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Epiphany - 2

TOHELL by TO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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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낡은 모텔 앞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을 비추며 시작된다. 카메라 뒤쪽에서 앞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발이 보인다. 구도가 낮아 종아리만 겨우 보이는 남자 뒤로 허리를 한껏 숙인 한 여자가 끌려간다. 고정된 카메라 구도에서 그렇게 남자와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여자가 멀어지며 영화의 제목이 스크린 가득 떠오른다. 사람은 둘인데 영화에는 풀벌레 소리와 직직 끌리는 슬리퍼 한 개의 소리만 들린다. 남자가 모텔로 들어서고 맨발의 여자가 따라 들어가며 빠르게 페이드아웃된다. 그리고 이어진 한새영과 류가량의 첫 만남 씬. 카운터 앞에 새카만 더플백을 내려놓은 류가량의 대사가 나온다.

“…달방 있어요?”

옆에서 들려오는 웨이의 목소리에 수애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든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이어지는 새영의 대사를 뱉었다.

“한 달에 삼십. 더 오래 있을거면 싸게 드려요.”

“한 달만요.”

“…….”

“이 부분 말고. 페이지 넘겨.”

웨이가 다가와 수애가 들고 있는 대본의 페이지를 여러장 넘겼다. 시선을 옮겨 대본을 바라보자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점차 가까워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가 페이지를 펼친 채 대본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안 보고 할 수 있어?”

“대본은 다 외웠어요….”

“Good girl.”

긴장한 듯 수애의 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웨이가 손을 까딱이며 들어오라는 듯 움직이자 느리게 심호흡을 하고 대사를 뱉었다.

“난 왜 죽고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을까요.”

시선을 올려 웨이를 바라보자 계속하라는 듯 손을 빙빙 돌렸다. 수애가 다시 눈을 내리깔고 제 대사를 계속해서 잇는다.

“눈을 감아도, 잠을 자도 악몽 뿐이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죽으면 그 악몽에 영원히 갇힐까봐. 그러니까 원인을 없애고 싶었어요. 그이를 죽이면….”

뚝 끊기는 대사에 웨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애가 반 걸음 물러나며 잔뜩 굳은 얼굴로 대본을 주워 다음 대사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가 대본을 가로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웨이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영화 좋아해?”

“…영화요…?”

“좋아하는 영화 있어? 장르라던가.”

“토이스토리…?”

“…사람 나오는 거. 실제 사람.”

“아…. 만추랑… 비포 선라이즈 좋아해요.”

“으음…. 로맨스, 사랑, 운명. 그런 취향?”

한순간에 간파당한 취향에 수애의 볼이 붉어졌다. 낮게 키득이며 웃는 그가 책상의 대본 위로 제 핸드폰을 올려두었다. 전화 앱이 실행되어있는 화면을 바라본 수애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번호.”

“아, 네…!”

그렇지, 주연끼리 번호 정도는 있어야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 번호를 찍었다. 그리고는 발신을 눌러 제 핸드폰에 진동이 온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두 손으로 웨이에게 건네었다. 어쩐지 과하게 공손한 태도에 기분이 이상해졌는지 웨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핸드폰을 받았다.

“영화 보낼거야. 다음주까지 전부 다 보는걸로. 그리고 다 보면 나한테 연락하기.”

“…영화요?”

“연기 레슨.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것 같아서.”

“그걸 어떻게….”

“그리고 연기할 때 고개 들고, 시선 바라보고. 잡아먹을 것 처럼. ok?”

“o, ok….”

끄덕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웨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도 없이 회의실을 나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수애는 제 핸드폰에 울린 메신저 알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열어보자 처음 보는 프로필 사진의 사람이 보낸 메신저가 보였다. 한 화면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수많은 영화 목록들. 대부분은 익숙한 제목이었지만 일부 낯선 영화들도 보였다. …三叶草…?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한자 제목에 검색창을 열어보니 자동완성 가장 맨 위에 리웨이의 이름이 보였다. 이제보니 제가 출연한 모든 작품이 포함된 것 같았다. 어쩐지 그의 장난스러운 면이 보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주라고. 그가 걸어둔 마감일까지 이 모든 영화를 다 보려면 밤을 새야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기꺼운 그의 호의에 손가락을 움직여 귀여운 토끼가 허리를 숙이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 감사합니다. 선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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