였다. 손을 꼼지락거리던 여자가 간지러움에 작게 소리 내 웃었다. 미유키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얽어 잡았다.

"그러니까…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나랑 하자니까."

결혼 하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그게 지극히 일방적이라서 문제지.

"뭐래 진짜…."

여자가 어이 없다는 듯 작게 헛웃었다. 미유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어릴 때는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몇 살 때 얘기를 하는 거야?"

"나라면 그렇게 안 해."

미유키가 고개를 여자 쪽으로 틀었다. 분명 미유키는 결혼에 대한 로망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미유키는 잡은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나는 야구랑 너밖에 모르니까 오늘 헤어진 그 자식처럼 다른 것들에 한 눈도 안 팔 거고. 질리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도 안 해. 나 돈도 잘 벌고… 생활력도 좋고…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리고 나 잘생겼다면서. 줄줄 늘어놓는 헛소리에 뚱한 표정을 유지하던 여자는 마지막에 가서 결국 피식 웃었다.

"…웃겨, 진짜. 그럼 오빠 하는 거 봐서."

"매번 대답하는 거 봐. 일어나면 기억도 못 할 거면서 너무하지 않아?"

"매번? 이상하다, 기억에 없는데…."

"한두 번은 아니지. 너 취하면 필름 끊기는 거 진짜 고쳐야 돼. 술을 마시지 말든가."

"아하하… 오빠도 이럴 때 보면 진짜 실없어…."

여자가 한숨처럼 옅은 웃음을 흘리며 미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곧이어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보고 여자가 잠들었음을 알았다. 미유키는 여자가 필름이 끊기는 지점의 주량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은근슬쩍 애들한테 술을 받아 마셨으니 한계점을 넘었고, 내일이면 중간부터 기억이 안 난다고 전화해서 우는소리를 할 것이다. 미유키는 여자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퍽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대로 도망가자. 미유키가 차 열쇠를 꺼내기 위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손에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자신이 소지품을 안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결국은 돌아가야 한다는 소린데…. 미유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여자를 부축했다. 여자는 칭얼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비틀비틀 두 발로 섰다. 그리고 뒤로 돌았다가, 미유키는 하마터면 여자를 바닥에 떨굴 뻔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결혼이 하고 싶으면 나랑 하자니까.'부터 끝까지."

"……."

"미친 새끼……."

그러니까… 쿠라모치와 여자의 친구가 서 있었다는 얘기다. 쿠라모치는 정말 진심으로 끔찍한 걸 보듯 그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친구는, 이 모든 광경으로부터 눈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며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을 찾으러 나온 차였다. 여자의 친구가 생판 모르는 남들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하는 걸 쿠라모치가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들어버린 것이다. 그 일방적인 대화를. 당황스러워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어진 내용이 기가 막혀서 그만 발걸음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매번? 한두 번은 아니야?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미유키는 침음성을 흘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아니면 투명인간이 되거나.

"못… 들은 걸로 해. 친구 분도 그렇게 해주세요."

"어우, 그럼요. 네, 네…."

"못난 새끼, 덜떨어진 새끼…."

뒤통수에 직격하는 쿠라모치의 욕설과 함께 미유키는 꿋꿋하게 여자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쳐야 했다. 돌아간 넷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미유키는 잠든 여자를 핑계 삼아 차 열쇠와 휴대폰을 챙겼다. 그는 친구들의 다음에도 튕기면 죽는다는 협박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술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끝까지 따라붙는 쿠라모치의 시선이 따가웠다. 

여자의 친구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미유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라면 한 번 더 권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 했다. 여자의 친구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에 필시 방금 전 상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유키는 대신에 여자의 친구에게 택시를 잡아주었다.

"……."

폭풍이 지나갔네…. 미유키가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중얼거렸다. 이제서야 어지러움이 돌았다.

차라리 상대가 쿠라모치라 다행인가? 여자의 친구는 어떤지 몰라도 쿠라모치는 제게 쌍욕을 퍼부을지언정 남의 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들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경멸에 찬 시선은 아마 꽤 오래 갈 것이다. 미유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너 때문이야, 알아?"

조수석에 탄 여자는 답이 없었다. 미유키는 잠든 여자를 바라보다가 안전 밸트를 매어주었다.

"…아니, 사실 나 때문이지. 나도 알아."

미유키는 자문자답하며 차 열쇠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천천히 도로를 나아갔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이었다.

그날은 미유키가 지옥의 겨울 합숙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걸어오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지던 날. 이미 오래 전 미유키 스틸의 기숙사 방에서 독립한 여자와 그의 어머니의 집은 미유키 스틸에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돌아오는 길에 여자의 집에 들렀다. 

미유키를 반긴 건 여자의 어머니였다. 그는 미유키를 보고 돌아왔느냐고 화색을 띄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반찬과 요리를 담는 찬합을 들고나왔다.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내온 여자의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음식을 챙겨줄 때가 많았다. 미유키는 감사 인사를 하고 찬합을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뒤를 힐끔거렸다.

"(—)는 집에 없어요?"

"남자친구랑 놀러 나가서 아마 저녁 지나서나 들어올 거야."

"…남자친구요?"

"어머, 걔가 너한테 말 안 했니?"

미유키는 터덜터덜 양손 무겁게 미유키 스틸로 향했다. 참나, 작년에는 오랜만에 집에 온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면서…. 

미유키는 작년 12월 31일, 첫 겨울 합숙을 끝내고 녹초가 되어 돌아온 자신을 잡아끌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는 미유키에게 때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는 준비 못 했는데, 하고 말하니 여자애는 오빠가 언제는 그런 거 챙겼느냐며 입을 댓 발 내밀었다.

화목했던 지난 날을 상기하며 미유키가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런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 그래도 그렇지, 오늘 나 오는 거 알고 있었을 거면서…. 거기까지 생각한 미유키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헤집었다. 몸이 피곤하니까 별 생각이 다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졌다. 

미유키는 잔업 중인 아버지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여자의 어머니에게 받은 반찬을 냉장고에 정리하는 것이었다. 불안하다 했더니만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있는 게 맥주뿐이었다. 모레에는 장 봐야겠네.

방으로 들어가자 책상 위에 리본으로 묶인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는 뻔하다. 이러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입꼬리는 정직하게 올라간다. 작년의 선물은 목도리였고 올해는,

"이건 내 선물을 산 건지, 자기가 사고 싶은 걸 산 건지…."

스노우 볼이다. 미유키는 반구형의 스노우볼을 흔들었다. 안에서 흰 조각들이 눈처럼 내렸다. 미유키는 여자가 왜 이걸 골랐는지 알 것 같았다. 곰돌이가 서 있는 초록색 필드가 얼핏 야구장과 닮았다. 물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축구장으로도 보였지만 미유키는 제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미유키는 피식 웃으며 텅텅 비어 허전하기까지 한 책상 위에 스노우 볼을 올려두었다.

때마침 창밖에서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의 일이었다.


1월 1일 새해가 밝았다.

이건 내가 옹졸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 아냐? 

미유키는 자신이 새해 첫날을 이렇게 조용히 보내리라고는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의 새해 첫날은 대개 소란스럽게 시작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여자가 들이닥쳐 와 신사에 가자고 조르면 미유키가 귀찮아 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겉옷을 챙겨 일어나고야 만다. 이 연중행사는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고, 그가 이제 어렴풋하게 밖에는 기억하지 못 하는 어린 날에도 그랬다.

끝내 미유키를 움직이게 한 건 전과 같았지만, 그가 여자의 집에 가서 들은 소식은 어제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남자친구랑 놀러 나가서….'

미유키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졌다. 물론 그에게 여자를 독점할 권리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여튼간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여자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미유키의 집에 고개를 디밀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들을 저녁에 초대했다는 전언과 함께였다. 여자의 집으로 향하며 미유키는 퉁명스럽게 은근한 불만을 내비쳤다. 오랜만에 온 오빠가 보고 싶지도 않았냐는 둥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자 여자가 억울하게 외쳤다.

"아냐! 나 어제 저녁에 왔었는데 오빠가 일찍 자고 있어서 그냥 간 거라구. 그쵸, 아저씨?"

"그래, 그랬지."

"뭐? 그런 얘기 못 들었는…."

"그리고 아침에는 자고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안 온 거야. 작년에 너무 녹초가 됐길래 올해는 좀 쉬라고! 그때 신사 계단 높다고 우는 소리 했잖아!"

도리어 수세에 몰린 미유키가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로 그랬다. 어제 저녁에 식사 후 일찍 잠든 것도 맞고, 작년 설에 터무니 없이 긴 신사 계단을 오르다 약간 짜증을 낸 것도 맞았다. 하지만 여자가 원한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어울려줄 수 있었고… 아니, 얘 왔었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미유키가 원망을 담은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오빠 보고 싶었지!"

여자가 팔짱을 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지 않고 실은 남자친구랑 노느라 나는 까먹은 것이 아니냐고 하려 했는데, 왜인지 그 한 마디에 기분이 풀려서…. 미유키의 입이 쏙 들어갔다. 여자는 그러면서 내가 책상에 크리스마스 선물도 두고 갔는데, 하고 쫑알거렸다.

"그거 책상 위에 올려뒀어. 근데 그거 내 선물 맞아? 네가 사고 싶은 거 산 거 같던데."

"아니거든. 그 안에 든 곰돌이가 완전 오빠 닮아서 산 거거든. 눈 무늬가 똑 닮지 않았어?"

"넌 안경만 쓰면 다 나 닮았다고 하더라…."

저녁 식사는 단란했다. 식사를 마치고 여자의 어머니와 미유키의 아버지는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일 얘기를 시작했고, 미유키는 여자에게 끌려가 방에 앉혀졌다. 여자가 조잘거리며 미유키의 학교생활이나 앞으로의 봄 고시엔 일정 따위를 물었다. 미유키는 여자가 묻는 대로 대답해주었고, 거기서 기이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 안정감도 미유키가 '너 근데 남자친구 생겼다며?' 하고 물은 순간 끝났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어머니가 그러더냐고 묻더니, 미유키의 대답은 듣지 않고 혼자서 남자친구 얘기를 떠들었다. 

그 남자친구는 여자와 동갑이며, 부활동을 함께 하는 사이라고 했다. 사귄 지는 두 달 즈음 되었으며 문화제가 끝나고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갑자기 고백을 해오더라나 뭐라나…. 미유키는 모든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남자친구 얘기를 괜히 화두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연애사 같은 건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미유키 부자는 밤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가로등 불빛이 골목을 비추고 코 끝에서 겨울 냄새가 감돌았다. 미유키가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걔 남자친구 생겼다는 거 알고 있었어? 아까 그 얘기만 정말 쉬지 않고 30분을 하더라."

"몇 번 집에 데려다주는 걸 봤지."

"아~ 그래?"

나만 몰랐단 말이지, 나만. 미유키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꽁해져 있는 아들을 보고 미유키의 아버지는 넌지시 물었다.

"동생을 빼앗긴 것 같아서 서운하니?"

"…설마! 그런 거 아니야."

물론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친구라는 녀석이 좀 못마땅하긴 하지만, 서운하다니.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터였다. 내가 애도 아니고 무슨. 미유키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진짜 아니라니까. 미유키가 열심히 변명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때까지 미유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미유키와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붙어 다니지 않았나. 그 누구도 그들의 우애 이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미유키의 고교 시절 마지막 여름이 끝났다.

그의 마지막 여름은 길었다. 그들은 끝내 고시엔 티켓을 손에 넣었고, 지난 봄 고시엔에 이어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다. 세이도는 고시엔의 그라운드에 가장 오래 남은 팀이었으며 동시에 우승 타이틀 거머쥔 승자가 되었다.

3학년은 고시엔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2학년과 1학년으로 구성된 새로운 팀은 재빨리 정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은퇴한 미유키는 여름 방학의 끝자락을 집에서 보내게 됐다. 이 시기에 집에 있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리고 (—)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미유키는 후일에 그 날을 자기 인생의 전환점 중 하나로 꼽았다. 그날은 8월의 끝이었고, 여자는 미유키의 방문을 예고 없이 벌컥 열고 들어왔다. 미유키는 제발 노크 좀 하라고 말하며 의자를 빙글 돌렸다가, 여자의 충혈된 눈동자며 부어서 새빨개진 눈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몇 번을 되물어 봐도 여자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미유키는 여자를 제 침대에 앉히고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여자는 잔을 받아 물을 반쯤 마셨다. 그리고 입을 여는데, 목이 메어 떨리는 목소리가 미유키에게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들렸다.

"마사토랑, 헤어졌어."

마사토라면 분명… 그였다. 중학생 때 같은 부활동을 했고, 문화제 캠프파이어에서 여자에게 고백했다던 남자친구. 이제는 더 듣고 싶지도 않은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왜? 미유키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대. 미유키는 곧 여자가 남자친구와 고등학교가 갈라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여자는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미유키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어설프게 토닥였다. 다음 순간 여자가 와락 미유키를 끌어안았다.

"야, 너……."

어릴 때 종종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몸을 붙였다. 미유키는 어색하게 여자의 등에 팔을 둘렀다. 나지막히 한숨이 흘러 나왔다. 미유키는 방금 전 짧은 대화와 그 안의 정보를 곱씹었다. 그 마사토라는 놈이 사귀는 사람이 있는 중에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여자를 찼단다. 

미유키는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와중에 화도 좀 났고. 그런데 그러면 기분이 착잡해야 하는데. 그러는 게 보통의 반응일 텐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어라. 한 번 인식하고 났더니 사고가 이상하게 돌았다. 여자가 품에 안겨 있기에 망정이지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더라면 대판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기뻐하는 모양새였다. 미유키는 안간힘을 써 입매를 굳혔다. 진정하고, 냉정하게….

'미유키, 남의 실연에 기뻐하다니 대체 얼마나 성격이 나쁜 겁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머릿속의 후배S가 격분해서 소리쳤다.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지. 미유키가 부정했다.

'그럼 뭡니까? 사람이 속상해서 우는데 올라가는 그 얌체 같은 입꼬리는!"

이건…. 미유키는 자기 객관화를 시도했다. 미유키는 하나씩 짚어 나갔다. 미유키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남이 속상해하는 걸 보고 기뻐서 웃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제게 안겨 있는 이 사람이라면 더했다. 애 속상해서 우는 게 뭐가 좋다고. 

분명 초점은 그보다 앞선 사실을 향했다. 여자를 울게 만든 원인 말이다.

생각이 뻗어나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미유키가 숨을 멈췄다. 아래에서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유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언젠가 보았던 새카만 눈동자가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밝고 또렷한 눈동자다. 

아. 미유키가 작게 탄식했다. 그와 동시에 품 안의 여자의 체온이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 가슴 안쪽 한 구석이 덩달아 함께 뜨거워졌다.

 그는 히끅이며 들썩이는 머리통을 멍청하게 내려다 보다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다시 눈물을 쏟는 여자를 미유키는 양팔에 힘을 실어 끌어안았다. 미유키는 고개를 숙여 여자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확신했다. 시끄럽게 뇌를 어지럽히는 이 맥박 소리는 분명 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얘가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는 게, 그리고 이제 사귀는 사람이 없다는 게 기쁜 거야.

'…그거 완전 최악이네요!'

후배S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유키는 겨우 말을 삼켰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머리에 열감이 돈다. 아, 큰일 났다. 

미유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애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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