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phany - 1
윤정우 감독의 신작 ‘흐름’에 주조연 캐스팅이 모두 확정되었다.
남자주인공 류가량에는 아시아의 배우 리웨이(31)가 캐스팅되었다. 최근 중국에서 사극 촬영을 마친 리웨이는 ‘흐름’ 촬영을 위해 지난 11일 한국으로 입국한 사실이 알려졌다. 윤정우 감독과의 세번째 만남인 만큼 지난 작품들에서 보였던 섬세한 호흡을 다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여자주인공 한새영에는 김수애(21)가 캐스팅되었다. 2020년, 걸그룹 30세기소녀로 데뷔한 수애는 2022년 그룹 해체 후 김수애라는 이름의 배우로 활동 중이다. 데뷔작인 ‘링 위의 양’에서 주인공의 동생 역으로 연기했을 당시, 아쉬운 연기력으로 실망했던 누리꾼의 반응을 뒤바꿀 수 있을지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화 ‘흐름’은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살인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벌어지는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윤정우 감독님 한 번도 아이돌 쓰신 적 없잖아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뭐 어디 연기력 되는 아이돌이면 누가 뭐라 하겠냐고.”
“물어봐도 절대 말씀 안 해주실걸요.”
옹기종기 모인 스탭들이 종이컵 하나를 들고 수다를 떨고 있다. 대화의 주제는 최근 장안의 화제, 윤정우 감독과 신인배우 김수애이다. 두 사람이 사촌지간이니, 감독님이 그런 사적인 캐스팅을 할 리 없다니 여러 소문만 무성했다. 윤 감독이 인격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이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더러운 소문이 날 법한 그런 사건이었다. 시계가 정각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회의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첫 리딩이니만큼 모든 주조연과 주요 스탭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다. 한참 전부터 자리에 앉아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수애가 인기척이 들리자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똑같지. 수애 씨는 잘 지냈어? 내가 대본을 너무 늦게 보내줘서 걱정했는데.”
“아니예요, 저 선택해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첫 리딩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대충 분위기만 본다고 생각해.”
수애가 다시 자리에 앉아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계속해서 쪽대본이 바뀌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연습할 시간 여유가 있어 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했는데, 처음으로 받은 영화 대본이 그 윤정우 감독의 작품이었다. 게다가 고작 삼일 전에 결정된 캐스팅 탓에 대사를 외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제 연기는 이 중 가장 형편없고 대본 숙지력도 부족해 제 밑바닥이 모두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수애는 덜덜 떨려오는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추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 상대 역이 될 남자 배우였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때, 닫히는 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모든 인원이 회의실에 들어온 모습이 보였다. 이어지는 리딩에 수애가 숨을 천천히 고르고 대본을 집어들었다.
“…남편은 매주 월요일은 아무데도 나가지 않아요.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는 몰라도…….”
“자, 수애 씨. 여기는 새영과 류가 처음 약속을 한 날이에요. 새영은 아직 류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고, 새영은 살의를 가지고 있어요. 겁에 질린 목소리 보단 조금 더 단단하고 의심하는 듯 한 느낌이 좋을 것 같아요.”
“아, 네…!”
다시 읊는 대사에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음성에 웨이가 시선을 올려 수애를 바라보았다. 대본을 쥔 손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 할 정도의 작은 떨림에 웨이가 가만히 작은 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겨우 수애의 분량이 끝나고 나자 웨이가 테이블을 작게 톡톡 두드렸다.
“…?”
“긴장했어?”
“조금요…”
“긴장되면 나 봐.”
그러고는 다시 고개 숙여 대본을 바라보는 웨이의 모습에 수애가 의아하면서 다시 제 대본을 바라보았다. 다시 이어지는 제 대사. 숨을 작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자 역시나 겁에 질린 듯한 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질끈 감다가 웨이의 말이 떠올라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을 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숨을 따라 쉬었다. 조금 안정된 톤에 문제없이 제 대사가 끝나고 나서야 수애가 힐끔거리며 웨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대본만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지는 대본 리딩은 엉망진창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만 진정되었을 뿐 감정선을 찾지 못하고 혼자 동떨어진 듯 한 느낌의 연기에 수애의 얼굴이 조금씩 창백하게 질려왔다. 이번 작품은 정말 작은 조연 하나도 연기력으로 호평받는 배우들로만 이루어진 캐스팅이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얼굴이 찍힌다니. 지금 이 꼴로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역할을 포기해야하는 건 아닐까? 수애의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갔다.
“…후회하지 않아?”
그 때, 귓가에 대사 한 줄이 들어왔다. 이 부분은 한새영의 모든 대사 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부분이었다. 한새영의 가치관을 가장 잘 보여주며, 이 모든 행위의 이유가 되는… 수애가 고개를 들고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난 후회하지 않아요. 후회같은 걸 챙기며 살아가기엔 내 인생은 충분히 벅차고… 괴로워요. 이제는 그만 불행하고싶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흔들리던 목소리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아 체념한 여인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의외의 목소리에 놀란 듯 몇몇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수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끝난 해당 씬을 제외하고서는 다시 형편없는 연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첫 리딩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씩 자리를 비웠다. 대본을 정리하던 감독이 수애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후반에 새영이 그만 불행하고 싶다고 했던 그 대사. 그거 느낌 좋더라. 연습 좀 더 열심히 하고… 이번에 새영 역할, 중요한 거 알지? 잘 해줘야해.”
“…네. 촬영 날 뵙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어느새 커다란 회의실에는 웨이과 수애 두 사람만이 남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앉은 수애가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 기다리세요…?”
“아니.”
“아….”
리딩이 끝나면 회의실을 계속 써도 된다는 감독의 말에 연기 연습을 하려 했는데… 이 남자가 있으면 연습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몰래 끙끙대며 고민하던 수애가 조심스럽게 웨이를 불렀다.
“…저…선배님. 제가 여기서 연기 연습을 하기로 해서….”
“응. 해.”
“…지금요…?”
“응. 봐도 돼?”
그 리웨이 배우가 내 연기를 본다니. 봐준다는 말인가? 수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 보기만 한다는 것인지, 연기를 봐준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드백 한 줄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다. 수애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을 풀려는 듯 제 자리에서 두어번 걸으며 심호흡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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